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ng a Mercenary Unit from Bankruptcy RAW novel - Chapter 18
제 15 장. Compagnia e Compagnia
“제가 없던 사이 그런 일이 있었군요. 황제 폐하께서 그런 정보를…….”
법관, 이제는 도마르가 지현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용병대에 자리 잡은 직후부터 슈틸나울트의 정보를 찾아다녔으니 황제가 알고 있는 것도 당연했다.
“제가 여행을 방해해 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게 법관 씨, 도마르 씨 잘못도 아니고요.”
“하하. 새 이름이 아직 익숙지 않습니다. 듣는 저도 아직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낯서니 천천히 익숙해지도록 하지요.”
“그래요.”
도마르의 웃음에 지현도 따라 미소 지었다. 많이 후련한 모습이었다. 답을 구한 사람의 얼굴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게 도마르 씨 탓은 아니에요. 급한 일도 아니고 천천히 찾아가면 되는 일인데요, 뭐. 어차피 가는 데에만 20일 이상 걸린다니까 오늘 가나 내일 가나 그게 그거죠.”
“그렇습니까.”
“네. 기왕 이렇게 된 거 출발을 좀 더 미루고 확실하게 준비해서 가려고요.”
“확실하게라면, 어느 정도 수준으로……?”
“오며 가며 불편하지 않게 세간살이를 잔뜩 챙겨 가야죠.”
니오 용병대는 군사 기동 시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는 게 가장 큰 강점이었다. 그런데 그런 특징이 일상까지 파고들었기에 평범한 여행이나 편지를 전달하는 일조차 군사 작전처럼 움직였다.
어디를 가든지 목적지까지 최단 경로로, 최소한의 짐만 챙겨서 움직인다. 속도는 빠르지만 행군하는 이는 고달팠다.
용병대가 정예 강군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움직임이었기에 지현은 따라다닐 때마다 녹초가 됐다. 용병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애초에 따라 다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업무차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용병대로 급히 복귀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만큼 지현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준비해서 출발할 생각을 했다.
“마차 대수도 늘리고 말들도 배려해 가면서 천천히 가려고요. 가는 데만 한 달은 걸리겠지만 편히 가야겠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솔직히 저도 용병대를 따라 행군하는 건 힘듭니다. 다들 보통 강골이 아니다 보니 원체 거칠게 달려야죠.”
“경로도 잘 짜서 최대한 야숙을 줄이고 도시랑 장원만 다닐 거예요.”
지현은 말한 대로 열심히 계획을 짰다. 지리에 익숙한 용병들의 도움을 받는 건 물론 누탈로 지방에서 온 회계사들에게도 많이 물었다. 그러는 사이 열흘이 흘렀다.
기왕 느긋해지는 거 복귀 일정이 늘어지더라도 용병대가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체계를 다지는 데 시간을 썼다. 지현이 왕성하게 활동하며 재무 부대를 다지는 통에 최선임이 된 아디슬이 오랜만에 시체처럼 퍼졌다.
모든 준비의 마무리는 시범 운영하게 된 니오 택배(가칭)의 첫 화물이 베겐도르프에 도착하는 걸 확인하는 것이었다. 출발지인 마르베터와 도착지인 베겐도르프, 그 사이 가도를 차지하고 있는 프랑켄도르프 백작과 야드가르, 인근 세 군소 영주들에게 확언을 받아 놓았다.
화물의 양은 많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다. 첫술부터 배부를 순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용한 상인과 자유민, 군주들이 홍보를 해 주면 앞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용병대 간부들이 베겐도르프 사무실로 내려와 화물을 기다렸다. 출발일을 생각하면 오전 중으로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해가 남중한 이후에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무슨 사고가 터진 모양이에요.”
“괜찮소. 좋은 신호라오.”
“네? 어째서요?”
“우리 애들이 행군 준비를 어설프게 해서 비전투 손실을 일으켰을 일은 아예 없으니 논외고 요 며칠 날씨는 쾌청했으니 예기치 못한 기상에 늦어진 것도 아닐 테지.”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개 정도 남아요. 야생 동물이나, 강도. 어느 쪽이건 화물을 안전하게 지킨다는 건 광고 효과가 좋지요.”
“이놈아, 내 말 빼앗지 마라. 요즘 아주 맛 들렸어.”
“하다 보니 이거 재밌네요. 헤헤.”
니오 용병대가 당한다는 건 애초에 생각조차 안 하는 모양이었다. 지현만 불안을 안고 사람들을 기다렸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시 경비대로부터 연락이 왔다. 용병대가 도착한 것이다.
발데마르가 가장 빠르게 반응했다. 속으로는 본인도 걱정이 많았는지 누구보다 빠르게 마구간으로 달려가 말들을 풀었다.
사무실을 나온 이들은 곧장 성문을 향했다. 성벽 밖 빈터에서 용병대원 스무 명이 옹기종기 모여 쉬고 있었다.
“응? 헛, 발데마르 총대장님!”
한 사람이 먼저 발데마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의 외침에 다른 용병들도 일제히 일어나 발데마르를 향해 도열했다.
“다들 수고했다. 앉아 쉬어라.”
“아닙니다! 저쪽에 쌓아 놓은 것들이 이번에 배송한 화물입니다. 행상인들이 맡긴 건 다들 알아서 들고 갔고 정주 상인들이 주문한 건 그들이 찾아와 챙겨 갈 때까지 저희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부상자는 없느냐? 늦은 이유는 무엇이더냐?”
“죄송합니다. 람부르크 백작령을 통과한 시점에서 일단의 무리가 가도를 막고 있어서 쫓아내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예상대로로구나. 그래 놈들은 누구더냐?”
“평범한 노상강도는 아니고 전장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이었습니다. 서른 명 조금 안 되는 수였는데 앞서가던 행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걷고 있었습니다.”
관문도 아니고 가도 한복판에서 세금을 걷는 정신 나간 영주가 있을 리 없었다. 용병대는 그들과 마주치자마자 강도임을 눈치챘다.
“그래서 어찌했느냐?”
“그들은 우리를 보고 두말없이 길을 열었습니다. 그들의 대장이라는 자는 척 보니 동업자 같은데 서로 힘든 일 만들지 말고 좋게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그런 고얀 놈이 다 있나. 어디 신의 충성의 원칙도 모르는 시정잡배만도 못한 모리배가 니오 용병대에게 그딴 협잡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단박에 들이쳐 놈들을 혼쭐냈습니다.”
“크하핫! 잘했다. 니오의 전사가 지녀야 할 바른 자세다. 애초에 이번 사업은 그렇게 오가며 길을 청소하는 걸 대가로 걸었으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지.”
“그래서 잡은 놈들은 어쨌어? 혹시 안 잡고 다 죽였어?”
“몇 놈은 죽였고 몇 놈은 사로잡았습니다. 의외로 훈련도가 높고 저항도 거세 서로 대오를 갖추고 정면으로 부딪쳤으면 우리도 한두 명쯤 크게 상할 수도 있었겠습니다. 두 사람이 각각 등과 어깨에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그 정도로 실력 있는 놈들이 왜 강도질을?”
“모르겠습니다. 잡은 놈들은 람부르크 백작 부인께 압송했습니다. 그로 인해 부대가 둘로 나뉘어 이리 수가 줄었습니다.”
“잘했다. 전사자를 내지 않은 게 가장 훌륭하다.”
“과찬이십니다. 지휘관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베겐도르프 시의 정주 상인들이 와서 화물을 확인했다. 딱히 필요해서 주문했다기보다는 니오 용병대와 관계를 생각해 맡긴 일이었지만 사정을 듣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정주 상인들은 사방에서 상품을 공수해야 했다. 가도는 군주들이 지키기에 비교적 안전했지만 이번처럼 불시에 나타나 길을 막고 토벌대를 소집하면 흩어져 도망치는 소규모 도적떼까지 일일이 막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매 주문 때마다 용병을 고용하면 배보다 배꼽이 컸다. 강도도 보통은 사람을 죽이고 상품을 훔치는 것보다는 소정의 금액만 받는 걸 선호했으니 리스크를 감수하고 상품을 배송했다.
상인 조합은 군주가 지키는 가도와 별개로 자산을 투입해 안전한 경로를 몇 확보했지만 부담이 막중했다. 한 지역의 영주조차도 상비군을 설치하기 힘들어 순찰을 강화하고 필요시 토벌대를 편성하는 수준인데 지역 상인들이야 오죽할까.
니오 용병대에 상품을 부치는 건 용병을 고용하거나 안전한 경로를 유지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달에 한 번, 용병대가 수송할 수 있는 중량이라는 제한이 붙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걸 이용하면 관세 혜택도 있다지 않은가?
니오 용병대가 이용하는 길은 하나뿐이고 거기로 들여올 수 있는 상품도 한계가 있지만 다른 경로에 가해지는 부담을 한층 덜 수는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충성 고객이 될 조건은 모두 갖췄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다친 분들은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지얀 재무관님.”
지현은 용병들 개개인과 악수를 나누며 그들의 수고를 칭찬했다. 설마 첫 배송부터 강도를 만날 줄은 예상 못했다. 그나마 잘 마무리됐을 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걸로 새 사업도 오케이다. 가볍게 출발할 수 있겠어.’
배송을 마친 용병들은 시내에 있는 사무실에서 쉬고 내일 새 화물을 받아 돌아가기로 했다. 지현을 비롯한 용병대 간부들은 본부로 돌아갔다.
지현은 내일 새벽에 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준비는 다 했다.
“발데마르 대장님. 중대한 일이 생겼습니다.”
“하아. 뭔가 일어날 줄 알았어요. 내 인생 쉬운 게 없다니까요.”
본부로 돌아온 간부들을 네로가 심각한 얼굴로 맞이했다. 예상외 사태 같은 건 이제 한숨 한 번으로 털어 낼 만큼 강해진 지현이었다.
지현은 발데마르와 함께 재무 부대 사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리카르도와 파올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얼마나 큰일이에요?”
“버디어 콤파니아 전체가 얽혔습니다. 더 크게 보면 대륙의 질서가 재편될 수준입니다.”
“와, 지금까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큰일이네요.”
지현은 한가로이 말하며 리카르도가 내민 편지를 잡았다. 길었다. 둘둘 말린 편지를 모두 펼치니 지현의 키만큼 늘어났다. 그런 편지가 한 장 더 있었다.
“방금 도착한 편지입니다. 대장님과 길이 엇갈렸더군요.”
“그렇군. 화물을 받는 사이 편지가 왔던 모양이야.”
“뭔가 내용이 좀 복잡한데요.”
편지의 내용만을 요약하면 콘타의 용병 요청이었다. 쉽게 생각하면 무력이 필요해 용병대를 고용하고 싶다는 걸로 끝낼 수 있지만 그 배경과 내막은 복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사건의 시작은 하이틸란트와 접해 있는 이웃 국가 르몽센에서부터였다. 이웃 국가라고는 하지만 서로 다른 나라라고 딱 잘라 나뉘는 곳은 아니었다. 르몽센의 국왕이 하이틸란트 황제의 피선거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황권에 도전할 만큼 강대한 르몽센의 국왕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한편 봉건 군주들을 휘하로 묶어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거기에는 전쟁이라는 수단이 동원됐다.
국왕은 군소 군주는 물론 최근에는 노턴브리아와 르몽센의 영토를 겸하고 있는 외국계 영주들까지 공격했다. 전쟁이 늘어났기에 용병들도 분주해졌다.
“아, 그쪽으로 옮긴 부대가 라그나 부대였지요?”
“그렇소. 세베리 부대와 함께 둘만 남은 국지전 부대로군.”
고용이 잦은 만큼 르몽센 인근에 있던 니오 용병대 지부는 아예 르몽센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현도 보고서를 받았기에 기억했다.
“원래 수익이 큰 부대였으니 남긴 거였지만 반 년 정도 전부터 수익이 더 커졌지요. 그만큼 사상자도 늘었고…….”
“전사가 전쟁터에서 죽는 거야 당연한 일이오. 일일이 마음에 상처를 내서야 견딜 수 없소.”
“그리 말씀하시는 발데마르 씨야말로 병사 한 사람 한 사람 죽거나 다칠 때마다 엄청 안타까워하시잖아요.”
“크흠. 나야 흉터 하나둘 더 늘린들 별 차이 없으니 하는 말이오.”
“그나저나 콘타 씨의 편지 말이죠, 본론을 먼저 적어 준 건 좋았는데 그 아래로는 대체 무슨 연관인지 모를 이야기가 너무 긴데요. 요약해서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아, 알겠습니다.”
군대를 움직이는 건 숨 쉬는 것조차 돈이 든다고 표현할 만큼 비쌌다. 또 신경 쓸 것도 많았다. 용병은 돈만 주면 나머진 알아서 처리하지만 사병과 징집군은 입는 것 먹는 것 하나하나 관리해야 했다. 그 관리에도 돈이 나갔다.
르몽센 국왕은 막대한 전비 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세금과 무역으로 얻는 돈은 한계에 달했는데 그보다 지출이 많아지자 그는 새로운 돈줄을 찾았다. 종교였다.
대부분의 종교 영지는 여느 귀족의 장원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귀족들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받는 한편 세금은 내지 않으니 축적한 부가 상당했다.
“사실 종교인 과세 문제는 벌써 십수 년을 묵은 문제였습니다. 집권 초기 때부터 천신교로부터 세금을 걷으려는 움직임을 몇 차례나 보였기 때문이지요.”
“그렇군요.”
지현은 문득 자신의 고향을 생각했다. 거기서도 ‘종교인이 세금을 내야 하는가?’로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펼쳤다. 지현은 경영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수익 있는 곳에 세금 있다.’라는 입장이었지만 결과를 보지 못하고 이곳으로 왔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가 봐요.”
“네? 아, 재무관님의 고향도 그럼.”
“비슷한 상황이었어요. 이렇게 전쟁 때문인 건 아니었지만.”
“그렇습니까. 아무튼 십수 년 동안 정치 싸움을 벌였는데 최근 골플란트 백작이 노턴브리아 국왕과 동맹을 맺으면서 전쟁이 격화됐기에 왕은 징세를 강행했습니다. 일레다 총대주교는 이에 반발해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천신교 신자에게 파문보다 두려운 일은 없을 터. 르몽센 국왕도 납작 엎드렸겠군.”
“물론 황제조차 감히 그 권위를 넘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르몽센 국왕은 훨씬 치밀하고 교활한 자였습니다.”
파문은 어느 날 뚝 하고 선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절차가 있고 절차를 밟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르몽센 국왕은 그 틈을 노렸다. 국내의 귀족, 시민, 성직자들을 모아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일레다 총대주교를 이단으로 고발한 것이다.
“어, 일레다 총대주교는 분명 종교 지도자 맞죠?”
“그렇습니다.”
“종교 지도자도 이단 재판을 받을 수 있나요?”
“태양이 비추는 모든 인간은 결국 천신님의 권위 아래 있는 존재들입니다. 총대주교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종교는 무섭네요.”
더 가관은 그 다음이었다. 일단 고발이 들어왔으니 재판을 준비해야 하지만 총대주교가 고발당한 건 초유의 사태였기에 천신교는 혼란에 빠졌다.
르몽센은 군을 움직여 기능이 마비된 일레다를 침공했다. 설마 이단 고발을 해 놓고 군사 행동까지 감행할 줄은 몰랐던 일레다는 미처 대응조차 못하고 수세에 몰렸다.
일레다군은 시내에서 농성하려 했으나 일레다 내부의 반 총대주교 파가 르몽센에 동조해 성문을 열었다. 르몽센군은 총대주교를 납치해 일레다를 빠져나왔다.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벌써 세 달 전이었군요.”
“우리가 몰랐던 게 더 놀랍네요.”
“하이틸란트는 이번 사태에서 제3자 입장이고 또 정보가 이쪽까지 도달하려면 한 달이나 걸리다 보니 그런 모양입니다. 저쪽에서도 정보를 취합하고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했겠지요.”
“지금의 누탈로는 혼란 그 자체라고 합니다. 문제는 버디어 가문이 그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콘타에게는 형이 둘 있는데 콘타가 남해를 통한 무역에 집중한다면 두 형은 대륙 북부의 군주들을 상대로 한 은행업이 주력 사업이었다. 최근 버디어 가문의 화폐 부족도 이러한 은행업의 실책으로 생긴 일이었다.
대륙의 군주들은 돈을 빌리면 도통 돈으로 갚지를 않았다. 니오 용병대는 귀족과 황제의 정치 역학을 이용해 받아 내기라도 했는데 버디어가 상대하는 건 그런 견제도 거의 불가능한 국왕들이었다.
형제는 화폐 대신 다양한 이권을 받았다. 노턴브리아 노스 링턴에서 생산되는 양모를 독점할 권리, 크롤리 시의 징세권, 사우스 첼시의 광산 채굴권 등 그야말로 국가적인 규모의 이권이었다.
문제는 그런 이권을 한계까지 활용해도 서류상의 이익만 있을 뿐 중요한 현금을 수급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국왕을 찾아가 제발 돈으로 갚아 달라고 하소연을 할 지경이었다.
“대체 얼마나 빌렸는데 그래요?”
“아마 데나리오 금화로 20만 정도였을 겁니다. 그런데 노턴브리아 국왕은 그것도 부족하다고 더 빌려 달라고 합니다.”
“억!”
액수를 듣는 순간 지현과 발데마르는 뒷골이 뻣뻣해지고 눈앞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니오 용병대 전체의 2년 총수입과 맞먹는 액수였다. 수익도 아니고 수입과!
“그러던 차에 누탈로 전체가 혼란에 빠지자 두 사람이 저지른 짓은 후……. 상인으로서 가족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걸 제 입으로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합니다.”
두 형제는 아주 획기적인 해결책을 생각해 냈다. 총대주교가 납치당해 혼란에 빠진 대주교령의 성을 하나 구입해 그곳에서 위폐를 제조한 것이다.
사람들은 경황이 없어 그 성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시장에 위폐가 돌아다니자 곧장 위폐가 어디서 출발했는지 추적했다.
히스타치아의 금화 데나리오에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중량과 금 함량에 대한 규칙이다. 이 규칙만 지킨다면 어느 나라에서 찍어도 정품 데나리오로 인정받았다. 반대로 이 규칙을 어긴다면 히스타치아 조폐국에서 찍었더라도 데나리오로 인정받지 못하고 위폐로 취급했다.
이런 엄격한 규정과 그걸 지키는 인근 공화국들이 있었기에 데나리오는 일레디온 제국의 데우스와 함께 대륙의 기축 통화로 작동했다. 그 지위를 흔드는 존재는 누구든 반드시 배제했다.
“공화국 정부를 너무 우습게 본 것입니다. 물론 버디어는 스스로를 공화국이라고 부를 만큼 강대한 가문입니다만, 진짜 공화국이 버디어 가문 하나만으로 좌우될 만큼 만만하진 않습니다.”
