Player Who Returned 10,000 Years Later RAW novel - Chapter (551)
만 년 만에 귀환한 플레이어 외전 32화
파란의 데이트 (3)
“…….”
“…….”
관람차 밖으로 나온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 그… 강우 씨.”
“임자한테 실망했어.”
“읏…!”
한설아는 흠칫 떨며 몸을 움츠렸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죄송해요… 그, 강우 씨랑 오랜만에 둘이 있으니 차, 참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관람차라고 해도 그렇지… 맹시(盲視)의 권능을 안 썼으면 주변에 다 보였을 거라고.”
“앗, 그럼 권능을 사용하시면 어디서든 가능하다는….”
“임자.”
“죄송해요.”
한설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강우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맹시의 권능은 대상의 인식 자체를 조정해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거나, 아예 전혀 다른 무언가가 보이도록 만드는 사기적인 권능이었다.
아마 단순한 능력만으로 따지면 대공의 권능도 비빌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가진 권능.
‘그만큼 제약이 많은 권능이지만.’
사기적인 능력만큼 맹시의 권능에는 굉장히 많은 제약이 붙어 있었다.
마기의 소모도 엄청나고,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펼쳤을 때 그 효과도 격감한다.
무엇보다 맹시의 권능을 사용한 대상이 조금의 저항력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얼마 못 가서 바로 효과가 풀려버린다.
‘마기에 아무 저항력 없는 일반인들만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상위 랭커급 플레이어가 있었다면 맹시의 권능을 뚫고 관람차 내부에서 벌어진 일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화나셨나요…?”
한설아가 옷깃을 붙잡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눈가가 촉촉했다.
“아냐, 괜찮아 임자.”
과연 누가 지금 한설아의 모습을 보고 화를 낼 수 있겠는가.
환하게 웃으며 시무룩해져 있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강우 씨!”
“어억.”
이루어 말할 수 없는 풍만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양 뺨을 압박했다.
한동안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바동거리던 강우는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크흠, 그나저나 슬슬 밥이나 먹을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여러 가지(?) 일이 있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 있었다.
둘 다 딱히 식사가 필요한 육체는 아니었지만, 데이트까지 나왔는데 맛깔난 식사고 놀 수 없었다.
‘미국 음식은 또 처음이기도 하고.’
양식보다는 한식을 선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햄버거나 치킨, 피자 등등의 양식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맛만 있으면 뭘 주든 간에 잘 먹을 자신이 있었다.
“이쪽에 가게들이 모여있네. 여기로 가자.”
“네!”
강우의 화가 누그러졌다고 판단했는지 한설아가 다시 해맑게 웃으며 팔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푸드 코트로 향했다.
“뭐, 뭔가 기름 냄새가 장난이 아니네요.”
“미국인의 반이 비만이라는데 그 이유를 좀 알겠네.”
푸드 코트에 들어선 강우와 설아는 경악성을 내뱉으며 입을 쩍 벌렸다.
무시무시한 기름과 치즈의 냄새가 푸드 코트 전체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었다.
냄새만으로도 배가 더부룩하게 느껴질 정도.
“어디 보자, 뭘 먹는 게 좋으려나.”
“으… 저는 좀 식욕이 떨어졌어요.”
한설아와 손을 잡은 채 푸드 코트 내부를 한 바퀴 돌았다.
익숙한 햄버거, 피자, 파스타부터 처음 보는 음식들까지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가득했다.
‘아, 김치찌개 말린다.’
도저히 식욕이 당기지 않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강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머나먼 외국에서 김치찌개를 파는 가게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
‘나중에 꼭 김치찌개 가게로 전 세계를 뒤덮어주마.’
아드득 이를 갈며 뜨거운 열망을 가슴 속에 태웠다.
“그냥 대충 고르자.”
짧은 한숨을 내쉬며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게로 걸어갔다.
가게에서 파는 것은 닭의 넓적다리로 만든 치킨 도시락.
