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ng a Mercenary Unit from Bankruptcy RAW novel - Chapter 17
제 14 장. 질서의 이름
본부로 돌아가는 배에서 지현과 발데마르는 연신 한숨만 쉬었다. 한 사람이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좀 잠잠해진다 싶으면 다른 한 사람이 바다가 꺼져라 한숨을 뱉었다.
보다 못한 힐다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두 사람 모두 답은 없었다. 오히려 힐다를 빤히 보다 다시 한 번 한숨만 내쉬는 바람에 힐다만 분통이 터졌다.
“대장, 그러고 있지만 말고 뭐든 말을 해 보라니까요!”
“휴우우.”
“악! 난 못해 먹겠다. 하인리히, 니가 좀 해 봐.”
힐다가 선창으로 들어갔다. 하인리히는 발데마르의 옆에 앉았지만 딱히 말을 걸진 않았다.
두 사람이 한참을 그렇게 뱃머리에서 바다만 바라보았다. 마음이 가라앉은 발데마르는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하인리히.”
“예.”
“우리가 왜 용병질을 하고 있었지?”
“본토에 금이 부족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사실 우리가 그리 못 먹고 사는 건 아니야. 바다에서 그물을 치면 대구와 청어가 물보다 많고 강에선 연어를 낚지.”
“예. 혹여 청어 수출 건으로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니.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후우우. 하인리히, 네가 생각하기에 우리 식량 부족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 같으냐?”
“말씀하신 대로 어업과 채집으로 확보할 수도 있고 목축도 병행하니 식량 전반이 부족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곡물은 도리가 없습니다. 보리와 귀리만으로는 부족한데 수확량도 적습니다.”
“그래. 지력이 약해서 땅의 절반은 휴경지로 묵혀야 하지. 농경지 확보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혹시 크누트 왕이 철광에 이어 개간 사업까지 벌이겠다고 했습니까? 그를 위해 금이 더 필요하다거나…….”
“거의 비슷했어.”
“철광에 이미 상당한 인력이 투입됐습니다. 개간지를 늘릴 인구가 없습니다.”
“그래. 인구가 정말 큰 문제란 말이야. 인구가.”
“인구가 줄어든 건 곡물의 부족보다도 내전과 외부로의 이주가 문제였으니 철광에서 난 수익, 헌츠 연맹과 연대 등으로 나라를 안정시키면 자연히 늘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말이 옳다.”
‘그걸 크누트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왜 저리 성급한 건지…….’
발데마르가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하인리히도 정보를 조합하고 정리하여 무언가를 깨달았다.
“대장님.”
“허?”
“저는, 저뿐만 아니라 본부의 어느 누구든 대장님의 의지를 따릅니다. 싸워 얻어내라 하면 그럴 것이고 참고 인내하라 하면 또한 그럴 것입니다. 중요한 건 대장님의 의지입니다.”
“내 의지라. 고맙구나.”
발데마르가 하인리히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하인리히는 자리를 옮겨 선창으로 들어갔다. 더 있어 봐야 발데마르가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장이 뭐라고 좀 말했어?”
“아니. 나한테도 딱히 말씀해 주시진 않더라.”
“아, 진짜 저 곰탱이가 대체 무슨 일인데 우리한테도 저렇게 입을 꾹 닫는 거야?”
“그래도 몇 마디는 하셨는데 아무래도 크누트 왕이 뭔가 또 하려는 모양이다.”
“뭐? 뭘 더 해?”
“그걸 모르겠어. 아무튼 부담이 상당한 일인 게 분명해. 대장의 성격을 생각하면 대장이나 가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부담이 지워지는 거겠지.”
하인리히의 추리에 힐다도 말을 멈췄다.
“내가 그리 약한가?”
“힐다. 네가 약하면 세상에 강한 사람은 발데마르 대장과 야를 뤼나 두 분 정도밖에 안 남을 거다.”
“그게 아니라 못미덥냐고.”
“평소 대장은 항상 우리에게 터놓고 상의했어. 우리가 못미더운 게 아니라 이번 일이 그만큼 큰 건수라고 생각해야겠지.”
“대체 뭐가 얼마나 크면 후. 지현도 완전 뻗어 버렸는데 대장까지 저 모양이면 곤란하다고.”
“그렇지. 모두 불안해하고 있어. 너와 나라도 중심을 잡아야 해.”
발데마르라는 큰 기둥이 한숨만 푹푹 쉬고 있으니 함께 온 용병대 전원에게 급속도로 불안이 전염됐다. 힐다와 하인리히가 총대를 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발데마르를 고치는 게 힘들다면 두 사람이라도 다른 이들을 다독여야 했다. 그게 간부의 일이다.
“지금은 고민하지만 곧 다 터놓고 의견을 구하실 거다. 늘 그랬듯.”
“으휴. 어차피 말할 거 왜 저리 늘어지는 건지. 대장이 안 되면 지현 얘기라도 들어 봐야겠다.”
“그래.”
힐다가 다시 갑판으로 나와 흔들림이 적은 배 중심부에 누워 있는 지현의 곁으로 갔다. 마음고생에 멀미가 겹쳐 올 때보다 두 배로 힘들어 하는 지현이었다.
힐다는 가타부타 말없이 그의 옆에 누웠다. 한참 조용하게 등으로 배의 진동을 느끼며 하늘만 보고 있자니 지현이 떠듬떠듬 말을 꺼냈다.
“힐다 씨. 전에 이상형 얘기한 거 기억나요?”
“네? 아, 뭐, 기억하고야 있지요.”
“힐다 씨는 결혼할 생각이 있어요?”
“예?”
깜짝 놀란 힐다가 허리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설마 크누트가?”
“그럴 수도 있고요.”
“으음.”
힐다는 옅게 신음을 냈다. 이쪽은 그래도 문제를 말해 주기는 하는데 하필 껄끄러운 쪽이었다.
“지현 양은 돌아갈 집이 있잖아요. 여기 정착하라고 권한 거예요?”
“네, 그런 셈이죠.”
“거 아주 괘씸한 놈이네. 몇 해 전에는 발데마르 대장 여동생들한테 청혼하더니.”
“귀족들한테는 그런 게 당연한 일인가 봐요.”
“당연하다면 당연한데, 야를 뤼나께서 딸들한테 그럴 마음이 없으면 안 된다고 못을 박으셔서 무산됐거든요.”
“그분은 역시 대단하시네요.”
“대단하시죠.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한 결과가 내전이었고 심지어 거기서 승리한 분이시니.”
“하지만 아주 특별한 예외겠지요?”
“지현 양도 아주 특별해요.”
“후우우.”
“사실 진짜 문제는 결혼 쪽이 아니었죠?”
“힐다 씨는 못 당하겠네요.”
지현도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앉자 지현이 배시시 웃었다.
“집에 돌아갈 방법이 없어요. 있어도 못 찾겠고요. 솔직히 지쳤어요. 정보도 없고, 기껏 얻은 정보라고는 부정적인 것뿐이라.”
“그……. 유감이에요.”
“아니요. 그래도 포기했다거나 꺾였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좀 지쳤단 거지. 그런 와중에 크누트 전하가 불확실한 정보보다는 차라리 정착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흔들린 것뿐이에요.”
“그 정착 방법이 결혼이고요?”
“힐다 씨는 크누트 전하가 청혼한 거라고 생각했죠? 아니요. 청혼이 아니라 중매를 섰어요.”
“엥?”
“그러니까 니오의 남자 귀족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마음에 맞는 사람 있으면 결혼해서 정착하는 게 어떻겠냐고.”
“지현 양이 정착이라. 솔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나도 그러면 좋아요. 근데 그것도 지현 양이 그럴 마음이 있을 때 얘기지요.”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설마 이 먼 세계까지 와서 결혼해 정착하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이쪽은 ‘여자의 행복은 어쩌고저쩌고.’ 하는 헛소리가 아니라 지현의 능력이 필요해 정략결혼을 요구한다는 게 유일하게 나은 점이었다. 속 터지긴 매한가지지만.
“그래서 마음은 있고요?”
“있을 리가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아니, 안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마음은 없고요.”
힐다는 지현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힐다 또한 모친인 탄드리가 독특한 케이스여서 피했지만 대체로 니오인들은 부모가 정한 사람과 결혼했다. 아는 사람이면 다행이고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식 때 처음 얼굴 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그 소릴 지금 지현 앞에서 하는 건 도와주는 게 아니라 등에 칼을 꽂는 행위니 조용히 있기로 했다. 힐다가 조용해지자 지현도 덩달아 말을 멈췄다.
“아무튼 결혼이나 정착에 대해서 묻고 싶은 거였어요. 힐다 씨도 청혼은 많이 받았잖아요. 중매도 많이 들어왔을 테고.”
한참 침묵하자 고요를 견디기 힘든 지현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힐다는 지현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청혼은 죄 비리비리한 외국 놈들이었고 중매는 받아 보긴 했는데 성에 차는 놈이 없었어요. 결혼 생각을 아예 안 했냐면 그건 아닌데…….”
“결혼하면 은퇴해야 해서 좀 그런가요?”
“네? 아니 내가 왜요? 엄마도 결혼하고 오른팔 잃어버리기 전까진 계속 용병일 하셨어요. 거기서 아빠까지 죽는 바람에 은퇴했지만.”
“앗……. 죄송해요.”
“뭐가요. 그냥 있었던 일인 건데.”
“그……. 아니요. 그냥.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어휴, 맘도 약하긴. 괜찮다니까요.”
