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58
정도마신 57화
설린은 어둠을 뚫고 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찾아갔다.
정도맹은 넓고 복잡했지만, 지도는 매우 상세하여 그녀는 길을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이곳인가?’
설린은 마침내 하나의 전각 앞에 도착했다.
주변에 다른 건물이 전혀 없는 독채에, 어떤 인기척도 없어 기괴하고 수상쩍게 느껴졌다.
문득 정신을 차린 설린은 큰 두려움에 휩싸였다.
대관절 자신에게 서찰을 보낸 의문의 고수는 누구이고, 구휘는 어떤 일을 당하고 있으며, 왜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실마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우선 휘아부터 찾자.’
설린은 검을 가슴 높이로 들고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며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전각 안에는 마치 회의실처럼 큰 공간이 있었다.
설린은 적적하고 넓은 공간이 주는 휑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내부에는 사람의 흔적을 보여 주듯 몇 개의 등불이 켜져 있어서, 어두컴컴했지만 사물의 구분은 되는 정도였다.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가 열고 들어온 문 쪽에서 하나의 음성이 갑작스럽게 들려왔다.
“정말 왔군.”
설린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그곳에는 허리에 칼을 찬 한 명의 사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는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왼쪽 팔이 고정된 것처럼 매우 부자연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린은 그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더욱 크게 놀랐다.
“다, 당신은!”
그는 바로 남궁세가의 소가주, 남궁준휘였던 것이다.
설린은 지금의 상황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정유문에서 사라진 구휘가 정도맹에서 누군가에게 잡혀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이곳에 나타난 사람이 남궁준휘라니?
그녀의 생각으로는 이 일련의 사건에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소가주께서 왜 이곳에 있을까요?”
“…….”
남궁준휘는 아무 대답 없이 설린을 바라보기만 했다.
설린은 남궁준휘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마치 굶주린 맹수를 보는 것만 같았고,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구휘의 안전이 걱정되어 용기 내어 물었다.
“당신이 내게 서찰을 보낸 것인가요? 휘아는 어디 있죠?”
“휘아?”
“구휘요. 우리 정유문의 문도예요. 나는 누군가에게 휘아를 살리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라는 서찰을 받았어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내 눈앞에 있군요.”
그러자 남궁준휘는 뭔가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그런 것이로군.”
설린은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바라봤다.
남궁준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어리석은 년.”
그 순간.
설린은 심장이 내려앉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남궁준휘는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설린은 자신이 어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뭔가 잘못됐어.’
설린은 검 자루를 꽉 쥐며 천천히 옆걸음으로 문 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때 남궁준휘가 한 걸음 움직여 그녀의 퇴로를 막으며 말했다.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린은 그의 흉포한 눈빛에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남궁세가의 소가주께서 이러시는 이유가 무엇이죠?”
설린은 의도적으로 남궁세가의 이름을 언급했지만, 남궁준휘의 표정은 더욱 험악하게 굳어질 뿐이었다.
“몰라서 묻는 것인가?”
“설마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그건 서로 간에 깔끔하게 끝난 문제 아닌가요?”
“깔끔하게 끝났다고?”
남궁준휘의 눈에 핏발이 섰다.
“감히! 나 남궁준휘에게 그런 모욕을 주고 그딴 말을 해?”
남궁준휘는 성난 얼굴로 설린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설린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내가 그런 수치를 당하고 그대로 끝낼 것이라고 생각했나?”
“그,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하시려는 거죠? 여기는 정도맹이에요. 제가 소리를 지르거나 싸우는 소리가 퍼진다면 누군가 반드시 듣게 되겠죠.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남궁준휘가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런 것에 대한 대비도 없이 여기서 너를 기다렸을까? 이곳에는 소리를 차단하는 진법이 펼쳐져 있지. 네가 아무리 소리 지르고 발버둥 쳐 봐야 아무도 모를 것이다.”
“뭐, 뭐라고요?”
설린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요? 당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죠?”
“…….”
남궁준휘는 설린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반반한 얼굴이야.”
그 한마디에 설린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설린은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되어 타이르듯 말했다.
“제가 소가주님의 체면을 생각해 드렸던 것을 모르시나요? 저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이 무릎 꿇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소가주님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면 제가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어요. 그리고 지금의 일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또 말한다 한들 증거가 없으니 누가 믿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남궁준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완악을 결코 가만둘 수 없다. 설린 문주,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신이 그의 여인이니 어쩔 수 없다.”
“제가 사 공자님의 여인이라니요? 소가주님은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어요. 저는 그저…….”
“닥쳐! 나는 너를 욕보이고 죽여 사완악 그놈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줄 것이다.”
남궁준휘는 그녀의 말을 막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설린은 어느새 벽까지 물러나 더 이상 도망갈 퇴로가 없었다.
그녀는 어떤 말로도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내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남궁준휘의 뒤쪽을 향해 말했다.
“사 공자님! 여기예요!”
순간 남궁준휘는 크게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곳에 설린 혼자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래도 혹시 그녀가 사완악을 몰래 데려오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사완악의 이름을 듣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궁준휘는 사완악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성을 잃었으나, 본래는 상당히 총명하고 기지가 뛰어난 자였다.
그는 자신이 설린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즉각적으로 보법을 밟으며 몸을 돌림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일장을 내질렀다.