그나마 으깬 감자와 같은 야채들이 섞여 있어서 먹을만 할 것 같았다.
“저도 그럼 강우 씨랑 같은 거로 먹을게요.”
“엉.”
두 개의 치킨 도시락을 주문한 후 자리를 잡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진동벨이 울렸다.
“그럼, 어디 한 번 먹어볼까.”
“호호, 그래도 치킨이면 강우 씨가 좋아하시지 않나요?”
“좋아하지.”
한식을 훨씬 더 좋아하는 강우지만, 그나마 양식 중에 가장 즐겨 먹는 것이 치킨이었다.
“그럼, 어디 아메리카의 치킨 맛은 어떤지 볼까.”
치킨 도시락의 뚜껑을 열어 포크로 넓적다리를 푹 쑤셨다.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푸흡!!”
미칠 듯한 짠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아니, 이건 뭐야 씨발!”
이 새끼들 왜 치킨으로 젓갈을 담은 거야?
“읏….”
강우를 따라 치킨을 베어 물었던 한설아도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을 막았다.
‘적당히 짜야지.’
혀가 저릿해질 정도의 염분에 다급히 으깬 감자를 입에 넣었다.
“푸흡! 아니, 시바 이건 왜 또 짠데?!”
대체 으깬 감자에 뭘 처 뿌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방금 전에 먹은 치킨보다 오히려 더 짠 맛이 혀를 타고 확 올라왔다.
“…….”
“…….”
강우와 설아는 망연히 치킨 도시락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이제까지 한국에서 먹은 양식은 양식이 아니라 한식이었구나.”
“전에 뉴스에서 한국인들이 짜게 먹는다는 말을 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였네요.”
질린다는 표정으로 도시락을 치웠다.
아무리 데이트라고 하지만 치킨 젓갈 따위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끄응, 그냥 구경이나 더 하자, 임자.”
“네, 강우 씨.”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안을 돌아다녔다.
음식은 별로였지만 볼거리와 놀 거리는 하루를 다 써도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았다.
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영화를 테마로한 놀이기구라든지 보트에 타고 있으면 옆에 거대한 상어가 튀어나오는 놀이기구라든지 여러 놀이기구를 타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후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너무 재미있었어요.”
한설아는 만족했다는 듯 방긋 미소를 지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아….”
그녀의 입에서 안타까움에 찬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금 더, 조금 더 강우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버, 벌써요?”
“시차를 생각하면 슬슬 가야지.”
“…….”
한설아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그녀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더니, 강우의 옷깃을 살며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더, 강우 씨랑 같이 있고 싶어요.”
“어차피 같이 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우는 촉촉하게 젖은 그녀의 눈빛을 보며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럼 여긴 볼 만큼 다 봤으니까 같이 바닷가나 걸을까?”
“아…! 조, 좋아요!”
시무룩해졌던 한설아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강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LA에 위치한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이동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거리가 꽤 됐지만, 음속을 넘는 속도로 하늘을 날 수 있는 강우와 설아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쏴아아아.
“후훗, 뭔가 로맨틱하네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해변가를 거닐며 한설아는 밝게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은 채 나지막이 해변가를 거닐었다.
딱히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어색하기는커녕 오히려 파도처럼 잔잔한 행복감이 전신에 퍼졌다.
“하아, 하아.”
그때,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한설아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참듯 꾹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임자?”
“…예?!”
그녀를 부르자, 흠칫 어깨를 떨며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아, 아아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설아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
눈에 띄게 이상한 그녀의 반응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참기 힘들어?”
“아, 아뇨! 전혀요! 전 이렇게 강우 씨랑 같이 손만 잡고 있는 게 너무 행복한걸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뺨은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그, 그러니까… 아까 전처럼 관람차를 타자거나,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까 전에 강우를 억지로 관람차로 끌고 가서 한 소리를 들었던 게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모양.