위폐를 발행하고 2주일 만에 루발라 정부는 위폐가 어디서 나왔는지 찾아냈다. 두 형제는 기소됐지만 공화국에 나타나지 않았다.
피고 없는 재판이 열렸다. 두 사람은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집행을 위해 공화국은 강인하기로 소문난 지나 쇠뇌병을 고용해 출병했다.
공화국 정부가 이렇게 발 빠르게 대처할 줄 몰랐는지 두 형제의 행각은 더 막장으로 치달았다. 숨어서 위폐를 제조하는 대신 아예 거점을 장악한 강도로 돌변한 것이다.
사업체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했던 용병들을 성으로 불러 모았고 그들로 공화국군을 격파했다. 그 이후 성을 통과하는 가도를 장악하고 상인들에게 세금을 물리거나 상품을 약탈했다.
“와…….”
지현은 할 말을 잊었다. 진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발데마르 또한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판단력을 상실한다지만 정도란 게 있지 않은가?
“공화국 정부는 버디어 가문에 강도 높은 비판과 동시에 엄중한 경고를 보냈습니다. 콘타 씨가 동분서주하며 용병을 모으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후. 우리의 힘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소. 지나 쇠뇌병의 명성은 류코스 산맥을 넘어올 정도로 유명한데 그들마저 격파 당했다니.”
“아니, 그 용병대는 고용주가 불법을 저지르는데 그걸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도 공화국 사람들 아닌가요?”
“대부분 르몽센인과 노턴브리아인입니다. 일부는 나이아인도 섞여 있군요. 아무튼 공화국 법쯤은 알 바 아닌 사람들이지요. 설령 형제가 항복하더라도 용병 원칙에 따라 처벌 받지도 않고요.”
“용병들은 고용된 순간부터 고용주의 도구로 취급된다오. 더군다나 학살 약탈도 예사로 하는 용병들이 고작 위폐 정도로…….”
“발데마르 씨.”
“크흠! 우리가 그런다는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용병은 평균적으로 그런다는 거지! 우리는 전사로서 도덕과 자존심을 걸고 무기를 들지 않은 자를 해치지 않소. 약탈도 200년 전에 깨끗하게 손 털었고! 진짜라니까!”
“니오 용병대는 전장을 깔끔하게 정리하기로 유명합니다. 니오 용병대를 고용하면 농지와 주민 피해가 극히 드물어 특히 영지전에서 인기가 높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지! 우리는 그저 때려 부술 줄만 아는 무식쟁이들이 아니라오. 고용주의 의사를 적극 반영하여 최선의 결과를 내놓는다, 이 말이오.”
“잘 알아요. 그리 흥분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나저나 콘타 씨는 뭘 이렇게 구구절절 보내 주셨나요. 힘이 필요하시다면 그냥 요청하시면 됐을 일을.”
“내 말이 그 말이오.”
“배경을 이해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 누탈로의 정세는 혼란하기 그지없습니다. 두 형을 제압한다는 단순한 목표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용병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위험에 싸여 있을 것입니다.”
“네로 씨의 말씀이 옳습니다. 정세를 봤을 때 위폐로 이득을 보려 한 건 두 형제뿐이 아닐 겁니다. 공화국군을 격퇴한 것만 보더라도 그렇지요.”
“그런 만큼 니오 용병대에게도 부담이 큰 의뢰이기에 전후 사정을 분명하게 알고 고심해서 결정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회계사들은 스스로가 버디어 가문의 일원으로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가문의 반도들을 제압하고 싶을 게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선 니오 용병대라는 강력한 무력 집단을 쓰는 게 좋고.
그럼에도 그들은 감정을 억누르고 선택을 요구했다. 지현은 이들의 태도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보통 사람들이 아니란 거야 알았지만 역시 대단했다. 세상에 누가 또 이렇게 냉철할 수 있을까?
“지현 양. 어찌 생각하시오?”
“대장님의 의견은요?”
“말할 것도 없소. 우리의 용맹을 어찌 보고 이런 질문을 던진단 말이오? 적을 알 수 없고 위험하다면 우리가 피하기라도 할 줄 알았는가? 우리는 강한 적일수록 더 강하게 꺾고 부숴 이겨 낸다네!”
발데마르가 호탕하게 소리쳤다. 회계사들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지만 그들 역시 가슴이 크게 동했다.
“발데마르 씨와 같은 이유는 아니지만 저 역시 이 의뢰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버디어 상회는 단순히 거래처가 아니라 니오 용병대와 중요한 동반 관계예요. 여러분의 혼란은 우리도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대장님, 부대를 정비하고 출정을 준비하세요. 저는 계약 조건을 듣고 예산을 짤게요.”
“훌륭하오! 그래야 우리 용병대의 재무관이지!”
발데마르가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곧장 취침을 준비하던 백부장들을 불러 모았다.
“고용 기간과 인원은 어떻게 하나요? 비용은?”
“콘타 씨는 최저한 천 명은 필요하다고 합니다. 비용은 매 달 2,500데나리오를 지불할 것이고 전리품은 관례에 따라 니오 용병대의 것입니다.”
“다른 용병대 두 곳을 더 불러 총 2천 명의 군대를 모을 것이고 니오 용병대는 독립 지휘권을 가진다는 조건입니다.”
“후한 조건인데요. 그럴 저력이 있다는 게 놀랍네요. 형제분들 때문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혼란이 있다지만 공화국, 아니 누탈로 최대 규모의 콤파니아입니다. 2위와 재산 격차가 반 배는 날 정도로 크지요.”
“부족한 현금은 각 왕국에서 얻은 이권을 떼어 주는 대가로 공화국의 다른 거대 가문으로부터 융통했습니다. 마침 콘타 씨의 처가라 다행이었지요.”
“애초에 현금 부족 문제도 그렇게 해결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건 그냥 현금도 아니고 빚이 아니겠습니까. 급하게 융통한 터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허허.”
“그도 그러네요.”
내일부터는 또 루발라 공화국까지 진주하는 데 소요될 시간과 물자, 비용을 계산하느라 머리가 깨져야 할 판이었다. 루발라 출신의 회계사들이 있으니 부담은 좀 덜 거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 * *
“무슨 말씀을! 지현 양은 히스타치아 공화국으로 향하시오. 휴가인 사람이 왜 일을 하려고 그러시오?”
이른 아침, 출발하지 않고 출근을 하는 지현을 보고 발데마르가 기함했다. 역시 좋은 상사다. 지현은 그런 발데마르를 보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본부 전체가 움직여야 할 정도로 큰일인데 어떻게 저만 떠날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제 호위로 사람도 수십 명씩 빠져야 하는데.”
“하지만 원칙이……. 게다가 이미 준비한 것도 있지 않소?”
‘다른 회사, 다른 상황이었다면 훌훌 털고 떠나 버렸겠지만.’
“도마르 씨 통해서 이미 휴가는 취소했어요. 자, 대장님도 어서 자기 할 일을 하셔야죠.”
지현이 발데마르의 등을 떠밀었다. 지현이 민다고 꿈쩍이나 할 발데마르가 아니었지만 그는 지현의 손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고맙소.”
“고마운 걸 알고 계시는 걸로 충분해요.”
문 앞에 선 발데마르는 지현에게 인사했다. 지현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자, 재무 부대 여러분. 전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우리 전장입니다. 힘내죠!”
“예! 총괄 재무관님!”
지현의 말마따나 이건 전쟁 그 자체였다. 본부에서 500명을 출병하고 부족한 인원은 누탈로까지 가는 경로에 위치한 세베리 부대에서 충원하는 걸로 계획을 세웠다. 그렇다면 세베리 부대가 위치한 엘라이히 잘츠슈타트까지 경로 계획을 먼저 세워야 했다.
거기까지 가도, 기후, 지형을 염두에 두고 경로와 예산을 짜야 했다. 벌써 수십 차례나 반복해 숙달된 업무였지만 경로 자체가 매번 바뀌니 업무 난이도는 항상 새롭게 갱신됐다.
잘츠슈타트에서 남하해 류코스 산맥을 넘는 것이 가장 고된 일이었다. 슈비츠의 관문은 니오 용병대의 면세 혜택 범위 밖에 있었다. 더군다나 여느 평지의 관문과 달리 산맥 관문은 이용료가 비쌌다.
그럼에도 남으로는 누탈로, 서로는 르몽센, 북과 동으로는 하이틸란트가 맞닿는 유일한 경로인지라 이용객은 많았다.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슈비츠를 용병업과 함께 지탱하는 기둥이 관문 수입이었다.
“인원이 적었다면 모를까 천 명이나 움직이려면 별수 없이 노숙해야 하는 구간이 많습니다.”
“류코스 산맥을 넘기 전까지는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누탈로에 접어들면 도시 규모도 커지고 물자 유동량도 인원을 감당할 만한 수준이 되지만.”
“사고가 발생할 때를 대비해 이동 시간에는 여유를 둬야 합니다. 그쪽 구간은 통과 시간을 하루 더 길게 잡으시지요.”
재무 부대는 거대한 원탁 위에 수십 장의 지도를 펼쳐 놓고 토의에 토의를 거쳤다. 삼각측량도 투영법도 없었기에 지도는 왜곡이 심했지만 상인들이 실제로 상행에 사용하고 방격법 등을 써서 보완했기에 거리만큼은 제법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재무 부대는 같은 지역의 서로 다른 지도를 겹쳐 놓는 방식으로 왜곡을 최대한 줄여 가며 거리를 산출하고 그에 따른 이동 시간을 계산했다. 뿐만 아니라 시간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문제들도 하나씩 풀어 갔다.
“아디슬 씨, 베겐도르프 시에 문의해서 남부의 곡물 동향 좀 알아봐 주세요. 여기, 만하임 남서쪽에 있는 수원지 아직 이용이 가능한지도 같이 문의하고요.”
“예!”
“식량도 식량이지만 염분의 확보가 중요합니다. 소금 비축량이 얼마나 됩니까?”
“재고 관리 부서에 문의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힐다 백부장의 전언입니다. 가금류를 짐과 함께 마차에 싣고 다니면 신선육을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지 않겠냐고 건의하셨습니다.”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다고 답해 주세요. 근데 동물을 잡고 뒤처리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나요? 인력은 어쩌고요?”
“용병대원들은 대체로 사냥 경험이 풍부하고 사냥감을 처리하는 데에도 능숙하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병사들에게 부담을 더 주고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럴 거면 절감한 금액 일부는 인센티브로 지급해야겠어요. 발데마르 씨한테 말씀드리고 정육을 담당할 병사를 모집해 보죠.”
“알겠습니다.”
“지현 재무관님은 역시 이곳 사람들과 생각이 많이 다르십니다.”
“네? 네로 씨는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인센티브란 개념 말입니다. 포상금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만 훨씬 범위가 넓고 방대합니다. 원래 그런 자잘한 일은 일일이 포상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니오 용병대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네로 회계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용병의 월급은 싸우는 걸로만 받는 게 아닙니다. 지현 재무관님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영내에서 생활하는 모든 게 기본급에 포함된 일이라고 쳤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누군가는 일을 더 하고 누군가는 덜하면서 같은 액수를 받아 가잖아요.”
“적당히 어제 일하면 오늘은 쉬고 내일은 또 다른 사람이 일하는 식으로 균형을 맞췄습니다. 지현 재무관님 말씀대로 불공평하면 안 되니까요.”
“결국 기존에 하던 일을 체계화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역시 무슨 일에는 얼마라는 식은 꽤나 놀랍습니다.”
“이럴 때 보면 지현 재무관님은 상인보다 더 돈에 철저하십니다. 허허.”
“놀리시는 건 아니시죠?”
“어이쿠, 리카르도. 웃을 시간에 지도나 한 번 더 확인하게.”
“누가 아니랍니까.”
한편 발데마르는 간부들을 소집해 출전할 부대를 골랐다. 본부를 완전히 비울 수는 없으니 한 개 백부대는 본부에 남아 본부 방위와 연락을 담당해야 했다.
발데마르는 고심 끝에 토마스 백부대를 남기기로 정했다. 나머지 다섯 백부장들은 필요한 물자와 장비를 점검했다.
“큰 전쟁이다. 무장은 최대한으로! 모든 무기를 포함해라!”
“예, 대장님!”
본부의 용병들은 만능 군인을 지향하기에 다룰 수 있는 무기도 다양했다. 기본적으로 방패와 검, 손도끼와 긴 자루 도끼, 장창과 기창에 투창과 활도 연습했다.
발데마르가 최대 무장이라고 한 것은 필요에 따라, 지형에 따라, 전술에 따라 언제든 중기병이 경기병이 되고, 경기병이 궁수가 되거나 창병이 되는 걸 요구한다는 뜻이었다. 이들은 그것을 해냈다.
무장이 많으면 그만큼 행군이 힘들었다. 평소와 달리 수레와 말도 더 많아야 하고 이동 시간도 더 오래 걸릴 것이었다.
발데마르는 이러한 사실을 지현에게 전달했다. 얼추 인원과 장비의 정보가 들어오자 비로소 예산의 얼개를 짤 수 있게 됐다.
“천막을 인수대로 챙기려면 그것만 해도 짐이 무지막지하겠는데요.”
“이동에만 두 달은 써야 하니 별 도리가 없군요.”
“본부만 있었으면 북해로 나가서 대륙 연안을 따라 빙 돌아 남해로 들어가는 방법을 썼을 겁니다. 그래도 걸리는 시간은 한 달 남짓이거든요.”
아디슬이 육로로 루발라까지 가는 길을 검토하며 투덜거렸다. 그의 말에 네로가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배를 얼마나 빨리 몰면 그 거리를 한 달 만에 간다는 겁니까?”
“아, 회계사 분들은 그때 없었지요. 헌츠 연맹 선단장도 니오 배에는 놀라더라고요.”
“허 참, 우리 무역선이 노턴브리아까지 가는 데만 40일이 넘게 걸리는데…….”
“어디 전함이랑 화물선이 같겠습니까?”
“하지만 말들이 힘들어 했어요. 배를 한 달이나 몰면 말이 과로랑 병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씀도 옳습니다. 보통 배로 이동할 때는 말을 태우지 않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지금 쓸 수 있는 방법에 집중하자고요.”
“넵!”
재무 부대가 고생하는 사이 전투 부대는 점검으로 고생했다. 병사별로 선호하는 무기가 있듯 선호하지 않는 무기도 있기 마련이었다. 자주 안 쓰는 무기는 보수가 필요했다.
힐다는 손도끼를 가장 애용했기에 항상 최상의 상태로 관리했지만 자주 쓰지 않는 검은 훈련 때나 꺼내서 기름칠하고 닦아 주는 게 전부였다. 녹이 슬진 않았지만 혹시라도 날이 상하진 않았는지, 몸체에 충격이 누적되진 않았는지 세세히 점검해야 했다.
병사들은 저마다 기름과 숫돌을 꺼내 무기를 닦고 날을 세웠다. 화살을 고정하고 중심에 추를 달아 너무 휘거나 너무 뻣뻣해진 화살은 없는지, 혹시라도 살대가 습기를 먹었거나 갈라짐이 발생하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힐다처럼 잘 안 쓰는 무기도 때마다 관리해 주는 사람들은 괜찮았지만 안 쓰는 무기는 써야 할 때가 되기 전까진 손도 안 대는 병사도 더러 있었다. 몇몇 병사는 녹이 슬어 시뻘게진 창날을 보며 울상을 짓다가 리하르트에게 웃돈을 주고 맡기기도 했다.
각 분대의 분대장들은 천막도 꺼내 점검했다. 분대용 천막은 다섯 개의 기둥과 큰 천, 밧줄로 구성됐다. 최근 천막을 갖고 작전에 나갔던 부대라면 몰라도 마지막으로 사용한 게 한 달이 넘어간 이들은 천막을 펼쳐 확인해야 했다.
연병장에 천막이 줄줄이 들어섰다. 분대장의 취향에 따라 천이 태피스트리인 천막도 많았다. 배와 용, 방패와 도끼 그림이 가장 흔했다.
“지현 양, 누탈로까지는 함께 가더라도 역시 거기선 히스타치아 공화국에 들르는 것이 어떻겠소?”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 거기 가서 생각해 볼게요.”
식사 시간이 돼 일에서 잠시 손을 놓고 식당으로 내려온 지현을 발데마르가 맞이했다.
발데마르는 창고에 남은 개인 식재료를 출발 전에 모두 사용할 생각으로 직접 요리했다. 부하들이 눈을 번뜩였지만 이번 요리는 두 사람 먹을 분량뿐이라 나눠줄 수 없었다.
“사람이 어찌 항상 일만 할 수 있겠소? 좀 쉴 때도 있어야지.”
“그렇게 말씀하시는 발데마르 대장님은 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요. 힐다 씨나 하인리히 씨도 휴가를 받은 적이 있는데.”
“대장쯤 되면 날 잡고 쉬는 게 아니더라도 부하들 눈에 안 띄게 쉬는 요령엔 달인이 된다오.”
“그건 몰랐네요.”
“아직 모르는 게 많을 것이오. 지현 양은 너무 요령 없이 일하는 것 같아 이따금 걱정이라오.”
“헤헷.”
발데마르의 말마따나 지현은 푹 쉬는 일이 적었다. 스트레스는 일과 후 슈바르츠와 산책을 다니는 식으로 해소했다. 사우나를 즐기는 것도 좋은 휴식 방법이었다.
하지만 모두 일과 후라는 단서가 붙었다. 지현은 지금까지 하루 이상 연차를 내고 일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는 야드가르의 의뢰를 따라 가서는 수도원에서 휴양을 취하려다 말고 영업을 하지 않았던가? 영업 다음엔 문자를 공부했고 대미를 장식한 건 종교를 끌어들여 전쟁을 축소하는 일이었다.
‘다시 생각하니까 나 진짜 쉬는 법까지 까먹었구나!’
향수병이 일어나는 걸 막으려는 행동이었지만 그게 습관이 돼 버렸다. 발데마르의 말에 지현은 진짜 자신이 쉴 줄 모른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다행히 향수병은 요 한 달 사이 상당히 잠잠해졌다. 일에서 손을 놓는다고 갑자기 고향이 그리워져 우울하거나 우는 일은 없었다.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 역시 발데마르 씨는 참 따뜻하네요.”
“크흠. 뭘 이런 걸로. 아무튼 용병들도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면 실전에서 크게 활약할 수 없다오. 지현 양도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시구려.”
“네. 꼭 그럴게요.”
지현은 발데마르에게 미소를 보이고는 식사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지현은 곧장 사무실로 향했다. 지현에게 지금은 아직 쉴 수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보급지로 선정한 곳 목록 재검토하고 주문서 작성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세베리 부대로 전령이 출발했습니다.”
주문서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날아다녔다. 금고에선 현금이 나와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지출 확인과 장부 기입을 위해 회계사들이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이따금 금화 대신 차용증이 오갔고 그 또한 장부에 그대로 올라갔다.
