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해치웠나……?”
보통은 재수가 없어서라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었다.
하지만 정수민은 터져 나오는 말을 차마 막아 내지 못했다.
그만큼 간절한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보이는군.”
첸이 담담하게 대답한 뒤 프라니움 소드를 칼집에 밀어 넣었다.
스릉.
첸을 지켜보는 글로리 길드 헌터들의 시선에는 놀라움과 동경, 부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대단하다……. 결국 키메라를 해치웠어.’
‘이레귤러 헌터들은 모두 이렇게 강한 건가.’
‘대만에서 온 헌터라던데…… 어떤 수련을 한 거지?’
‘천해선은 어떻게 이런 나이트를 영입한 거야?’
‘칼에서 번개가 나가다니. 듣도 보도 못한 타입이야.’
그러나 첸을 향한 동경의 시선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몇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그의 하체가 풀려 버렸기 때문이다.
휘청.
탁.
허물어지는 그의 몸을 마리아가 가까스로 받쳐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치유력이 첸의 몸을 뒤덮었다.
“워낙에 탈진한 상태라 바로는 안 되겠지만…… 곧 체력이 돌아올 거예요.”
“고맙군.”
정작 치유를 해 주는 마리아의 안색도 썩 좋지는 못했다.
부상을 당한 글로리 길드원의 수가 워낙에 많았던 탓이다.
첸을 기다리는 강정현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마를 통해 ‘비’를 날려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다들.”
첸의 얼굴에 희미한 조소가 피어올랐다.
그나마 여기 있는 세 명은 의식이라도 있지.
육철완과 비수는 아직 의식조차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첸. 마리아. 강정현. 육철완. 비수.
천해선이 빠진 이레귤러는 글자 그대로 혈전을 치렀다.
그리고 그만큼 치열하게 싸운 결과, 확실한 수확을 얻었다.
‘천해선 없이’ 키메라를 잡았다는 수확 말이다.
“끄응…….”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비수였다.
그녀는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기며 찡그렸던 눈을 떴다.
“아오…… 씨…… 목이야……. 맞다! 첸 이 자식 어디 갔어?!”
당수로 자신의 목을 쳤던 기억이 떠오른 듯, 비수가 눈을 부라리며 첸을 찾았다.
“죽어! 죽일 거야!”
비수가 양팔을 거칠게 휘둘렀지만 첸의 몸에 닿을 리 만무.
첸은 손가락으로 양쪽 귀를 막은 채 멀찌감치 떨어졌다.
“진정하세요 누나. 그게 다 이유가 있어서…….”
“이유는 무슨 얼어 죽을 이유야? 이유 한 번만 더 있다가는 초상 치렀겠네!”
“키메라가 누나의 힘을 이용한 것 같아요.”
강정현의 말에 비수는 양팔은 물론이요 얼굴 근육까지 딱딱히 굳고 말았다.
“뭐……?”
“누나도 봤을 거예요. 키메라의 목이 다시 붙었을 때, 이마에 이상한 뿔이 생겨났잖아요? 힘도 더 세지고.”
“그랬…… 지?”
“그런데 누나가 의식을 잃고 나니까 키메라의 힘이 다시 약해졌어요. 첸이 누나를 기절시킨 게 그런 이유인 것 같아요.”
비수는 차가운 얼음에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
자신의 버프를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존재라니.
어쩐지 이상하긴 이상하다 싶었다.
분명 버프를 다른 사람한테 보내질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탈력감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아무래도 마인들이 널 노리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구나.”
어느새 정신을 차린 육철완이 그늘진 얼굴로 말했다.
만약 비수의 버프를 다른 키메라들도 사용할 수 있다면?
나아가 마인들조차 비수의 버프를 이용하게 된다면?
이레귤러로서는 상상도 하기 싫은 가정이었다.
“한때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버프를 이용할 수 있었던 걸까요?”
강정현의 질문에 육철완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정황상 그래 보이기는 하지만 확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앞으로 비수를 좀 더 잘 지켜야 할 필요는 있겠구나.”
-꾸왕!
뽀리가 비수의 머리 위로 올라 작게 포효했다.
“꾸왕은 무슨 얼어 죽을 꾸왕이야? 키메라가 난리 칠 때 변신했으면 좋았잖아!”
-꾸왕.
뽀리는 마치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듯, 작은 날개를 퍼덕거렸다.
마리아가 뽀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뒤 멤버들에게 말했다.
“우선은…… 이진승 헌터가 키메라가 된 연유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맞는 말입니다. 단서가 될 만한 게 있는지 물어보죠.”
육철완의 말과 함께 이레귤러 헌터들이 정수민 쪽으로 이동했다.
“키메라가 된 헌터는 이진승입니다. 나이트 타입이고, 글로리 길드 3팀의 부팀장 역할을 맡았습니다. 아쉽게도 장비가 다 박살이 나는 바람에 키메라가 된 경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팀장을 비롯한 3팀 대부분이 전멸한 상태입니다.”
정수민이 어두운 얼굴로 자신이 아는 정보를 이야기해 주었다.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사상자만 잔뜩 생긴 반면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몬스터를 처치하면 코어라도 얻었겠지만, 지금의 키메라에게서는 그것조차 바랄 수가 없었다.
손실만 가득하고, 소득은 없는 싸움.
마계와의 전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주변 CCTV 등을 비롯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다 끌어모을 생각입니다.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게 생긴다면 마리아 님을 통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오……. 그렇게까지…….”
