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05)
205화
“팔마리움(palmárĭum)이 뭔지 기억나냐?”
“전혀.”
천해선의 대답에 부지성이 일그러진 얼굴을 더욱 찌그렸다.
“하긴. 내 번호도 저장 안 한 놈이 그걸 기억할 리 없지.”
부지성이 셔츠의 왼팔 소매를 풀어 헤쳤다.
소매 부분을 팔꿈치까지 잡아당기자, 피부 대신 물고기의 비늘 같은 얇은 디바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팔마리움이야?”
“아니. 이건 팔마리움 투(2)다.”
“그럼 원은 어디 갔어.”
“니가 박살 냈잖아! 랭킹전에서! 기억을 하란 말이다!”
“아. 그랬나.”
부지성이 심호흡을 하며 멘탈을 바로잡았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당시 네가 차고 있었던 디바이스가 ‘팔마리움’보다 훨씬 정교했던 것 같다.”
“내 힘이 더 셌던 게 아니고?”
“그거나 그거나. 대충 넘어가 짜샤. 아무튼, 팔마리움에는 특별한 장치가 심어져 있었다. 디바이스가 파괴될 정도의 심각한 상황이 올 때, 주변의 정보를 수집해 ‘건테크’의 전산망에 송신하는 기능이지.”
“오……. 일종의 다잉메시지 같은 건가.”
“그래. 그런 느낌이다. 주변 영상을 촬영하고 각종 파장을 수집한 뒤 디바이스는 최후를 맞는다.”
천해선은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랭킹전에서 서로의 디바이스가 파괴당할 걸 염려하며 싸우는 헌터는 없다.
서로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면 그뿐.
부지성도 디바이스에 미련을 두려는 생각은 없었다.
“내가 네 검에 베여서 자빠져 자고 있는 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부서진 디바이스는 오랫동안 대련장의 정보를 수집했다. 네가 구건이와 대결을 할 때에도 말이다.”
“!”
“그리고 정체불명의 회오리가 나타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그래. 마계의 세력이 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 어떤 파장이 나타나는지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대박이네…….”
부지성을 두고 괜히 복이 많은 남자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하필이면 구건이에게 암흑 물질이 발동하려고 할 때, 그리고 두덱이 나타날 때 데이터를 추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 이 설명을 먼저 했어야 하는 건데. 너 말이야. 다른 차원의 존재가 나타날 때 생겨나는 파장이, 뭐와 닮았는지 알고 있냐?”
“응.”
“알고 있어?”
“포이즌 몬스터의 혈액 아니야? 거기 염기 서열인지 뭔지랑 이공간의 파장이랑 비슷하다던데.”
“!!!”
한창 신나서 설명하던 부지성이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입을 헤 벌렸다.
“너, 너 그걸 어떻게 알았냐?”
“하하. 팔마리움을 박살 낸 기계를 만든 사람이 알려 줬지.”
“와……. 놀래켜 줄려다가 내가 먼저 기절할 뻔했네.”
그 내용은 얼마 전 진 박사와 도이수 대표가 천해선에게 전달해 준 연구 결과였다.
이미 한번 들은 내용이기 때문에 천해선은 딱히 놀라울 게 없었지만, 부지성은 충격과 허탈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 비밀이, 누군가에게는 이미 상식이었다는 데서 오는 허탈감.
입맛을 다시는 부지성을 보며 천해선이 킥킥댔다.
“너무 상심하지 마.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으니까. 형 말대로 그걸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거야.”
“그렇지? 암. 그래야지.”
천해선의 위로에 기운을 얻은 듯, 부지성이 설명을 재개했다.
“이사순 회장이 변을 당한 시간에 나는 헌터 협회를 방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투명한 벽 앞에 가로막혔어. 처음에는 두드려 보기도 하고 나중에는 에테르 탄환까지 먹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어나서 그런 건 처음 봤어.”
천해선은 숨도 쉬지 않고 부지성의 말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랭킹전 때 생각이 났다. 내가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디바이스로 투명한 막 주변을 스캔했지.”
