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64
정도마신 63화
한 청년이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삼십 대 중반에, 체격과 얼굴은 평범하여 별다른 특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잔잔하고 깊은 호수와 같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그에게 감히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기운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 방문이 열리며 또 다른 삼십 대의 청년이 나타났다.
바로 이군이었다.
이군은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일군을 뵙습니다.”
순간, 천의문의 문주이자, 일군으로 불리는 청년의 얼굴에 약간의 동요가 일어났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느냐?”
“…….”
“신우야.”
일군이 부른 이름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체격과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뭇 달랐지만, 이목구비는 상당히 닮은 부분이 있었다.
“……형님.”
“그래, 말해 보아라.”
이군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자괴감이 섞인 음성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일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능력이 그토록 뛰어나고, 그의 성격이 그토록 독특할지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사부님이 계셨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완악이 천하의 악인이 될 수 있게끔 모든 계획을 세웠다.
자미성의 기운을 봉인했고, 사대악인의 제자로 만들었으며, 심장에 영겁사령존을 심어 놓았고, 그가 익힌 탈정미혼공의 음욕(淫慾)을 폭발시킬 수 있는 음독(淫毒)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완악은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늘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는 오히려 그들이 원했던 계획의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군이 일군을 향해 말했다.
“형님, 사완악은 결코 협객이 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일군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이군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일군은 생각을 정리한 뒤, 방문을 열고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군은 일군을 따라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일군이 말했다.
“우리 천의문은 지금까지 하늘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준비를 하는 것과 천기를 바꾸는 것은 다른 일이지요.”
“사부님은 그것이 얼마나 큰 금기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으나……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셨다. 하여 당신의 목숨까지 바쳐 가면서 이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뜻을 이어 가지 않을 수 없겠지.”
일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이군의 눈빛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럼……!”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방법이었다. 사부님은 물론이고, 나 또한 그리 생각했다. 선조의 가르침대로 천기의 이치를 아무리 해석해 보아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확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군은 문득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구나.”
이군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시간이 없다니요?”
“희미해져 모습조차 볼 수 없었던 그 기운이 순간적이지만 다시 한번 나타났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이로써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일군을 몸을 돌려 이군을 바라봤다.
“맹주님께 내가 말씀드리도록 하마.”
* * *
사완악이 비무 대회 결승에 오른 것은 정도맹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대이변이었다.
하지만 사흘 전 연회에 참석했던 젊은 후기지수들은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북팽가와 남궁세가의 소가주 두 사람, 그리고 점창파의 섬광이라 불리는 진철영까지. 강호에서 손꼽히는 명문대파의 유망한 후기지수 세 사람을 동시에 상대했던 모습은 그들의 뇌리에 강렬히 새겨져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사완악이 누군가에게 패배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승전이 되자 모든 사람들의 눈빛에는 강렬한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무당파의 청운 도사, 정유문의 사완악, 올라오시오.”
무당파의 청운.
강호에서 그에게 붙여 준 별호는 ‘무림일룡(武林一龍)’.
한마디로 이곳에 모인 모든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처럼 가장 뛰어난 존재가 바로 이 청운이라는 청년이었다.
사실 청운에 대해서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림일룡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바로 다른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장문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약 칠 년 전, 무당파에서 열렸던 명문대파 회동에서 청운을 보게 되었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무당파의 청운이야말로 운룡무왕 양천상을 능가하는 무재요,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다.’
명문대파의 수장이 다른 문파의 제자를 그렇게 극찬하는 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또한 운룡무왕 양천상이 누구인가?
불과 삼십의 나이에 사천회주 마양과 삼백 합을 겨루고, 만장일치의 의견으로 정도맹의 맹주직에 오른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런 양천상을 능가하는 무재라니!
이것이 그가 세상에 뚜렷하게 무위를 드러낸 적이 없음에도 무림일룡이라 불리게 된 이유였다.
“과연 누가 이길까?”
“그야 당연히 무림일룡이지. 열 살 때 무당파 무학의 요체를 깨달았다는 천재잖아.”
“그거야 소문이지. 저 사완악이라는 친구가 연회식 때 보여 준 모습 기억 안 나?”
“대단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당파라고. 무림의 양대산맥, 무당파.”
“자자, 그냥 지켜보자고. 어쨌든 확실한 건 드디어 무림일룡의 실력을 보게 되었다는 거야. 사실 이전 시합까지는 너무 싱겁게 끝나 버렸잖아.”
사완악과 청운, 두 사람 모두 이전의 시합들을 너무 쉽게 이기고 올라왔다.
그만큼 실력이 압도적이라는 뜻이지만, 역설적으로 두 사람 모두 진정한 무위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인 셈이었다.
“흐음…….”
비무대에 먼저 올라온 사완악은 팔짱을 낀 채, 맞은편 계단에서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청운 도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소 작은 편에 속하는 키와 체구에 하얗고 순진해 보이는 얼굴.