취합된 주문서는 전령을 통해 베겐도르프 시로 넘어갔다. 미리 상회에 주문해 보급지에 물자를 집적해 놓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보급품을 항상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여타 용병대처럼 상인을 끌고 다니자니 그들은 이동 속도가 턱없이 느렸다. 더군다나 주보 상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빌미로 폭리를 취했다.
본부에 부족한 물자는 베겐도르프 시에서 보충하되 다른 공급 지역도 미리 물색했다. 용병대가 통과하는 경로에는 도시도 여럿 있었으니 꼭 한 곳에서 모든 걸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출발은 이레 뒤로 확정했소.”
“충분히 준비하고 갈 수 있으려면 분주하겠네요.”
“나가야 하는 사람의 수가 많으니 말이오.”
“보급품을 실어 나를 수레는 다 점검했지요?”
“수레와 말은 평소에 신경 써서 관리하니 큰 문제가 없었소. 그보다 평소에 쓰지 않던 장비들 쪽에 더 집중해야지.”
“좋은 생각이에요.”
* * *
출전 일정에 맞춰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물자 집적을 요청받은 상회는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답장을 보냈다. 지현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식량을 추가 발주해 여유를 뒀다.
그 와중에 야드가르로부터 편지와 함께 금화가 왔다. 일전에 도적떼를 소탕한 포상이었다. 편지에 따르면 그들은 야드가르와 일전을 벌였던 게르빈 용병대였다. 대장인 게르빈이 고용주와 함께 포로로 잡히고 그 지출을 감당하지 못한 용병대가 강도질을 벌인 것이다.
파데슈타트 백작령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다 토벌대의 추격에 영지 밖으로 도망쳤다는 정보도 함께 있었다. 그렇게 도망친 뒤 다시 강도 행각을 벌이다 니오 용병대에 잡힌 것이었다.
전직 용병인 만큼 규모도 크고 도주도 재빨라 골치를 썩이던 상대였다. 해당 장원의 기사는 본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서 야드가르에게 도움을 요청한 판이었다. 야드가르도 원정 부대를 조직하자니 생돈을 들여야 해서 속앓이를 하던 차에 니오 용병대가 해결해 준 것이다.
본래 계약상 가도 이용 중 강도나 야생 동물의 퇴치는 당연한 업무라 추가금이 없지만 포로를 잡은 걸 높이 사 몸값만큼 돈을 보낸다는 내용이 편지 말미에 있었다. 일종의 배려였다.
용병대가 야드가르와 친하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진 않았으리라. 지현은 역시 유력자와 친해서 나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가외로 수익을 얻는 건 좋은 일이었다. 지현은 당사자들에게 전달할 인센티브 금액을 떼어 토마스에게 넘겼다.
“이 추가금을 그쪽 지부로 배송해 주세요. 아디슬 씨, 장부에 자금 출납 기록하세요. 백작 부인의 편지는 증명서로 동봉하고.”
“옙!”
“이걸 보면 지부 녀석들이 앞다퉈 배송 업무에 나서려고 하겠구려.”
“의뢰가 없는 사람들만요. 50명씩 나눠 가지면 얼마 안 되는 돈이니까요.”
“항상 의뢰가 없어 남는 사람은 수십에서 수백 명씩 있으니 당분간 인기가 식을 일은 없어 보이오.”
“그러게요. 지금처럼 큰 의뢰가 잦은 것도 아니고.”
“몇몇 지부는 르몽센으로 옮기는 것도 고민하는 모양이오. 사냥으로도 수익이 제법 짭짤하니 아직은 고려 단계에 불과하지만.”
“전쟁터는…… 역시 사상자가 너무 큰 게 마음에 걸려요. 물론 부대원 분들이 바란다면 그리해야 하겠지만.”
사냥 부대로 전환한 것도 수익성 개선을 위해서였으니 전쟁에서 더 큰 수익을 낸다면 얼마든지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지금은 수익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 더 생각해 보자는 의견도 상당수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도 지금 전쟁터로 향하는 거구나. 후……. 정말 생각하기 싫었는데.’
“내일 새벽 출발이니 오늘은 일찍 주무시오. 다른 녀석들도 준비를 마치고 출발 전 마지막이라고 욕탕과 사우나 앞에 아침부터 줄을 섰소.”
“푹 쉬어야겠네요. 내일부터는 다시 고생할 테니까.”
“그럼 쉬시구려.”
재무 부대 역시 일을 일단락 지었다. 아디슬은 본래 아드니 부대 소속이라 함께 가야 하지만 본부 재무 업무를 지휘해야 했기에 남기로 했다.
회계사들은 고향 문제라 함께 가며 재무 및 회계를 담당했다. 현장에서도 그들은 버디어 콤파니아의 일원이 아니라 니오 용병대 재무관으로 활동할 것이다.
“지현 양, 오늘 호신술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아, 하인리히 씨. 오늘도 해야죠.”
“내일 출발이니 하루쯤은 쉬셔도 괜찮을 텐데요.”
“오히려 너무 늘어지면 더 고생할 테니까요. 도와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오늘은…… 지현 양, 힐다가 준 방패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네? 아, 네!”
지현은 방으로 돌아가 방패를 들고 나왔다. 처음 힐다에게 선물 받았을 때는 들고 서 있는 것만도 힘들어서 팔에 힘을 있는 대로 줘야 했지만 지금은 한 손으로도 거뜬히 들 수 있었다.
“자세를 취해 보십시오.”
“음, 들 수는 있는데 여전히 많이 무거워요.”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무거운 게 꼭 단점인 것만은 아닙니다. 무거운 만큼 더 묵직한 공격을 받아 낼 수 있고 반대로 더 묵직하게 공격할 수도 있지요. 왼쪽부터 갑니다.”
지현은 방패 손잡이를 꽉 쥐고 왼손으로 방패 면을 받치며 섰다. 하인리히가 몽둥이를 휘둘러 지현의 왼쪽을 노렸다. 지현은 몸을 틀며 방패 날을 세워 공격 경로를 차단했다.
“잘하셨습니다. 움직이는 건 어떻습니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 은근히 빨리 움직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계속해 보겠습니다. 시선은 항상 상대의 몸을 노리고 신체 전부를 시야에 두셔야 합니다.”
“네!”
하인리히의 주문은 까다로운 것이었다. 눈을 쓰는 건 다른 몸을 쓰는 방식과 달리 누가 직접 지도해 줄 수도 없어 지현도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숙련에 이르진 못해 아차 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한 부위만 집중해서 보게 됐다. 주로 무기를 쥔 손에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날아온 공격에 당하기 일쑤였다.
지현은 의도대로 방패를 움직이는 한편 방패 무게에 휘둘리지도 않고 차근차근 하인리히의 공격을 막거나 차단했다. 근력 운동의 성과였다. 하지만 한계가 일찍 찾아왔다.
“윽, 으아아아…….”
3분 만에 체력이 고갈됐다. 심폐 능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팔과 상체에 가해지는 피로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팔에 힘이 쫙 빠지고 결국 손을 축 늘어뜨렸다. 아귀에는 아직 힘이 남아 방패를 쥐고 있지만 휘두를 수는 없었다.
“아직은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시간을 늘려 나가야겠습니다.”
무게가 두 배가 된다는 건 힘도 두 배가 든다는 뜻이 아니었다. 무게를 들기 위해 필요한 힘, 휘두르는 데 필요한 힘, 휘두르는 힘을 제어하기 위해 필요한 힘 등 세 배, 네 배가 넘는 힘이 필요했다.
“동체 시력은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이 정도라면 길거리 왈패 정도는 막고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거 고무적이네요, 헷.”
“근력을 더 키우셔야 할 겁니다. 체력은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렇게 휘두르고도 숨이 크게 차진 않으시지요?”
“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열심히 달린 보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현은 말없이 웃었다. 하인리히 말대로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는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게 더 많은 노력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으니까.
“지현 양, 호신술 훈련은 끝났어요?”
“아, 힐다 씨.”
“오, 내가 준 방패네! 이제야 그걸 쓰는 거예요?”
“많이 늦었지요? 그런데 아직도 잘 다루긴 힘들어요. 고작 몇 번 휘둘렀다고 팔이 이 모양이라서.”
“에고, 팔을 벌벌 떠네. 대장한테 마사지라도 배워 둘 걸 그랬나 봐요.”
“마사지요?”
“네. 마사지. 뭔지 모르세요?”
“아, 알아요. 잘 알지요. 여기도 그런 게 있는 줄 몰라서요.”
“우리야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면 대충 주물거리거나 붕대로 감는 수준인데 대장은 뭔가 좀 더 잘 알더라고요. 술탄국 의사한테 배웠다나 뭐라나.”
“발데마르 씨, 아직도 뭘 더 아는 게 있다고요? 세상에…….”
“신기하죠? 양파 같다니까요, 우리 대장.”
“당신께선 뭐든 넓고 얕게 배우기에 그렇다고 하시지만 뭘 하시든 평균 이상으로 해내시지. 하지만 천재라는 말로 일축할 수는 없어. 얼마나 노력하시는지는 옆에서 본 우리가 잘 아니까.”
“‘천재니까’라고 대충 넘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좀 질투할 수밖에 없지. 까놓고 말해서 대장은 열만 해도 남들 스물 서른 한 것 이상 해낸다고.”
“그래. 그건 그렇지. 그래도 결국 대성한 건 전투뿐이니…….”
‘아니, 제가 볼 땐 두 사람도 엄청 천재거든요!’
하인리히의 학습 능력은 다른 행정병은 물론 지현마저 상회했다. 회계사들이야 업계 경력자들이고 다져 놓은 기반이 튼실해 학습 속도가 빠르다지만 하인리히는 그냥 머리가 좋았다.
무엇보다 하인리히의 강점은 기술의 구조와 원리를 빠르게 이해하는 논리력과 추리력이었다. 그러다 보니 재무제표를 기입하고 해석하는 기술을 빠르게 습득했다.
문자 그대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실무는 반복 숙달의 영역이 많아 경험을 쌓아야 하지만 그마저도 다른 이들보다 훨씬 적은 경험으로 더 많은 능력을 얻을 것이었다.
반면 힐다의 이해력은 다른 행정병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힐다의 능력은 몸을 쓰는 쪽이었다. 지현은 그걸 무기가 없을 때 쓸 호신술을 배우다 크게 느꼈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맨손 무술을 배우다 문득 대학 시절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복싱을 힐다에게 가르쳐 주면서였다.
지현은 학점이 남고 주말을 비우기 위해 시간표에 넣었던 과목이었던지라 대충 배웠고 지금은 자세도 틀리게 기억하는 게 많았다. 하지만 힐다는 지현이 가르쳐 준 잘못된 자세를 보고 오히려 바른 자세를 알아냈다.
‘어? 이러면 좀 불편한데?’라든지 ‘이렇게 치려면 이게 맞는 동작인가?’라며 알아서 자세를 고치다 진짜 복싱을 터득해 버린 것이다. 그 후 힐다는 한동안 혼자 복싱을 연구했다.
며칠 뒤 힐다는 직접 개량한 복싱을 지현 앞에서 보였다. 얻은 기반이 부실하고 힐다가 몸을 주로 쓰는 방식이 정해져 있어 모던 복싱의 방대한 원리를 다 담아내진 못했지만 일부 자세와 기술만큼은 지현이 아는 것과 놀랄 만큼 흡사했다.
‘굳이 주먹으로 싸우면서 상체를 앞으로 숙이는 건 때리기 쉬우라고 하는 건지 되게 신기하네요. 자세도 낮고. 이러고서도 안 맞으려면 고민 좀 해야겠는데요.’
‘이 풋-워크라는 통통 튀는 보법이 재밌어요. 순발력 있는 치고 빠지기로 응용할 수도 있어 보이는데 당장은 좀 어렵네요.’
지현은 할 말을 잃었다. 가르쳐 준 건 분명 풋워크로 앞뒤 움직이는 것과 잽-스트레이트 원투 펀치, 그리고 기본 규칙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며칠 만에 슬립, 스웨이, 패링까지 익혀서 오는 걸까?
아무튼 이런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자괴감이 들거나 질투할 법도 한데 지현은 오히려 신이 났다. 이들을 보는 지현의 감각은 사람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구경하는 관객과도 같았다.
뭐든 시키는 대로 잘 해내니 가르치는 맛도 있고 그걸 보는 것도 재밌는 것이다. 그 정점이 발데마르였고.
“자자, 내일 출발하려면 그렇게 벌벌 떠는 팔로는 안 되죠. 방패 놓고 사우나나 가요. 몸을 뜨겁게 달구고 자작나무로 두들겨서 피로를 쫓아내자고요.”
“힐다 씨가 휘두르는 자작나무는 너무 아파요.”
“몸에 좋다니까.”
“으아아아아.”
지현은 힐다의 손에 사우나로 끌려갔다. 하인리히는 방긋 웃고는 연병장을 정리했다.
니오 용병대는 계획한 대로 출발했다. 500명이 넘는 대인원에 인원수보다 많은 말과 수십 대의 마차를 포함하다 보니 한꺼번에 나갈 수는 없었다.
선발대로 게다의 백부대가 먼저 출발했다. 시간을 두고 발데마르가 직접 지휘하는 힐다, 아드니, 랑기 백부대 300여 명이 보급 마차와 함께 나섰다. 마지막에 하인리히 백부대가 후위로 나왔다.
선발대는 정찰도 겸해 짐을 가볍게 하여 빠르고 경쾌하게 움직였다. 도로 사정을 미리 파악하고 도로상에 계획에 없던 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지현은 발데마르와 나란히 걸었다. 짐이 많은 만큼 전체 부대의 속도가 느렸고 그 덕에 지현은 한층 편히 말을 몰 수 있었다. 다른 병사들과 달리 짐이 적어 편한 것도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검과 도끼를 차고 방패를 맸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피로를 막기 위해 갑주를 벗어서 보급 마차에 맡겼다.
몇몇 짐은 마차에 맡겼지만 개인이 필수로 챙겨야 하는 보급품들은 모두 챙겼다. 사흘 치의 곡물과 건량, 개인용 가죽 수통, 시위를 걸어 둔 활, 화살 한 묶음이 들어간 전통이 그것이다.
만약의 사태가 터져 본대에서 떨어지더라도 자력으로 사흘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생존해 복귀할 수 있도록 짠 구성이었다. 일부 병사는 간단한 취사도구와 연장까지 들고 다녔다.
그에 비해 지현의 짐은 펜과 잉크, 여러 장의 종이, 부적 삼아 챙긴 배터리가 나간 스마트폰이 전부였다. 다른 짐을 다 합친 것보다 방패가 더 무거울 정도였다.
날짜로는 한여름이었지만 지현에게는 마치 봄 날씨 같았다. 여전히 밤에는 조금 쌀쌀함을 느낄 수 있었고 한낮의 기온이라고 해 봐도 살짝 더울 뿐 뜨겁지도, 무덥지도 않았다.
출발 전 며칠 동안의 날씨는 쨍쨍한 날이 거의 없이 늘 우중충했다. 흐리지만 구름은 낮게 깔리지 않고 높은 곳에서 해를 가렸다. 날이 흐려도 비는 사흘이나 나흘에 한 번 꼴 정도로 적었다.
그렇게 구름이 해를 가리니 한낮에도 크게 덥지 않았다. 지현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지현의 고향에서 여름이란 찌듯이 덥고 습했다. 그건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는 한편 기력을 뺏어 갔다. 그런 날씨에 전쟁하자고 부르면 적보다 의뢰인을 먼저 두들길지도 몰랐다.
첫날 하루 동안 본대는 50킬로미터 남짓을 남진했다. 평소의 행군 속도를 생각하면 3분지 2 정도의 속도였다. 이것도 전원이 승마했거나 마차에 탑승했기에 낼 수 있는 속도였다.
세베리 부대는 본부와 달리 기병이 얼마 없었다. 기병의 수는 한 개 백부대를 간신히 채울 정도고 전장까지 말로 이동하되 전투는 도보로 하는 승마 보병이 두 개 백부대 정도 있을 뿐이었다.
세베리 부대와 합류하면 그 뒤부터는 하루 이동 속도가 지금보다 떨어질 것으로 추측했다. 피로를 무시하고 급속행군을 한다면 더 빨리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루발라에 도착해도 휴식기를 가져야 했다.
첫날밤의 숙영지는 베겐도르프 남쪽에 위치한 어떤 남작의 장원이었다. 부대는 장원의 휴경지에 막사를 가설했다.
병사들은 제 음식보다 말을 먼저 챙겼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누구보다 고생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말들이었다. 전마로서 힘든 훈련을 받고 보통의 말과는 차원이 다른 강인함과 용맹함을 얻었다지만 무거운 짐을 싣고 꾸준히 걷는 건 역시 힘든 일이었다. 지현도 챙겨 온 짐에서 콩과 당근을 꺼내 귀리 건초에 섞어 슈바르츠를 먹였다.
앞으로 한 달, 중간에 산맥도 넘어야 하는 만큼 막대한 지구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강행군이었다. 그런 만큼 말의 체력을 최대한 회복시키는 식단을 구성했다.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예산 규모가 커진 만큼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행군을 계속했다. 때로는 도시의 옆에서 때로는 백작의 장원에서 숙영했다. 어떤 때는 가도 위에서 노숙하며 걸었다.
이따금 그 지역의 군주나 시의회에서 용병대 간부들을 초청하는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발데마르는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군주에게 인사를 다녔다. 그 또한 용병대의 중요한 외교 활동이었다.
그렇게 행군한 지 11일째, 본부 부대는 세베리 부대가 머물고 있는 잘츠슈타트 시에 도착했다. 발데마르는 시 외곽에 숙영지를 건설하도록 지시하고 본인은 세베리가 있는 들로 향했다.
세베리 부대 역시 본부 부대와 마찬가지로 시 근처에 병영을 건설해 거점으로 삼았다. 산이라는 천연의 방어벽을 주변에 두르고 있는 본부와 달리 탁 트인 평야에 머물기에 목책으로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든 점만 달랐다.
“발데마르 선장. 격조했네.”
“오랜만이요, 영감.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구려.”
“나야 늘 건강하지. 그대는 여전히 건강이 과한 거 같고. 어서 들어오시게.”
요새 밖에 발데마르와 지현이 도착하자 세베리가 직접 마중 나왔다. 성벽 안은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을 시작할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해 놨네. 이거 때문에 의뢰도 안 받고 대기하고 있으니 그럴 만한 일이기를 바라겠네.”
“거 편지에 미리 써 놨잖소. 월 1,200데나리오짜리 일이니 고트 금화로 바꾸면 3,000이 넘는데 그럼 병사 한 명마다 매달 거의 천 제니 가까이 벌 기회란 소리요. 그걸 500명이나.”
“허, 계산 참 빨라졌네. 내가 알던 선장이 아니라 가짜인가?”
“웬 흰소리요, 영감.”
“하긴 그 덩치를 위장할 수 있는 인간 따윈 없겠지, 클클.”
“그만 놀려먹고 병사들이나 봅시다.”