“뭐가 나왔어?”
“파장.”
“……!”
“그건 랭킹전 때 감지했던 파장과 패턴이 굉장히 흡사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인 뿌리가 같다고 해야 할까.”
“……대충 알 거 같아.”
“음?”
천해선이 천천히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기본적인 베이스가 같은 건 녀석들이 같은 마인이기 때문이겠지. 미묘하게 파장이 다른 건 서로 다른 마인들이 나타났기 때문일 거야.”
그러자 부지성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화했다.
“너…… 마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구나?”
“영계에서 마인들과 한판 붙었으니까.”
“뭐, 뭣?!”
“아직 대외비야. 말조심하는 게 좋아.”
고급 정보를 주기 위해 천해선을 부른 건데, 이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아닌가.
부지성은 깜짝 놀라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계에 있는 수호령과도 대화를 했어.”
“수호령은 또 뭔데?”
“영물들 중에서 지성과 무력을 갖춘 녀석들이야. 우리 헌터들처럼.”
“와…….글자 그대로 신세계네.”
“우리가 아는 정보가 많은 건 아니야. 마인이 총 열두 명이고, 내 팔을 작살 낸 놈과 이사순을 죽인 놈이 다르다는 것 정도.”
잠자코 설명을 듣던 부지성이 의문을 표했다.
“그 두 명이 다르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단순히 파장이 좀 다르다는 거로 판가름하기에는…….”
“다를 거야.”
두덱은 가장 마지막, 열두 번째의 서열을 가졌다.
그리고 이사순 회장은 죽는 그 순간에 숫자 7을 남겼다.
“그렇구나……. 네 말을 들으니까 아귀가 딱 맞네.”
부지성은 잠시 동안 ‘과연’, ‘그렇군’ 따위의 말을 하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했다.
“잠깐만. 그런데 WHPO는 이 중대한 사항을 왜 말해 주지 않는 거지? 그저 단순히 영계의 환경에 대해서만 브리핑하던데.”
“글쎄. 자기들의 프로젝트가 헌터들을 사지로 몰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걸지도.”
“이런 씹어 먹을 놈들……!”
부지성이 자기 일처럼 흥분하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우리 쪽에서도 정보를 완전히 준 건 아니야. WHPO 내 누군가가 스파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 중이거든.”
공교롭게도, 헌터들이 영계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인간계에 있던 초월급 헌터들이 죽임을 당했다.
엄청나게 큰 이슈 앞에서 영계에 관한 관심이 줄어드는 건 당연지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영계를 다녀온 이후로 해당 멤버들이 조용하다 싶더니만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부지성이 눈을 좌우로 굴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근데 너 말야.”
“음?”
“그런 걸 나한테 말해 줘도 되는 거냐? WHPO도 믿지 못하는 마당에 나는 믿는 거야?”
“형을 믿으니까.”
“!”
천해선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부지성은 크게 감복한 반응을 보였다.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녀석에게서 기대하지 않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형도 나를 믿고 배정대와의 관계를 말해 준 거 아냐? 파장에 관한 이야기도 협회 대신 나한테 말한 거 같은데.”
“그건…… 맞지.”
“대신 아까도 말했듯이 입조심하는 게 좋아. 한국에도 마계와 결탁한 인간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 그래.”
부지성이 선한 인간이라는 건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었다.
랭킹전 당시에도 그는 천해선에게 비밀스러운 정보를 전달해 주곤 했다.
“으음…….”
천해선에게 ‘믿는다’는 소리를 듣고 난 이후, 부지성은 엄청난 번뇌에 빠졌다.
너무나도 속이 뻔히 보이는 모습에 천해선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고민하지 말고 더 꺼내 봐.”
“엉?”
“뭔가 더 말해도 되나 엄청 고민하는 거 같은데?”
“햐……. 이 자식 귀신이네.”
부지성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 천해선의 말대로, 부지성은 아직 오픈하지 않은 정보가 하나 있었다.
