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7)
7화
아주 어렸을 적.
미끄럼틀을 처음 탔을 때가 생각난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아찔한(?) 속도감과 중력.
어두컴컴한 통로를 타고 내려가면서, 나는 먼 옛날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우당탕.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이번 미끄럼틀의 종착지는 푹신한 모래밭이 아니라,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블랙 에테르로 몸이 강화되었다곤 하나, 나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아호…… 씨.”
각성하기 전의 허약한 몸이었다면 이미 저세상에 갔을지도 모른다.
욱신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주변을 확인해 본다.
조명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사각형의 방.
내가 떠내려온 미끄럼틀(?)의 반대편에는 커다란 철제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저 문을 열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나는 문 앞으로 가 조타 핸들처럼 생긴 둥그런 손잡이를 쥐어 보았다.
꾸욱.
제법 힘을 주었는데도 돌아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외부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쉽사리 열기는 어려워 보였다.
“음……?”
매끈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손잡이에는 자잘한 굴곡이 있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생겼다기보다는, 손잡이 표면에 불순물이 말라붙은 듯한 느낌?
나는 얼마 안 가 그 불순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피……!!”
철제문의 손잡이에는 망자들의 아우성 같은 검붉은 피가 들러붙어 있었다.
원래부터 호의적인 곳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피로 물든 손으로 이 핸들을 돌렸을 상황을 떠올리니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이봐요 키릴.
어쩌자고 날 이런 곳에 보낸 거야?
기이잉-
내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머리 위로 작은 기계음이 들린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그마한 분출구가 날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곧, 분출구에서 검은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취이이이이익-
색으로 보나 냄새로 보나, 유해한 가스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시발.”
갑자기 땅이 꺼지질 않나.
독가스를 살포하질 않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고는 하나, 환영 인사가 이 정도면 레전드급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매를 들어 코를 막았으나,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포이즌 몬스터의 독성에도 끄떡없었던 나다.
이 정도의 독에 타격을 입을 거면 죽었어도 열 번은 죽었다.
“…….”
예상대로 몸에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이상은커녕, 어쩐지 반가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가…….’
처음에는 보란 듯이 멀쩡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으나, 나는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윽……!!”
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팔을 부르르 떤 채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굳이 표정을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각성 전에 자주 느꼈던 고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으니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스으으읍.
주변 공기가 환기되더니, ‘철컥’ 하는 소리가 철문 쪽에서 들렸다.
그와 동시에 환한 조명이 들어왔다.
옳거니.
잘 걸렸다.
끼이익-
나는 실눈을 뜬 채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영을 쳐다보았다.
제법 퉁퉁한 체격의 사내였다.
그는 아직 방 안에 남은 독성 때문인지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한물간 체크남방이 두둑한 살집을 감싸고 있었고, 곱슬곱슬한 머리가 아무렇게나 자라 산짐승을 연상케 했다.
혼자 살고 있는 ‘박사’라며?
정말이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박사와는 다른 이미지였다.
툭툭.
조심성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그는 내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발로 내 몸을 건드렸다.
“죽은 건가?”
그는 한참을 확인한 후에야 방독면을 벗었다.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의 얼굴.
볼살이 빵빵한 게 본인의 체형을 꼭 빼닮았다.
저 사람이 진 박사로군.
그는 쭈그려 앉아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나는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무리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게 위험한 가스를 살포해?
나는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남자를 향해 포효했다.
“어흥!!!”
“히이익!!”
서프라이즈.
독가스를 마신 대가치고는 약한 감이 있지만, 상대(?)의 나이를 감안해 장난은 이 정도 선에서 멈추기로 했다.
“으…… 으흐악!!”
“얼레.”
문제는, 상대방의 반응이 내 예상보다도 훨씬 격렬했다는 점이다.
뒤로 넘어진 진 박사는 사지를 뒤틀며 땅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흰자로 뒤덮여 있었고, 입술 끝에 게거품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놀랄 법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반응일 줄은 몰랐는데.
일이 잘못됨을 느낀 나는 다급하게 진 박사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장난이에요. 장난!”
“으아악!! 살려 줘!! 키릴!! 구해 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나를, 아니 내 뒤쪽의 무언가를 향한다.
나는 그제야 공포의 근원이 나 때문이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에 키릴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단은 그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아저씨! 정신 차려요! 키릴이 여기로 오라고 해서 여기 온 거라구요!”
“히익!! 저리 가!! 살려 줘!!”
패닉에 빠진 진 박사가 양손을 거칠게 휘두른다.
피부에 닿지는 않았지만 쓰고 있던 후드가 뒤로 젖혀졌다.
“아……?!”
사지를 바둥거리며 울부짖던 진 박사의 행동이 갑자기 잠잠해진다.
갑자기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다.
자칫하면 서프라이즈 한 번에 사람 하나를 골로 보낼 뻔했다.
“키릴……!! 키릴이구나!!”
시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사내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진 박사가 내 몸을 껴안고 울어 재끼는 바람에 질문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으허어어어엉!! 보고 싶었어, 키릴!!!”
단순히 정신이 이상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진 박사는 내 드러난 얼굴에서 ‘무언가’를 보고 내 존재가 키릴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나이가 무색하게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는 진 박사.
그의 어깨가 갑자기 왜소하게 느껴진다.
“……죄송해요. 아저씨.”
나는 진 박사의 어깨를 한참 동안 쓰다듬어 주었다.
* * *
“……그런 일이 있었구나. 키릴이…….”
울음을 그친 진 박사가 곧 정신을 차렸고, 나는 그간의 일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진 박사는 내게 뜻밖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해선이라고 했지? 키릴의 어린 시절과 참 닮았구나.”
“네?”