“푸흡! 하하하하!”
강우는 밝은 웃음을 터트리며까지발을 들어 한설아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차오르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으니까.
“왜, 왜 웃으세요, 강우 씨!”
한설아가 강우의 몸을 가볍게 꼬집으며 외쳤다.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처럼 움츠러든 그녀의 모습이 퍽 귀여웠다.
“여기 근처에 모텔 좀 많은 것 같던데 잠시 들렀다 갈까?”
“모, 모텔이요?”
한설아의 눈빛이 떨렸다.
한층 더 거칠어진 숨을 내뱉으며 부르르 몸을 떠는 것이 마주 잡은 손을 타고 느껴졌다.
“뭐… 지금 내가 이 모양 이 꼴이어서야 임자가 좋아할지 모르겠다만.”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아, 고개 숙인 남자.
고개 숙인 프랑소(小)와.
‘인생 씨발….’
미칠 듯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정력에 좋은 식품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떠도는 중장년층의 고충이 뭔가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었다.
‘아니, 애초에 정력은 문제가 아니지만.’
자신의 경우 쥐어짜내진(?)만큼 그녀의 회복마법으로 금방금방 충전되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그것과는 다른 스케일의 문제가 있었다.
-띠링.
[말 그대로 스케일(비엔나)의 문제가 있죠.]아가리요.
[풉키! 풉키! ~(˘▾˘~)(~˘▾˘)~!] [쿠쿠르쿠쿠.]하하하.
우리 이브.
요즘 살맛 나나 보네?
너 내가 힘을 다 되찾으면 바알처럼 티탄의 율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고 했지?
그러면 우리 둘이 가슴 벅찬 상봉을 할 수도 있다는 걸 혹시 잊은 거니?
[…….]딱 기다려 이년아.
만나자마자 대가리를 물음표 모양으로 접어줄 테니까.
[٩(๑• ₃ -๑)۶♥]치워.
치우라고 씨발.
그렇게 시스템 메시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
“호호호. 신경 쓰지 말아요, 강우 씨.”
한설아가 환한 웃음을 흘리며 강우를 끌어안았다.
혀를 살짝 내밀어 귓가를 핥으며 고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한입 크기도 좋다고 했잖아요♥”
“…….”
한 번 발동이 걸린 한설아는 강우의 팔을 잡아끌고는 빠른 걸음으로 해변가를 벗어났다.
근처 모텔로 들어간 두 사람은 뜨거운 눈빛을 교환했다.
“우선 옷을….”
“후훗, 제가 벗겨드릴게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한설아가 강우에게 손을 뻗었다.
강우는 괜히 부끄러운 기분에 뒷걸음질 쳤다.
그때,
-툭.
무언가가,
그의 주머니에서 떨어졌다.
“…어?”
“이건 뭐에요, 강우 씨?”
한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네모난 상자를 들어 올렸다.
차연주를 잔뜩 놀려주고 난 후, 무심코 주머니에 집어넣었던 상자.
그 상자를 손에 든 한설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
“…….”
침묵이,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우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그러니까….”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한다.
뭐라도,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까,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쥐어 짜내야 한다.
“아무래도 결혼도 하지 않은 지금은 주의를 할 필요가 있잖아.”
고민은 짧았다.
갈등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내가 체액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언젠가는 아이도 생각해야겠지. 하지만 지금 난….”
좋아.
좋아 씨발!
이 정도면 어떻게든 됐어!
이제, 이제 한 걸음만,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임자와 둘만의 시간을 더 즐기고 싶어.”
“…….”
세이프?
이거 세이프 맞지?
“강우 씨.”
서릿발이 흩날리듯 차가운 목소리로, 한설아는 입을 열었다.
네모난 상자 안을 유심히 살피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거.”
초점이 사라진 눈이 강우를 향했다.
끼이익.
목각인형의 목이 꺾이듯, 그녀는 목을 기울였다.
“하나… 사용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