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39)
239화
300여 명 중에 열다섯 명.
테스트에 통과한 헌터는 고작해야 그 정도 숫자였다.
당연히 S랭커 헌터고, 당연히 해당 나라에서 가장 강한 인물들이었다.
‘비공개로 진행되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온 세계가 들썩일 뻔했다.’
지금의 테스트가 주는 의미를 당사자들은 알고 있을까?
천해선은 앞서 공언했던 것처럼 ‘독무’의 강도를 굉장히 약하게 조절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본래의 힘을 쓰면 모든 헌터들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천해선.
혼자의 힘으로 말이다.
‘물론 헌터들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겠지만…….’
기다란 손톱으로 입술을 꼬집던 사일리아가 돌연 누군가를 찾았다.
“잉센. 네 말이 맞았어.”
“그래?”
잉센이 사일리아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잉센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란 바로, ‘천해선은 인간을 상대할 때가 가장 무섭다’라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천해선이 인간들에게 살의를 품는다면…….’
걸어 다니는 재난.
그런 표현 외에는 더 적합한 수식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저 녀석도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사일리아의 시선이 천해선을 거쳐 첸에게로 향한다.
프라니움으로 도배된 칼이라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독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헌터를 단숨에 제압한 실력도 놀라운 것이었다.
“드락슬러. 나이 먹더니 약해졌나?”
“설마.”
잉센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시너지 효과 때문일 거야.”
“시너지?”
“너도 겪어 봐서 알잖아? 전투 중에 메루스를 섞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흠.”
“우린 그동안 에테르에 대해서 오만한 생각을 가졌던 거야. 에테르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수박 겉핥기 정도였던 거지.”
사일리아는 잉센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메루스의 기운을 담을 만큼, 에테르를 뿌리 끝까지 컨트롤한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천재 중의 천재라 칭송받는 사일리아조차 한 줌의 메루스를 전달받고 사경을 헤매지 않았던가.
“그럼 네 말은, 메루스를 담아 훈련을 하면 할수록 강해진다는 거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잉센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사일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의 ‘가정’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는 걸.
“가만.”
“?”
“잉센. 너 영계에 다녀온 뒤로 계속 한국에 있었잖아.”
“그렇……지?”
사일리아의 윤기 나는 이마에 짙은 주름이 팼다.
“이제 보니 자기만 세지려고 그랬던 거였네?”
“뭐?”
잉센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하지만 사일리아의 의심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잖아. 너도 메루스 사용할 수 있다며.”
“한정적으로는…… 가능해.”
“당연히 한정적이겠지. 여기에 저 괴물 말고 메루스를 펑펑 쓰는 애가 어디 있어?”
사일리아가 검지로 천해선을 가리켰다.
졸지에 괴물이 된 천해선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둘의 대화에 관심을 보였다.
“네가 나보다 훨씬 빨리 메루스를 익혔으니까, 이제 나보다 셀지도 모르겠네? 지금 한판 붙자.”
“미안. 사양할게.”
잉센이 진절머리를 치며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잉센은 굳이 사일리아보다 강해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힘보다 지식이 훨씬 더 중요한 사내였다.
“너 뭐 하냐?”
사일리아의 손에 카테나가 생성되자, 천해선이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잉센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해 보려고.”
“뭔가 엄청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잉센이 메루스를 익힌 건 너랑 일주일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 꼴랑 일주일로 강해져 봐야 얼마나 강하겠어?”
“그래?”
“그런 짓 할 시간 있으면 가서 정리나 해.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흠.”
사일리아가 영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셨다.
번쩍이던 카테나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고, 그녀는 발걸음을 돌려 헌터들에게로 향했다.
“고마워, 해선.”
잉센이 천해선을 향해 한쪽 눈을 감았다.
한편으로는 감탄스러웠다.
어떻게 저렇게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잘하는 건지.
사일리아보다 일주일 빨랐다는 건 천해선의 새빨간 구라(…)였다.
그는 한국에 올 때부터 메루스를 담기 위해 정기적으로 훈련을 했고, 자연스럽게 그가 구사하는 ‘에테르 머신’도 한층 성장한 상태였다.