“그래야지.”
노련한 세베리가 직접 조련한 병사들이었다. 용병대 전체에서 최고 중의 최고만 모인 본부 부대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강인한 정예군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의 기도는 발데마르가 봐도 만족스러울 정도였다. 훈련도가 높고 사기가 충만하며 실전 경험도 풍부한 병사이었다. 이런 용병은 어떤 군주든 고용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바로 출발할 거다.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푹 쉬어라.”
발데마르는 길게 연설하지 않았다. 세베리 부대의 간부들은 발데마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흩어졌다.
“재무관들은 일을 잘하고 있나요?”
“총괄 재무관께서 잘 가르쳐 준 만큼 다들 훌륭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다오. 지현 재무관께서 용병대에 참 큰일을 해 주셨소.”
세베리 부대 재무관은 지현에게 교육 받은 세 사람이 전부였다. 셋 모두 아직 미숙했지만 잠재력은 충분했다.
세베리는 최선임 재무관을 이번 원정에 데리고 가기로 정했다. 본부 재무관과 함께 원정 중의 행정 처리를 집행하며 실력을 쌓도록 해 부대 재무관으로 키우려는 속셈이었다.
우연이지만 다른 재무관이 아니라 지현이 직접 나섰으니 세베리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과찬이세요. 그저 관리 효율을 조금 높인 정도에 불과한 걸요.”
“천만에. 단순히 효율을 높인 정도가 아니라 부대의 골격부터 뜯어고친 수준이라오. 장담하는데 이 체제 자체를 판다면 상인이건 군주건 눈에 불을 컬 것이오.”
“이미 꽤 많이 팔았답니다.”
“그렇다네. 헌츠 연맹, 버디어 상회, 이젠 하이틸란트 황제까지 포함되겠군.”
“오, 이런. 사실 생각 같아선 니오의 비밀 무기로 삼고 싶기도 했소. 하긴 갑자기 용병대에 막대한 이권 사업이 쏟아진 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 지현 재무관께서 움직인 결과였구려.”
“다들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지 뭐예요.”
“안 좋아할 리가 있겠소? 크건 작건 집단의 경제를 책임져 본 사람이라면 진가를 알아차렸을 대단한 운영 방식인데. 사실 우리 같은 군인보단 상인이나 군주에게 더 필요할 것이오.”
지현은 세베리의 말에 눈을 빛냈다. 모든 행정병은 동일한 교육 과정과 비슷한 성취를 거뒀다. 하지만 세베리 부대에서 보내는 장부는 항상 남달랐다. 체제 개편 전의 장부부터 그랬다.
세베리 역시 하인리히와 마찬가지로 행정관으로서 유능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발데마르보다 연륜도 있고 전에 모였을 때 지켜본 바로는 여타 지부장들에게도 존경 받는 것 같으니 총사령관의 옆에서 부대를 다독이는 역할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발데마르가 경영책임자, 지현이 재무책임자라면 세베리는 운영책임자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혹시 부대를 맡길 인재가 있다면 운영책임자로 승진해서 본부로 이적하라고 권하고 싶었다.
발데마르와 지현은 세베리에게 일단 작별하고 숙영지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평소였다면 동이 트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출발했겠지만 이번에는 좀 더 차분하게 숙영지를 정리하고 기다렸다.
세베리 부대가 원정 준비를 마치고 순차적으로 요새에서 나와 본부 부대와 합류했다. 본부 부대와 많은 부분에서 다른 모습이었다. 일단 걸어 다니는 이가 전체의 절반이었다.
그들은 갑주 일체와 무장, 식량과 수통, 침낭을 포함한 필수 장구를 모두 착용해 30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짐을 짊어지고도 묵묵히 걸었다. 승마한 이들은 그들을 포위하듯 둘러싸고 움직였고 그들의 중심에 보급 마차가 있었다.
지현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 발로 걸어야 하는 그들을 보고 걱정부터 들었다. 저렇게 움직이면 피로해서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일단 행군을 시작하자 상황이 지현의 예상과 판이하게 흘러갔다. 인간의 신체는 분명 다른 여느 동물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다. 같은 체급의 네발짐승보단 속도도 느렸고 근력도 약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도 강점은 있었다. 바로 지구력이었다.
말은 속도도 빠르고 무거운 짐도 척척 나를 수 있고 같은 시간 동안 인간보다 훨씬 먼 거리를 달렸다. 그런 만큼 자주 쉬고 많이 먹어야 했다. 한 번 쉬면 또 오래 쉬어야 했다. 그래야 신체에 무리가 안 가고 다시 뛸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사람은 꾸준히 계속해서 걸었다. 비록 속도는 느려 같은 거리를 가려면 더 오래 걸어야 했지만 그럼 그냥 더 오래 걸으면 됐다. 쉬는 시간도 말에 비해 극도로 짧았다. 그렇게 짧게 쉬고도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었다.
첫날 행군은 지현의 예상보다 이르게 경유지에 도달했다. 아무리 불의의 사고를 대비해 여유 시간을 넉넉하게 준 일정이라지만 그걸 감안해도 빨랐다.
“이 정도면 경유지를 좀 더 멀리까지로 밀어도 되겠어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때 단축해야겠어요. 산맥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준 여유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릴지 모르니까.”
“좋은 생각이오. 그럼 세베리에게도 그대로 전달하겠소.”
길만 탄탄하다면 부대를 최고 속도로 행군시킨다면 하루 30킬로미터를 훌쩍 넘게 갈 수 있었다. 기병의 진격 속도를 거의 따라잡는 것이다. 물론 보병은 악을 쓰고 걸은 결과고 기병은 약간 여유롭게 행군했을 때의 비교지만 말이다.
문제는 일레디온 가도가 이제 곧 끝난다는 것이었다. 바닥을 단단하게 다지고 포석을 깐 가도와 달리 야지를 달리게 되면 문제가 되는 건 보병이 아니었다. 오르막길이건 진흙탕이건 병사는 묵묵히 걸었다. 하지만 마차는 그럴 수 없었다.
한 번 진창에 깊이 빠지면 그걸 빼내는 데 한세월, 오르막길을 오르고 나면 녹초가 돼 퍼진 말을 달래는 데 또 한세월이었다. 간부들도 그걸 알기에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언했다.
그것도 다 감안해 경로를 짜고 여유 시간을 둔 거였는데 보병들이 열심히 해 준 덕에 시간을 절약했다. 지현은 다음 물자 집적소까지 경로를 다시 짰다.
본디 나흘 거리였으나 시간을 당겨 이틀 한나절 만에 도착했다. 그곳이 산맥에 입장하기 직전 마지막 물자 집적소였으니 일찍 도착한 만큼 계획한 것보다 하루 더 푹 쉴 수 있었다.
산길에선 기병들도 말에서 내려 걸어 올라야 했다. 안 그래도 짐이 많은데 사람까지 짊어지고 오르막을 올라가다간 말이 탈진해서 쓰러질 위험이 있었다.
산에 오르는 순서도 중요했다. 아직은 가파르지 않았지만 산맥 중심부에 도착하면 여러모로 위험한 길도 나타날 것이었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만큼 제대를 나눠 행군해야 했다. 동시에 사고를 당한 요구조자를 빠르게 구조할 수 있을 만큼의 간격을 유지해야 했다.
“후, 지옥 강 도하 훈련을 꾸준히 한 게 확실히 도움이 되긴 하네.”
산을 오르며 힐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마따나 본부 출신 병사들은 해 볼 만하다는 느낌으로 걸었다. 훈련 때와 달리 짐의 상당량을 말과 마차에 맡겼고 경사도 완만했기에 훨씬 쉬웠다.
산맥이라고는 하지만 깎아지른 듯한 절벽 옆에 난 소로를 타고 아슬아슬 움직인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완만하고 넓은 언덕을 타고 오르는 쪽에 가까웠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 언덕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기 전에 도시 하나를 통과하는데 그곳에서 안내인을 고용하기로 돼 있었다. 슈비츠 운터벨니스 칸톤의 관문 도시였다.
도시라고는 하지만 인구는 천 명 겨우 넘기는 작은 곳이었다. 따로 성벽을 쳐서 막은 게 아니라 산에 난 길을 이용하려면 무조건 그곳을 통과해야만 했기에 관문으로 기능했다.
“어서 오십시오. 연락 받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안내인은?”
“빌! 이쪽으로. 여기 이분이 바로 니오 용병대의 대장님이시고 그 옆에 분은 총괄 재무관님이시다.”
“반갑습니다. 안내인 빌헬름입니다.”
“니오 용병대 재무관 지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기까지 올라오시느라 피곤한 건 알지만 시내에는 천 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할 공간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벨니스 호수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다시 출발하지.”
니오 용병대가 관문 도시를 통과하는 내내 시민들은 도로변으로 나와 그들을 구경했다. 항상 상인, 귀족, 순례자가 지나가는 관문 도시였지만 이런 대규모 군대가 움직이는 건 흔치 않은 구경거리였다.
니오 용병대가 도시를 완전히 통과하는 데에만 반나절이 필요했다. 길이 좁고 사람이 많은 만큼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슈비츠는 역시 경관이 멋지군.”
“하하. 류코스 산맥이야 말로 대륙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습죠.”
류코스의 뜻은 고대어로 “흰색”이라고 하였다.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롭게 선 산봉우리를 새하얀 눈이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여름의 더위도 만년설을 녹일 순 없는지 봉우리마다 새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산맥의 골과 마루가 하얗게 이어지는 그 모습은 과연 절경이었다.
행군 중에도 고개를 들어 먼 봉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있자면 가슴에 새 바람이 들어와 힘을 불어넣었다. 멀리는 높이 솟은 장엄한 마루가 보이고 가까이는 새파란 풀과 나무가 길의 양옆에서 싱그러운 향기를 뿜었다.
벨니스 호수에 도착한 건 저녁 무렵에서였다. 다들 지치고 힘들어 당장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호숫가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잡을 순 없었다. 빌헬름의 안내에 따라 야영이 가능한 장소까지 마저 걸어야 했다.
호수는 굉장히 넓었다. 길이는 10킬로미터가 넘었고 폭도 족히 수 킬로미터에 이르렀다. 호수의 동쪽과 서쪽 끝에 각각 마을이 발달했는데 담수는 물론 어획으로 식량을 수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숙영지를 건설하고 수통을 채워라. 오늘은 이곳에서 쉰다.”
“예! 대장님!”
아직 부대가 모두 도착한 게 아니었다. 먼저 온 발데마르와 본대가 숙영지를 건설하고 있자니 후속 부대가 순차로 도착했다.
“안내인. 여기서부터 산을 통과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오늘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열흘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급하게 움직이면 여드레까진 줄일 수 있어 보입니다만.”
“역시 산맥을 통과하는 게 가장 어렵군.”
“요금은 또 얼마나 비싼데요. 게다가 무조건 데나리오 금화로만 받다니.”
지현이 투덜거렸다. 지현의 말마따나 관문 통행세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평소엔 면세 혜택을 받던 니오 용병대다 보니 더 크게 느꼈다.
“산맥을 통과하면 어디로 나가게 되지요?”
“이쪽 도로는 페반티 공작령으로 이어집니다. 파빌리노 공국이지요.”
“파빌리노 공국은 루발라 공화국 바로 북쪽에 닿아 있는 나라요. 거기서부터 루발라 공국까지는 일레디온 제국의 가도가 그대로 남아 있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지. 대충 보병 행군으로 엿새 거리 정도 된다고 보면 된다오.”
“산을 나가서 다시 엿새. 진짜 꼬박 한 달이 걸리네요.”
“뭐 사람도 짐도 많으니 말이지. 그사이 루발라에 큰 변고가 없으면 좋겠구려.”
“두 형제가 공화국군을 한차례 격퇴했다고는 하나 공화국을 직접 침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도망칠 수도 없으니 아마 아직까지 대치하고 있을 겁니다.”
“걱정이 되는 부분은 외교로 해결되는 경우입니다.”
네로가 합당한 추론을 내놓았다. 그런 네로의 의견에 하인리히가 덧붙였다.
“공화국군은 이미 한 번 패배를 겪어 체면이 떨어진 상황이고 추가로 병력을 투입하자니 확실하게 증원하지 않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인력과 자원이 걱정될 겁니다. 그렇다면 두 형제를 사면한다는 조건으로 전쟁을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는 안 될 것입니다.”
하인리히의 추측에 파올로가 고개를 저었다. 파올로는 콘타가 보낸 편지를 다시금 꺼내 보였다.
“공화국은 버디어 가문에 통제를 명령했습니다. 당장은 버디어 가문이 이 전쟁의 전권을 지닌 셈입니다.”
“같은 가문인데 그렇다면 더 위험한 것 아닙니까?”
“아니요. 이미 두 형제의 만행으로 신용이 깎인 상황입니다. 우리 손으로 둘을 막지 못하면 버디어 가문이 지닌 대륙 남부의 영향력이 축소될 테지요. 콤파니아도 그건 막아야 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늦을수록 여론이 나빠질 테니 둘이 만들어 놓은 반란의 기반을 반드시 주저앉혀야만 하겠지.”
“이해했습니다.”
간부들은 짧은 의견 교환을 마치고 각자 부대로 흩어졌다. 내일은 다시 힘든 행군을 반복해야 하니 푹 쉬어 두어야 했다.
지현은 이쪽 세상에 올 때 신고 있던 부츠를 아직 갖고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현의 부츠는 이쪽 세계의 신발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옷은 갈아입어도 신발만큼은 바꾸지 않은 이유였다.
반발력도 적고 발을 편안하게 감싸 걸을 때 무리가 없어 오래 걸어도 발과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만약 하이힐이나 구두 따위를 신고 왔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행군에서 신발은 중대한 문제였다. 대다수의 병사들은 역사가 검증한 가죽 샌들을 신었고 몇몇 간부들은 깔창에 부드러운 가죽을 덧대고 발등과 앞코를 철골로 보강하는 등의 수를 썼다. 발데마르를 비롯해 소수의 사람들은 장화를 신고 필요에 따라 금속 각반을 덧입었다. 승마 시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장거리 행군에선 잘 걷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지휘관들은 바로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부하들의 발에 문제는 없는지 점검하고 나서야 쉴 수 있었다.
특히 하인리히와 세베리는 자기 전에 발바닥에 이상은 없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리하르트 같이 짓궂은 병사들은 발바닥의 단단한 굳은살로 박수를 치며 다른 이들을 웃겼다.
그렇게 산에서 첫 하룻밤이 지났다. 병사들은 새벽 호숫가의 안개 속에서 깨어나 천막에 앉은 이슬을 털어 냈다. 행군 중만 아니라면 경탄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경치였다.
“이제부터는 강을 따라 이동합니다. 룬달까진 지금처럼 완만한 경사지지만 룬달에서 알트슈타트까지는 굽이진 급경사가 몇 있습니다. 길의 폭도 좁아 경사로를 올라갈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됩니다.”
“룬달이면 오늘 숙영지였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하루 푹 쉬고 순서대로 오르면 되겠군.”
발데마르는 출발 준비를 지시하고 다시 간부들을 소집했다. 당초 계획한 대로 움직일 수 있는지 휘하 병력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천 명이나 되니 관리하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문제가 생긴 병사가 없었다. 발데마르는 다시 선두를 맡았고 이후 두 개 백부대씩 짝을 지어 행군을 시작했다.
강을 따라 상류로 오르는 길은 폭이 좁았지만 길옆으로 난 완만한 언덕까지 이용한다면 부대가 넓게 포진해 움직이는 것도 가능했다.
강의 바로 오른편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왼편으로는 완만한 구릉지가 백여 미터 존재하고 그 너머부터 30도가 넘는 급경사가 시작됐다.
“어느 길로 들어서건 경치는 대단하네요.”
“과연 그 말씀대로요. 하지만 앞으로 마주할 오르막이 걱정되는구려.”
“사람이 너무 많으니 말이죠.”
룬달까지 가는 길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산적은 고사하고 야생 동물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산적이 영업하기에는 지세가 너무 험했다. 협곡의 소로가 아니고서야 빠져나갈 길도 없어 어쩌다 산적이 나타나도 슈비츠 군대에게 토벌당할 게 뻔했다. 더군다나 천 명 넘는 인간이 뭉쳐서 냄새를 풍기는데 동물이 접근할 리도 없었다.
“과연, 이런 길이라면 힘들 수밖에 없지.”
룬달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룬달은 인구가 100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구릉지에서 양을 치고 작은 밭을 일구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필요한 건 도로를 이용하는 행상인에게 구하는 소박한 삶이었다. 도로 중간에 있다고 해서 보급 기지나 중계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땅이 넓지도 않고 관문을 설치하기에는 애매한 곳이었기에 그런 것이었다.
니오 용병대는 양을 방목하는 너른 풀밭에 숙영지를 건설했다. 발데마르는 그사이 강변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봤다.
자세히 보니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빌헬름이 안내하는 길이 오른쪽에 있고 지금까지 진행하던 방향으로 작은 개울과 함께 길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며 봤던 것보다 훨씬 좁은 협곡이었다.
“빌헬름. 저쪽 길은 이용할 수 없는 건가? 방위를 보면 우리가 가려는 길은 서쪽이고 이 길은 남쪽인데. 이 길을 가면 질러 갈 수 있지 않을까?”
“이쪽 길은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길의 폭이 좁아 마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수 있고 그나마도 비페르테에서부터는 끊어집니다. 거기서부터는 협곡이 아닌 산을 곧바로 타고 올라야 하는데 이렇게 대인원이 지나갈 수는 없습니다.”
“저쪽 길도 만만찮게 좁아 보이는데.”
빌헬름이 안내하는 길도 산을 타고 올라야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길은 급경사의 좌우를 지그재그로 왕복해 길의 경사를 억지로 낮춰 올라가는 식이었다.
“저기는 최소한 길이라도 있잖습니까. 굽이굽이 올라야 하지만 일단 오르고 나면 다시 골짜기의 길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흐음, 그런가? 현지인인 자네가 잘 알겠지. 알겠네.”
“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푹 쉬게.”
발데마르 이외에 다른 용병대원들도 굽이진 오르막길을 보고 탄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일은 저 길을 올라야 한다니 막막하기만 했다.
지그재그로 올라 경사를 낮췄다지만 여전히 길 자체의 경사가 10도 가까이 되는 급경사였다. 저런 길을 오르려면 체력이 보통 많이 드는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낙상 사고나 낙석에 의한 사고도 걱정이었다.
마차 한 대마다 말이 두 마리씩 더 붙었다. 마차에 실은 짐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람이 직접 운반하도록 고쳤다.
힘들어도 별수 없었다. 사람은 힘들면 힘들다고 말이라도 하지만 말 못하는 짐승은 힘들어하다 그대로 픽 고꾸라질 수도 있으니까.
