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15
정도마신 14화
화려한 마차에서 마지막으로 천천히 나온 여인.
그녀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청초한 꽃잎처럼 고상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었다. 진청청, 소월, 단교 세 사람도 어디 가서 미인이라고 자랑할 만한 외모였지만, 그녀의 옆에서는 시들어 말라 버린 꽃처럼 빛이 바랬다.
특히 여인의 걸음걸이는 존귀한 신분처럼 기품이 넘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예를 갖추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대사자!”
세 여인이 그녀에게 길을 터 주듯 옆으로 물러섰다.
사뿐히 사내의 앞으로 다가온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월궁문의 소문주, 백리향(百里香)이라고 합니다. 소협(小俠)의 존명(尊名)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세 여인은 의아한 듯 백리향을 바라봤다.
‘대사자가 어째서 저자에게 이토록 예의를 갖추는 걸까?’
그러나 그녀들은 백리향에게 감히 어떤 말을 하지는 못했다.
사내는 백리향이라는 이 여인을 뜻밖이라는 듯 응시했다. 그녀는 마치 사내의 대답을 기다리듯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존명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사완악. 내 이름은 사완악이야.”
핏물로 범벅된 무복의 청년.
그는 물론 영겁사령존을 제압하고 산에서 내려온 사완악이었다.
월궁문의 여인들은 다시 한번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완악(完惡).
악을 완성한다는 해괴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독특한 이름이군요.”
백리향은 사완악의 옷을 물끄러미 보고는 말했다.
“새 옷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제 사매들이 소협에게 무례를 저지르긴 했지만, 오해를 살 만한 모습이네요.”
사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자신의 꼴은 누가 봐도 이상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음, 그렇긴 하지.”
백리향이 말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제가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쪽은 내 옷이 왜 이 모양인지 묻지 않는 건가?”
백리향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제가 물어봐야 할까요?”
사완악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이 여인, 평범하지는 않다.
‘무공도 제법 강할 것 같네.’
다른 세 명의 여인과는 차원이 다르다. 저 여인은 사완악 자신의 힘을 빙산의 일각이나마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동시에 기이한 직감이 스쳐 갔다. 어쩐지 이 여인과의 인연은 오늘이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좋아. 옷을 준비해 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러자 뒤에서 진청청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대사자, 그는 색마나 살인마일지도…….”
“진 매는 말을 가려 하도록.”
진청청은 깜짝 놀랐다.
평소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백리향은 질책을 할 때도 저렇듯 단호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진청청은 대사자의 꾸짖음이 몹시 두려웠지만 기어가는 목소리로 기어코 한마디를 더 했다.
“하지만 대사자를 보니까 저, 저 사람의 아래가 더…… 더…… 막 그런데요…….”
백리향의 시선이 어쩐지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완악은 한숨과 함께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오해하지 마. 아주 복잡하고 깊은 사정이 있으니까.”
백리향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깊은 사연인가 보군요.”
“그, 그래.”
뭔가 불신이 섞인 듯한 말투에, 사완악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백리향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마차의 마부에게 말했다.
“양 노. 월궁문으로 가서 이 소협에게 어울릴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오세요.”
“예, 소문주님.”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노마부(老馬夫) 즉각 마차를 돌려 달려왔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양 노의 마차 모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요.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예요.”
사완악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옷값은 무엇으로 주어야 하지?”
백리향은 곧바로 답했다.
“후에 저희가 마주친다면, 두 번 정도는 제게 양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말에 사완악은 확실히 감탄했다.
두 사람의 대화에는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백리향이라는 여인은 안목(眼目)과 지혜(知慧)가 보통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 옆의 다른 여인들만 하더라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사완악은 그녀가 순진한 얼굴의 영리한 여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속내를 지나치게 숨기지는 않는 여우였다. 아주 약간, 약간만 감춘 정도일 뿐이다.
“두 번은 너무 많아.”
“양 노는 두 벌의 옷을 가져올 거예요.”
“한 번. 타협은 없어.”
“인심이 박한 분이셨군요.”
“대신 안심해도 돼.”
백리향이 의아한 얼굴로 사완악을 쳐다봤다.
그러자 사완악은 다 알고 있다는 듯,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색마도 아니고 살인마도 아니다. 너희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는 않을 것이니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상하네. 아까 그 마부는 혼자 떠났지만, 돌아올 때는 다른 사람과 함께일 것 같은데.”
순간, 백리향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당신이 마부에게 보내는 눈빛이 미묘하더군. 고개를 살짝 돌리며 짧은 순간에 전음을 보낸 것도 매우 자연스러웠어. 내게 호의를 베풀면서 동시에 그 마부는 당신 문파의 고수들을 몰래 데려오겠지. 만약에 대비해서 말이야. 아주 영리한 처세술이었어.”
사완악의 말에, 이번에는 백리향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놀람이 스쳐 갔다.
‘이 사람은 내 의중(意中)까지 모두 꿰뚫고 있었구나! 게다가 사부님보다도 더 강하게 느껴지는 이 기운…… 도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의 속내를 들켰다는 부끄러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꼈으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 말했다.