만약 잉센이 자신의 본 실력을 다하게 되면, 사일리아는 곧바로 눈이 돌아갈지도 모른다.
“다들 주목.”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사일리아가 헌터들을 모았다.
“아까 말했던 대로 테스트에 탈락한 헌터들은 돌아가도 좋다. 낭비한 시간에 대해서는 WHPO 차원에서 보상해 줄 예정이니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혹시나 테스트 선발 과정에 불만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해 주길 바란다.”
나라면, 드락슬러 꼴이 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헌터들은 확신할 수 없었다.
“뭐. 없는 모양이군. 앞으로 마인들과의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소집령은 발동되지 않을 거다. 총재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사일리아는 상처받은 헌터들의 자존심을 적당히 달래 주었다.
그렇다고 앙심을 품은 헌터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대부분의 헌터들은 사일리아가 굽히고 나오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다음은 이쪽인가.”
사일리아의 시선이 테스트를 통과한 15명에게 향했다.
“플랜은 간단하다. 지옥의 계단 7층까지 천해선이 전속력으로 길을 열 것이다. 7층에서 마력 파장 디바이스를 작동시킨 후, 비수를 납치해 간 놈들을 쫓는다. 마인을 상대하는 일이니만큼 굉장히 위험한 작전이다. 죽을 확률도 높고.”
“……!”
사일리아는 가감 없이 담백한 어조로 비수 탈환 작전을 설명했다.
“죽음이 두려운 헌터는 빠져도 좋다. 탈락자들과 함께 오늘 밤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면 된다. 각오와 복수심. 두 개가 없는 헌터는 우리도 사양이다.”
복수심.
비수가 납치되기 이전에,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마인들에게 끌려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천해선을 경계한 마인들이 한국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세계 각지에 백 명이 넘는 헌터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현장에 모인 헌터들은 나라에서 국보로 취급받는 정예들이다.
그리고 실종된 헌터들은 그들의 오랜 친구이거나 혹은 가족, 스승이었다.
제대로 된 반격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헌터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분루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레귤러와 달라진 WHPO가 연합을 맺고 복수의 문을 열어젖혔다.
“내일 봅시다.”
과연 열다섯 명 중 몇 명이나 남을까?
사일리아의 말을 끝으로 모든 헌터들이 해산했다.
* * *
‘희한하네.’
아침에 일어난 천해선은 기지개 대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터가 된 이후로 꿈을 꾼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주 생생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죽을 것이라 생각해 눈을 질끈 감았던 그때.
몬스터로부터 자신의 몸을 구해 준 외팔의 헌터.
-안녕. 강아지.
천해선은 키릴의 꿈을 꾸었다.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키릴의 꿈을 다 꾸다니.
무의식적으로 오늘의 일정이 두려웠던 걸까?
천해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신발끈을 조였다.
‘반드시 구해 낸다.’
기억 속의 키릴의 얼굴이 점차 비수의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그와 동시에 천해선의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안 그래도 한평생을 구속당해 살던 아이다.
이제야 겨우 자유를 얻었나 싶더니마는, 암시장보다 더 가혹한 환경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한 인간의 인생이 이렇게 기구해도 되는 것인가.
천해선의 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고,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날이 바짝 서 있네.’
사일리아가 천해선을 발견한 뒤 휘파람을 불었다.
이 먼 거리에서도 그의 흉흉한 기운이 또렷이 느껴질 정도였다.
천해선의 심각한 분위기에 살짝 눌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든든하기도 했다.
오늘.
지옥의 계단을 향하는 이 연합의 핵심 전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하나둘…….”
사일리아는 현장에 모인 헌터들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총 열세 명.
천해선의 테스트를 통과한 헌터들 중 돌아간 헌터는 단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죽기 싫어서. 다른 한 명은 테스트 때 입은 내상이 심해서 돌아갔다.”
사일리아와 친한 미국 헌터 한 명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했어야지. 쯧쯧.”
사일리아가 천해선을 향해 눈을 흘겼고, 천해선은 무심한 얼굴로 받아쳤다.
“언제는 반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라며?”
“……자! 여러분!”