경사로를 오르는 첫 타자는 발데마르였다. 이번만큼은 지현도 뒤로 순번이 밀렸다. 가장 힘이 좋은 사람들이 먼저 올라가야 정체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최상의 컨디션인 사람들을 모조리 먼저 올려 보냈다간 뒤에서 사람들을 받쳐 줄 이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힐다가 뒤에 남았다.
“이 정도로 힘들면 니오 용병대라고 말하고 다닐 수 있겠냐!”
“없습니다!”
“그렇지! 그런 패기다! 순번이 뒤라고 퍼져 있지 말고 몸이라도 풀어! 쉬다가 갑자기 힘쓰려면 다치기 쉽다!”
“예! 힐다 대장님!”
선발대의 뒤를 따라 용병들이 줄을 이어 산을 올랐다. 굉장한 광경이었다. 경사로가 사람과 마차로 가득 찼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산을 오르는데 사고는 고사하고 지쳐서 뒤쳐진 사람 하나 나오지 않았다. 관리가 잘된 덕도 있지만 역시 사람 하나하나가 강인한 덕이 컸다.
지현은 용병대의 꽁무니에 붙어 올랐다. 지금까지 오른 길과 달리 급경사를 한참이나 오르려니 상당히 힘들었다.
체력이 제법 강해졌는데도 경사의 3분지 2 시점을 통과했을 때는 점점 앞사람과 거리가 멀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지는 것이다.
‘으윽, 안 되는데…….’
대열의 마지막이기에 자신이 느려진다고 전체 행군에 지장이 생기진 않았지만 이러다 일행을 놓칠까 걱정됐다. 그때 지현의 등을 두 손이 받쳤다.
“아, 에이자 씨, 폴카 씨.”
“지치신 것 같은데 잠시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아뇨, 저기…….”
“괜찮습니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히.”
“그렇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지현 재무관님의 직속 보좌는 저희 둘이니까요.”
“고마워요.”
지현은 길의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 다리를 경사 아래쪽으로 두고 앉았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뿐인데 벌써 다리가 퉁퉁 부은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으로 30분은 더 올라가야 했다.
‘후우, 진짜 이 사람들 튼튼하긴 튼튼하구나.’
새삼스럽지만 니오 용병대는 역시 강골이었다. 지현은 짐도 없이 좋은 신발을 신고 편하게 올랐는데도 지쳐 멈췄지만 보좌인 두 사람은 갑주를 입고 허리와 배낭에 짐을 짊어졌으면서도 지현보다 가볍고 빠르게 움직였다.
10여 분을 쉰 지현은 다시 힘을 내 일어섰다. 더 쉬었다가는 오히려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고생 끝에 간신히 경사로 끝에 오르니 발데마르가 힐다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발데마르 씨? 선두는 어쩌고요?”
“휴식 중이오. 이제 막 출발하겠구려. 세베리에게 맡겼으니 그쪽은 걱정 없소. 그보다 지현 양이 낙오됐다고 들어 깜짝 놀랐소. 몸은 괜찮으시오?”
“잠깐 쉬느라 뒤쳐진 것뿐이에요. 이젠 괜찮아요.”
“괜찮을 턱이 있나. 에이자, 폴카. 수고했다. 힐다, 요인 호위에 특화된 녀석으로 열 명 뽑아서 지현 양에게 붙여라.”
“알겠습니다.”
갈 길이 멀다 보니 휴식은 짧았다. 발데마르는 이것저것 조치를 취하고 바로 부대를 지휘하러 떠났다. 후미 부대를 지휘하는 힐다 역시 호위대만 남기고 먼저 출발했다.
호위대에는 힐다가 엄선한 열 사람을 비롯해 바우그와 네 마리 말이 함께했다. 여차할 때는 짐을 모조리 버리고 지현을 바우그에 태워 도망치라는 의미였다.
“발데마르 씨도 참 과보호라니까.”
“지현 재무관님 정도 되면 더 과보호해야 합니다.”
“그럴 리가요.”
니오 용병대의 요인이라고 하면 거의 모두 스스로 중무장한 군인이었다. 추가로 호위가 필요한 건 지현과 도마르, 세 회계사 정도뿐이니 다른 집단의 요인보다 호위 정도가 높았다.
“그나저나 회계사 분들은 잘도 따라가네요. 네로 씨는 나이도 있는데.”
“앞쪽 부대와 함께하고 있어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과거에 배를 몬 적도 있다 하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아, 배……. 이해가 가는 이유네요.”
지현이 본 선원들은 하나같이 억세고 강인한 사람들이었다. 군인에게 요구되는 강함과는 방향이 다르지만 체력에 자신이 있다는 건 이해했다.
“단지 그 막내, 파올로 씨였던가. 그 사람은 하마터면 낙오할 뻔해 주변에서 보조해 준다고 합니다.”
“그건 그거대로 의외……가 아닐지도. 파올로 씨, 완전히 사무실 타입이었으니까요.”
‘이쪽 세계에서 실무자 딱지를 붙이고 살려면 체력이 필수 요건인가? 법관 씨도 은근히 팔뚝에 근육이 있고.’
다른 사람들보다 쉬엄쉬엄 걸으며 지현은 체력을 온존한 채 부대의 뒤를 따라갔다. 빌헬름의 말대로 일단 경사를 오르고 나자 비교적 평탄하고 굽이지지도 않은 골짜기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인원이 적고 가벼운 만큼 일단 지현이 체력을 회복하고 나서부터는 부대를 빠르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선두는 산중 도시 인근의 공터에 도착했다. 거대한 빙식호의 남쪽에 자리한 도시였다.
도시 인근은 시원했다. 빌헬름은 슈비츠에 연중 이런 온도가 유지되는 도시가 많다고 했다. 기후도 온화하여 농사만 잘되면 사람 살기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딱 하나 단점이 있다면 곰이 많다는 겁니다.”
“곰이?”
“예. 슈비츠 어느 도시가 안 그러겠냐만, 산에 지은 도시들은 대체로 곰과 영역 다툼 끝에 지은 것들입니다. 오죽하면 도시 이름 중에 베르네, 베른, 운터베른, 위버베른, 베르예거 같은 것도 있을 지경입니다.”
“허참. 곰이라니. 사람이 많이 상했겠군.”
“정착 초기에도 그랬지만 최근에 새로 지어진 도시들도 곰을 몰아내느라 고생이 많습니다.”
“흠흠, 혹시 사상자를 많이 내는 곰이 있다면 인근의 니오 용병대에 문의해 보게. 우리는 곰 사냥에 특화된 전투 부대도 다수 보유하고 있으니.”
“하하. 니오도 어지간히 곰이 많은 모양입니다.”
“말할 것도 없지. 그 덩치, 그 체중. 어지간히 단련된 사냥꾼이나 전사한테도 어려운 존재야. 그만큼 강인하기 때문에 숭배하기도 하지.”
“이해할 것 같습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 도시가 보급지로군.”
“예. 베르예거 시입니다. 슈비츠 중부의 자유시이자 관문도시입니다. 사실 이름만 자유시고 아직도 바이젠부르크 가문의 영토나 마찬가지지만요.”
“바이젠부르크 가문인가.”
“그래도 최근에는 바이젠부르크 가문도 속깨나 앓고 있을 겁니다.”
“왜 그런가?”
“휘하 관문도시들이 납세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각 시와 칸톤의 지역 귀족들을 필두로 파상적인 정치 공세도 퍼붓고 있으니 그 처리가 귀찮을 겁니다.”
“길잡이가 자세히도 알고 있군.”
“길을 안내하느라 이 칸톤 저 칸톤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면 저도 모르게 듣는 게 많은 덕이지요.”
“과연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그렇군.”
발데마르는 심후한 눈길로 빌헬름을 바라보았다. 빌헬름은 방긋 웃으며 발데마르의 눈을 피했다.
“그럼 앞으로도 길잡이 일을 열심히 하게. 자네에게 들인 돈이 만만찮으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날이 바뀌고 용병대는 다시 골짜기를 걸었다. 베르예거까지 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돼 썩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경사는 완만했고 길도 그리 좁은 편은 아니었기에 전날에 비해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완만한 경사 덕에 지현도 선두에 다시 합류했다. 지현의 호위 부대는 그대로 유지됐지만 말이다.
“이보게, 길잡이.”
“예, 대장님.”
“어제 했던 얘기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군.”
“무슨 얘기 말씀이십니까?”
“슈비츠가 바이젠부르크 가문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예. 제가 듣기론 그랬습니다.”
“바이젠부르크 가문이 가만히 있었나? 세금 청부인이 그걸 보고만 있을 리가 없는데.”
“하하. 더군다나 관문도시의 대부분은 자유시입니다. 원래대로라면 바이젠부르크에게 납세의 의무 따윈 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처음 안 사실이군. 그럼 어떻게 세금을 요구하는 거지?”
“바이젠부르크에선 선황제 시절 슈비츠를 바이젠부르크 가문에 불하했으니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슈비츠에선 그 전 황제 시절에 특허장을 발부 받았으니 우리는 자유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복잡하군.”
‘이런 건 도마르에게 물어보면 잘 알 텐데.’
“군사 보복은 없는 건가?”
“군대를 움직일 명분이 없잖습니까? 아직은 정치 공세 단계니 말입니다.”
“과연. 한창 혼란스러운 시기면 몰라도 나라가 안정되고 있는데 먼저 군대를 움직이는 건 부담이 크겠군.”
“슈비츠가 먼저 군사 행동을 보인다면 모를까 바이젠부르크도 엘라이히 내부를 정리하느라 바쁜데 황제도 눈여겨보고 있는 슈비츠로 먼저 군대를 파견할 수야 있겠습니까. 하하.”
발데마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빌헬름을 다시 보았다. 역시 길잡이가 이 도시 저 도시 오가며 귀동냥으로 들은 수준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심도 깊게 배운 학자나 정치가와 같았다.
“그래. 이제 확실히 알겠군.”
“슈비츠와 바이젠부르크의 관계 말씀이십니까?”
“자네, 루카 경과 무슨 관계인가?”
빌헬름을 말을 뚝 그치더니 싱글싱글 웃었다. 발데마르는 대답하지 않는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네. 길안내나 잘하게나.”
“물론입니다. 그리고 베르예거부터는 안내인이 바뀔 겁니다.”
“처음 듣는데?”
“죄송합니다. 제 활동 반경이 그리 넓지 않아서……. 물론 추가 요금은 없습니다. 처음 주신 돈이 파빌리노까지 안내하는 비용이었으니까요.”
“베르예거부터 안내하는 사람은 누군가?”
“빌헬름입니다.”
“자네도 빌헬름이지 않은가?”
“예. 흔한 이름이지요?”
“흔한 이름이라. 그렇군. 흔한 이름이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발데마르는 선두를 하인리히에게 맡기고 빌헬름과 떨어져 지현에게로 갔다.
“그럼 빌헬름이란 이름도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크겠네요.”
“역시 나랑 같은 생각이시구려.”
“토너먼트에서 루카 씨의 제안을 받은 게 벌써 반 년 전이니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던 게 이상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 점이 더 이상하다오. 연락을 할 거라면 진즉에 했겠지 굳이 우리가 여길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겠소?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지. 우연과 필연의 혼재일지도 모르고. 모르는 게 너무 많구려. 미안하오. 조언이 필요했던 터라.”
“저도 좀 생각해 볼게요. 일단 그 빌헬름이라는 길잡이는 어디 있지요?”
“선두에서 길 안내 중이오. 같이 가시겠소?”
“네.”
지현도 합류해서 이것저것 질문했지만 대체로 대답은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대답할 수 없습니다.”로 귀결됐다. 발데마르는 이럴 거면 뭐 하러 운을 뗐느냐고 물었지만 빌헬름은 방긋방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부대는 베르예거에 들어섰다. 빌헬름은 중부와 남부를 잇는 최대 규모의 관문도시라고 자랑했다. 과연 그의 말마따나 베르예거는 거대한 도시였다.
우선 다른 도시나 마을처럼 호숫가나 골짜기의 비교적 평탄한 좁은 면에 지어진 게 아니라 제대로 산자락과 산자락이 마주치는 분지에 형성된 곳이라 면적이 넓었다. 좌우 사면을 타고 내려온 강이 합류하여 담수도 문제가 없었다.
면적이 넓으니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기후가 온화하니 어떤 동물을 목축해도 잘 자랐다. 니오 용병대가 타고 온 길과 서쪽의 르몽센으로부터 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이라 관문 수입도 상당했다.
“그럼 빌헬름 씨를 불러오겠습니다.”
길잡이 빌헬름이 교대할 사람을 부르러 떠났다. 그사이 니오 용병대는 도시 남쪽의 휴경지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 오는 이에게 뭔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예, 대장? 무슨 말씀이심까?”
“아직은 나도 모르겠다.”
빌헤름이 교대할 사람을 부르러 떠났다. 그사이 니오 용병대는 도시 남쪽의 휴경지에 자리를 잡았다.
“발데마르 대장님. 이쪽이 앞으로 안내를 맡을 빌헬름 씨입니다.”
“반갑습니다. 길잡이 빌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니오 용병대 대장 발데마르네.”
새로 온 빌헬름은 중년의 사내였다. 눈 밑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턱수염에는 흰색이 섞여 있었다.
“저는 그럼 이만.”
젊은 빌헬름이 떠났다. 길잡이 빌은 니오 용병대와 함께 숙영지에서 머물기로 했다. 발데마르는 자신의 옆 천막을 그에게 내어 주었다.
늦은 밤, 병사들의 건강 상태를 점검한 간부들이 발데마르의 천막으로 모였다. 그곳에는 새로 합류한 길잡이 빌도 함께했다.
“다 모인 것 같으니 이야기를 나눠 볼까.”
“자리를 마련해 주신 발데마르 대장님께 우선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슈비츠 자유 서약 동맹의 빌헬름입니다.”
“본명인가?”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저는 빌헬름으로 활동하고 빌헬름으로 죽습니다.”
“알겠네.”
길잡이 빌은 서약 동맹의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바이젠부르크 가문은 군대를 움직이는 대신 슈비츠의 자유시들을 고발했고 그로 인해 예상했던 군사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니오 용병대를 호출하지 않은 건 이런 배경에서였다. 법정 분규는 물론 변호사를 선임하고 황제와 여러 귀족들에게 자신의 억울함과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도 포함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리 보면 이리 해석되고 저리 보면 저리 해석되는 법은 강력한 명분이 되기 어려웠다. 황제도 제국의회도 해석이 자유로운 법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했다.
그렇기에 슈비츠는 여러 선제후 가문에 물밑으로 접촉해 로비 활동을 벌이는 데 집중했다. 여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아직 전비까지 손을 대지는 않았어도 꽤나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다.
“그럼 의뢰를 철회할 건가요?”
“아닙니다. 그 답변이 제가 여기에 온 이유입니다.”
“이해가 안 가는군.”
“동맹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니오 용병대가 류코스 산맥을 넘으러 온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슈비첸 일파는 이것이 천신의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신앙심의 발로로 보이지는 않았다. 중요한 건 동맹의 다른 파벌을 설득할 재료였다. 적어도 지현은 그렇게 해석했다.
슈비첸의 지도자들은 원래부터 주전파였거나 직접 전쟁을 벌이지는 않아도 항상 전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맹의 다른 주축은 하이틸란트의 귀족을 끌어들여 싸움 없이 일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면?
슈비첸은 동맹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와중에 니오 용병대가 슈비츠를 통과한다는 소식을 듣고 첩보원을 급파한 것이다.
“실제로 바이젠부르크 가문과 동맹 사이의 긴장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당장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도 군대가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용병대의 뒤를 따라온 행상인들을 보셨습니까?”
“그래. 수가 많더군. 역시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라 그런지.”
“예. 매년, 매월, 매일 많은 이들이 지나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 상인들 중 몇몇은 바이젠부르크 가문의 간자입니다.”
“확신하는 이유가 있는가?”
“저희도 살기 위해선 알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말은 못 해도 근거는 있다는 투로군.”
“예.”
“그래서 어쩌고 싶은 건가? 그게 제일 중요한 일인데.”
“동맹은 설득했나요?”
“예.”
“거참, 눈을 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연락을 주고받은 거지?”
“그것 또한 비밀입니다. 서약 동맹의 비법이지요.”
“됐네. 어차피 도시 인근에 전서구라도 양식하다 우리가 숙영하는 사이 보냈겠지.”
길잡이 빌은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럼 결론이 어떻게 되나? 우릴 고용하겠다고?”
“그렇습니다. 루발라 공화국에서 새로운 간자가 찾아뵐 것입니다. 그가 예치금으로 1천 데나리오를 드릴 것입니다.”
“우린 은행이 아닌데.”
“언제 의뢰할지도 모르는데 우리 의뢰를 바이젠부르크 가문보다 우선해 달라는 요청에 대가를 드리는 겁니다.”
“뭐, 알겠네. 이 이야기가 뭐 그리 어려운 거라고…….”
“엘라이히 대공은 무서운 자입니다. 어디를 가나 그의 눈과 귀가 있고 항상 우리 목덜미에는 그의 칼이 닿아 있습니다.”
길잡이 빌이 가라앉는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발데마르는 그의 표정을 보고 턱을 쓰다듬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이렇게 우군을 모으려고 동분서주하다 사로잡혀 죽은 동료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적들이 그냥 죽였으면 또 모를까 정보를 얻기 위해 모진 고문을 가했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 이해했네. 우리야 용병이니 의뢰를 받으면 늘 최선을 다하지. 단지 우리가 한창 싸우고 있을 때 부르지만 말게. 우리라고 상시 대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물론입니다.”
“파빌리노 공국에 닿을 때까지는 쭉 내 옆에 붙어 있게.”
“배려에 감사합니다.”
간부들이 흩어졌다. 똑같이 천 명을 고용한 큰 전쟁이었지만 당면한 적은 일개 상인 가문의 반역자들이었고 바이젠부르크 가문은 황제의 피선거권을 지닌 가문이었다. 괜스레 소름이 돋고 솜털이 곤두설 만큼 강력한 적인 것이다.
당장 내일 싸울 적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맞붙어야 할 적인 건 분명했다. 용병대는 벌써부터 그때를 기대했다.
* * *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수고했네.”
산을 내려와 벌판을 걷던 용병대가 넓고 단단한 가도에 도착했다. 그 유명한 제국 도로였다.
땅을 깊이 파고 바닥을 고르고 단단하게 다진 뒤 자갈과 점토를 깔아 완전히 평탄하게 만들고 그 위에 포석을 빈틈없이 끼워 맞춘 단단하고 평평한 도로였다.
아무리 무거운 마차가 올라가도 땅이 움푹 꺼지거나 진창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도로 좌우로는 배수로까지 있어 쾌적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가도에 닿는 순간까지가 길잡이 빌의 역할이었다. 그는 거기서 용병대와 작별했다. 부대는 도로 위로 정렬했다.
“와우, 하이틸란트에 있던 도로랑은 차원이 다른데.”
도로 위에 서서 툭툭 뛰어 본 힐다가 경탄했다. 마차를 올려도 꿈쩍없고 수백 명의 사람이 올라서도 괜찮은 도로는 처음이었다.