힐다가 지현을 끌어안았다. 힐다의 말을 듣는 순간 덜컥하고 아프던 심장이 그 포옹으로 풀렸다.
“고마워요.”
“아무튼 엄마 아빠가 용병대에서 만나 결혼했던 걸 생각하면 나도 좀 그런 걸 꿈꾸긴 해요.”
“그럼 혹시 니오 용병대에?”
“내 얘기가 아니라 지현 양 얘기였잖아요.”
“왜 빼고 그래요.”
“지현 양이야말로 용병대에 괜찮은 놈팡이 없어요? 아, 결혼 생각은 없다고 했지 참. 그럼 연애는? 천신교로 개종한 놈들은 연애를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그런 거 아니니 한 번 말이나 해 봐요.”
“저 부르셨슴까?”
“안 불렀어. 저리 가.”
“힝.”
“저 바보도 천신교니까 머리에서 치우자고요.”
“크크큭.”
천신교 소리를 듣고 왔다 어깨가 축 쳐져 떠나는 리하르트의 모습에 지현이 소리 죽여 웃었다.
“리하르트 씨도 좋은 사람이잖아요.”
“헤헤. 내 동생이고 좋은 놈인 것도 맞지만 개종한 놈들은 연애 상대로 꽝이에요. 너무 진지하니까요. 좀 더 편하게 사귀려면 다른 놈들로 골라야지요.”
“많이 사귀어 본 말투인데요?”
“숨길 것도 없죠. 제법 만나는 봤는데 잠깐 사귀면 좋아도 오래 간 녀석은 없더라고요. 지현 양도 생각 있으면 해 봐요. 의외로 재밌으니까.”
“힐다 씨까지 중매 서는 거예요?”
“누가 결혼하래요? 연애만 슬쩍 맛보라는 거지. 본부에도 괜찮은 녀석 많아요.”
“예를 들면 하인리히 씨요?”
“좋은 녀석이지요. 하지만 걘 빼는 게 좋을 거예요.”
“어, 왜요?”
“그 녀석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진짜요?”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 녀석도 청혼깨나 받거든요. 본부에도 꼬시려는 애들 많고.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사람을 못 봤어요. 내 촉이 확실해요. 누군가 가슴에 품고 있어.”
“힐다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하지만 하인리히 씨가 사랑이라니,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하네요.”
“나도 궁금해요. 한 번 대놓고 물었는데 그냥 웃으면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더라고요. 말하기 싫다는 놈한테 억지로 들을 순 없지요. 저 녀석이 나한테 숨기는 것도 다 있나 싶긴 했지만.”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갑판의 용병들이 다가와 대화에 끼었다. 한참 떠든 지현은 기분이 한결 나아진 걸 느꼈다.
* * *
브레머하펜에서 헌츠 연맹 일행을 내려 준 용병대는 헌츠 연맹의 배로 갈아타고 베겐도르프 시까지 항해했다. 기왕 얻은 권리이니 알뜰하게 써먹어야 했다.
앞으로는 하이틸란트 제국 내에서 수운만 연결돼 있으면 공짜에 가까운 비용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본부에 전달하니 절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래, 보고할 사항은?”
“부재중 의뢰 내역과 계약서입니다.”
“훌륭하군. 특이 사항은? 부상자나 사망자, 여타 본부의 손실 따위는?”
“없었습니다. 특이 사항으로는 대장님과 면담을 요청한 손님이 있었습니다. 대장님께서 복귀하시면 서신을 보내 달라 요청했습니다.”
“그럼 전령을 파견하도록.”
“알겠습니다.”
발데마르는 간략한 보고를 듣고 자세한 내역은 나중에 확인하기로 했다. 긴 여행으로 지쳤고 크누트가 내민 숙제 때문에 머리도 아팠다. 돌아오는 길 내내 고민했지만 역시 답은 안 나왔다.
한편 지현은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아디슬과 회계사들을 만났다. 밀린 한 달 치의 장부를 확인하고 현금과 대조하고 재고품 현황까지 확인한 끝에 비로소 휴식을 취했다. 달리 말하면 그냥 돌아오자마자 업무에 들어갔다.
좋은 소식도 있었다. 아디슬과 신입 행정병, 회계사들이 지현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앞으로 지현은 비즈니스 전략 업무로 빠지고 회계는 회계팀에게 맡길 것이다. 업무 부담이 한순간에 반 이하로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행정병들과 각 백부대의 병사들로 재고팀도 신설했으니 그쪽 부담도 한결 가벼워졌다.
‘역시 분업이 최고야.’
덕분에 지현은 발데마르와 하인리히의 교육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임원인 두 사람에게는 지현과 마찬가지인 비즈니스 전략 능력이 필요했다.
지현은 향후 용병대의 수익 방향성을 생각하며 버디어 콤파니아와 관계도 고민했다. 지금까진 원료 수입 대행을 맡기는 정도의 업체였지만 회계사도 그렇고 앞으로 더 긴밀하게 연결할 필요가 있었다.
상품의 수출 창구는 다양하면 좋았다. 헌츠 연맹의 특혜 도시를 창구로 강철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품을 무역할 수 있을 테니 거기에 버디어 콤파니아를 통해 대륙 남부까지 영향력을 뻗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장기 재고품은 본토에 대량 발주하고 소모품 중 외주가 가능한 물품을 버디어 측에 맡겨서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지현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세 회계사와 나누고 의견을 물었다. 회계사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회계사들은 콤파니아에서 대부해 준 귀족들 목록을 검토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이틸란트 내에도 콤파니아의 지부가 몇 개 있지만 용병대 본부에 가까운 위치에 지부를 신설할 셈이었다.
‘식량만큼은 먼 거리를 움직일 수 없고 또 안 그래도 외국인 용병대가 외국인 상회에게 공급받으면 모양이 나쁘니 현지에서 구매, 소비해야 해. 그리고 용병대의 주문이 아닌 개인의 소비는 최대한 현지에 붙이고.’
아무리 이윤을 최고로 치는 상인이라도 도의가 있고 도덕이 있었다. 버디어 콤파니아도 그런 지현의 설명을 납득했다. 오히려 본인들이 지현에게 건의하려던 생각이었다. 외부인이 한 지역에서 지나치게 세를 확장하면 반드시 토착 세력의 제재가 돌아오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렇게 바쁜 듯, 평소보다 여유로운 듯 업무를 자르고 나누며 지현은 생활을 안정시켰다. 확실히 전에 비해 업무량은 줄고 여가 시간은 늘었다.
여유 시간만큼 피어나는 잡념은 몸을 혹사하는 걸로 잡았다. 운동량을 배로 늘리고 식사량도 늘렸다. 특히 기름진 청어 대신 대구 중심으로 자신의 식단을 바꿨다. 단백질 보충은 중요하다.
며칠간은 하루가 멀다 하고 피로했는데 어떤 시점을 경계로 자신의 힘이 강해졌다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체력과 근력이 붙었으니 호신술에도 박차를 가했다.
아직 철을 두르고 가죽을 씌운 강화 방패를 마음 놓고 휘두르기는 힘들지만 1킬로그램 남짓한 얇은 판재 방패 정도는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지현은 방패로 적의 공격을 차단하는 법, 적의 시야를 가리는 법, 적의 무기를 쳐 내고 고정시키거나 빼앗아 무력화시키는 법 등을 배웠다.
땀을 실컷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시작 전에는 어쩐지 피곤하고 귀찮고 하루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일단 몸을 움직이면 상쾌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은 이래서 생긴 걸까?
‘본토 쪽 인력난도 빨리 해결되면 좋겠고. 크누트 씨는, 좀 적당히를 알았으면 좋겠는데…….’
지현이 본부로 돌아오고 며칠 지나자 본토에서 편지가 왔다. 크누트가 보낸 명단이었다.
초상화를 포함한 소개장이 마흔 장 넘게 들어 있었다. 거의 책 한 권 수준의 두께였다.
지현보다 본부의 다른 용병들이 더 즐거워했다. 그들은 소개장과 초상화를 펼쳐 보는 지현의 뒤에 뭉쳐서 누구는 어떤지, 또 누구는 어떤지 떠들었다. 그다지 도움이 되는 조언은 없었다. 그냥 떠들 구실이 필요해 재미 삼아 떠드는 거였다. 그나마 진지하게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은 힐다와 하인리히 정도였다.
“다 아는 얼굴이구려. 이 사람은 성격은 좋은데 몸이 허약해서 크흠. 아, 그는 지현 양보다 열댓 살은 많소. 그 친구는 바로 옆 영지의 장남인데 아무리 자유연애를 지향한다지만 어릴 때부터 너무 추문을 뿌려서…….”
“다 별로라는 말씀이시네요, 발데마르 씨.”
“그저 아는 사람들이라 도움이 될까 하고 정보만 전해 드린 것이오. 크흠. 그럼 난 다시 업무가 있어서 이만.”
“에효. 애초에 결혼할 마음이 없다니까 이런 거나 보내고.”
“푸하하. 크누트 왕이 하는 거 보니까 지현 양을 니오에 앉히고 싶어서 안달 난 거 같은데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냥 무시해요. 여기까지 와서 쪼아댈 것도 아니고 이런 편지나 보낼 텐데 뭐가 무서워요.”
“그냥 마음이 좀,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심적 부담감?”
“그런 건 대군을 앞에 뒀을 때나 느끼는 거 아니에요?”
“와……. 힐다 씨처럼 강철 같은 멘탈이 갖고 싶네요.”