사일리아가 곧바로 꼬리를 내린 채 브리핑을 시작했다.
“여러분의 각오를 받았으니, 이쪽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넘겨주겠다.”
“……!”
“이계와 영계. 그리고 마계에는 다른 차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 간섭’이 있다. 과거 여러분이 지옥의 계단에 내려갔을 때 느꼈던 기운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차원 간섭을 지탱하는 물질은 세계마다 다르다. 이계에는 희귀초가, 영계에는 아니마라는 꽃이 그 역할을 담당하지. 그리고 인간계의 차원 간섭을 지탱하는 물질은…….”
사일리아가 촤우를 한차례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 자신이다.”
“!”
“에테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개체 수. 영계의 수호령 크라수스 드래곤은 강한 에테르를 가진 헌터가 줄어들수록, 안간계의 차원 간섭이 사라진다고 했다. 여러분의 생명이 곧 이 세계를 유지하는 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사일리아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헌터들에게 당부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여러분 자신이다. 부디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길 바란다.”
딱히 헌터들로부터 대답이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 떠오른 비장함, 사명감, 혹은 감동이 얼굴을 붉게 상기시켰다.
“플랜은 앞서 말한 대로다. 천해선이 길을 뚫을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따라와.”
휘오오오오.
초월급 헌터 습격 사건 이후로 한동안 사라졌던 회오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누군가 지옥의 계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
천해선 일행이 하나둘 회오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갑니다.”
빨간 노을이 넘실대는 신전.
여기 모인 헌터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제 곧 마주치게 될 몬스터의 이름도.
노웸(novem) / BOSS / type – 전투형, 군집형 / 처치 난도 8성(★★★★★★★★) / 물리 레벨 ‘A’ / 기타 레벨 ‘S’ / 전용 스킬 – 분할>
파바박.
“?!”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헌터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천해선이 글자 그대로 하늘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벨 3로 올라선 ‘독보’가 가능하게 만들어 준 스킬.
천해선이 ‘스카이워크’로 태양을 향해 날았다.
“저런 미친놈…….”
부지성이 하늘로 솟구치는 천해선을 보며 넋 나간 목소리를 뱉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길드 ‘건테크’에서는 하늘을 정복하기 위해 갖가지 첨단 과학 기술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나 천해선은 단 하나의 비행 보조 장치 없이 하늘을 제집처럼 휘젓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아아악.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헌터들이 몸을 움찔했다.
소름 끼치는 몬스터의 포효가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하늘에서 나타난 적독사가 다이빙을 하듯 신전 한가운데를 이마로 박아 버렸다.
쾅!!!!!!!!!!!!!!!!!!!!!
“으악!”
“꽉 잡아!!”
지진보다 더한 충격에 헌터들의 몸이 일제히 위로 튀어올랐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물리력이란 말인가.
지면에 가하는 충격으로 대지 위에 있던 헌터들이 10m 이상은 뛰어오른 듯했다.
“힐러들 챙겨.”
나이트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사일리아.
그녀의 눈에 수백 마리의 노웸들이 눈에 들어왔다.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이 전갈들은 적독사의 충돌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하늘로 솟구친 것이다.
‘독우’
푸슈슈슈슛.
어느새 땅으로 내려온 천해선이 손바닥을 하늘로 펼쳤다.
검은색 에테르 다발이 까마득히 높은 곳까지 승천한 뒤, 이내 노웸들을 향해 분산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퍼버버벅.
더없이 치명적인 독을 머금은 빗줄기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노웸들의 몸을 꿰뚫었다.
노웸들의 몸이 약속이라도 한 듯 후두둑 땅에 박혔고, 가느다란 경련 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노웸은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괴물……!’
‘또라이……!’
‘저 녀석은 신인가?’
대부분이 지옥의 계단을 경험해 본 헌터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금의 상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뼛속 깊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천해선은 불과 1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1층의 중간 보스를 궤멸시킨 것이다.
“갑니다.”
그러나 천해선은 헌터들의 벌어진 입을 계속 봐 줄 생각이 없었다.
입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천해선은 짧은 한마디를 남긴 뒤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