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ay away from my family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
파베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방금 왕세자가 준 자료는 그저 정치적 파트너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정략적 결혼 따위의 결속 없이도 서로가 상부상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 놓고, 굳이 청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저의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번에도 결혼 이야기를 꺼내 가족들의 빈축을 사지 않았었나. 또 청혼 얘기를 꺼내 봤자 이번 제안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리가 없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군.”
“부정하긴 어렵군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그대 곁의 세르비투스 공이 마법을 쓸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물러나야겠어.”
짐짓 겁먹은 척 말한 왕세자가 웃었다. 갓 만개한 봄꽃처럼 산뜻하게.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헤어지기 전에 그대의 전령새 신호를 알려 줄 수 있겠나? 이번처럼 장소를 정해 마법을 쓰는 건 아무래도 불안 요소가 많아서.”
세르비투스가 싫다고 말하는 것처럼 팔을 꼭 끌어안았으나, 파베는 이 정도는 교환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여차하면 신호를 꺼 두는 방법도 있으니까.
뺨을 문지르며 세르를 달래 준 그녀는 궁중 마법사와 신호를 교환했다.
“그럼 긍정적인 답변 기대하지.”
왕세자는 파베의 손등에 입 맞추려 했으나, 파베의 팔을 놓아주지 않는 엘프 때문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잔뜩 못마땅해하는 세르비투스를 보며 피싯 웃은 혼이 알렉스와 함께 마법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없어진 자리를 바라보던 엘프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파베 곁에는 쓸데없는 날파리가 너무 많이 꼬입니다.”
“어차피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신경 쓸 것 없어.”
지난번에 처음으로 얼굴을 봤던 사이였다. 심지어 만난 자리에서 건넨 청혼조차 감정이 전혀 없는 계산속에 불과했던.
고작 두 번째 만남인 지금에 대단한 감정이 싹텄을 리 없었다. 그럴 만한 계기도 없었지 않나.
“……당신은.”
세르비투스는 진심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파베를 보며 뱉고 싶은 말을 겨우 삼켰다.
그의 유일한 구원이자 의미인 파베 크로슈는 이런 쪽으로 지나치게 무신경했다.
제가 어떤 빛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지 별 자각이 없어서.
방금도 제 눈에는 인간의 왕자가 그녀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가 빤히 보이건만, 파베 크로슈는 그 가능성을 전혀 생각지 않는 눈치다.
관대하고 상냥하여 다른 이들에게 여지를 주는 행동이 불만스러우면서도, 그들을 아예 애정의 대상으로 생각지 않는 태도에 안도하게 된다.
괜히 더 말을 얹어서 왕세자를 의식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세르비투스는 뭐라 말을 잇는 대신 파베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 인간 남자가 닿지 못했던 손등에 키스하고, 손바닥의 손금을 따라 계속해서 입술을 눌렀다.
“……그만 좀 해라. 이제 들어가야지.”
“조금만 더요, 파베. 요 며칠은 불의 정령왕이 와 있어서 마음대로 닿질 못했습니다.”
“애초에……”
파베는 이런 접촉은 ‘권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다 실패했다.
그녀의 손바닥에 입술과 턱을 묻은 채 꼼지락대던 세르비투스가 손가락 끝을 살짝 물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손가락 첫 마디를 입술로 부드럽게 물고, 손톱 자리를 혀끝으로 핥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타액으로 살짝 젖은 손끝에 뭉근한 입김이 닿자 기분이 아주 이상해졌다.
파베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잡힌 손을 빼냈다.
“적당히 해라.”
“이 정도도 안 됩니까?”
“모르는 척 묻지 마라. 의뭉스러운 녀석 같으니.”
세르비투스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선을 긋는 상대를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곁에 있어도 조갈이 나서 매 순간이 고통스러운데, 매정한 파베는 조금이라도 경계를 넘으려 들면 칼같이 그를 밀어냈다.
제 마음을 일부라도 안다면 저리 매정하지 못할 텐데.
내가, 얼마나…….
“어쨌든 이제 들어가자.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왈리가 걱정할지도 몰라.”
그의 손을 덥석 붙잡은 파베가 마나를 불러일으켰다.
다음 순간, 다시 저택 안이었다. 테이블 위에 항상 비치해 두는 초콜릿을 하나 까서 입에 넣은 대마법사가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왕세자 때문에 내일은 그 염병할 샐리온과 네 시간이나 같이 있게 생겼구나.”
“그러니까 오늘은 나를 계속 예뻐해 주십시오, 파베. 내일은 당신과 단둘이만 있을 시간이 아예 없습니다.”
“……하아.”
푹 한숨을 내쉬었으나, 세르비투스는 파베가 결국 넘어와 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부족에게 어머니를 빼앗기고 밑바닥까지 망가졌던 그의 과거를 늘 안쓰럽게 여기니까.
과연 소파에 앉은 파베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세르는 거기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 파베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어리광이 너무 늘었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세르비투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뭐야, 왕세자 놈이 다녀갔다고?”
제안서를 건네받은 왈라이카가 눈을 부라렸다.
“아니, 그 새끼가 오지 말랬더니 꼼수까지 써서 기회를 보네? 어쩐지 에브론 쪽에서 접촉하길래 이상하다 싶었더니!”