“내가 좀. 헤헤.”
“지현 양! 그런 재미없는 거 그만 보시구 도시로 놀러 가지 않으시겠슴까?”
“네? 도시에는 갑자기 왜요?”
“황제가 순행 왔슴다!”
“네?”
지현은 리하르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반년이 넘게 살면서 지역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고 생각했더니 아직 지현이 경험하지 못한 일이 많았다.
하이틸란트는 중앙집권을 완비하지 못했고 황제도 절대 군주가 아닌 봉건 질서에 포함된 하나의 제후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황제는 휘하 영주들을 단속하고 지방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순례하듯 끊임없이 각 지방을 순행하는 것이었다.
지방 영주라면 자기 영지의 핵심 도시에 틀어박혀 살 수도 있지만 황제나 국왕은 한평생을 떠돌아야 했다. 어떤 의미로는 하급 귀족보다 고달픈 삶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충은 다른 사람이 알 바 아니었다. 도시의 시민들, 장원의 농노들에게 황제의 순행은 한 해 한 번씩 보는 특별하고 즐거운 행사였다. 황제의 순행에는 귀족과 기사만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상인과 광대도 따라다니니까.
황제가 기분 좋고 전에 들른 지방의 영주에게서 이것저것 많이 뺏어서 재정에 여유가 있으면 황제를 찬양하러 모인 백성들에게 선물을 뿌리기도 했다.
황제의 순행이 도착하는 날은 안식일이 아니어도 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좋은 날이었다.
“어제 베겐도르프 시에 들어갔다고 함다. 이례적으로 이번엔 닷새나 머문다고 하니까 지금 가도 재밌는 구경은 할 수 있을 검다.”
“그래요? 앗, 그럼 도시로 가고 싶다는 사람도 많을 텐데 일단 명단부터…….”
“그거라면 이미 작성했습니다. 신청자가 많았지만 순행 기간 동안에는 도시의 수용력도 커지니 조금만 분산하면 문제없겠습니다.”
리하르트가 방방 뛰는 사이 법관이 들어와 말했다. 다른 병사들은 알아서 법관에게 신청했지만 간부들은 업무가 바빠 직접 신청하질 못해 법관이 찾아온 것이었다.
“재무관님. 저희도 내일은 휴가를 쓸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순행이라면 루발라의 외교 대사도 있을 텐데 오랜만에 만나 뵙고 싶습니다.”
“물론 괜찮아요. 하지만 세 분이 동시에 빠질 순 없으니 순번을 정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지현 양도 다녀오시겠습니까?”
“한 번 경험해 보는 게 물론 좋겠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명단에…….”
“아, 미안하지만 도시 방문은 모레로 미뤄 주게.”
“예?”
“전에 면담을 요청한 손님이 하필 내일 오겠다는군. 그것도 나뿐만 아니라 법관과 지현 양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지현 양도 그럼 모레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말고요.”
“그럼 힐다 백부장도 자연히 모레로 미루겠군요. 일단 여쭤 보긴 하겠습니다. 자네도 미룰 거지?”
“그래야겠슴다. 하인리히도 미뤄 놓으시면 되겠슴다. 저랑 힐다 누님이 미루면 걔도 미룰 테니까.”
“물어보러 가겠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나중에 봬요. 발데마르 씨는 무슨 일이세요?”
“아, 지현 양의 신규 사업안에서 상의할 게 있소. 마침 루발라의 회계사들도 있으니.”
“그런 거라면 호출을 하시지 참.”
* * *
아침, 막 업무를 시작하려는 지현을 발데마르가 호출했다. 손님이 보낸 전령이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건 조금 심각하구려.”
“왜 그러시나요?”
“그 손님의 정체가, 어디 귀족 정도인 줄 알았는데…….”
“네?”
“황제가 온다고 하오.”
“황제요?”
“쉿! 시내에 대역을 세우고 비밀리에 방문하니 기밀 유지를 철저히 하고 왕복에 호위도 맡으라는 전언이오.”
“예, 그건 당연히 해야겠지요. 가만, 그럼 황제의 호위 의뢰로 쳐야지요. 의뢰비는요?”
“편지에 동봉했소. 세상에 고작 여기서 도시까지 오가는 동안 지키는 걸로 고트 금화를 줄 줄이야. 동생도 그렇고 참 통이 크구려.”
“금화를요? 금화 하나면 백부장급을 포함해서 열 사람 정도를 보내야겠네요.”
“하나가 아니라 다섯 개가 왔소.”
“헉.”
“크하하. 그래서 최고 중의 최고를 보냈소. 약속의 군단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베르세르크만으로 구성했다오.”
“훌륭해요!”
“뭘 이런 걸로. 그보다 황제를 맞이하는 자리가 더 큰일이오. 최소한 닷새 전에 연락을 줬다면 모를까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뭘 준비할 수 있을지.”
“일단 식사 시간은 아니니 다과라도 준비해야지요. 일레디온 식으로 준비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황제의 입맛에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하겠소.”
분주한 준비 끝에 얼추 모양은 낼 수 있었다. 황제에게 내놓을 접시와 찻잔도 본부를 샅샅이 뒤져서 그나마 가장 좋은 황동 그릇을 겨우 찾았다. 용병대 물건도 아니고 어떤 병장의 개인 물품이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 황제의 전령이 먼저 본채의 정문을 열었다. 그는 우렁차게 소리치는 대신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본채 전체에 울릴 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천신님의 가호와 태양의 햇살 아래 하이틸란트 제국의 모든 들과 숲과 산과 강과 바다와 모든 자유시와 제국시의 군주이시며, 모든 귀족과 기사와 시민과 농노의 보호자이시며, 모든 제국 영방 국가의 수장이시며…….”
“짧게 줄이렴. 내가 여기 대관식 하러 온 건 아니잖니.”
“예, 폐하. 가장 위대하고 존엄하며 자유로운 하이틸란트의 황제 루트비히 3세 납십니다!”
전령이 말을 마치고 바로 무릎을 꿇으며 허리를 숙였다. 본채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은 좌우로 갈라져서 왼손으로 무기를 잡고 오른손을 자신의 가슴에 붙였다.
“행복과 건강이 그대의 앞길을 밝히기를!”
좌우로 갈라진 병사들의 사이로 발데마르가 걸어가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황제가 손을 내밀자 발데마르는 그의 반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일어나게, 발데마르 경.”
“예, 폐하.”
“훌륭한 사람들을 보내 줬더군.”
“폐하께선 그럴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과연 그렇지. 바로 본론에 들어가 볼까. 일단 앉지. 사람들도 물리고. 궁정 예법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 치워도 좋다. 충분히 훌륭했으니까. 공식적인 방문도 아니고 말이야.”
황제 루트비히는 생각보다 소탈하게 말했다. 지현은 그제야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각진 턱에 눈썹이 진하고 눈이 깊어 여느 니오인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강인한 인상이었지만 동생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매끈하고 하얬다. 키는 지현과 비슷했지만 어깨가 떡 벌어졌다.
머리는 기름을 발라 곱게 옆으로 넘겼는데 원래는 그 위에 왕관을 썼던 건지 가볍게 눌린 흔적이 있었다.
“이쪽의 여인이 그 유명한 지현 재무관이겠군.”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그래. 슈틸나울트란 말이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인종이군. 다른 슈틸나울트하고도 다르군. 인종까지 다른 건 처음인데.”
루트비히가 지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지현은 당황스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재무에 특별한 능력을 지닌 슈틸나울트라. 제국관직 수석 재무관을 할 생각 있나?”
“예?”
지현은 자기도 모르게 반문했다. 갑작스러운 스카우트 요청이었다.
“제국관직의 수석 재무관이면 무역의 모든 권한을 지닌 관직이다. 재원 조달에 한해는 법을 새로 짓는 것도 가능할 만큼 권력이 막강하지. 원래는 황제 가문 사람 중에서도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이야. 파격적인 제안이니 고민해 보라고.”
지현은 대답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꿈지럭댔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가 상대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지현 양. 마음 가는 대로 말씀하시오. 폐하께서도 다 이해하실 터이니.”
“아.”
발데마르가 나직이 말했다. 지현은 머리가 맑아지는 걸 느꼈다.
어차피 국왕 앞에서도 할 말 다 했던 자신이었다. 입장할 때 퍼포먼스 때문에 위축되기라도 했던 걸까? 지현은 마른 침을 삼키고 고개를 바르게 세운 뒤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모처럼의 제안이지만 저는 이미 니오 용병대의 재무관입니다.”
지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불호령이 떨어질까, 아니면 비꼴까? 어느 쪽이건 걱정됐다. 그렇다고 어떤 사람일지도 모르는 황제를 덥석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아쉽군.”
의외로 루트비히는 애초에 지현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처럼 가볍게 받아들였다. 지현도 발데마르도 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혹시 생각 있으면 언제든 서신을 보내고. 문은 열어 놓을 테니까. 그럼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지.”
루트비히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앞으로 시종이 종이를 펼쳐 보였다.
“어디 보자. 그렇군. 니오 용병대 법관이 그대였지?”
“그렇습니다, 폐하.”
“오늘 여기 온 건 그대 때문이었다.”
“제가 감히 제국과 폐하의 시선을 끌 어떠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지 못하겠습니다.”
“니오 용병대의 법관이라면 그렇지 못하겠지. 솔직히 그것도 거슬리는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게 아니야. 그대의 다른 신분 때문이지. 예전 신분이라고 해야 하나.”
