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26)
26화
한평생을 같이 살아도 때론 예상할 수 없는 게 가족이다.
천만 원을 줄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던 누나가, 칠억오천 돈 가방을 보자 반기기는커녕 겁부터 집어먹었다.
“해선아……. 이 돈이 어디서 난 거야?”
누나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인물은 아니다.
아직 미성년자에 헌터도 아니었던 천해선.
그 애송이가 벌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금액이겠지.
나는 돈 가방을 누나한테 넘겨주며, 그간의 일들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영원히 비밀로 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한동안 누나에게 비밀로 했던 건 지나친 걱정 때문이었다.
중독 증세로 한평생을 앓아 온 몸이니 완치 후에도 노심초사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러나 이제 내 한 몸 건사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라에서 공식으로 인정한 ‘S’랭크 헌터가 아니던가.
“……그런 일들이 있었구나.”
어린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선생님이 된 기분이 이런 것일까.
누나는 내가 처한 일들을 듣는 동안 갖가지 리액션을 보여 주었다.
입을 가리고 놀라기도 하고, 서글서글한 눈매를 바짝 세우기도 하고, 코를 훌쩍거리기도 하고.
“비밀로 한 건 미안해. 솔직히 누나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어.”
“우리 해선이. 누나를 잘 알고 있구나? 포이즌 던전에 들어간다는 걸 알았으면 머리채를 붙잡고 안 놔줬을 텐데. 잘했네. 아주 자알했어.”
“그렇게 노려보지 마. 다른 사람들한테나 위험하지, 나한테는 노다지나 다름없는 공간이야. 그래도 거짓말한 건 미안.”
“흥. 일은 다 벌여 놓고?”
누나는 입을 샐쭉 내밀었지만 정말로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개인적으로 강함을 입증하는 건 한계가 있다.
하지만 헌터 협회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으니 누나도 내 선택을 존중하기로 한 모양이다.
‘S’랭크가 부착된 황금색 배지.
누나는 손에 들고 있는 배지를 아직까지도 쓰다듬고 있었다.
“내 동생이 뛰어난 헌터가 되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누나가 잘 보살펴 준 덕이지.”
“정말 잘 됐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도 함께 기뻐해 주실 거야.”
부모님이라.
낳아 주신 은혜는 감사하지만, 얼굴 한번 못 본 사이라 그다지 와닿지가 않는다.
“난 부모님은 잘 모르겠어.”
“응?”
“그동안 누나가 부모님 역할까지 다 했잖아. 그래서, 난 누나가 부모님 몫까지 합쳐서 기뻐해 줬으면 좋겠어.”
“…….”
나는 옆에 놓인 돈 가방을 누나에게 내밀었다.
“누나. 공대에 가면 어떤 여자든 그 안에서 여신이 된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공대에 입학하는 여대생이 얼마 안 되니까, 그 안에서 인기가 폭발하나 보더라고. 벌써부터 걱정이 되네.”
고개를 갸웃하는 누나를 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이제 돈은 내가 벌게. 누나 공대 가고 싶어 했잖아. 공장은 이제 그만 가고 대학을 다녔으면 좋겠어.”
“해선아…….”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누나가 수십 년을 저축해도 못 모을 돈이 눈앞에 있다.
그건 반대로, 더는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까, 이제 누나도 꿈을 좇았으면 좋겠어.”
“……머리가 굳어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것이 한참 후에 머뭇거리면서 말한, 누나의 대답이었다.
* * *
“어디 보자…….”
다음 날.
헌터 협회로부터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공식 명칭은 멀티 인포메이션 어쩌고저쩌고하는 디바이스인데, 실상은 그냥 스마트폰이다.
헌터 전용 어플이 들어간 것 말고는 별 차이점도 없어 보이는데, 오만 명칭은 다 붙여 놨군.
헌터와 관련된 디바이스를 접하는 게 처음이라면 신기해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손에 쥔 디바이스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물건을 세 가지나 경험한 뒤다.
생각을 읽고 대답을 해 주는 안구 장착형 V1을 경험하다가 이 스마트폰을 보니 하품이 나올 지경이다.
“모든 헌터들이 이 장비를 쓰나?”
통계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나, 상위 길드의 헌터들 대부분이 협회의 허가를 받고 인포 디바이스를 개조합니다.>
V1의 설명에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 같아도 이 뭉툭한 건 불편해서라도 못 써먹겠다.
TV 화면에서 본 나이트 헌터 대부분은 스카우터처럼 생긴 디바이스를 차고 전장을 활보했다.
그 스카우터 안에 헌터 어플의 기능이 들어간 거겠지.
디바이스는 헌터들이 대형 길드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길드의 규모에 따라 개조한 디바이스들의 퀄리티가 천차만별이니까.
오죽하면 ‘순정 디바이스로 정보를 검색하는 헌터는 믿고 걸러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겠는가.
“이로써, 길드에 굳이 가입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추가됐네.”