왕세자가 찾아온 것도 짜증 나고, 제가 왕세자의 계략에 넘어가 자리를 비웠던 것도 짜증 난 모양이다. 왈라이카는 평소보다 많이 화를 냈다.
“싸부, 그 제안서 찢어 버려! 기분 나빠!”
“위나델과 관련된 내용이니 아가한텐 보여 줘야지.”
“왕세자가 보낸 거라 하면 딸도 곧장 폐기하라 할걸? 와, 진짜…….”
말을 다 잇지 못한 왈라이카가 헛숨을 뱉자, 그 순간도 파베 옆에 아교처럼 찰싹 붙어 있던 세르비투스가 말했다.
“본인이 생각 없이 자리를 비워 놓고 애먼 데 화를 내다니, 과연 반쪽짜리 도마뱀답게 유치한 반응이군요.”
“뭐 인마? 그러는 너는 싸부랑 같이 있으면서 그놈 안 막고 뭐 했어?”
“난 오늘 파베의 무릎베개를 베고 낮잠을 잤습니다.”
“……내가 저걸 같은 싸부 제자라고…….”
어쨌든, 제안서를 위나델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기는 했다.
왈라이카는 연신 기분 나쁘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파베의 제안을 진심으로 반대하진 않았다.
크로슈 저택으로 간 파베는 위나델에게 왕세자의 제안서를 건네주었다.
내용을 쭉 읽던 아이가 말했다.
“아주 좋은 내용 같기는 한데…… 이거 왕세자 전하께서 보내신 거죠?”
“그래.”
“저번에 결혼 얘기 하시더니 결혼 전제 제안이 아니네요?”
“이번에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가져왔다간 단박에 거절당할 걸 알았던 게지.”
정치 파트너 제안서를 준 다음 이상한 말을 꺼내긴 했지만, 이건 위나델에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파베는 가만히 딸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안서를 들여다보며 생각하던 아이가 눈을 들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건 제안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가도 제안 상대가 왕세자라는 점이 제일 중요하다 생각하니?”
“아니, 아니요. 물론 그것도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위나델이 고개를 살짝 갸울이자, 단정하게 정돈한 은빛 앞머리칼이 찰랑 따라 기울었다.
엄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엄마의 의견요.”
“음?”
“제 의견이 아니라, 엄마 생각. 엄마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아이는 파베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부분을 짚었다.
“세계의 인과 때문에 한동안 집 밖 출입도 삼가셨잖아요.”
“……그러긴 했었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좋든 싫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가 저 부분을 짚어 낼 줄은 몰랐다.
대견하면서도 괜히 속이 간지러웠다. 파베는 어물어물 변명하듯 대답했다.
“이 제안이 아니어도 조만간 세상에 나를 드러낼 생각이긴 했었다.”
“하지만 왕가 쪽 사람으로 나서는 건 얘기가 다르잖아요.”
“아주 예리한 지적이로구나. 우리 아가는 영특하기도 하지.”
결국은 이 작은 아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파베는 스스로 얻을 이익보다 다른 이의 사정을 먼저 헤아리는 위나델을 꼭 끌어안았다.
양모 품에 안긴 채 조금 쑥스러워하던 위나델이 말했다.
“저 때문에 무리하지 마세요.”
“응. 그래.”
“이런 지원 같은 거 없어도 충분히 잘해 나가고 있는걸요. 아직 어린 세 명 빼곤 전부 초급 마법사의 벽을 넘었잖아요. ……심지어 아퀴스조차.”
자기는 뭐든 빨리 익힌다고 뻐기던 아퀴스는 제 말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마법에 입문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견습 딱지를 떼어 버린 것이다.
수련법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아서, 어쩌면 내년쯤엔 중급 마법사의 경지까지 다다를지 모르겠다는 전망도 나왔다.
덕분에 나히야를 비롯한 기존 구성원들이 더욱 전투적으로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저는 지금 속도로도 충분해요.”
“그래, 훌륭하다.”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정직한 결실을 가져다줄 테니까요. 그렇죠?”
“조금 부끄럽구나. 우리 딸은 이렇게나 의연한데, 괜히 내가 급하게 굴었어.”
아이는 점점 가주 자리에 걸맞은 모습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나 작고 어린 아이가, 어쩜 이만큼이나 깊은 속을 가졌을까.
파베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서 함께 빙그레 웃었다.
이어 딸의 양 뺨을 부드럽게 덮어 감싸고서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 날, 파베는 제안을 거절하겠다는 전령새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세상에 저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지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략적인 틀은 몇 가지 구상해 놓았었다.
하지만 어제 위나델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생각이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나를 드러내겠다 결심한 것은 반절 이상이 아가 때문이었지.’
정체를 함부로 드러내기 곤란한 자신 때문에, 위나델이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었다.
그리고 정령사 가문에서 마법사 가문으로 노선을 바꾼 크로슈 가에 힘을 실어 주고 싶기도 했다.
150년 전의 위인인 파베 크로슈가 다시 나타나 새 가주의 후견인이 되었다 하면, 그 누구도 가문의 정통성을 흠집 내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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