하이틸란트도 남서부 일부와 엘라이히 공국에는 이러한 제국 도로가 나 있지만 북부에는 하이틸란트 영주들이 만든 소금길 정도가 그나마 쓸 만한 도로였다. 본부 인원들 중에서 이런 반듯한 도로를 경험한 건 발데마르를 비롯해 소수의 인원뿐이었다.
제국 도로를 이용하니 행군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일행은 제국 도로를 타고 얼마 되지 않아 첫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본디 용병대는 마을을 그대로 통과할 셈이었으나 마을 입구에 있던 이가 그런 니오 용병대를 막아섰다. 그는 스스로를 버디어의 사자라고 소개했다.
“에밀로! 자네가 왜 여기에 있나?”
“용병대가 류코스를 넘는다 하여 기다렸지요. 류코스를 넘는 경로는 많지 않으니까.”
“아니 언제 올 줄 알고…….”
“언제 올 줄을 몰라 사흘 전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카르도가 에밀로를 단박에 알아봤다. 인사를 나눈 리카르도는 곧장 에밀로를 발데마르에게 소개했다. 같은 버디어 가문의 방계라 하였다. 촌수로 따지면 네로와 리카르도가 에밀로의 당숙이었다.
에밀로는 니오 용병대를 기다리느라 마을을 통째로 전세 냈는지 마을에서 나온 사람들은 주민이 아니라 그의 가솔과 하인, 그를 호위하는 용병들이었다.
“제 호위병 중에는 당시 공화국군과 함께 산타 빌리오를 공격했던 이가 있습니다. 루발라까지 가시는 길에 그에게서 정보를 들으시지요. 저도 제가 얻은 정보를 나누겠습니다.”
“고맙군. 안 그래도 루발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그거였는데.”
에밀로와 그의 용병은 자신이 보고 들은 일, 자본과 인력을 투입해 알아낸 정보 등을 풀었다. 발데마르는 세심한 것 하나하나까지 캐물었다. 싸우기 전에 적을 아는 이는 잘 싸우는 것 이상으로 중요했다.
당면한 적은 일개 범죄자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한 번 정규군을 격퇴한 이들이었다. 모의전도 아닌 실전인 만큼 철저한 조사가 필수였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공화국군을 격퇴한 데에는 신무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무쇠 솥’이라. 일종의 별명인가?”
“예. 그럴 것으로 추측합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살과 돌덩이를 던지는 무기라. 팔린토논과 같은 대형 발리스타의 일종인가?”
“당장은 그렇게 추측합니다. 문제는 정작 적진에서 그런 공성병기를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크기인 만큼 마땅히 관측됐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들이 입수했다면 우리도 입수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부분이 문제입니다. 안 그래도 콘타 씨가 동방 무역로를 통해 해당 무기와 같은 무기를 입수해 보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호오? 왜 그런가?”
“칸국으로부터 밀수한 물건이었습니다. 술탄국과 칸국에 접촉한 덕에 그 무기의 별명이 무쇠 솥이란 것까진 알아냈습니다만……. 더 자세한 정보를 얻고자 외교관과 선단을 함께 보냈으나 아직은 요원합니다.”
“그렇군. 대형 발리스타의 위력을 지닌 소형 병기라……. 공화국군이 패할 때의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묘사해 보아라.”
“예!”
참전 용병은 당시 주력군이 아닌 보조군에서 복무했다. 주력군의 사령관은 르몽센의 나이아인 용병대장 앙투안이었다. 그는 기창 돌진의 달인이었고 중무장한 기병대의 돌파력으로 적을 분쇄하는 걸 장기로 삼는 장군이었다.
그의 기병대는 철판으로 보강한 갑주를 착용했고 평범한 기창이 아닌 돌진용 기창을 들었다. 방패 또한 하체까지 가려 주는 눈물 모양 방패이 아니라 크기를 줄인 대신 더 두꺼운 방패를 들어 돌파력을 더욱 키웠다.
이번에도 그는 자랑하는 중기병 부대를 이끌고 당당히 적진을 향했다. 적들은 성 안에서 농성하지 않고 성으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은 채 앙투안의 기병대를 맞이했다.
보조군이 쇠뇌와 장궁으로 적들을 사격하는 사이 앙투안은 돌진하기 최적의 장소를 찾았다. 적들도 앙투안의 명성을 익히 들었는지 거마창을 세우는 등 대 기병 대책을 세워 놓았다.
앙투안은 적의 거마창이 부실한 지역을 찾아냈고 즉시 그쪽으로 돌격했다. 멀리서 쏘는 화살 따위는 방패에 박히지도 않고 튕겨 나갈 뿐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참전 용병은 앙투안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앙투안이 적과 거리를 100미터 안팎까지 좁히고 돌진을 위해 가속을 시작한 시점에서 참전 용사는 천둥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대재앙이 일어났다.
“천둥소리라고?”
“예. 똑똑히 들었습니다. 앙투안 장군의 기병대가 픽픽 쓰러지는 그 순간 천둥이 쳤습니다.”
“날이 흐리거나 뇌운이 있었던 건 아니고?”
“전혀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우레에 우리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적들이 악마에게 혼을 팔고 사악한 주술을 부린다고 말입니다. 지금에야 그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앙투안 장군은?”
“다행히 살아남아 후퇴하셨습니다. 하지만 기병대의 1할 가까이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무시무시한 피해로군.”
적진에서 날아드는 화살은 방패와 갑옷을 종잇장처럼 꿰뚫었다. 쏟아지는 석탄은 마갑을 뚫고 말의 머리통을 부숴 버렸다.
어떠한 공성 병기도 이토록 위력적일 수는 없었다. 하늘까지 치솟는 대형 투석기나 발리스타라면 가능하겠지만 적진 어디에도 그런 존재는 없었다.
적진을 가리는 자욱한 안개와 천둥소리가 병사들의 사기를 꺾었다. 본디 기병 돌격은 축차 투입하는 것이 기본 전술이기에 앙투안이 후퇴하더라도 대기 중이던 후속 부대를 출격하면 됐다.
하지만 앙투안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앞을 달리던 듬직한 부하이자 전우가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시체가 되어 낙마하는 걸 목격한 터라 남은 부하들도 그런 사지에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후퇴한 앙투안은 공화국 정부에 정보를 요청했다. 신무기의 소식을 접한 그는 그 사실을 알려 부대의 사기를 다시 끌어올리고 복수심으로 기강을 다잡았다.
남은 건 복수의 무대였다. 당장이라도 병사를 모아 다시 출격하고 싶지만 작전권이 버디어 가문에게 넘어간 터라 루발라 시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나저나 그들의 거점은 고작 성 하나와 인근 장원 정도인데 공화국은 왜 포위해서 고사시키지 않은 것이오?”
“포위를 할 만큼의 인력을 투사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우선 산타 빌리오는 공화국이 아니라 대주교령에 위치해 있어서 작전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것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러고 보니 총대주교가 납치당했다던가.”
“그 사건 때문에 대주교령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까다로워졌습니다. 성을 포위할 정도면 최소한 수천, 수만 명이 필요한데 대주교령이 그걸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자국 영토에서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데 대주교령에서 자체 대처는 안 하는 건가?”
“납치당한 총대주교를 구출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보니 일개 범죄자 무리한테 힘을 쓴다는 건 어렵다는 태도입니다.”
“알아서 처리하되 영토에 많은 군대를 몰고 와선 안 된다는 건가. 모순되지만 그들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을지도…….”
“사실 총대주교도 없겠다 인근 용병을 깡그리 고용해서 몰고 간다면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었습니다. 비판이야 받겠지만 사건만 해결하고 빠르게 철수하면 그들로서도 적당히 화내는 척하다 끝낼 테니 말입니다.”
“그럼 왜 그러지 않았나?”
“근처에 용병이 그리 많이 남질 않았습니다.”
“그것도 총대주교 납치 사건 때문에?”
“예. 앙투안 경도 정말 간신히 고용했습니다.”
누탈로에 산재한 공화국과 공국, 종교국은 일제히 르몽센을 규탄하는 한편 무력시위를 위해 용병을 모았다. 그들은 접경 지역이나 항구에 모여 언제든 출병할 준비를 갖췄다. 무력시위인 것이다.
“공화국 방위를 위한 군대도 남겨 놔야 하다 보니 가용한 병력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장 부를 수 있는 최강의 군대인 앙투안 기병대를 불렀습니다만.”
“잘되지 않았지. 그래서 멀리까지 와 우릴 찾은 거고.”
“그렇습니다.”
“확실하게 처리해야겠군.”
발데마르는 한숨을 쉬었다. 정체를 모르는 신무기가 마음에 걸렸다. 작은 덩치로 대형 공성병기의 위력을 내는 무기라니, 일레디온 제국에서 복무하던 시절에도 본 적이 없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 더 많은 무기도.’
발데마르는 공화국에 도착하는 즉시 공방부터 들르기로 정했다. 지금 쓰고 있는 갑주와 방패를 더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보조군이 아닌 주력군의 증언도 필요했다. 실제로 그 무기의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어떤 식으로 아군을 공격했는지, 약점은 없는지. 모든 걸 파악해야 했다.
밀수한 무기의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아야 했다. 그런 무기로 연속 사격이 가능하다면 니오 용병대라도 전투가 힘겨울 것이었다.
용병대는 우선 루발라 공화국의 수도인 루발라 시내에 입성했다. 이곳에 행군의 피로를 풀고 전쟁을 준비할 것이다.
지극히 사무적인 이유의 방문이었지만 일단 도시에 접근하자 병사들은 휘황찬란한 루발라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루발라는 인구 4만의 대도시였다. 더군다나 상공업의 발달에 힘입어 여러 차례 재개발을 거쳤기에 화려함의 정점을 달렸다.
도시의 동서를 관통하며 강이 흘렀고 강 바로 북쪽에는 건설 중인 대신전이 있었다. 그 대신전이 도시의 중심으로 그 주변 구획들은 자로 잰 듯 질서정연하게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건축물에 규정이라도 있는지 모든 건물의 벽은 새하얗고 지붕은 주황색 기와였다.
“루발라 공화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콘타 씨. 직접 뵙는 건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지현 재무관님. 네로 씨, 리카르도 씨, 파올로. 많이 배우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이 사태만 진정되면 가문의 젊은 녀석들을 데리고 가 가르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우선 사태부터 진정시켜야겠지요. 그것 때문에 카네지에 있어야 할 제가 예까지 온 것이니.”
“콘타 씨도 고생이 많습니다.”
“자, 우선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버디어 콤파니아는 미리 루발라 외곽의 건물을 다수 임대해 용병들을 거주시켰다. 먼저 고용한 용병 천여 명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앙투안 경도 이곳에 있는가?”
“예. 앙투안 기병대 총원 263명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만나고 싶군.”
“연락을 보내 놓겠습니다.”
“병장 이하 병사들은 오늘 하루 동안 휴가다. 시내로 들어가는 건 상관없지만 반드시 간부에게 보고하고 조를 짜서 움직이도록. 전파해.”
“예, 알겠습니다!”
“대장장이들도 만나 봐야겠는데, 혹시 직영하는 공방이 있는가?”
“직영은 아니지만 전속 계약을 맺고 있는 공업 조합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장인을 불러오겠습니다.”
“부탁하지.”
병사들은 빨리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짐을 정리했다. 보급 마차에 있던 개인의 장비를 꺼내 모조리 짊어지고 자신에게 배정된 방을 찾았다.
갑자기 천 명이 넘는 손님이 들이닥치자 관리인과 고용인들도 분주해졌다. 그들은 방을 안내하고 주의 사항을 알리고 다른 사람의 건물, 방과 자신의 것을 구분하는 법을 가르쳤다.
말들은 숙소에서 떨어진 목장으로 옮겼다. 마구간에 수용할 수 있는 수가 아니었다.
보급 마차와 용병대 공동 보급품은 창고로 들어갔다. 오후 즈음에 도시에 당도했으나 이런저런 정리를 마쳤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저녁 식사는 시내에서 하자며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났다. 하지만 백부장 이상의 간부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회의 시간이었다.
“앙투안 경은 훈련으로 몸이 지저분하기에 당장 만나는 건 예의가 아니며 내일 오찬에 발데마르 경을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기꺼이 받아들이지. 장인들은?”
“지금 오고 있습니다.”
“좋아.”
다른 이들이 전쟁 준비로 바쁜 와중에 지현은 돈 계산으로 바빴다. 콘타는 미리 현금을 마련해 놓았다. 착수금치곤 관례보다 큰 액수였다.
“루블린 금화입니다. 무게와 금 함량은 데나리오와 같습니다. 하이틸란트를 비롯해 대륙 동부에선 데나리오가 유명하지만 르몽센을 비롯해 대륙 서부는 루블린이 훨씬 대량으로 유통된답니다.”
콘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가 마련한 금화는 모두 700개로 전체 의뢰비용의 3분지 1에 해당했다.
“당연하지만 순금 함량을 확인하실 수 있게 저울과 추, 수조도 준비해 놨습니다.”
“고마워요.”
회계사들은 오랜만에 만난 콘타와 나눌 말이 많은지 한참을 떠들었다. 그들은 가져온 교범과 장부를 보여 주며 지현이 그들에게 무제한한 교육을 허가했다며 자랑했다. 그들의 말에 콘타도 크게 고무됐다.
“지현 양, 예산 편성에 관해서 조금 할 말이 있소.”
“아, 발데마르 씨. 지금 갈게요.”
발데마르의 요청으로 모인 장인들이 홀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몸만 오지 않았다. 혹시 발데마르가 새 상품을 발주하지 않을까 싶어 자신 있는 제품을 하나씩 챙겨 왔다.
발데마르 역시 이곳이 대륙 간 무역이 가장 왕성한 지역인 만큼 다양한 문명이 교차하며 만들어 낸 새로운 장비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적의 신무기를 봉쇄할 아군의 신무기였다.
“무슨 일인가요?”
“발데마르 대장께서 주문한 상품의 도안입니다.”
“이건 뭐지요? 꼭 바퀴 달린 벽 같은데…….”
“맨틀렛이라는 장비입니다.”
지현의 묘사가 정확했다. 그건 두 개의 벽을 V자 형태로 붙이고 바닥에 바퀴를 달아 놓은 모양새였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엄폐물을 끌고 다니는 셈이었다.
“이게 왜 필요한가요?”
“앙투안 경께서 알려 주신 정보를 토대로 적이 강력한 공성 화살을 쏜다고 판단한 버디어 콤파니아가 대량으로 발주한 참이었습니다.”
“강력한 공성 화살이라……. 버디어 콤파니아가 이미 발주했다면 그쪽이랑 상의하면 되지 않나요?”
“그런데 발데마르 경께선 이 위를 철판으로 보강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아아, 추가 비용이 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이건 콘타 씨랑 상의해야겠네.’
지현이 보기에도 저런 장비를 앞에 세워 둔다면 두려울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저 장비가 보호할 수 있는 건 보병뿐이었다.
사람을 완전히 가릴 수 있는 사이즈에 두께는 보통의 방패보다 서너 배는 두꺼운 장비였다. 무게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만큼, 어쩌면 사람보다 무거울 수도 있었다. 그런 걸 말 위에 얹으면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건 고사하고 말이 지쳐서 쓰러질 것이었다.
‘그건 발데마르 씨가 어떻게든 하시겠지.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발주한 정확한 수량과 개수에 소요되는 기간, 비용을 가르쳐 주세요. 버디어 콤파니아와 상의해서 결론을 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서류를…….”
“시제품이 나오면 방탄 실험도 꼭 진행하게. 최소한 1,500리브라 이상 되는 위력의 발리스타로.”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늘 검증된 제품만 납품합니다. 자, 그럼 발데마르 경. 아까 하던 말씀을 마저 드리고 싶습니다만, 이쪽의 이 건틀렛은 어떠십니까? 다양한 크기에 대응하도록 기성품을 제작해 당장 발주하셔도 이틀 안에 받을 수 있습니다.”
지현은 서류를 받아 회계사들과 콘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장인들은 저마다 챙겨 온 시제품을 꺼내 발데마르 앞에 늘어놓았다.
“맨틀렛 말씀이십니까? 예, 그건 저희가 발주한 게 맞습니다. 보병 위주인 보조군을 그걸로 무장시키려 했지요.”
“발데마르 대장님은 아무래도 기존의 제품이 충분한 방어력을 지녔을지 의심하신 거 같아요.”
“흠, 저는 군인이 아닌지라 그 분야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전임 사령관이셨던 분, 앙투안 경이라고 하셨나요? 그분의 의견은 어떤가요?”
“신경조차 안 씁니다. 당신은 기병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난관에 봉착했네요.”
“발데마르 경께서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개수를 주문하겠습니다. 비용도 버디어 콤파니아가 지불하겠습니다.”
“네? 그래도 되겠어요?”
“물론입니다. 확실하게 두 사람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지출 정도는 감수하겠습니다.”
“너무 우리에게만 유리한 조건 같은데……. 상호 신뢰를 위해서라도 적절한 분담이 필요해요. 그럼 이렇게 하지요. 맨틀렛이란 장비는 버디어 콤파니아가 소유하고 니오 용병대에 일정 비용을 받고 대여하는 형식으로.”
“흠, 사업 동반자까지 생각해 주시는 그 마음 씀씀이에 탄복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계약서를 작성하겠습니다.”
“네. 이제부터 대여료를 상의해 볼까요.”
“서로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최저한의 비용으로 책정하겠습니다.”
“바로 그런 자세가 필요했어요.”
“자, 그럼 시간이 늦었으니 남은 논의는 식사하며 진행하는 게 어떻습니까? 지현 양, 제 식사 초대에 응해 주시겠습니까?”
“영광으로 알게요.”
다섯 행정직 임원들은 식당으로 이동했다. 산맥을 넘어 다른 문화권에 들어서서 그런지 지금까지 니오 용병대와 함께하며 익숙해진 요리와는 전혀 다른 요리들이 가득했다. 어떤 의미로는 지현에게 익숙한 요리도 존재했다.
“이건 라자냐네요?”
“오, 라가눔을 아시는군요. 지현 재무관님의 고향에도 같은 요리가 있었습니까?”
‘엄밀히 말해 고향 요리도 아니고 같은 요리도 아니지만요.’
지현은 쓰게 웃으며 층층이 쌓인 파스타를 쌍갈래 포크로 집었다. 토마토가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버터와 치즈로 만든 흰 소스도 맛있었다.
지현이 먹어 본 라자냐는 마트에서 파는 냉동 간편식이 전부였기에 최고의 조리사가 정성 들여 만든 라가눔과 감히 맛을 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현이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향은 났다.
‘와, 이젠 콜라도 추억의 맛이라고 할 거 같아.’
만 리보다 먼 땅에서 만리타향의 음식을 먹고는 고향의 맛이라 생각하게 되다니. 지현은 이 웃기면서도 슬픈 상황에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혹시 입에 안 맞으셨습니까?”