“제 예전 신분은…….”
“그렇다고 변호사 막스를 부르는 것도 아니야. 더 예전 말이지.”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감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다 알고 온 거 뻔히 보면서 발뺌하지 말라고. 막시밀리안 라인헤센. 그대가 카셀 대공국의 적자라는 건 이미 알고 왔으니까.”
법관이 눈을 꾹 감았다. 동상처럼 서 있던 용병들도 화들짝 놀라 눈살을 찌푸리거나 법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막시밀리안 라인헤센은 12년 전에 죽었습니다. 그에 대해 아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로군.”
루트비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잠시 자신이 찾는 대목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그냥 라인헤센 가문에 대해 마음대로 떠들지. 발데마르 경은 그냥 내 말동무나 돼 주게.”
“어, 예, 폐하.”
“우선 이거부터 말해야겠군. 현재의 카셀 대공, 그러니까 막시밀리안 라인헤센의 맏형인 빈센츠 라인헤센 폰 카셀이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
지현은 법관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도자기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언뜻 본 그의 손은 달랐다. 탁자 밑의 두 손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시퍼렇게 물들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사냥을 나갔다 곰을 만났다더군. 다행히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몸을 던진 덕에 목숨은 건졌지만 크게 다쳤어. 그 이후 고열에 시달리며 의식도 깜빡이고. 그게 벌써 보름 전인데 여전히 차도가 없으니 가문은 슬슬 준비를 해야겠지.”
“어떤 준비입니까?”
“관심이 생겼나 보군. 대공의 작위를 누가 받을 것인지 정해야지. 현재로선 4남인 안톤 라인헤센이 유력하군.”
“카셀 대공의 자식들은…….”
“딸만 셋이고 이미 다들 성혼했지. 정략혼이라는 게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인가? 그쪽에 작위를 넘겼다간 카셀이 여기저기 찢어질 판이라 라인헤센 가문이 용납할 리 없군.”
“그 사실을 막시밀리안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톤 라인헤센을 내 여동생과 결혼시킬 것이다. 최근 홀슈타인이 노골적으로 황권에 도전하고 바이젠부르크가 엘라이히에서 세력을 키우는 판이라 바벤베르크도 믿음직한 우방이 필요하거든. 마침 베로니카도 혼처를 구해 달라고 한 참이고.”
“정략적이시군요.”
“정략적이어야지. 내가 뭐 때문에 하이티리히 왕국까지 동생에게 맡기고 제국 전체에 집중하는데. 동생이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애 같아서 좀 걱정이지만. 그러고 보니 발데마르 경과 지현 경은 저번에 동생 녀석을 기함하게 만들었더군.”
“제가 부여 받은 통솔권과 지시 받은 명령을 최대한 따랐을 따름입니다. 전하의 명령대로 저 자신은 본진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녀석에겐 다음부턴 용병을 고용하면 병의 모든 권한을 직접 갖든가 아니면 아예 풀어놓으라고 충고해 줘야겠어.”
“고용주의 명령이라면 충성을 다해 따릅니다. 설령 독립된 작전 권한을 주시더라도 승리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아, 애초에 그 건으로 책망할 생각은 없네. 니오 용병대를 제 군대에 복속시키지도 않고 자리만 정해 준 그 녀석의 전술이 잘못됐던 게지. 또 이야기가 옆으로 샜군.”
황제가 손가락을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시종이 종이를 걷어 갔다.
“아무튼 결혼으로 두 가문의 동맹이 공고해질 거야. 두 가문의 피가 섞였으니 황권을 노릴 때도 도움이 되겠지. 혈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서로 좋다는 말이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어. 만약에 셋째인 막시밀리안이 살아 있다면 말이지.”
루트비히가 잠시 말을 멈추고 법관의 안색을 살폈다. 법관은 여전히 고요한 얼굴 그대로였다. 루트비히는 혀를 찼다.
“북서부는 대부분 장자 상속제로 통일했지만 중남부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가문에 따라선 형제 상속, 장자 상속, 심지어 분할 상속을 유지하는 곳도 있지. 라인헤센도 그런 가문이야. 전대 가주의 가장 가까운 핏줄이 가문을 잇게 돼 있군. 그리고 넷째 동생보다는 셋째 동생이 더 가깝단 말이지.”
“설령 죽은 줄 알았던 셋째가 돌아온들 12년이나 가문에 관여한 적이 없는 이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정통성은 모든 상황에 우선하지. 언제나, 어디서나.”
“어째서…….”
처음으로 법관의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다. 슬픔, 설움이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어째서 그러한 사실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까. 폐하, 제국의 황제이시여. 당신께서 일일이 살펴야 할 만큼 크고 중한 일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네가 피할 수 있을 만큼 작은 파문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시대의 흐름이고 세계의 파도이다. 운명에게서 도망치려 들지 마라 막시밀리안 라인헤센!”
“그는 죽었습니다. 저는, 저는 그 이름을 버렸습니다.”
“이름을 버리는 게 네 뜻처럼 쉽겠더냐?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게 네 마음처럼 쉽겠더냐? 내가 찾아오지 않았던들 라인헤센이 찾아왔을 거다. 그들은 이미 네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이 어찌 저를 안단 말입니까? 저는 두 차례나 죽음을 겪은 자입니다.”
“두 차례 모두 위장된 죽음이었고, 두 차례 모두 라인헤센 가문이 관여했으니 당연히 알겠지!”
“그, 그럴 리 없습니다. 첫 번째 암습이야 그렇겠지만 두 번째는 발데마르 대장님이……. 대장님……. 설마…….”
“우연히 호위도 없이 도시 밖을 걷던 변호사와 우연히 변호사에게 원한을 가진 상인이 마주쳤을 때 우연히 지나가던 정의롭고 용감한 용병대장이 구해 준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저 도시의 수비를 의뢰 받고 그 지역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그대 또한 그 무대의 등장인물에 불과했지. 대본에 조종당하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관이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찼다.
“황제 폐하. 당신께서는 어찌 그 모든 걸 알고 계신 겁니까?”
“빈센츠와는 막역한 사이다.”
황제의 음정도 조금이지만 낮아졌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가문을 장악하는 데 방해될 것이라 치우더니 어째서 그 뒤엔 목숨을 살려 준단 말입니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루트비히는 그런 법관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게는 두 가지 선택을 주겠다.”
법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루트비히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문으로 돌아가 공국을 승계하고 내 여동생과 결혼하는 것이다.”
“저는…….”
“지현 경과 너는 경우가 다르다. 당장 대답하라고는 않겠다. 하지만 빈센츠가 죽기 전에는 대답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모든 걸 버려라. 니오에 정착해 니오인이 되어라. 네가 그리한다면 나 또한 너를 외국인으로 대해 주겠다. 가문의 추적도 적절히 물리쳐 주마. 하지만 네가 그리하고 나선 제국에게 무엇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후 라인헤센에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너와 관련될 수 없다.”
“저는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허면 이 나라를 떠나란 말씀이십니까?”
“네가 이미 그러고 있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넌 아직도 새 이름이 없지?”
“그거야말로 제 과거와 결별하고자 하는 제 각오입니다.”
“그저 도망친 거겠지. 과거와 결별, 새로운 시작 따위가 아닌 잠깐의 도피처를 찾은 것처럼. 너는 부정하고 있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보아라. 과연 내 말이 틀렸는지.”
“저, 저는…….”
루트비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돌아서자 용병들이 재빨리 문밖으로 나가 사열했다. 귀환하는 황제를 호위해야 했다.
“떠나기 전에 한마디만 더 하마. 네가 무엇을 선택하건…… 빈센츠가 의식을 잃기 전에, 그가 죽기 전에 찾아보기는 하여라. 그는 널 아꼈으니.”
“형님은 저를 치우려 했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할 리 없습니다!”
“뭐?”
막 문밖으로 발을 내밀던 루트비히가 우뚝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낮고 무거워졌다.
루트비히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뒤로 돌아섰다.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빈센츠가 너를 죽이려 했다고? 설마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냐?”
놀랄 만큼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의 말이 서릿바람처럼 본부를 휘감았다.
“믿을 수가 없구나. 빈센츠가 너를 죽이려 했다고? 이건 있을 수, 아니 있어선 안 돼! 세상에, 지금까지 아무도 네게 가르쳐 준 적이 없던 게냐?”
법관은 루트비히의 고함에 바싹 움츠러들었다. 그 대상이 아닌 지현조차 움츠릴 만큼 거친 기세였다.
빈센츠를 배웅하기 위해 일어섰던 발데마르가 슬쩍 법관의 옆자리에 섰다. 그 모습을 본 루트비히는 더욱 분개했다.
“널 보호하는 저자와 만난 게 누구 덕인데! 암살자들로부터 널 지킨 것도! 이럴 수가! 지금까지 네가 무사히 니오 용병대에 숨어 있을 수 있던 게 모두, 아니 도대체. 어째서 아무도 설명해 준 적이 없는 거지? 맙소사, 빈센츠!”
시뻘겋게 달아오른 루트비히의 얼굴을 시종이 손수건으로 닦았다. 루트비히는 분을 못 참고 뜨거운 숨을 씩씩 내뱉었다.
“가문을 장악하는데 방해될까 봐 널 치우려 했다고? 그건 전대 카셀 공작, 네 늙은 애비였다! 오히려 빈센츠가 둘째를 지키지 못했다고 얼마나 자책했는데 정작 간신히 구해 낸 셋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내가 준 선택지 따위는 잊어라! 네놈을 빈센츠 앞으로 보내려 했다니 내가 크게 실수할 뻔했구나!”