대형 길드의 개조 디바이스보다 훨씬 좋은 녀석이 내 몸에 장착되어 있으니 아쉬울 것이 없다.
나는 시범 삼아 헌터 스마트폰을 조작해 본 뒤, 이내 침대 위로 던져 버리고 명령을 내렸다.
“이 일대 신규 던전 리스트를 보여 줘.”
금월 확인된 신규 던전 리스트 / 정렬 순서 : 현 위치에서 가까운 순 / 1. 서울 강남구 수진동…….>
그래.
이게 ‘첨단’이지.
나는 마음속으로 진 박사에게 넙죽 엎드려 절했다.
“수진동…… 창신동…… 이매동이 또 생겼어?”
생각보다 신규 던전의 양이 많다.
아니.
이 정도면 역대급이라도 해도 될 정도다.
최근 들어 게이트와 던전의 생성 횟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기사는 봤는데, 이렇게까지 많을 줄이야.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생성된 던전의 등급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좋아.
그럼 슬슬 출격 준비를 해 볼까.
“너, 유니온에도 접속할 수 있어?”
가능은 하지만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흠.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유니온.
그건 쉽게 말하면 ‘소모임’ 같은 거다.
길드에 속하지 않는 헌터들이 던전 공략을 위해 인원을 꾸리는 집합체.
홀로 활동하는 헌터가 인원 제한이 있는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유니온에서 동료들을 찾는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서는 예전에 했던 것처럼 혈혈단신 던전에 들어가 보스몹을 상대하고 싶었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다.
모든 헌터들에게는 등급을 막론하고 ‘수습 기간’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헌터 협회의 규정에 따라, 신규 헌터들은 ‘5인 이상 던전’을 5회 클리어해야 한다.
난이도는 3성(★★★) 이하.
처음 던전에 입성해 어리바리 타다 죽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요, 한편으로는 길드 내 신입을 연수시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제도라는 말이다.
[신사로 528 2성(★★) 던전 나이트 모집합니다. 한 자리 남았어요!] [대전 충암동 1성(★) 던전 힐러 구해요. ‘E’랭커도 가능!!] [전남 여수에서 파토 난 힐러 다시 구합니다. 내일 당장 오시면 보상 2배 지급!!]게임에서 파티를 모집할 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특징이 있다면, 다른 타입에 비해 힐러의 수요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힐러 타입으로 응시를 한 각성자의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나이트 계열이 아니다 보니 전장에서 목숨을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작 타인을 치료해 주면서 자기 자신은 위험에 노출된 직업.
그래서 힐러는 어느 곳에 가도 우대를 받는다.
이렇게 되고 보니 처음에 나이트가 아닌 헌터를 선택한 게 탁월한 초이스가 되었다.
“처음이니까 몸도 풀 겸…… 여기로 가 볼까.”
[신입 헌터 환영! 서울 노량진 2동 1성(★) 던전 모집합니다. 에스퍼, 힐러 모집 중!]나는 헌터 스마트폰으로 유니온에 접속해 참가 의사를 제출했다.
V1으로 글을 남길 수도 있었지만, 녀석의 말처럼 굳이 해킹 시스템을 통해 글을 남기느니 이쪽이 깔끔할 것 같았다.
[참가 희망 접수] [장소 : 서울 노량진 2동 1성(★) 던전] [성명 : 천해선] [금번 분기 신규 헌터] [타입 : 힐러] [협회 등록 랭크 : ‘S’]* * *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목소리만으로도 신규 헌터와 베테랑 헌터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씩씩하게 인사하는 두 남자는 나이만큼이나 경력이 오래되어 보였고, 내 옆에 선 앳된 얼굴의 남녀 한 쌍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하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떻게 보이려나.
사실 나도 좀 신기하긴 하다.
지금 입장하려는 곳은 포이즌 던전이 아닌 ‘일반 던전’이었고, 예전과 달리 보스몹을 굳이 살려 주지 않아도 된다.
정말로 정식 던전 공략에 나서는 것이다.
힐러로 등록했으니 직접 피를 보는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만.
베테랑 남자 둘은 모두 나이트 타입이었다.
장발의 근육맨이 박효상.
금발로 염색한 태닝 남자는 김추상이라고 했다.
박효상이 한눈에 날 알아보더니 덥석 손을 잡는다.
“오! 천해선 씨! 만나서 정말 영광입니다!”
“처, 천해선??”
박효상과 김추호과 달리 신입 헌터 두 명은 나에 관한 정보를 듣지 못했나 보다.
두 신입 헌터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와 정말 천해선 님이잖아? 이럴 수가…….”
“저…… 저 조금 이따가 같이 사진 한 장 괜찮을까요??”
헌터 시험장에서 본 얼굴 같기도 하고.
아무튼 두 명의 신입 헌터는 둘 다 에스퍼 타입이었다.
눈에서 총명한 기운이 넘실거리기는 하는데, 이게 에스퍼라 그런 건지 나를 만나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대부분의 에스퍼가 그러하듯 신체는 그다지 강인해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런 타입들을 위해 수습 기간이 존재하는 거겠지.