천해선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말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원래 이 정보까지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었지만, 천해선의 ‘믿는다’는 말에 부지성은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에이, 좋아!”
부지성이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쳤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추어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네가 아까 그랬잖아? 랭킹전에 나타난 놈과 이사순 회장을 죽인 놈이 다를 거라고. 그 두덱이랑…… 셉 뭐시기?”
“셉티뭄.”
“이름도 드럽게 어렵네. 아무튼 우리 건테크는 전 세계 위성과 기지국을 통해서 동일한 파장을 분석하기로 했다.”
그러자 천해선이 놀라 물었다.
“그게 가능해? 기관이 아니라 국가 단위의 협조를 구해야 할 텐데.”
천해선의 말에 부지성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못생긴 얼굴에 약간의 머쓱함과 익살스러움이 드러났다.
천해선은 그 표정으로 정황을 확인했다.
“협조를 구한 게 아니라 해킹을 했구나. 그렇지?”
“맞아.”
“한국의 떠오르는 신흥 길드, 건테크가 국가 단위의 불법행위를 자행했다라…….”
“인마. 뭘 또 그렇게 이야기하냐. 협조 공문 보내서 회신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너도 알잖아? WHPO의 절차가 오죽 복잡하냐?”
“뭐. 이해해.”
사실 해킹과 관련해서는 천해선도 남에게 뭐라 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가 눈에 착용하고 있는 렌즈형 디바이스.
V1도 기본적으로 해킹 데이터를 베이스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각 세계의 파장 데이터와 마인들이 활개를 쳤을 때의 데이터를 비교해 봤다. 그랬더니…….”
부지성의 얼굴에 약간의 망설임이 스쳐 지나갔다.
“이사순이 살해당했을 때의 파장과 똑같은 걸 발견했다.”
“!”
“협회 본사 건물에 투명한 막이 생겼을 때는 없었다가, 이사순이 죽고 난 뒤에 다시 관측이 되었지.”
“마치, 누군가가 집을 비우고 왔다 갔다 한 것처럼?”
“바로 그거야.”
이쯤 되면 참을성 많은 현인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천해선이 살기등등한 눈을 한 채 물었다.
“거기가 어딘데?”
“워싱턴.”
“!”
미국 워싱턴.
WHPO의 본사가 있는 지역이자, 래더 총재가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제아무리 셉티뭄이라 해도 보안이 살벌한 본사 건물에 상주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형한테 들려줄 말이 있어.”
이쯤 되면 의심을 넘어 확신의 영역이라 할 만했다.
천해선은 영계 내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히 알려 주었다.
* * *
“기가 막힌 노릇이군.”
부지성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래더 총재의 행동이 수상쩍다는걸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런 걸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래더 총재가…… 그 총재 아들이 오웬이잖아? 던전에서 몬스터에게 죽었다고 했던 초월급 헌터.”
“맞아.”
“허…….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래더는 미친놈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군. 어떻게 자기 자식을 죽인 놈들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만이 알겠지. 우선은 어긋난 것부터 바로잡아야 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 그게 뭔데.”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을 데려와야지.”
“……?”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부지성에게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천해선이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이사순 회장 이야기를 했잖아. 그럼 억울한 사람이 누군지 바로 나와야지.”
“어…… 음…….”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구기는 부지성을 보며 천해선은 생각했다.
다음부터는 자신의 시신경을 위해서 어려운 질문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표혁규?!”
“빙고.”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부지성이 억울하게 끌려간 사람의 이름을 맞혔다.
“그래…… 맞아……. 이사순을 죽인 녀석은 따로 있어. 표혁규가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부지성이 말한 그곳이란 ‘헌터 수용소’였다.
징역을 살고 있는 헌터나, 재판을 받게 될 헌터들을 모아 놓은 곳.
일반 수용소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인물들인 만큼 각 나라마다 별도의 수용소를 건립해 골칫거리 헌터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표혁규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이사순이 죽었을 때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유력 용의자로 몰린 것이다.
“표혁규를 데려오자. 단서가 될 만한 게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