도저히 무림일룡이라 불리는 천재 무인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완악의 표정에는 비무 대회에 참석한 이후 처음으로 진지한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강호는 넓은 법이라…… 현종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군.’
사완악이 현종에게 그가 비무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우승이 너무 쉬울 거라고 이야기 했을 때, 현종은 강호는 넓은 법이니 그리 시시하지는 않을 것이라 말했다.
사완악은 그때 현종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이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현종은 어디 갔지?’
사완악은 문득 주변을 살폈지만 현종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누구보다 이 대결을 지켜보고 싶어 했을 그가 여태껏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때, 비무대로 올라온 무당파의 청운이 포권과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청운이라 합니다. 사 공자님에 대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 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나에 대해 많이 들었다고?”
사완악은 청운을 바라봤다.
하지만 청운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다시 한번 꾸벅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사완악과 청운을 호명했던 집법당주 서문석이 말했다.
“비무의 결승은 본인이 직접 심판을 볼 것이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상대의 눈과 목, 낭심을 노리는 초식과 독공, 그 외 비겁한 수단은 금지이며, 비무가 과열될 경우 심판의 역량으로 중지시키고, 판정승을 내릴 것이오.”
사완악과 청운은 당연히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좋소, 그럼 시작하시오.”
서문석은 비무대의 끝으로 물러났다.
사완악과 청운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투지나 날 선 기운을 내뿜지 않았고 그저 고요한 시선으로 서로를 응시할 뿐이라, 사람들은 비무가 시작된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작은 바람이 연무장을 스쳐 감과 동시에 한 사람의 신형이 움직였다.
“청운 도사가 먼저…….”
사람들은 무당파, 그리고 무림일룡이라는 이름 때문에 청운이 선공을 양보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청운은 그 예상을 깨며 구름을 밟듯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무당파가 자랑하는 제운종(梯雲縱)이라는 신법이었다.
움직임이 부드럽다고 해서 속도가 느린 것은 아니었다.
청운은 어느새 사완악의 앞에 당도해서 왼손으로는 원을 그리며 자세를 잡고 오른손은 앞으로 쭉 내밀며 일장을 내질렀다. 이 역시 무당파를 대표하는 무공, 태극권의 일 초식이었다.
“흠!”
사완악은 약간의 감탄이 섞인 음성을 내뱉으며 목검을 세워 청운의 장법을 막아 갔다. 검과 장이 격돌했다. 그런데 이때, 사완악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청운의 공격은 겉으로는 가볍게 느껴졌으나, 이내 거대한 내공이 사완악의 검을 타고 밀려오는 것이었다.
사완악은 사부 영환 대사가 말했던 무당파 무공의 특징을 떠올렸다.
무당파의 무공은 경지에 오르면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파괴한다고 했다.
물론 다른 문파의 무공들 역시 그런 수법을 따라 할 수는 있으나, 무당파의 무공만큼 정교하고 강력한 내가중수법은 없다는 말이었다.
다른 문파의 무공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염라대사 영환의 말이 그 정도이니, 무당파의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무당파의 무공보다 더 놀라운 것은 청운의 내공이었다.
작은 체구와 어수룩한 얼굴과는 다르게, 청운의 내공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아무리 사완악이라 하더라도 내상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사완악은 염화신공을 일으켜 밀려오는 청운의 내공을 불태워 버리고는 말했다.
“처음부터 아주 과격한데?”
이때, 청운은 사완악보다 더욱 놀란 표정이었다.
청운은 잠시 사완악을 바라보다가 인정한다는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께서 머리 굴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분?”
“현종 대사님과 친우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아. 난 또 누구라고.”
청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실 현종 대사님께서 너무 칭찬을 하셔서 조금 질투심이 났었습니다. 저보다는 확실히 한 수 위의 실력을 지녔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오늘 많은 가르침을 받을 생각입니다.”
“응? 너 지금 혹시……!”
사완악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청운은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속도는 조금 전보다 더 빨라져 있었다.
‘열 받은 거 맞네!’
정확하게 말하면 승부욕일 것이다.
청운 정도의 재능과 실력이라면 동년배에서 그 적수를 찾을 수 없어야 정상이었다.
물론 현종도 비슷한 또래이지만, 그는 소림사의 원로원이 심혈을 기울여 길러 낸 존재이니 인정할 수 있었을 것이고, 유일한 호적수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난데없이 현종의 입에서 본인보다 한 수 위의 동년배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아무리 도사라지만 혈기왕성한 천재 무인의 마음에 호승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사완악은 그것이 현종의 의도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아니, 현종 이 중놈은 왜 이렇게 싸움 붙이는 걸 좋아하지?’
사완악은 내심 황당했으나, 눈앞의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못했다.
진심을 다해 물결처럼 밀려오는 청운의 태극권.
사완악은 감히 경시하지 못하고 정유검법을 맞서 펼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