베테랑 신규 헌터 할 것 없이 나를 향한 관심이 쏟아진다.
이곳이 비인기 던전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 자. 여러분. 들어가기 전에 확인하실 게 있습니다.”
던전에 입장하기 전 박효상이 박수와 함께 우리 셋을 둘러보며 말했다.
“지금 들어가는 지하 던전은 1성(★)이긴 하지만, 꽤 위험한 편입니다. 보통 이런 던전에는 휴즈 뉴트리아가 있죠. 시궁창 바닥에서 갑자기 물어뜯으면 낭패를 볼 수가 있습니다.”
“윽…….”
여성 에스퍼가 비위가 상하는지 짧게 신음 소리를 낸다.
뉴트리아 정도로 이런 반응이라니.
전에 상대했던 맹독 지네를 보면 기절을 하겠군.
“여러분들이 던전에서 안전할 수 있도록, 저와 이 친구가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비용은 한 사람당 백만 원입니다.”
“예에?”
“그,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아요?”
두 신입 헌터가 깜짝 놀라 되묻는다.
함께 던전을 공략하는 자리에서 추가 비용을 요구하다니.
서로 힘을 모으기 위해 헌터를 모집한 게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 저들에게는 아니다.’
나는 속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다.
저 신입 헌터들이야 도움이 필요하다지만, 박효상과 김추호는 ‘D’랭크의 나이트들이었다.
1성 던전쯤은 둘이서도 공략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길드는 물론이요 D랭커에게조차 메리트가 없는 던전이 바로 이곳이었다.
놈들이 메리트가 없는 던전을 굳이 찾아온 이유.
그들은 ‘장사’를 할 요량이었다.
길드에 가입하면 같은 길드원들이 소위 ‘쩔’을 해 주겠지만, 여기 있는 에스퍼들은 아직 길드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각성자 수치가 낮아 어디서도 받아 주지 않는 상태라고 해야겠지.
던전 공략 횟수를 충족하지 못하면 영원히 수습 딱지를 떼지 못한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약한 헌터들을 상대로 불법 장사가 벌어지는 거다.
‘나 참…….’
외국에 나가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다름 아닌 같은 국적 사람이라더니.
지금이 바로 그 꼴이군.
협회에서 연수를 위해 일부러 인원 조건을 걸어 놓은 것 같은데, 이들은 이를 악용해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뭐, 그냥 들어가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여기에 S급 힐러 천해선 님도 계시니까요. 하지만 연수 계약을 안 할 시 뉴트리아의 공격들을 막아 주지는 않을 겁니다.”
“!!!!”
“뉴트리아의 이빨이 얼마나 악독한지는 알고 계시죠? 상처가 치유돼도 그 고운 피부에 흉터가 영원히 남을 겁니다. 재수가 없으면 영원히 공격받고 영원히 치료받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죠. 하하하.”
“그런……!!”
두 명의 신입 헌터가 나란히 울상을 짓는다.
안 그래도 던전이 처음이라 잔뜩 긴장해 있을 텐데, 나이트들이 지켜 주지 않는다면 무슨 해를 입을지 공포감이 밀려오는 것이다.
“까 놓고 이야기합시다. 어느 길드에서도 불러 주지 않아 유니온으로 신청한 거 아닙니까. 다들 공개적으로 언급을 안 해서 그렇지, 다른 던전을 가도 다 이렇게 연수 비용을 받습니다. 우린 그나마 양심적으로 싸게 진행하는 거예요.”
양심이 다 얼어 뒤졌냐.
에스퍼들은 적지 않은 시간 고민했지만, 결국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말았다.
1성 던전의 코어를 추출해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번다고.
배보다 배꼽이 훨씬 큰 상황이었다.
“우리 천해선 님은 어떻게……?”
금발 태닝 김추호가 혀를 낼름거리며 내게 다가온다.
그들이 보기에는 S랭커든 뭐든 힐러는 힐러.
근접 전투 능력이 없는 존재들은 전부 자신들의 먹잇감으로 보이나 보다.
일부러 뉴트리아가 돌아다니는 지하 던전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짜증 나네.’
그냥 무시하고 던전에 들어가면 일은 끝난다.
하지만 기분 좋게 첫 던전을 시작하려는 찰나 이런 상황을 마주하게 되니 적잖이 열이 받는다.
보호라.
보호를 해 주면 돈을 받는다 이건가.
나는 금발 태닝 김추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시죠.”
“역시! 탁월한 선택입니다!”
두 베테랑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힐러가 그럼 그렇지’라는 듯 서로를 보며 교활한 미소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계약서에 한 줄만 추가하죠.”
“추가한다니 뭘 말입니까?”
결정했다.
저 던전 안에서 나는 녀석들을 보호해 주기로.
물론, 강제로 말이다.
“두 분이 제게 보호를 요청한다면, 한 사람당 이백만 원씩 받는 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