“키릴도 막 각성을 끝낼 때 너와 같은 모습이었다. 울긋불긋한 반점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지.”
“……!!”
키릴에게 적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런 내용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모습을 하고 살아가기가 녹록지 않았을 텐데. 고생이 많았겠구나.”
패닉에서 돌아온 진 박사는 푸근한 동네 아저씨처럼 나를 대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조금 전의 일이 더 미안하게 느껴졌다.
“반점도 반점인데, 주기적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학교를 다니지 못했어요.”
“그랬겠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각성을 하기도 전에 진작 이 세상을 떠났을 게다. 하지만 이제 괜찮을 거다. 너도 곧 키릴처럼 반점들이 사라질 테니 말이다.”
진 박사가 내 어깨를 한차례 쓰다듬더니 문 쪽으로 고갯짓을 한다.
“들어가자. 저기가 내가 사는 집이다.”
철제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전 장소와는 180도 다른 전경이 나타난다.
“우와…….”
감탄사를 금할 수가 없다.
보기만 해도 튼튼해 보이는 합금 건틀릿.
간담이 서늘해지는 각종 병장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자 기기들.
벽에는 온갖 종류의 멋들어진 디바이스들이 걸려 있었고,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첨단 기기로 보이는 장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위튜브에서 본 어지간한 길드 연구소보다 더 좋아 보이는 환경이었다.
“집이라기보다는, 내 고약한 취미의 집합체라고 봐야겠지만.”
진 박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소파 쪽으로 안내했다.
“우리 집에 누군가 찾아온 건 5년 만이다. 가끔씩 날 노리는 불청객들이 오곤 했지만, 좀 전의 그 방에서 목숨을 잃었지. 아, 참고로 민간인들에게는 바닥이 열리지 않는다. 생사람을 잡을 수 없으니 각성자 여부를 판단하고 함정 장치가 열리게 되어 있지.”
조타 핸들처럼 생긴 손잡이의 피가 ‘불청객’의 것이었구나.
“누군가 진 박사님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군요.”
“그래. 난 키릴이 가지고 있던 블랙 에테르를 변형해 독가스를 만들었다. 불청객을 상대하기에 그것보다 좋은 무기는 없거든.”
아.
그래서 그 독가스에 반가운 느낌이 들었던 거구나.
특별히 키릴이 내게 주의 사항을 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애당초 나는 그 공간에서 죽을 일이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누가 진 박사님을 노리는 건가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먼 옛날로 돌아가야 하지. 하지만 지금은…….”
진 박사의 볼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난다.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PTSD가 오는 것 같았다.
“아니에요. 힘드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알려 주세요.”
“그래? 고맙구나.”
물론 궁금하긴 하다.
생명의 은인인 키릴과 진 박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포이즈너’라는 존재들은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저희 누나가 포이즌 몬스터의 독에 중독됐어요. 키릴은 진 박사님을 만나면 해독약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
진 박사가 헤벌쭉 웃는다.
웃음 속에 묘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구할 수 없나요?”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만들 수 있지. MMPT 테스트를 고안해 낸 사람이 바로 나니까.”
“아, 정말요?”
“그래. 해독약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키릴의 모습을 떠올린 것일까.
진 박사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네 누나는 벌써 치료가 된 상태일 것 같구나.”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치료를 했다면 어째서 내게 해독약을 가져오라고…….
가만.
혹시 그럼……?
“진 박사님을 만나게 하려고?”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중독 증상을 치유하는 건 당사자의 몸 상태와 아무런 연관이 없거든. 아마 다친 몸을 치유하면서, 중독된 몸도 같이 회복시켜 주었을 게다.”
“그 망할 뻥쟁이가 또…….”
“흐하하. 얼굴을 본 지 오래되었지만 키릴은 여전한 것 같구나.”
진 박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박수를 친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 본래의 성격인 듯 보인다.
“왜 그런 걸까요? 키릴이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절 이곳에 보낸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마도 키릴은 최대한 빨리 네가 나를 만나길 바랐던 것 같다.”
“네? 왜요?”
진 박사는 대답 대신 엉뚱한 질문을 했다.
“헌터 테스트. 아직 본 적 없지?”
“어……. 네. 각성을 한 것도 며칠 되지 않았거든요.”
“바로 그거다.”
“네?”
“키릴이 각성자가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녀석의 능력을 끌어올린 사람이 나니까 말이다.”
오?
그건 제법 귀가 솔깃한 말이다.
진 박사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키릴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죽이 잘 맞았지. 그놈이라면 내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지 잘 알고 있을 게다.”
“생활이라면…….”
“그래. 나는 언젠가 키릴을 다시 만날 날을 대비해, 그놈에게 딱 맞는 디바이스들을 만들고 있었다.”
키릴에게 맞는 디바이스.
바꿔 말하면, ‘포이즈너’에게 맞는 디바이스.
“아, 그럼…….”
“키릴과 함께 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 혼자서라도 널 보낸 이유는 아무래도 이 녀석들 때문인 것 같다.”
진 박사가 엄지손가락을 자신의 어깨 뒤로 가리켰다.
벽에 걸린 수많은 최첨단 디바이스들.
진 박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저 장비들을 내게 쥐여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중독 증세는 치유가 됐겠지만, 그래도 누나가 걱정하고 있을 테니 오래 잡아 두지는 않으마. 여기서 이틀만 지내거라.”
“……누나가 회복이 되었다는 게 확인되면 그렇게 할게요.”
“그동안 나는 네게 두 가지를 줄 계획이다.”
“두 가지요?”
“그래. 하나는 네게 잘 어울리는 디바이스를 세팅해 주마. 그리고 또 하나는…….”
진 박사가 한층 젊어진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키릴이 했던 트레이닝 방식을 네게 전수해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