루트비히가 거칠게 돌아섰다. 문밖으로 나간 그는 입구에 우뚝 서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귀족에게 권력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는 황제인 내가 더 잘 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빈센츠가 너를 죽이는 일이 쉬이 일어날 거라 생각지 마라. 우리는, 형이란…… 그런 사람이니까.”
황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건물을 나섰다. 지현과 발데마르가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지현은 문득 루트비히가 법관을 통해 자신의 동생을 본 게 아닐까 생각했다.
루트비히가 떠나고 한참이 지나도록 법관은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그는 혼몽하게 ‘형님이 나를?’이란 말만 중얼거렸다.
“답지 않게 흥분했군. 암행은 이런 점이 다행이야. 화가 난다고 화를 낼 수 있거든.”
루트비히는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니오 용병대는 서로 다른 계급이 마구 뒤섞여 있지. 그러다 보면 이런 감각에 무딜 수도 있겠군. 군주라는 인종은 친구가 귀하다네.”
루트비히는 그렇게 말하고 발데마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친구는 곰을 만나 죽음의 문턱에 섰지만 발데마르는 그런 무시무시한 곰을 맨손으로 죽였다. 루트비히는 발데마르가 곰과 ‘싸워서’ 이겼다는 게 사실인 걸 알았다.
“빈센츠가 그대와 같았더라면 사냥하다 곰 따윌 조우했다고 목숨이 위태롭진 않았겠지. 하다못해 그대 같은 기사라도 있었다면……. 그대에게도 제국의 문은 항상 열려 있네. 언제든 찾아오게.”
“호의와 환대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래. 제국 하니 아까 말하는 걸 깜빡했군. 곧 있을 제국 의회에서 약속의 군단 출신들로 의전을 챙긴다는 계획, 마음에 들었네. 비용은 얼마든지 내지. 다른 제후들의 기를 죽여 놓을 좋은 기회야.”
루트비히가 그렇게 말하자 시종이 품에 지니고 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니오 용병대의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킨 계획서였다. 발데마르는 그 내용을 가볍게 훑어보고 계획서를 챙겼다. 나중에 간부들과 상의해야 할 내용이 많았다. 루트비히의 참모들이 고민해서 계획한 게 분명했다.
“통일된 무장은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주지. 그러고 보니 니오 용병대도 제식 갑주를 도입한다고 했던가? 좋은 판단이야. 근황군은 내가 대관하자마자 제식 무장을 도입했어. 아직은 일레디온 제국의 위세를 빌려야겠지만 그것도 곧 바뀌겠지. 제국도 전 같지 않으니.”
대화하며 걷는 사이 마차가 루트비히 앞에 멈췄다. 한 기사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부를 점검한 뒤 루트비히를 안내했다.
황제의 마차치고는 아담했다. 하지만 화려함과 섬세함만큼은 문외한이 보아도 빼어났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면서도 권위는 잃고 싶지 않은 사람에겐 꼭 맞는 선택이었다.
“끝으로 지현 경은 이 표식을 주지. 편지에 동봉하면 언제든 내 측근과 연결될 수 있으니.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고. 슈틸나울트도 개체차가 있다지만 그대는 이미 자기 능력을 과할 정도로 증명했으니. 덕분에 난 니오 용병대를 얻지 못했지만.”
“저, 저는…….”
“긴장할 거 없네.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적대할 마음은 없으니까. 오히려 친하게 지내야지. 이러나저러나 대륙 최강의 용병대에 니오 왕국과 무역 협약까지 주선해 줬는데.”
“다시 생각해도 역시 과분한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과분할 거 없어. 사람은 가진 만큼 대접받기 마련이지. 그대나 발데마르 경이나.”
루트비히가 마차에 올랐다. 니오 용병대원들이 호위 대형을 갖추고 마차 주변을 둘러쌌다. 출발하기 직전, 루트비히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던 시종이 지현을 불렀다. 막 건물로 들어가려던 지현이 그의 부름에 돌아섰다.
“황제 폐하께서 우호와 친교를 증명하시고자 그대에게 진귀한 정보를 내리시니 이는 자손만대 영광이 이어질 위대한 치적이노라. 그대는 영혼을 정갈히 하여 온몸을 열고 들어…….”
“에머리히 경, 내일 출발할 것이오?”
“줄이겠소. 황제 폐하께서 선의로 내려 주신 정보인 만큼 감사히 받으시오.”
“예.”
지현은 일단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상대는 최소한 무릎을 꿇는 것 정도는 기대했는지 갈고리눈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지현에게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루트비히의 시종과 기사들 모두 마차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지현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몇십 분 정도였는데 그사이 태풍 속을 돌아다닌 기분이었다.
“황제가 직접 지현 양을 콕 집어 전달하다니 보통 일이 아니구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말한 것치곤 미련이 철철 넘쳐흐르는 거 같아요. 높으신 분들한테 관심 받는 건 피곤한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보통이라오.”
“제가 그런 사람이었으면 한참 전, 다른 귀족들 눈에 들었을 때 이적했겠죠.”
“예나 지금이나 그러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하오.”
“에효, 어서 들어가요. 법관 씨도, 이름이 막시밀리안이라고요?”
“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싫어할 것 같소. 나는 전직 변호사 막스라고만 알았는데 설마 대공가의 삼남일 줄은…….”
“대장님!”
“막, 법관. 무슨 일인가? 자네가 이렇게 튀어나오는 건 처음 보는군.”
“죄, 죄송합니다. 저도 너무 경황이 없어 그만…….”
지현과 발데마르가 막 법관을 어떻게 달랠지 고민하며 정문 앞에 서는 순간 법관이 나오며 두 사람 코앞에 소리쳤다. 법관도 발데마르가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오히려 본인이 더 놀랐다.
“그래, 무슨 일인가? 일단 들어가 얘기하지.”
“예. 혼란스럽고 또 그렇기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내일부터 휴가를 내야겠습니다.”
“그렇군.”
발데마르는 법관을 내려다보았다. 결론을 내린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 결심한 건 분명했다. 아마 그의 여행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답을 구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게다, 하인리히.”
“예, 대장님!”
“각자 백부대에서 최고를 선별해 열 사람씩 뽑아라. 의뢰주는 나 용병대장 발데마르. 의뢰 내용은 요인의 호위이다.”
“예, 알겠습니다!”
“대장님…….”
“카셀까진 먼 길이네. 호위도 없이 돌아다니다 덜컥 늑대나 덤불 기사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큽, 감사, 합니다. 크흑.”
법관이 다시 한 번 오열했다. 병사들이 그런 법관을 달래 방으로 돌려보냈다.
“법관은 5년 동안 용병대에서 각종 행정 업무에 헌신을 다해 왔소. 그런 만큼 그가 빠지면 본부에 그 여파가 클 건 자명한 일이지. 그래도 역시 과거와 마주 보고 깨끗하게 정리하는 게 좋겠지. 어떤 결과가 나오건.”
발데마르가 땀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황제를 대접하려고 준비한 다과는 결국 손도 못 댔다. 다시 생각해도 폭풍처럼 들이닥친 사람이었다.
“법관은 그렇다 치고. 지현 양, 황제가 남긴 건 무엇이오?”
“저도 이제 펼쳐 보려고요.”
“이거 좀 드시구려. 너희도 먹어라. 모두 먹기엔 양이 적으니 잘 나눠 먹고.”
발데마르는 지현에게 잔을 건넸다. 안에는 연분홍빛의 음료가 담겨 있었다. 지현은 독특한 색을 감상하며 마시고는 부드러운 단맛과 독특한 향에 깜짝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뜬 지현을 보며 발데마르가 웃었다. 역시 요리해 줄 맛이 나는 사람이었다.
용병대에는 똑같이 놀라도 별생각 없이 맛있다며 그냥 후루룩 들이켜 버리고 마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옆에서 후루룩 들이켜고 있는 리하르트와 그런 리하르트의 뒷목을 때려서 잔을 뺏어 가는 힐다처럼.
“이건 무슨 음료인가요?”
“멜리갈라라는 음료를 황궁 조리장의 비법대로 개량한 것이오. 기본은 꿀을 탄 우유지만 특별한 허브와 향신료를 첨가해 향과 색을 냈다오.”
“그렇군요. 아, 힐다 씨. 이거 드세요.”
“고마워요. 하인리히, 이건 너 마셔라.”
“너무함다, 힐다 누님.”
지현은 말린 과일을 하나 집어 먹으며 양피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뜻밖의 소식이 적혀 있었다.
“무슨 내용이오?”
“또 다른 슈틸나울트의 정보예요. 제가 슈틸나울트를 찾는다는 소식이 황제 폐하께도 전해졌나 봐요.”
“또 다른 슈틸나울트라.”
“슈틸나울트가 생각보다 많은 모양임다. 전 지현 양을 만나기 전까진 걍 뜬소문이나 전설인 줄로만 알았슴다.”
“의외로 많기는 하다. 일레디온 제국에는 그런 이들의 기록도 상당히 남아 있지. 전설이나 신화 따위가 아니라 사서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 처음 왔을 때 제가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걸 눈치챈 사람은 발데마르 씨뿐이었지요.”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신경을 덜 써도 정보가 모이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소. 슈틸나울트도 그런 것이었지. 그래도 여전히 드문 존재라오. 전 대륙을 다 합쳐도 몇 안 되니. 나도 알기는 했지만 살아생전에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저는 운이 좋았네요.”