이때 설린은 남궁준휘를 향해 정유검법의 초식 중 가장 빠른 초식을 찔러 넣고 있었다.
그 기습은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가지 악재(惡材)가 있었다.
바로 정유검법의 특성이었다.
정유검법은 기본적으로 부드러움을 기반으로 하고, 단발성의 공격이 아니라 초식과 초식의 연계를 중요시하며, 공격보다는 방어적인 검술이었다.
도백천의 군자신검 역시 정유검법과 기본적인 성격이 비슷했기에, 사완악은 그것을 참고하여 정유검법이 지닌 특성을 최대한 살리려 노력했었다.
자연히 그녀가 익힌 검술은 속도에 있어서는 크게 장점이 없었고, 선공보다는 반격에 능한 초식들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한 가지 실수마저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설린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아 본 적이 없었다.
또한, 그녀는 천성이 어질고 착하여 차마 남궁준휘의 등을 정면으로 찌르지 못하고, 그의 오른쪽 어깨를 찔러 갔다.
공교롭게도 남궁준휘가 보지도 않고 내지른 장법과 방향이 맞아떨어졌고, 설린의 검은 궤도가 크게 꺾여 남궁준휘의 왼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큭!”
남궁준휘는 왼팔을 부여잡고 서너 걸음 물러났다.
곧 그의 왼팔에 감겨 있던 천이 핏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설린의 표정은 몹시 어두워졌다.
자신의 검이 그에게 깊은 피해를 주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남궁준휘는 포악해진 얼굴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좋아, 네년이 그렇게 나오니 나도 편해지는구나.”
남궁준휘는 마지막 망설임을 떨쳐 낸 사람처럼 전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설린은 그의 무공이 자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정유검법을 펼치며 그의 검을 막아 갔다.
창창창창창!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캄캄한 장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흥! 제법 숨겨 둔 실력이 있었군!”
남궁준휘는 설린의 실력이 의외라는 듯 감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작 더 놀란 것은 설린 본인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 사람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지?’
낮에 사완악에게 크게 패배하고 왼쪽 팔에 부상까지 입었지만, 그래도 남궁준휘는 명문대파의 후계자였다.
설린의 수준으로는 결코 그를 상대할 수 없었다.
그저 목숨이 위험하다 보니 본능적으로 맞섰을 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녀는 남궁준휘의 초식을 모두 막아 낸 것이었다.
“제대로 해 주마.”
남궁준휘는 굳어진 표정으로 다시 한번 막아 보라는 듯 창궁대연검법을 전개했다.
설린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정유검법의 동작으로 남궁준휘의 검을 막아 갔다.
남궁준휘의 초식은 이전과 같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빨라져 있었다.
하지만 검과 검이 격돌하는 순간.
설린의 검이 튕겨 나가며, 그녀는 손아귀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남궁준휘의 검에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후한 내공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남궁준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약점이었군.”
남궁준휘는 설린이 생각보다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니고 있지만, 반대로 내공의 경지는 매우 얕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남궁준휘는 곧바로 내공을 끌어올리며, 초식의 정교함보다는 투박하지만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방식으로 초식을 쏟아 냈다.
설린은 그의 이러한 공격을 두세 번은 막아 냈으나 점차 손발이 어지러워지며 급급해졌고, 결국 그녀의 검은 허공을 날아 멀리 떨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반항해 봤자 소용없다.”
남궁준휘는 그 말과 함께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설린은 이미 내상을 입어 바로 반응할 수 없었다.
한데 남궁준휘의 검은 그녀의 몸이 아니라 가슴 앞섶을 스쳐 갔고, 옷이 벌어지며 설린의 하얀 속살이 나타났다. 설린은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옷을 감싸 쥐어 가슴을 가리며 남궁준휘를 노려봤다.
남궁준휘는 검을 집어넣고 설린에게 다가갔다.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이런 행동을 해도 되는 건가요?”
“큭큭. 글쎄. 세상 사람들이 과연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알 수 있을까? 아니, 어떤 결과가 되어도 상관없다. 나는 그놈에게 감히 나를 건든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설린은 화가 나 소리쳤다.
“당신은 정말 비겁한 사람이에요. 애초에 우리에게 창피를 주려고 했던 것도 당신이었고, 시합을 받아들이고 패배한 것도 당신이에요. 심지어 당신이 약조를 지키지 않아도 나는 사과를 받아 주었는데, 당신은 그저 앙심만을 품고 이런 나쁜 짓을 하는군요. 차라리 사 공자님을 찾아가 정정당당하게 다시 대결을 하세요. 그렇게 이길 자신이 없는 건가요?”
“닥쳐!”
“악!”
뺨을 치는 소리와 함께 설린의 고개가 돌아갔다.
남궁준휘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우악스럽게 위로 추켜올리는 바람에, 감싸 쥐었던 설린의 옷은 다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남궁준휘는 이때 눈을 번뜩이며 그녀의 옷깃을 잡고 힘주어 당겨 버리니 그녀의 옷이 길게 찢어졌다.
설린의 몸이 등불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흑!”
설린은 외유내강의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목숨을 잃는 것보다 지금 이곳에서 남궁준휘에게 욕보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너무나 괴롭게 만들었다.
‘이 사람에게 나쁜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겠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게 무엇하는 짓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