“아, 아니요. 아주 맛있어요. 그냥 좀 옛날 생각이 나서요.”
다른 요리도 많았다. 지현은 자신이 본 적도 없는 요리를 조금씩 먹으며 맛을 음미했다.
“어? 지현 양, 먼저 식사 중이었네요.”
“힐다 씨, 하인리히 씨! 발데마르 씨도 오셨네요.”
“제가 초대했습니다. 장인들과 대화를 오래 나누시느라 늦으신 모양입니다.”
“그렇다네. 대신 좋은 걸 많이 알았지.”
“지현 양, 이거 한 번 볼래요? 남쪽은 갑주가 되게 발달했더라고요.”
“일단 뭐 좀 먹고 하자, 힐다.”
“넵.”
함께 온 본부 백부장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세베리도 부르려고 했으나 그는 이미 부하들과 시내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럼 맨틀렛의 비용은 그렇게 결정하셨소?”
“네. 우리로서도 전쟁 후에 그 장비를 들고 다닐 건 아니라고 생각해 대여 형태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어요.”
“훌륭한 판단이오. 장인들에게 물어보니 철판까지 씌우면 맨틀렛의 중량이 못해도 수십 파운드를 넘길 거라고 하는데 안 그래도 많은 짐에 그런 것까지 짊어지고 다닐 수야 없지.”
“고마워요. 비용 문제는…….”
“그거라면 총괄 재무관에게 일임했으니 나중에 명세서나 보여 주시구려.”
“그럴게요.”
“그나저나 오랜만에 누탈로 음식을 먹어 보는군.”
“발데마르 대장님은 참으로 박학다식하십니다.”
“그냥 보고 들은 게 많은 것뿐이오.”
“혹 르몽센어나 누탈로어도 할 줄 아십니까? 앙투안 경과 원활하게 소통하려면 통역사가 필요하실 텐데.”
“북부 누탈로어라면 일상 회화 정도는 할 줄 알지만 르몽센어는 아침 인사와 감사 표현밖에 할 줄 모르오.”
“누탈로어가 통한다면 문제없습니다.”
“다행이군.”
“난 하이틸란트어 익히는 것만 해도 꽤 고생했는데 말이지…….”
“대장은 외지를 오래 돌아다니셨으니 그런 거야. 노바 일레디온에서도 누탈로어는 통하니.”
식사를 마무리 짓는 달달한 후식이 나오자 백부장들의 대화가 더 활기를 띄었다. 힐다는 지현에게 새로 산 장갑과 각반을 보여 주며 자랑했다.
발데마르 역시 손등을 보호하는 건틀렛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것은 철판이 손등까지만 보호하고 손가락은 그냥 가죽 장갑이었다. 힐다가 새로 산 것은 손가락의 위까지 철판으로 덮은 형태였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독립된 철판을 지녀 섬세한 동작도 가능하고 전투 중 취약한 손가락을 보호한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철판이 약하게 고정돼 쉽게 떨어질 것 같지만 그것도 없는 것보다는 중요했다.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한 번을 막는가 못 막는가는 승패를 가르는 요소였다.
“이쪽 동네는 갑옷도 신기하더라고요. 몸통을 아예 통짜 쇳덩이로 가리는 흉갑도 있던데.”
“아아, 세바스티아노 씨의 갑옷을 보셨군요.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는 장인이지요.”
“대장 갑옷 같은 그, 브리건딘? 같은 형태도 있었어요. 브리건딘이랑 경번갑을 섞어 놓은 형태도 있고.”
“할가라나 크라프 같은 대륙 동부는 물론 칸국, 술탄국과도 교류하다 보니 다채로운 양식이 섞이며 새로운 발상이 계속 떠오르고 있답니다. 말씀하신 브리건딘도 할가라의 것과 형태가 많이 다를 겁니다.”
“예, 그렇더군요. 이쪽은 철판을 박은 판을 만들어 정면의 가슴과 배만 가리고 비는 부위는 사슬로, 팔다리는 판금으로 막는 모양이었습니다.”
“듣자 하니 허리를 옆으로 돌리거나 굽힐 때, 팔을 휘두를 때 방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답니다. 저야 그 분야는 전문가가 아니라 모르지만 장인이 의욕적이라 좋은 일이지요.”
“이거 참, 니오도 새 갑주를 만드는 데서 만족하지 말고 계속 새 갑주를 연구해야겠군. 이러다 뒤쳐지겠어.”
“하하. 과연 어떤 갑주가 미래를 지배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의외로 사슬 갑옷이 계속해서 시장을 주도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다양한 시도를 한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발데마르 대장님도 당신께서 지니신 방대한 경험을 토대로 장인들에게 새로운 발상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발데마르 씨는 이미 그러고 있지요. 이번 니오 용병대 신형 갑주도 그렇게 개발을 시작한 거니까.”
“크흠, 이거 부끄럽구려. 우연의 일치인 것을.”
동체를 가리는 갑옷 이외에 팔다리에 장비하는 보호대도 있었다. 신형 갑주의 부속품으로 니오 용병대에 보급된 것은 이곳의 장비보다 오히려 방어력이 비등하거나 더 우위에 있었다. 고품질의 강철을 두껍게 단조해 만든 덕이었다.
하지만 양식의 차이가 발데마르의 눈길을 끌었다. 니오 용병대의 것은 상박과 하박에 각각 철판 보호대를, 팔꿈치나 무릎에 둥근 방어구를 대고 그걸 가죽 끈과 사슬로 이어 관절의 움직임에 대응했다.
그러나 루발라의 것은 관절 부위에 여러 장의 철판을 겹치고 오금 부위를 대갈못으로 고정해 관절의 움직임에 대응했다. 조금 더 무겁겠지만 빈틈이 사라졌다.
‘찰갑처럼 작은 철판을 다닥다닥 붙이는 것보다 저렇게 큰 철판을 몇 개만 붙이는 편이 빈틈을 줄일 수 있겠지. 관절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방식을 여러 가지 보았으니 적절히 조합하면 성능을 더 개선할 수도 있겠어.’
발데마르는 문득 든 발상에 조만간 라그나르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개발 중인 브리건딘을 더 강하게 개량할 수도 있어 보였다.
오랜만에 남쪽을 방문한 건 정말 좋은 기회였다. 의뢰비로 막대한 현금을 얻은 건 물론 새로운 기술과 발상도 얻었다. 발데마르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신무기의 위협만 막으면 됐다.
“오늘 식사는 정말 감사했어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더 잘 대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콘타는 인사를 나누고 용병 숙소에서 떠났다. 네로나 리카르도는 함께 떠날 법도 한데 자신은 아직 니오 용병대의 회계사라며 남았다. 발데마르는 그들의 모습에 미소 지었다. 사소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이 중요했다. 그들의 의리는 보답 받을 것이다.
시내로 들어갔던 용병들도 속속들이 돌아왔다. 발데마르는 인원을 점검하고 불상사는 없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처음 본 대도시에 길을 잃거나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 병사는 없었다. 전쟁이 코앞이라 군기가 몸을 지배한 것도 한몫했다.
날이 밝자마자 발데마르는 세베리를 대동하고 앙투안을 만나러 나섰다. 떠나면서 발데마르는 지현에게 휴가 명령을 내렸다. 다양한 지시를 받아 왔지만 거부권이 없는 명령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일이 사라진 지현은 한동안 실내에서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놀러 온 힐다와 리하르트가 그걸 보고 지현을 끌어냈다. 하인리히가 미리 목장에서 말을 데려와 지현 앞에 대령했다. 세 사람은 시내 구경을 가자며 지현을 꾀었다. 마침 할 일도 없던 지현은 선선히 승낙했다.
지현이 시내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접한 네로가 곧장 건물 관리인을 불러 안내역을 붙였다. 그냥 안내역이 아니라 호위를 겸하는 건지 덩치도 크고 머리를 짧게 깎은 장정이었다.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와 방패도 차고 있었다. 니오 용병대가 들고 다니는 폭이 사람 어깨만큼 넓은 거대한 방패는 아니었다. 직경이 두 뼘 길이도 안 되는 작은 버클러였다.
힐다, 하인리히가 함께 하는 이상 호위가 필요치 않다는 건 네로 역시 잘 알았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사람을 붙인 건 실제 전투에서 지현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시비 자체가 일어나지 않도록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네 사람 역시 네로의 그런 마음 씀씀이를 알았기에 안내이자 호위를 받아들였다.
“디에고라고 합니다. 오늘 니오의 귀빈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니오 용병대 총괄 재무관 이지현이라고 합니다.”
“영광입니다, 마님.”
‘웃.’
디에고는 지현이 인사하자 한쪽 무릎을 꿇고 악수하기 위해 내민 손등에 입을 맞췄다. 지현은 순간 팔과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어이, 우린 그런 거 안 하니까 하지 마.”
“이런, 실례했습니다. 존귀한 분께 마땅한 예의인지라. 분명한 거부의 의사를 밝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당당한 모습도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번엔 나한테냐?”
디에고는 핀잔을 들었음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일어났다. 힐다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입을 딱 벌렸다. 지현 역시 그런 그의 태도에 당황했다. 속으로 문화의 차이라고 되뇌어도 놀란 게 진정되진 않았다.
“이번은 지현 양이랑 누님이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부턴 주의하쇼.”
“예,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출발할까요?”
디에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행을 이끌었다. 그 모습에 다시 한 번 네 사람은 입을 딱 벌렸다.
“누탈로 남성들이 여성에게 치근거리는 걸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저게 치근거리는 거냐? 껄떡대는 거지. 허참.”
“아니, 누탈로라고 싸잡아 말하기엔 콘타 씨도 네로 씨도 저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단 말이지요. 깜짝 놀랐어요.”
“하긴 저도 들어만 본 말입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너 정도 되는 녀석이 웬일이래?”
“아무튼 특이한 녀석이랑 도시를 돌게 됐슴다.”
“그러게요. 네로 씨도 참, 어쩌다 저런 분을 고르셨는지.”
네로가 디에고를 고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그는 말도 안 되는 마당발이었다. 길을 걷는 사람 두 명 중 한 사람은 디에고에게 인사를 건넸다. 평범한 인사도 아니고 근황 보고부터 디에고가 예전에 요청했던 작업의 진척까지 설명했다.
“아주 유명하신가 봐요?”
“하하, 부끄럽습니다. 버디어 가문 밑에서 루발라의 치안을 위해 조금 힘을 쓴 게 전부입니다.”
“보통 그 정도로 이렇게 유명해지나?”
“열정적으로 산 덕분이지요. 태양처럼 살아가는 것이 천신님의 종으로서 합당한 모습 아니겠습니까.”
“와우…….”
“지현 마님. 좀 더 앞쪽으로 걸으시지요. 예, 좋습니다. 리하르트 군과 하인리히 씨 사이에. 힐다 마님도 좀 더 옆으로 붙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호위는 우리가 알아서 할 건데, 이유는 좀 알고 싶네. 왜?”
“제 입으로 감히 말씀드릴 수도 없는 천박한 것들이 두 분의 빛나는 얼굴을 보고 허튼 수작을 부릴 게 두려워 그렇습니다.”
“여기서 허튼 수작 부리는 건 너 하나뿐이거든.”
“하하, 재밌는 농담입니다. 니오인들은 재치 있군요.”
“농담이 아니라고. 아 진짜…….”
“저기, 디에고 씨.”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그 감히 말할 수도 없는 천박한 것들이란 게 무슨 말이지요? 그냥 깡패 같은 사람들을 말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지현의 질문에 디에고가 처음으로 안색을 굳혔다. 그는 가만히 하늘을 보다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오 천신이시여, 감히 제 입으로 이런 불경한 소리를 내는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울러 부디 지현 마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당신의 가호를 부여해 주십시오.”
그의 거창한 모습에 일행은 그들 중 유일한 천신교 신자인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시선이 집중되자 리하르트는 두 손으로 X자를 그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는 어지간히 독실한 신자라도 평소에 저러고 살진 않았다.
“제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걸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현 마님의 생김새는 니오인이나 누탈로인과 많이 다르십니다. 감히 지현 마님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닙니다.”
지현은 디에고의 호들갑스런 모습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살폈다.
“예, 뭐, 실제로 다르니까요.”
“저는 지현 마님의 존귀함을 알아보았으나 그들은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아아, 통탄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대체 그들이 누군데?”
“지나와 히스타치아의 노예 사냥꾼들입니다. 천하고 천하며 천하디 천한 종자들입니다. 거기에 악독하기까지 하지요. 그들은 주로 라카프인과 돌루인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걸 생업으로 삼습니다.”
천신교는 교리상 노예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예 사냥꾼들은 ‘천신교의 교리는 천신교에게만 미친다.’는 논리로 다른 종교를 섬기는 사람을 납치해 노예로 팔았다.
막아야 할 종교 측에서도 쉬쉬했다. 이미 여러 공화국과 공국의 고위층이 노예를 보유했고 조금이라도 재력이 있는 자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노예를 찾았다. 누탈로 전역에 노예가 유행하는 것이다.
수요가 많으니 공급이 멈출 리가 없었다. 노예 사냥꾼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납치했다. 누탈로에 여행 온 이들이 사라지는 건 예사였고 용병 부대가 외국으로 원정을 가 주민들을 잡아오기까지 했다.
오르투시아 고원의 술탄국과 벡국들은 마땅히 주민을 보호해야 했지만 동쪽으로는 칸국의 침입에, 서쪽으로는 일레디온 제국에 가로막혀 힘을 쓰기 어려웠다. 지방 군주가 스스로 막아 보려 해도 철저하게 준비하여 빠르게 치고 빠지는 노예 사냥꾼을 모두 대응할 수는 없었다.
술탄국이 해상 봉쇄를 시도해 봤지만 동부 제해권을 장악한 히스타치아 공화국의 해군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누탈로에 직접 보복을 가하지 못하니 화는 엉뚱한 곳에 미쳤다. 마찬가지로 칸국의 침입과 교역의 붕괴로 세가 약해진 대륙 동부의 천신교 국가를 침략한 것이다. 정규군으로 이뤄진 전면전이 아니라 공화국들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예 사냥꾼의 침입이었다.
악순환의 연쇄였다. 하지만 그런 대륙 동부의 혼란과 달리 누탈로의 공화국들은 평온하기만 했다. 위협적인 적의 전면 공격은 일레디온 제국이 받아 주고 바다만 잘 막으면 아무 문제도 없으니 안심하고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다.
“끔찍하지만 얼마 전 버디어 가문의 손님인 술탄국 상인 분도 함께 온 가솔 한 명이 사라져 수사를 요청하셨습니다.”
“노예를, 그렇게 공공연하게…….”
지현은 살짝 현기증이 났다. 하지만 다른 세 사람은 함께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았다. 니오 본토에도 여전히 노예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노예 노동의 낮은 효율과 잦은 내전, 개종 등의 사유로 수가 많이 줄었지만 아직 다수의 노예가 있었다. 더군다나 그런 노예 거의 대부분은 니오인의 조상들이 대륙 연안을 약탈하며 납치해 온 이들의 후손이었다.
당장 뤼나의 성에도 피고용인이 아닌 노예가 있었다. 군에 복무하면 해방된다는 조건을 걸어 상당수가 전사로 전환됐지만 그래도 상당수의 노예가 남았다.
“우리랑 있으면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해요.”
“걱정 마십셔. 저희가 철벽처럼 지키고 있으니까!”
대신 세 사람은 지현을 안심시키는 데 집중했다. 지현도 말로만 들었기에 피부에 닿는 공포는 아니었고 금방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노예의 존재에 여전히 속이 거북했다.
디에고는 한 번의 경고로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다시 분위기를 바꿔 시내를 소개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도시의 화려함에 –지현의 입장에선 고전적인 멋에– 다들 금세 즐거움을 되찾았다.
시장에 들어섰을 때는 검과 버클러를 찬 무리가 추파를 던지기도 했지만 힐다의 허리에 찬 도끼와 그 옆에 선 디에고를 보더니 찔끔하고 물러났다. 시장에는 온갖 문명의 산물이 혼재했다. 베겐도르프 시장에선 찾아볼 수도 없는 것들이 가득했다. 지현은 딱히 필요한 게 없었기에 구경만 했지만 다른 세 사람은 기념품을 겸해서 몇 가지 물건을 샀다. 주로 귀금속이나 장신구, 조각품이었다.
관광을 마치고 쇼핑도 마무리했다. 지현은 거절했지만 디에고가 손님을 맨손으로 보내면 네로에게 실례하는 거라며 우겨 지현과 힐다에게 목걸이를 하나씩 넘겼다.
“후 지친다.”
숙소로 돌아온 힐다가 아끼는 도끼마저 풀어서 침상에 던지고 그대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지현이 그 옆에 천장을 보며 따라 누웠다.
“노느라 지친 게 아니라 디에고 씨 성격 때문에 지쳤어요.”
“누가 아니람까.”
“참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두 사람도 피로하긴 마찬가지였는지 상의를 벗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하인리히가 이렇게 풀어진 모습은 극히 드물었기에 지현은 신기한 눈으로 지켜봤다.
“돌아왔냐? 지현 양, 잘 쉬었소?”
“네. 아주 즐거웠어요. 정말 고마워요. 배려 덕분에…….”
“아니, 애초에 지현 양은 지금 휴가 중이어야 하는데 예까지 와서도 일을 하고 있으니. 나머진 세베리 부대의 재무관이랑 보조 재무관들에게 맡겨도 되겠소만.”
“후후, 일이 있는 한 일을 해야 하는 법…….”
“이따금 지현 양을 보고 있으면 혹시 내가 게으른 건가 의심하게 된다오.”
“그건 안 되지요. 그건 안 되지……. 저 쉬는 동안 발데마르 씨는 함께 싸워야 할 다른 용병대장님이랑 만나셨다면서요?”
“아, 맞다. 대장, 그쪽은 좀 어땠어요? 한 번 진 걸로 위축됐거나 하면 같이 싸우기 곤란한데.”
“그건 아니더라. 오히려 정 반대였지. 사기도 충분하고 전의도 충만해. 단지 문제는 흠…….”
앙투안 기병대와 니오 용병대는 각자 지휘관에게 독립적인 병력 통솔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함께 싸워야 하는 이상 작전의 큰 틀은 함께 짜야 했다. 그런데 앙투안의 전술관은 발데마르와 크게 달랐다. 그게 문제였다.
앙투안은 기병의 절대적 우위를 신봉했다. 그렇기에 보병이 보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 자신의 기병대와 발데마르를 위시한 니오 용병대의 기병이 적진에 난입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거라 주장했다.
이미 한 번 그리 시도했다 실패하지 않았느냐는 발데마르의 반문에 앙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건 적의 공격을 받아 내는 ‘모루’ 역할의 보조군 보병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항변했다. 발데마르는 그와 나눈 대화를 상기하며 한숨을 쉬었다.