“우리 모두 운이 좋았지. 그래서 그 새로운 슈틸나울트는 누구요?”
“좀 더 자세히 읽어 봐야 알겠어요.”
정보의 발신처는 천신교의 중심인 일레다 대교구였다. 누탈로 반도 동북부의 히스타치아 공화국 외곽 영토에 성인으로 추앙 받는 이가 나타났는데 다각도로 조사한 결과 대상은 기적을 행하는 게 아니라 세상 바깥의 기술을 지닌 자라는 것이었다.
그가 여러 사람에게 성인으로 추앙 받는 이유는 그의 의술이 기적과도 같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 창에 맞아 사경을 헤매던 이는 물론이고 역병에 걸려 산 채로 소각당할 뻔한 사람까지 그와 만나고 나면 깨끗하게 나았다.
지현 역시 그걸 읽고 기적이 아니면 현대 의학일 거라고 생각했다. 상당수의 병은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고 이곳 사람들에게 항생제는 기적이랑 다를 바 없으니까. 작은 알을 꾸준히 먹기만 하면 병이 사라진다니, 기적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치료를 받은 사람들과 현지 의사들, 현장을 검증하러 간 주교까지 입을 모아 기적을 찬송했다. 하지만 천신교의 정보원들은 꼼꼼하고 세심하며 무엇보다 의심이 많았다.
그들은 대상의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 그의 인종이 대륙인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 그가 거주하는 집이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어떠한 외부 인력과 자원의 유입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났다는 점 등을 알아냈다. 그리고 각 왕실에 요청해 유사한 과거의 사례까지 찾아냈다.
과연 한 대륙의 문화와 생활을 지배하는 종교 조직다운 정보력이었다. 대상의 정보는 일레다 교구의 기록보관소에 저장됐고 조사에 도움을 준 군주들에게도 전해졌다. 그중 하이틸란트 제국의 황제인 루트비히도 있었다.
기적을 행한다는 건 종교의 권위와 직결돼 있다 보니 이런 일에는 종교 지도자나 세속 지도자나 다들 민감했다. 눈에 띄는 외계인의 정보는 일단 모으고 포섭하든 제거하든 선택하는 것이다.
“이 정도로 꼼꼼히 조사한 걸 보니 좀 소름 돋는데요. 혹시 저도 제가 모르는 사이 이렇게 조사당한 걸까요?”
“우리와 함께 있는 이상 그건 어렵다고 말하고 싶지만, 지현 양은 대외 활동도 잦았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겠소.”
“세상에…….”
“그나저나 히스타치아 공화국이라. 여기는 그냥 한 번 들러 보겠다는 생각으로 가기에는 좀 멀구려.”
“얼마나 멀까요?”
“루발라와 비슷하오. 말을 타고 소수의 인원이 가장 짧은 길만 택해서 가도 최소한 스무날 이상은 걸린다오. 길 중간을 류코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특히 오래 걸리지.”
발데마르는 말을 끊고 지현의 안색을 살폈다. 지현이 크게 실망할까 걱정됐다.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지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멀다는 게 뭐가 그리 대수인가? 못 갈 것도 아닌데.
아무튼 지현에게는 만나 봐야 할 사람이었다. 설령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르더라도 의료 지식을 지닌 사람과 친해서 나쁠 일은 없다. 당장 지금도 병에 걸리면 어쩌나 무서운 판이니.
“황제 폐하께 감사의 인사를 해야겠어요.”
뤼나에게 한 번, 루트비히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교통 통신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사회지만 일국의 수장이나 그에 준하는 자리라면 외계인의 정보를 습득하고 보관한다는 걸. 황제와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생각난 김에 바로 편지를 보내죠.”
지현 자신이 황제의 재무 담당자가 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기술이란 건 나눈다고 줄어드는 게 아니었다.
지현은 황제가 지정한 사람을 교육해 주겠노라 약속하는 내용의 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걸 네로에게 맡겨 도시로 보냈다. 네로는 루발라 대사를 만나겠다고 했고 외교관을 만나는 자리라면 황제도 배석할 테니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를 통해 황제에게 전달할 수는 있었다.
상황이 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제 신입의 교육은 지현이 참석하지 않아도 됐다. 지현은 자신에게 늘어난 자유 시간을 확실하게 활용할 생각이었다.
“발데마르 씨.”
“말씀하시오.”
“저도 휴가를 받아야겠어요.”
“그렇구려. 반년만의 첫 휴가라.”
발데마르는 지현을 말리지 않았다. 단지 멀리 가는 길이 걱정될 따름이었다.
“힐다.”
“네, 대장.”
“아드니와 상의해서 스무 명을 뽑아라. 그리고 네가 직접 지휘해라.”
“내가 직접이요?”
“그래. 생각 같아선 내가 가고 싶지만……. 믿고 맡긴다.”
“헤헤, 나만 믿어요, 대장! 자, 지현 양. 언제 출발할까요?”
“빠를수록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휙휙 떠나 버릴 수는 없지요. 지금 준비 중인 일을 마무리하고 출발할게요. 한 열흘 이상은 걸릴 거예요.”
“그때 의뢰 중이 아니려면 일정을 잘 관리해야겠네요.”
“부탁할게요.”
지현은 조금 더 쉰 후 사무실을 찾았다. 회계사 두 사람은 도시로 내려갔고 파올로와 아디슬, 신입 행정병들이 남아 있었다. 지현은 기본적인 것들을 점검하고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다.
최근 니오 용병대를 고용했던 귀족들로부터 신형 갑주를 소량 구매하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아직은 사업이라고 할 만큼 체계도 안 잡혔고 큰돈은 안 되지만 이런 식으로 유행을 퍼뜨리면 어느 시점부터 주문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었다.
사실 니오의 신형 갑주가 대륙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갑주보다 특출하게 방어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철의 질이 좋은 만큼 효과는 기대할 수 있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굳이 멀리서 비싼 값을 주고 수입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니오 용병대’가 그걸 사용하는 걸 직접 봤다는 사실이었다. 니오 용병대는 이 갑주를 입기 전에도 최강이었지만 소비자에겐 그런 사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성능도 최상급이었으니 이걸 소량 도입한 귀족과 그의 기사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역시 좋은 갑옷이야.’라고.
소비 행위에도 관성이란 게 있다. 기사의 실력은 그대로일 것이고 다른 어떤 갑옷을 사건 장인이 정성들여 만든 것이라면 똑같았을 테지만 그들은 니오의 갑주를 선호하게 된다.
지현은 그런 상황을 유도했다. 의뢰가 들어올 때마다 지휘관들은 과시하듯 서코트나 타바드도 입지 않고 갑주를 내보였다. 최선의 전력을 보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 나면 이런 말을 흘려주는 거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지만 갑주가 튼튼해 잘 막아 냈다.’
‘통일된 무장이 지휘에도 이점을 주고 관리도 편하게 만들어 준다.’
‘이건 우리의 제식 무장이다. 아직 용병대 전원이 무장하진 못했지만 본부를 중심으로 꾸준히 도입 중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부인에게도 판매하는 것 같더라. 프랑켄도르프 백작도 몇 벌인가 주문했더라.’
노골적으로 보이지만 광고란 적당히 노골적인 게 좋다. 덕분에 이미 주문해서 사용하는 귀족도 있었다.
백작이 풍년인 제국이지만 그런 백작들 사이에서도 ‘급’이란 게 있기 마련이었다. 프랑켄도르프 백작은 하이티리히 국왕의 측근이고 영토도 손에 꼽힐 정도로 넓으며 상업이 발달한 도시를 여럿 보유했다. 그런 사람이 주문했다는 건 꽤나 묵직한 사실이었다. 단순히 다른 귀족들이 프랑켄도르프 백작의 안목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니오 용병대의 제식 갑주를 사용하신다고요? 마침 저도 의뢰를 맡겼다 우연히 보고 주문했는데 정말 뛰어나더군요. 역시 대단한 안목이십니다.’
이런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귀족 사회에 어떤 여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이미 갖추고 있었다. 가진 걸 활용하는 게 지현의 일이었다.
‘수운의 이용은 제한이 빡세서 확대하기 힘들지만 육로는 이쪽으로 하면…….’
갑주의 주문을 받으며 귀족들에게 다른 언질도 흘렸다. 지금 용병대가 받고 있는 무관세 혜택의 다른 이용 방법이었다.
도로는 빈약하고 여행은 위험하며 물자의 수송은 언제나 부담을 안고 있는 사회이다. 그럼에도 장원제라는 고치를 깨고 인력과 자본이 도시에서 도시로, 장원에서 장원으로 이동하며 상업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과도기인 것이다.
과거의 장원은 자급자족의 세계였기에 도로를 이용할 필요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도시의 발달과 상업의 활성화가 소비를 창출해 냈다.
농사 지어 음식을 구하고 입을 옷을 짓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니다. 귀족들은 문화에 굶주려 있다. 그리고 문화는 도로를 타고 흐른다. 항상 돈과 함께.
귀족들은 도로를 보호하고 대신 통행세, 관문세, 보호세 등을 걷으며 수익을 냈지만 그만큼 길바닥에 다시 뿌려야 했다. 도로를 보호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현은 그런 상황을 잘 이용했다. 목표를 바꾼 것이다. 대상 고객을 상인에서 귀족으로. 도로를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며 가로막는 걸 치워 버리는 대가로 귀족들은 니오 용병대가 소량의 상품을 수송하는 것 정도는 눈감아 주는 것이다.