“저희같이 힘없는 여인들은 매사에 조심하는 습관이 있을 뿐입니다.”
“힘이 없는 건 모르겠지만…… 뭐, 좋은 습관 같군.”
두 사람은 이후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고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네 대의 말이 이끄는 화려한 마차가 돌아왔다.
양 노라는 마부는 사완악에게 매우 화려한 백의장삼(白衣長衫) 한 벌과 평범하지만 고급스러운 흑의무복(黑衣武服) 한 벌을 내밀었다.
“취향을 몰라 두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때깔이 괜찮은걸.”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마부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사완악은 생각보다 옷이 마음에 들어서 몇 번 쓰다듬다가 불쑥 말했다.
“기왕 신세진 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내가 강호초출(江湖)初出)이란 말이야. 그리고 돈이 한 푼도 없지. 강호에서 무엇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사완악은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당당히 말했다.
“어머, 당신도 나처럼 강호가 처음이군요. 그런데 돈이 없다니 꽤 불편하겠네요.”
진청청은 과연 천방지축 소녀였다. 색마나 살인마가 아니냐고 할 때는 언제고, 강호 초출이라는 한마디에 벌써 동질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소월과 단교가 눈짓으로 그녀에게 입 좀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사완악은 진청청의 모습이 어쩐지 어린 구득소를 보는 거 같아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세상에서는 무엇을 하든 돈이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아주 불편할 것 같단 말이지.”
백리향은 양 노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양 노는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 사완악에게 주었다.
사완악이 주머니를 살짝 열어 보니, 그 안에는 휘황찬란한 금덩이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사완악이 백리향을 쳐다봤다.
“돈을 어떻게 버는지는 너무 많은 방법이 있어서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하지만 당신이 그 어떤 방법을 찾을 때까지 그 정도의 금이라면 충분히 편한 생활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사완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으로 할까?”
백리향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걸 바란 것은 아닙니다.”
“됐어, 내숭 떨지 마.”
마치 아랫사람에게 한마디 던지는 듯한 말투.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소월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소협은 정말 이상한 남자군요. 강호의 남자들은 우리 대사자를 보면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난리인데.”
“소 사매.”
백리향이 쓸데없는 말을 한다는 듯 그녀를 흘겨봤다. 그러나 이미 그 말을 들은 사완악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모두 잘 보이려고 난리라고? 왜지?”
소월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나요? 그야 물론 우리 대사자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죠. 소협 눈에는 우리 대사자가 예쁘지 않은가요?”
사완악이 백리향을 스윽 쳐다봤다.
“소월, 쓸데없는 소리 마라.”
백리향은 조금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려 사매 소월을 노려봤다.
사완악은 그런 그녀를 잠깐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어쨌든 이제 서로 갈 길 가자고.”
사완악은 한마디 툭 내뱉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피차 볼 장 다 봤으니 헤어지자는 뜻이다.
소월은 물론 다른 사매들도 기가 차다는 듯 사완악의 등을 바라봤다. 시원시원하다고 해야 할지,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사완악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사라질 때까지 월궁문의 사람들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마차에서는 어느새 네 명의 중년 여인들이 내려와 함께 있었다.
“그는 정말 대단한 고수구나.”
중년 여인들 중 깊은 눈빛에 심후한 내공이 느껴지는 한 사람이 말했다.
그 말에 단교, 소월, 진청청 세 사람이 깜짝 놀랐다. 자신들이 보기에 사완악은 그다지 뛰어난 무공을 지닌 느낌이 아니었다.
반면, 그녀들의 사고(師姑:사부의 사매)인 이 중년 여인의 무공은 실로 고강했다.
대사자를 제외하면 자신들 전부가 달려들어도 십초지적(十招之敵)이 되지 못했다.
그런 사고의 입에서 ‘정말 대단한 고수’라니?
반면, 백리향은 긴장이 풀린 듯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고. 처음 보는 순간 손발이 떨릴 정도였어요. 하지만 그는 무공보다 심계가 더 뛰어난 사람 같아요. 그는……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네요.”
소월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고수인가요? 무공은 모르겠고…… 저는 저렇게 잘생긴 남자는 처음 봐요. 여인보다 고운 얼굴 같으면서도 사내다운…….”
소월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공연히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흥! 아무튼 대사자의 미모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니, 정말 건방진 사람이에요.”
그러나 소월이 어찌 알 수 있을까.
사완악이 지난 십수 년간 함께 살아온 여인의 미모는 백리향이라 할지라도 결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이때 중년 여인은 소월의 실없는 말을 무시하며 단교, 소월, 진청청을 향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향아는 알아서 하겠지만, 너희는 강호에서 저 사람과 만나게 된다면 최대한 부딪치지 말거라. 천기자 선생께서 예언하신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특히 청청이와 월이는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청청과 소월은 이 엄격한 중년 여인에게 감히 말대꾸할 수 없었다.
중년 여인은 이미 사라져 버린 사완악의 뒷모습을 그리며 말했다.
“나는 월선(月船)을 통해 저자의 정체를 좀 알아봐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