앙투안의 말은 현재 대륙의 군사 사상을 정확하게 대변했다. 기병은 빠르다. 그리고 강하다. 기병은 완벽한 병사다. 기병은 적 부대를 우회해 빈틈을 찌를 수도 있고 빠른 속력과 묵직한 중량으로 적의 중심을 돌파할 수도 있다. 서전을 열 때도, 회전의 한가운데에서도, 적이 분열하거나 패퇴해 추격을 벌일 때도 유리하다. 그야말로 전천후 만능 병과인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군사 사상이었다. 그렇기에 많은 군주들이 비싸더라도 기병을 육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니오 용병대 본부가 최강인 건 강자들만 모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원이 기마 전투에 능하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값도 비싸고 유지비도 비싼 기병 비율을 높게 유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보병이 기병에 대항해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활과 쇠뇌를 쏘아 저격하거나 빽빽하게 모여 기병의 돌진을 저지하는 것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갑주를 모두 갖춰 입고 방패를 쥔 기병은 어지간한 활로는 저지할 수 없었다. 근거리가 아닌 이상 강력한 쇠뇌라도 방패를 뚫고 갑옷까지 뚫고 사람을 살상하는 건 어려웠다.
빽빽하게 뭉쳐서 방패와 창을 앞세워 기병의 돌진을 저지하는 건 비교적 효과적이었다. 문제는 코앞에 창을 든 거체의 기사가 돌진해 와도 도망치지 않을 만큼 병사가 용맹해야 했다.
더군다나 그렇게 용맹하더라도 중기병의 돌격을 못 막는 경우가 허다했다. 니오 용병대의 방패벽만 해도 동부 전장에서 적의 돌진을 항상 막은 건 아니었다. 중기병의 돌격을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해 전열이 붕괴한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고 그렇기에 방패벽 이외의 다양한 대기병 전술을 개발해야 했다.
적들은 그런 대기병 전술을 확립하고 있었다.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는 거마창, 연사 속도가 뛰어난 활로 화살을 퍼부어 돌격을 견제, 장갑을 뚫고 사람을 살상하는 강력한 신무기 사용 등이 그러했다. 앙투안은 그러한 견제를 보병이 받아 내라고 주문한 것이다. 발데마르로서는 마땅찮을 수밖에 없었다.
발데마르 생각에도 앙투안의 작전은 틀리지 않았다. 가장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병이 적의 견제를 받아 내는 사이 기병이 적의 중추를 때린다는 건 상식이었다. 앙투안은 실제 같은 방식으로 수십 번의 전장을 재패했다. 전과 달리 니오 용병대라는 강력한 보병이 있으니 이번엔 성공할 거라 확신했다. 발데마르를 위시한 본부의 강력한 중기병도 함께하니 더욱 사기가 높았다.
앙투안의 작전 계획에 모순은 없었다. 발데마르가 반대할 이유 또한 없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이리도 불안한가.’
발데마르는 이곳에 오면서도 끊임없이 적의 정보를 수집했다. 자세한 정보는 함께 듣지 않아 모르지만 발데마르가 누구보다 노력하고 또 부하들을 아낀다는 건 지현도 잘 알았다.
“힘내세요. 발데마르 씨. 그만큼 노력했으면 분명 성공할 거예요. 내일은 새 장비도 나온다면서요? 멘틀렛이었던가?”
“그렇소. 적의 주공을 받아 낼 든든한 방패지. 후, 지현 양 말마따나 힘을 내야지. 이번에도 또 우리가 이길 게 분명하니!”
“멋져요. 바로 그 자세예요.”
“크하하. 이거 부끄럽군. 다음부턴 소리 내서 말하는 건 자제해야겠소.”
“괜찮은데요, 왜.”
* * *
이른 아침부터 공방의 심부름꾼이 용병 숙소를 방문했다. 주문한 멘틀렛이 완성됐다는 소식이었다. 발데마르는 즉시 간부들을 이끌고 공방을 찾았다.
멘틀렛은 정확히 설계대로의 형태였다. 직각으로 이어진 두 개의 나무 벽 앞면에 철판을 대갈못으로 고정했다. 좌우 끄트머리와 중앙의 꼭짓점 밑에 바퀴가 달렸다. 폭은 사람 네 명이 어깨를 맞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사격 실험을 위해 장인들이 끙끙거리며 멘틀렛을 밀어 미리 설치한 발리스타 앞으로 옮겼다. 힘 좋은 장인들도 끙끙대는 그 모습에 발데마르와 힐다가 멘틀렛 뒤에 가서 직접 밀어 보았다.
무게가 최소한 60킬로그램은 넘어가는 무지막지한 물건이었다. 네 사람이 동시에 밀기에 감당할 수야 있겠지만 최전방에서 이걸 밀며 전진하는 병사들은 적진에 도착하면 지쳐서 이탈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험의 시간이었다. 화살에 맞아 밀려나거나 넘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사람이 밀고 있는 것처럼 멘틀렛 뒤로 지지대를 붙였다.
발리스타는 표준적인 것보다 한참 거대한 물건이었다. 버디어 콤파니아의 용병 두 사람이 발리스타 몸체 끝에 붙은 권양기를 있는 힘껏 돌렸다. 손잡이가 한 바퀴 회전할 때마다 시위가 조금씩 뒤로 밀려왔다.
철컥. 마침내 시위가 후방에 고정됐다. 용병들은 권양기에서 손을 떼고 화살을 가져왔다. 두께가 발데마르의 팔뚝만큼이나 두껍고 촉은 뾰족한 쇠몽둥이처럼 거대했다.
“조준!”
“더 물러나십시오.”
혹시라도 파편이 날아들면 위험했다. 관중들은 분분히 용병들이 든 방패 뒤로 숨었다. 지현 역시 발데마르와 힐다가 펼친 약식 방패벽 뒤에 숨어 그 과정을 지켜봤다.
“발사!”
캉!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용병이 발사 손잡이를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순간, 화살이 멘틀렛을 때렸다.
“결과 확인!”
발데마르와 힐다가 방패를 치우고 멘틀렛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바닥에 떨어진 화살도 찾았다.
얼마나 거세게 부딪쳤는지 살대가 받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발데마르가 찾은 건 화살의 머리 부분이었고 나머지 반쪽은 어디론가 날아가 찾을 수 없었다.
“여기 피탄흔이 있습니다.”
먼저 온 용병들이 맨틀렛의 표면을 살펴보며 한 지점을 가리켰다. 쇠가 눌린 자국이 있었다.
“반대편은?”
“아무런 이상도 없습니다.”
철판이 관통을 막더라도 반대편에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앞면은 무사하더라도 뒤편이 터지거나 뒤틀리는 일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훌륭하군. 이거라면 어떤 무기라도 막아 낼 수 있겠어.”
“무거운 게 흠이지만요.”
“한 번만 더 확인해 보지. 이번에는 투석으로.”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분주히 선 밖으로 이동했다. 그사이 용병들이 다시 권양기를 돌려 시위를 당겼다. 이번 탄환은 둥글게 깎은 돌이었다.
“발사!”
다시 한 번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철판에 눌린 흔적이 생겼을 뿐 큰 피해는 없었다. 발데마르는 비로소 안심했다.
“좋아. 이런 게 모두 몇 개라고?”
“열두 개를 제작했습니다. 실전에 열 개를 투입하고 두 개를 여벌로 쓸 것입니다.”
“수레를 끌고 오지. 전장까진 그걸로 옮긴다.”
“예!”
“장인들이 수고했네.”
“별말씀을요. 저 정도면 아웰의 장궁으로 수백 발을 쏘아도 뚫을 수 없을 겁니다.”
“기동성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든 하지. 그럼 이만.”
신무기에 대항할 장비도 갖췄다. 남은 건 언제 전장으로 갈 것인가 뿐이었다.
적들이 점거하고 있는 도로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농장 지대에 이미 700명가량의 용병 부대가 주둔지를 건설해 대기 중이었다. 거기까지는 제국 도로를 타고 한나절 거리였다.
“저녁 무렵부터는 비가 올 것 같으니 비가 그치고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습니다. 도로를 이용하면 비가 온 직후라 해도 문제없을 것입니다.”
“좋아. 앙투안 경도 동의한다면 그렇게 하지.”
“그럼 의중을 묻고 오겠습니다.”
하이틸란트에서는 비가 온 직후 토양이 물러져 기병의 움직임이 제한되거나 마차가 달릴 수 없는 일이 허다했다. 하지만 단단히 다진 땅 위에 포석을 깔고 좌우로 배수로를 낸 도로에 비는 그저 잠깐 젖는 정도에 불과했다.
발데마르는 언제든 출발할 수 있게 각자 짐을 정리하고 포장해 놓도록 지시를 내렸다. 용병 숙소 전체로 전의가 피어올랐다.
“지현 양은 회계사들과 함께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네, 알겠어요.”
“호위 역으로 에이자와 폴카를 두고 갈 것이오. 더 많이 남기지 못해 미안하오.”
“천만에요. 오히려 제가 말렸을 거예요. 큰 전투를 앞두고 한 사람이라도 더 중요한 판에.”
“킁. 기다리는 동안 부디 조심하시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대장, 지현 양이 애예요? 그만하고 좀 나와요.”
“알았다, 이놈아.”
콘타의 말대로 저녁 무렵부터 비가 왔다. 비 내리는 밤의 도시는 색다른 경관을 제공했다. 지현은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착잡한 마음을 달랬다.
지금부터 니오 용병대가 갈 곳은 전장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지현이 본 것과 규모가 다른 전장이었다. 어쩌면 힐다나 하인리히, 리하르트처럼 친한 이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죽을…….
‘욱.’
거기까지 생각한 지현은 갑자기 쇄골 사이가 꽉 막히는 통증에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목젖 바로 뒤부터 가슴 바로 위까지 안에서 죄는 느낌이었다.
‘제발 다들 무사하기를.’
지현은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이란 존재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답답한 지현의 마음과 달리 시간은 잘만 흘렀다. 전날 저녁부터 내린 비는 오후 즈음에 그쳤고 비가 그치자마자 구름이 빠르게 사라지더니 이내 뜨거운 햇살이 도시를 달궜다.
“씁, 이런 날씨에 행군은 진짜 끔찍한데.”
기온이 빠르게 치솟았다. 강한 햇빛이 젖은 바닥을 말리며 습도를 높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내린 비의 양이 얼마 되지 않고 일사가 강해 금방 바싹 마르고 습도도 낮아질 거라는 사실이었다.
“여름에는 비가 이레에서 열흘에 한 번 정도밖에 내리지 않으니 지금 출발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진 쭉 맑거나 아주 적은 양의 구름만 낄 것입니다.”
“우리 애들 더위로 죽어 나가겠네.”
북극에 가까운 니오는 말할 것도 없고 한여름 최고 기온이 30도 근처에도 못 가던 하이틸란트 중북부에서 생활하던 이들이라 지금의 날씨는 끔찍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체력을 갉아먹는데 짐을 들고 행군까지 했다.
누탈로에서 나고 자란 용병도 지치는 판이니 니오 용병대가 얼마나 힘들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걸었다. 이럴 때 쓰라고 체력을 길러 놓은 것이라 자신을 타이르며 걸음을 옮겼다.
오후에 출발한 일행은 밤이 늦어서야 아군 주둔지에 도착했다. 군대는 700여 명이지만 일꾼과 상인 등등을 포함해 1,500명이 넘어가는 인구가 거주 중이었다.
거기에 천 명이 넘는 군대가 추가됐다. 새로 온 일행은 버디어 콤파니아의 인부들이 미리 지어 놓은 막사에 들어가 지친 몸을 달랬다. 중간에 노숙을 하지 않으려고 서두른 탓에 다들 피로했다.
“오후의 햇살이 이 모양이라면 최대한 교전은 해가 남중하기 전에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오.”
“당장 내일 아침에 싸울 생각이오? 하루쯤 푹 쉬며 적진을 살피고 나서 붙어도 되지 않겠소?”
“지원군의 자세한 정보가 적에게 넘어가기 전에 손을 봐야 하지 않겠소?”
앙투안이 발데마르를 재촉했다. 발데마르는 숙고에 들어갔다.
지치기는 했지만 싸우지 못할 상황인 건 아니었다.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면 최상까진 아니더라도 체력은 회복할 터였다.
실제 전장에서 최상, 만전의 상태로 전투에 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것까지 감안하는 게 전쟁이니까.
그리고 전쟁이란 빨리 끝낼수록 좋은 일이지 오래 끄는 건 어떠한 경우에도 미덕이 될 수 없었다. 발데마르도 그걸 알기에 한 수 양보했다.
“그럼 내일 새벽 내가 직접 적진을 정찰해 보고 결정하겠소.”
“정 발데마르 대장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따르겠소. 하지만 우린 이 자리에서 지속적으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확인했다는 걸 알아주시오. 속공이 최선이라는 생각은 변치 않소.”
작전 회의에 함께 참가한 니오 용병대 백부장들은 통역사로부터 앙투안의 말을 전해 듣고 서로 의견을 나눴다. 앙투안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옳다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
앙투안의 말마따나 적이 대비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르게 들이쳐 뭉개는 건 어느 전장에서나 통하는 방법이었다. 아군이 지쳤다고는 하지만 적 또한 천 명이나 되는 증원은 당혹스러울 것이었다.
아군이 만전이 아니라면 적도 만전이 아닌 상황에서 싸우면 된다. 적이 니오 용병대의 대비책을 세우기 전에 공격하는 건 그러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적은 기다리는 입장이고 아군은 원정 온 입장이라는 차이를 생각해야 했다. 언제 공격하건 적은 늘 만전의 상황일 수도 있었다. 병력 차가 있어도 거점에서 수비하는 입장에겐 세 배, 네 배가 아니면 미미한 차이일 수도 있었다.
야간의 회의는 짧았다. 발데마르는 쪽잠을 자고 일어나 동이 트기도 전에 앙투안과 소수의 기병을 몰아 적진을 향했다.
적진까지는 순식간이었다. 말을 구보로 모니 5분 만에 적의 사정거리 가까이까지 닿았다. 발데마르는 설명으로 들은 지형과 눈앞에 펼쳐진 실제 지형을 비교해 보았다.
설명과 큰 차이는 없었다. 제국 도로 좌우로 높이가 2미터도 채 안 되는, 언덕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완만한 굴곡이 있었고 도로 한가운데를 적들이 점거 중이었다.
도로 위에는 거마창이 3중으로 설치돼 있었고 그 뒤로 거뭇거뭇하게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발데마르는 말머리를 돌려 적진을 중심으로 크게 선회했다.
낮은 둔덕 위로 병사 몇 명이 보였다. 그나마 고지대에 해당하는 곳에서 견제 사격을 가하는 모양이었다.
“저 둔덕에는 어느 정도의 병력이 배치되었소?”
“저번 전투에선 각각 서른에서 마흔 정도. 전부 궁수였소. 애초에 높이도 낮고 넓지도 않아 많은 병사를 배치할 순 없소.”
“그렇다면 저 위에 무쇠 솥이 배치됐을 가능성도 없겠구려.”
“오히려 그래 줬으면 좋겠소. 저 좁은 곳에 많이 둘 수도 없을 테고 그러면 기병으로 단박에 들이쳐 빼앗아 올수 있을 테니까.”
“과연 그 말이 옳군.”
둔덕으로 오르는 길 방향에도 거마창이 몇 개씩 놓여 있었다. 적 본진과 거리는 대충 백 수십 미터였는데 둔덕을 탈취하면 적 본진을 향해 화살을 날릴 수도 있어 보였다.
“저번 전투에선 저기를 탈취하지 않았소?”
“물론 저기를 제일 먼저 쳤소. 하지만 저 위의 적을 몰아내고 그 위에서 재정비하는 사이 기병대가 타격을 입어 후퇴해야 했소.”
“그렇군.”
앙투안이 씁쓸한 침을 삼키며 말했다. 발데마르는 심후한 눈으로 적진을 다시 살폈다.
현재 모여 있는 군대는 모두 2천 명. 공화국군이 벌였던 저번 전투 때는 총원 1,200여 명이었다고 들었다.
적의 숫자도 비슷하게 1,200명이 조금 넘는 수였고 그 안에 기병은 50명도 안 됐다. 적이 성 안에 틀어박혔다면 모를까 도로 한복판을 점거하고 있었기에 우세한 기병을 이용해 이길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히려 당한 것이다.
발데마르는 수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작전을 고민했다. 앙투안은 주력 보병 부대가 적의 공격을 모두 받아 주기를 바랐지만 발데마르는 적의 신무기를 분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수 대 다수의 전투에선, 화살을 쏘더라도 열 사람이 한 곳을 노리는 것과 똑같이 열 사람이 제각각의 목표를 노리는 건 차원이 달랐다. 신무기 역시 열 기가 한 점을 노리는 것과 열 기가 서로 다른 적을 노리는 건 확연한 차이를 보일 것이었다.
‘하지만 둔덕 위로 맨틀렛을 보내는 건 무리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군.’
둔덕은 얕을 뿐만 아니라 좁았고 단속적으로 존재했다. 조금만 선회하자 다시 평탄한 길이 나왔다.
“직접 지형을 보니 좋은 생각이 났소?”
“괜찮은 작전이 생겼소.”
발데마르가 본진으로 귀환했다. 그가 돌아올 무렵에서야 하늘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병사들이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행군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세베리! 간부들을 모아라. 타 부대의 지부장들도.”
“예, 발데마르 대장.”
지나 쇠뇌병 부대를 이끄는 조반니 대장, 라카프인 용병대를 이끄는 니콜라이 대장, 중장 보병 부대를 이끄는 니콜로 대장에 앙투안까지 모든 지휘관급이 모였다. 발데마르는 그들 앞에서 자신의 작전을 설명했다.
적진을 대강 묘사한 지도 위로 병사 모형이 움직였다. 각 지휘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데마르의 말을 경청했다.
발데마르의 작전은 신묘한 전술도, 경이로운 계책도 아니었다. 기본에 충실하고 가용한 모든 수단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계획이었다. 각 지휘관들은 오히려 그렇기에 좋아했다.
착실하고 분명하게 승리를 노리는 작전이었다. 모두의 동의를 얻은 발데마르는 출병 시간을 조식 후 두 시간 뒤로 잡았다. 오전에 전투를 시작해 오후 중에 적을 격퇴하는 게 목표였다.
“꼭 섬멸할 것도 없이 일단 놈들을 성까지 몰아내기만 해도 승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놈들이 굳이 성에 틀어박히는 대신 도로를 점거한 것도 다 고립되는 게 두려워서 아니겠습니까?”
“도로 이용만 막아도 놈들은 금세 고사할 겁니다. 성 안에 얼마나 많은 물자를 비축해 놓았건 상관없습니다.”
“도로를 막으면 정보도 차단될 겁니다. 내부에서 서로를 책하다 항복하겠지요.”
“자자, 벌써 이긴 분위기군. 진정하고 식사나 합시다. 병사들이 충분히 기력을 회복하고 전장에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