용병을 고용해 도로를 정리하는 건 비쌌다. 도로를 도적떼나 다른 용병들이 점거하면 전쟁에 준하는 수준으로 비쌌다. 어중이떠중이를 고용하면 오히려 그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상인들에게 통행세를 걷을 때도 있었다.
니오 용병대는 한정된 도로지만 훨씬 저렴하게 처리해 주겠다는 것이다. 똑같이 용병인데 귀족들이 그걸 납득했느냐면, 니오 용병대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명예와 명성을 지현이 한 번 반짝이게 닦아 전시한 것으로 해결했다.
노바 일레디온 제국의 황제 친위대인 약속의 군단은 외국인 용병 부대이면서 수백 년에 걸쳐 단 한 번도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었고 니오 용병대에는 그런 약속의 군단 출신들이 잔뜩 포진해 있다. 또한 니오 용병대는 백 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의뢰인에게 항상 충성을 다해 왔다.
그걸 상기시키자 귀족들도 과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 니오 용병대에게 차용증을 내줬다가 도시를 잃은 몇몇 귀족은 성을 내겠지만 여론을 만들기엔 수도 적고 지은 죄도 많았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현은 여러 귀족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앞으로 몇 달이 걸릴지 몰랐지만 본부와 가까운 지부 사이의 도로에서 시범 운용하는 건 며칠 이내에 가능했다. 프랑켄도르프 백작과 야드가르의 영향권인 덕분이었다.
“아디슬 씨, 슈바인베르크 남작의 주문서가 어디 있지요?”
“따로 말씀하시지 않으셔서 의뢰서 항목에 모아 놓았습니다.”
“이런, 앞으로는 의뢰서랑 주문서를 분리해서 보관해야겠어요. 상품 주문이랑 인력 파견은 구분해야지요.”
“알겠습니다.”
“본부에 갑주 재고품이 얼마나 있더라. 아, 본토에서 다음 주에 추가 갑주를 발송해 준다고 했으니까 재고 관리인 분들에게 미리 알려 주세요.”
“넵. 이번에는 얼마나 온다고 합니까?”
“일단 100벌 먼저 보낼 거래요. 광산 개발 건으로 생산 속도가 느려졌어요.”
“광산은 중요하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광산이 당장 수익을 내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인력을 쏟아부으면 다른 데서 문제가 터질 게 뻔한데.”
지현은 다시 한 번 구시렁거리고 주문서를 찾았다. 여론 조성을 위해선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안 그래도 도로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줄일 수 있는 곳에서 최대한 시간을 줄여야 했다.
‘법관 씨가 걱정이네.’
법관은 지현이 사무실로 돌아올 무렵에 용병대에서 떠났다. 정말 준비도 없이 훌쩍 떠났다.
발데마르는 급히 떠나는 법관에게 자신의 사재를 털어 금화를 한 움큼씩이나 쥐여 줬다. 지현이 예산을 작성하기도 전에 모든 일이 처리됐다. 그만큼 몸도 마음도 급했기 때문이리라.
법관과는 업무 때문에 자주 이야기를 나눠야 했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만약 법관이 그곳에 남는다면 그 빈자리가 클 것 같았다. 업무 분야로나 개인적으로나.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어떤 선택을 하건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지현의 마음이었다.
“자, 그럼 여기까지 하고 다들 퇴근하세요. 수고하셨어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재무관님.”
지현은 업무를 마치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발데마르와 하인리히가 먼저 나와 몸을 풀고 있었다.
“두 분은 표정이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었나요?”
“아니, 그냥 법관이 걱정돼 그렇소. 형이 죽이려 했다는 건 오해였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슴에 품고 있을 터인데.”
발데마르의 말에 지현은 가슴 가운데로 무언가 쑥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 고민은 지현만의 것이 아니었다.
“법관 씨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죠?”
“친구의 새 출발을 축복하며 한잔 들어야겠지.”
“만약 돌아오면요?”
“돌아온 형제를 환영하며 한잔 들면 되지 않겠소?”
“훌륭해요.”
지현이 싱긋 웃으며 방패를 쥐었다. 오늘은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을 거 같았다.
* * *
법관은 정확히 12일째 돌아왔다. 지현이 막 교통정리를 마치고 먼 남쪽으로 여행 갈 준비를 하던 시점이었다.
법관은 몹시 지쳤고 야위었다. 발데마르는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함께 다녀온 병사들은 특별한 일은 없었다고 대답했다.
카셀 대공의 성에 들어가는 것도 아무런 마찰이나 충돌이 없었다. 법관이 어렸을 적에 모친에게서 선물로 받았던 로켓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덕이었다. 다른 모든 걸 버리고 이름마저 버려도 버리지 못한, 미련의 조각이었다. 그런 물건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모친이 살아 있던 시절부터 성에서 근무했던 집사가 여전히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마치 운명이 그에게 형과 대면하라고 지시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성 안에서도 문제는 없었다. 용병들은 혹시 모를 암살에 대비해서 최고 수준의 경호를 펼쳤고 성의 사용인과 병사들도 그걸 용인했다. 성의 기사가 불쾌하게 여겨 마찰이 있을 법도 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법관은 다음 날 새벽 그의 형을 만날 수 있었다. 둘 사이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병사들도 듣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법관이 직접 입을 열 차례였다. 발데마르가 법관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법관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더니 발데마르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울며 소리쳤다.
“대장님! 발데마르 대장님! 부디 저를 형제로 거둬 주십시오!”
“일단 일어나게.”
발데마르가 법관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우선 여독을 풀고 마음을 안정시키라 말하며 법관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출발은 잠시 미뤄야겠어요. 미안해요, 힐다 씨.”
“아뇨, 저걸 보니 저도 좀 미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법관은 꼬박 하루를 잤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형님께선 오히려 제게 사과하셨습니다. 아버지를 막지 못해 미안하시다고…….”
선대 카셀 대공은 야망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야망에 잡아먹혀 광증에 시달릴 정도로.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되지 못하자 자신의 자식을 황제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를 위해서 카셀 공국의 모든 힘을 모아 단 한 사람에게 몰아줘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건 계승권 분쟁을 막아야 가능했다. 그렇기에 차기 대공으로 지목한 첫째를 제외한 모든 권리자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막대한 반발이 있었다. 학살을 찬성할 만큼 가신과 측근들까지 함께 미치지는 않았다.
봉신들이 반대하자 대공은 일단 계획을 물렸다. 대신 그의 장자가 공국의 모든 권한을 승계하는 데 봉신들 전원이 힘을 모으라 지시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일단락된 줄 알았다.
하지만 자기 생각에 미친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대 카셀 대공은 어떤 귀족보다도 특출하게 미친 사람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씩 계승권을 지닌 사람과 그를 보호하는 이들이 사라졌다. 식중독으로, 맥각병으로, 심지어 흑사병에 걸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그 이외에도 사냥 중 낙마 사고로, 시찰하다 강도를 만나서 죽어 나갔다.
사람이 죽는 거야 흔한 일이었고 모두 ‘있을 법한’ 일이었다. 어떤 봉신은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챘지만 건설 현장을 지휘하다 부역 중이던 농노가 던진 돌을 맞고 어이없게 죽었다.
법관의 큰형 빈센츠는 둘째가 훈련을 하다 날을 죽인 검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됐을 때 모든 걸 알았다. 그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둘째는 죽었다.
빈센츠는 부친에게 따졌지만 따귀만 맞고 쫓겨났다. 빈센츠가 독한 사람이었다면 사람을 모아 부친을 축출했을 것이었다. 선대 카셀 대공은 그걸 은근히 종용했다. 강한 군주가 되려면 푸른 피를 지녀야만 한다고.
하지만 빈센츠는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남은 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여동생들 또한 계승권을 지녔기에 인맥을 동원해 혼처를 찾았다. 그렇게 어떻게든 부친의 사정거리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던 중 법관에게도 암살자가 닥쳐왔다. 선대 카셀 대공이 예상치 못한 건 가문의 친위 기사 일부를 빈센츠가 포섭했다는 것이었다.
사전에 정보를 알았던 빈센츠와 기사들은 암살자로부터 간신히 법관을 구했다. 하지만 한 번 구한들 다음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여전히 공국은 대공의 손아귀에 있었다.
빈센츠는 암살자를 모조리 제거하고 자신이 포섭한 친위 기사와 말을 맞췄다. 암살자들이 실패해 자신의 손으로 법관을 제거했다고. 그리고 법관은 밖으로 빼돌렸다.
법관은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서 호위했던 친위 기사가 자신을 구해 준 줄로만 알았다. 사실 그 뒤에 빈센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빈센츠가 아니라 그날, 법관을 살렸던 친위 기사 본인에게 들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 수도 사령관에서 명예직으로 자리를 옮기고 성내에 살고 있었다.
“저는, 저는 되먹지 못한 놈입니다. 어찌 그리도 생각이 얕을 수가 있습니까? 어찌 그리 멍청할 수가…….”
“자네 잘못이 아니네. 그 경황 중에 누가 진실을 꿰뚫어 본단 말인가?”
“저는…… 형님께 사과를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때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러했을 것입니다.”
“자네는 자네라네. 누구도 남과 같을 수는 없어.”
그 이후로도 빈센츠의 보호는 계속됐다. 갓 열여섯 된 어린 청년이 도시로 나가 변호사로 개업하기까지 보이지 않는 지원이 그를 지탱했다.