“아니요. 이레귤러 헌터님들이 해 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수민의 말은 백 퍼센트 진심이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레귤러에 지원 요청을 한 자신을 격하게 쓰다듬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키메라를 처치하는 데 있어서 글로리 길드가 한 건 찰나의 시간 벌기뿐이었다.
마리아가 보유한 무한에 가까운 치유력.
식물을 심고 다니는 소년의 정체 모를 힘.
벼락의 힘을 사용하는 첸 등.
이들이 없었다면 키메라의 퇴치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레귤러를 향한 정수민의 마음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랭킹전 당시 천해선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탈락했으니까.
그러나 정수민은 사사로운 감정에 이레귤러를 적대시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나머지 뒷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차후에 이번 지원 요청에 대한 보상과 정보 공유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상은 필요 없…… 읍읍.”
육철완이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지만, 곧 비수의 손에 가로막혔다.
“준다는 건 받아야지……. 왜 이래요?”
그녀의 속삭임에 육철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저 그리고…… 마리아 님.”
비수가 육철완을 제압(?)하는 동안 정수민이 마리아를 불렀다.
“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레귤러가 떠날 채비를 하는 사이, 마리아는 정수민을 따라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혹시 법무팀으로부터 이야기 들으신 게 없으십니까?”
“법무팀이라면…… 글로리 길드 법무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아니요. 딱히 연락받은 게 없어요.”
“음. 그렇군요.”
정수민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머지않아 글로리 길드에서 정식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내용은 구건이 대표의 유산과 관련한 것입니다.”
“……!”
“아시다시피 구건이 대표는 미혼이고, 딱히 가족이 없습니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저도 알아요. 구 대표님은 저와 같은 헌터 보육원 출신이니까요.”
“그렇습니다. 해서 구건이 대표는 자신의 사후 지정인으로 마리아 님을 지정하셨습니다.”
“!”
사후 지정인.
언제 전장에서 죽을지 모르는 직업 특성상, 헌터들은 자신의 사후를 미리 대비하곤 한다.
법적으로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가족이 있다면 모를까, 구건이나 마리아처럼 홀로 살아가는 경우라면 사후 지정인의 지목은 필수.
정수민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외람되지만, 글로리 길드의 공시 자료를 살펴보았습니다. 구건이 대표가 회사 지분의 35%. 마리아 님께서 15%를 가지고 계시더군요.”
“아마…… 그럴 거예요.”
“만약 이대로 사후 지정인 절차가 완료된다면, 마리아 님께서 사실상 글로리 길드의 주인이 되십니다.”
“아…….”
마리아의 고운 눈매가 미묘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글로리 길드의 시작은 매우 보잘것없었다.
다른 길드에서 용병으로 뛰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출발한 회사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한 푼 두 푼이 어마어마한 가치로 변한 상태였다.
사실 마리아에게 그 지분은 있으나 마나 한 가치였다.
애초에 돈 때문에 헌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글로리 길드와 척을 지고 나서도 지분에 대한 처분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글로리 길드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리아 자신이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정수민이 혀로 입술을 한번 훔쳤다.
“마리아 님께서 글로리 길드의 대표로 돌아오신다면……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
그녀는 구건이만큼이나 글로리 길드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아니, 대외 이미지로 따지만 구건이보다 더 나은 존재라 할 수도 있었다.
“작금의 글로리 길드는 명백한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강의 전력 둘을 잃은 상태고…… 무엇보다 길드를 이끌 구심점이 없습니다. 이럴 때 마리아 님이 돌아와 주신다면…….”
“전 생각 없어요.”
평소의 마리아답지 않게 그녀는 정수민의 말을 잘라 버렸다.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럴 자격도 없구요.”
“…….”
정수민은 마리아가 말한 ‘자격’이란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글로리 길드를 등지고 천해선을 따라 이레귤러에 편입되었다.
보기에 따라 ‘배신’이라고 보여질 만한 일.
마리아는 그래서 글로리 길드원들에게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구건이의 지분이 넘어온다 해도, 스스로 발길을 끊은 단체에 대표로 돌아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마리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해 보였다.
하지만 정수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저희도 다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 님이 등을 진 건 글로리 길드원들이 아니라 구건이 대표였다는 걸 말입니다.”
“…….”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주십쇼. 마리아 님은 생각하고 싶지 않으실 수 있겠지만, 어차피 사후 지정인 때문이라도 머지않아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마리아.
그녀가 이내 작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예요.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 볼게요.”
“주변 사람이라면…….”
“제가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요.”
정수민은 마리아가 지칭한 사람들이 누군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헌터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던 글로리 길드 내에서도 특별한 친분을 쌓지 않았던 그녀다.
이제 와서 그녀가 의지하고 조언을 구할 사람이라면 그들밖에 없었다.
바로 직전까지, 그녀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이레귤러 멤버들.
정수민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그래……. 다들 조금 특이하긴 해도 천성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분명 마리아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 줄 거야.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 없는 단 한 명.
정수민은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가능하다면 마리아가 그에게 상담받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악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을 알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경우에 따라 글로리 길드를 날로 먹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고도 홀라당 날로 먹…….”
깊은 생각에 잠긴 나머지 엉겁결에 대답을 하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마리아가 아닌 다른 이가 한 질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생각해 보면 마리아가 방금처럼 저속한 질문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공교롭게도, 질문을 던진 사람은 정수민이 가장 꺼려하는 인물이었다.
“어느 틈에 여기로……?”
“에이.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죠.”
던전에서 본 포식형 몬스터조차 지금처럼 탐욕에 깃든 눈을 하지는 않았다.
황금보다도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한 채, 천해선이 한쪽 팔로 정수민의 어깨를 걸었다.
“사후 지정인……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