빈센츠는 놀랍도록 치밀했다. 부친의 치밀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완벽하게 필연을 가장해 법관을 도왔다. 법관 자신이 변호사로 성공한 건 그리 될 법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형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당신께선 저를 계속 지켜 주셨습니다. 발데마르 대장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두 분은 좋은 우정을 나눌 수도 있을 텐데…….”
“자네 말을 들으니 나도 꼭 만나 뵙고 싶어지는군.”
“품안의 사람은 온 힘을 다해 보살펴 주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저는 지금까지!”
법관이 다시 오열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주위 다른 용병들이 그를 다독였다. 발데마르는 평소 지현이 마시는 차를 건넸다. 진한 당귀 향이 마음을 좀 진정시켰다.
“대장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형님 생각이 나서 제 추태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런 분이 사경을 헤맨다니 안타까운 일이로군. 유감일세.”
“그나저나, 그럼 왜 공국에 돌아가지 않은 검까? 이제 죽을 염려도 없고 형님도 위태로우신데 곁에서 지켜 드려야 하지 않슴까?”
“나는, 그럴 자격이 없네. 십수 년을 밖에서 나돌았네. 공국의 일은 하나도 모르지. 그런데도 나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동생의 계승권을 흔들어. 형님이 사랑으로 일군 공국을 내가 망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네.”
법관은 그리 말하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께선 제게 자유롭게 살라 하셨습니다. 제 발걸음이 닿는 곳이 제 세상이 될 거라 하셨습니다. 대공의 자리가 부담스럽다면 재판관으로 살며 동생을 보필해 주는 것도 좋다고…….”
빈센츠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야기를 길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는 법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빈센츠가 의식이 있는 동안 법관은 니오 용병대의 이야기를 풀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빈센츠는 발데마르를 고른 건 정말 훌륭한 선택이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법관이 백지라 표현했다. 누구의 아들도, 누구의 군주도, 누구의 신하도 아닌 오직 자신뿐인 백지. 그렇기에 발길이 닿는 대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숙고한 끝에 용병대에 남고 싶다는 건가?”
“그냥 남고 싶은 게 아닙니다. 저를 니오인으로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감히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게 염치없겠지만…….”
“아니. 자네가 그동안 용병대에 헌신한 것만 보더라도 자네에겐 자격이 충분하네.”
“저는…… 감히 불의 시련에 도전하겠습니다.”
“뭐? 아니, 그거랑 이건 얘기가 다른 거 같은데.”
“저도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새 이름을 받고 형제가 되게 해 주십시오.”
발데마르가 턱을 쓰다듬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용병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각오는 도망친 결과가 아니라 그대의 자유 의지인가?”
“물론입니다.”
“불의 시련이다! 밤을 준비하라!”
“예! 대장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지현만 그게 무엇인지 몰라 하인리히에게 물었다.
“불의 시련이 뭐예요?”
“본부 입단 시험입니다. 원래는 먼 옛날 존재했던 전사단의 입단 시험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이름만 같고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그게 어떤 거지요?”
“전우애와 신뢰를 확인하는 시험입니다. 대상자는 자신을 도와줄 전우를 청하고 그들과 함께 방패벽을 펼쳐 시험자의 공격을 세 차례 막아 내야 합니다. 본래는 지부에서 쌓은 경력과 명예, 신뢰 등을 확인하는 시험입니다.”
원래 불의 시련은 전사단의 기존 전사 한 명을 지목해 일대일로 결투해 승리하면 통과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군대는 개인의 무력보다도 합이 중요했기에 시험의 방식이 지금처럼 바뀌었다.
불의 시련을 통과한 사람은 단순히 본부 소속 용병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본부의 용병들과 형제자매의 연을 맺는 것이다.
이는 은퇴 이후까지도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평민 출신일지라도 본부 근무를 마치고 나면 지역 군주들이 작위나 관직을 주면서 어떻게든 초빙하려고 눈에 불을 켰다.
“지현 양도 받아 보시겠습니까?”
“저도요? 하지만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데…….”
“몸이 멀어져도 영혼과 마음이 함께하는 한 가족의 유대는 끊어지지 않소. 그대라면 나설 이도 많으니 도전하는 것도 좋겠구려.”
“맞아요. 일단 난 꼭 나설 거니까 안심하고!”
“저기, 법관 씨가 저렇게 일생의 결단을 내리고 도전하는데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나서면 안 될 거 같아요. 오늘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법관 씨인 걸로 부탁해요.”
“커험. 과연 지현 양은 역시 사려가 깊구려. 그 말씀이 옳소. 내 생각이 짧았소.”
“앗, 치사하게 혼자만 빠져나가려고!”
“시끄럽다, 녀석아.”
지현은 일단 여행 계획을 며칠 뒤로 미뤘다. 법관이 새 이름을 받고 안정되는 것까지 봐야 자신도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의 시련은 밤에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기에 해가 저물 때까지 사람들은 각자의 업무에 열중했다. 해가 저물자 용병들이 하나둘 연병장으로 모였다.
연병장 중앙에는 거대한 모닥불이 있었다. 바싹 마른 통나무를 사각형으로 층층이 쌓아 올렸고 중앙에는 불쏘시개와 함께 목탄을 넣어 화력을 키웠다.
용병들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며 모였다. 전원이 참석하진 못했지만 200명이 넘는 대인원이었다.
“불의 시련이다! 새로이 이름을 받을 자는 앞으로 나와라!”
발데마르의 외침에 법관이 앞으로 나왔다. 그는 평생 안 입던 갑주를 챙겨 입고 손에는 방패를 들었다.
“천둥과 북풍의 눈, 불꽃이 지켜보는구나! 이제 그대의 형제자매를 청하라!”
“이 자리에서 엄숙히 고하노라. 나 맹세하노니 우리의 혼을 피처럼 나누고자 한다. 누가 나와 방패를 쥐겠는가.”
“탄드리의 딸 힐다! 방패 안에서 우리는 하나일지니!”
“라그나르의 아들 리하르트! 내가 그대의 벽이 되겠다!”
“하랄드의 아들 하인리히! 형제를 받아들이노라!”
이후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일어섰다. 서른 명의 인원을 채우는 순간 발데마르가 멈췄다.
“도전자들에게 시련을 베풀겠다! 천둥과 북풍의 이름으로!”
“야, 잠깐. 대장이 직접 하는 거였어? 다른 놈이 아니라?”
“못 들으셨슴까? 사람이 사람이라고 대장이 직접 나선다고 하셨는데.”
“못 들었어! 리하르트, 좌측으로. 하인리히는 오른쪽이다. 키르스텐, 베르세르크들 중앙으로 모아. 자칫하면 날아간다!”
“그럴 줄 알고 우리 부대 베르세르크는 다 모았다. 다들 기꺼이 나서 주더군.”
힐다가 분주히 인원을 배치했다. 방패벽 중앙에 법관이 섰고 힐다가 법관의 등을 받치며 상단에 방패를 얹었다. 키르스텐이 법관의 앞에 앉아 하단을 가리게 방패를 겹쳤다.
그들의 좌우로 똑같이 세 사람씩 오를 갖추고 방패를 겹쳤다. 촘촘하게 얽힌 방패들은 충돌 시 충격을 이어진 방패로 분산시켜 적의 공격은 물론 기병의 돌격까지 막아 냈다.
힐다 또한 훈련하며 방패벽에 돌격한 적이 있지만 뚫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발데마르는 있었다.
“씁, 대장을 정면에서 막는 건 오랜만인데.”
“지금까지 전적은 어떻습니까?”
“네 번 하면 한 번은 뚫렸지?”
“지금이 네 번 중 한 번이 아니길 바라야겠군요.”
방패벽이 준비됐다. 주변을 둘러싼 용병들이 한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용맹을 찬양하고 죽을 때는 전우와 함께 전장에 눕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발데마르가 시작을 외쳤다. 다들 마른 침을 삼켰다.
발데마르가 달려온다. 분명 사람이 달리고 있는데 중기병이 돌진하는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발데마르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몸에 힘을 풀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빨리, 더 단단하게 몸을 조이며 달렸다.
충돌의 순간, 정면의 베르세르크들이 숨을 뱉으며 몸을 경직시켰다. 충격이 남아 있던 숨까지 억지로 토해 내게 만들었다. 뒤를 받치던 힐다마저 컥 하고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방패벽은 견고했다. 크게 한 번 출렁였을 뿐, 그들은 여전히 서 있었다.
“훌륭하다!”
발데마르가 뒤로 돌아갔다. 그사이 전사들은 저린 팔과 어깨를 이완시켜 다음을 준비했다.
“다시 간다!”
두 번, 출렁임은 줄었다. 세 번, 몇몇이 기침을 토했지만 여전히 방패벽은 견고했다.
발데마르는 땀투성이였다. 갑옷을 입고 세 번이나 수십 미터를 질주하는 건 역시 힘들었다. 방패벽에 전력으로 부딪치는 걸 반복해 어깨에는 피멍이 들었다.
그럼에도 후련했다. 부하들이 대견스러웠다.
“너, 새로운 이름을 원하는 자야! 너는 시련을 통과했다! 천둥과 북풍의 이름으로 새로운 형제를 받아들이노니 너의 이름은 앞으로 도마르! 판결하는 자라는 이름이 그대의 삶을 밝히리라!”
“저, 도마르는 새로운 이름을 받아 형제와 자매에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다! 천둥과 북풍의 이름으로!”
“천둥과 북풍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