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65
정도마신 64화
청운의 태극권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부드럽다는 것이 나약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때로는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했고, 때로는 계곡의 급류처럼 거침없다가, 어느 순간은 폭포처럼 강렬하게 쏟아졌다.
“저것이야말로 무당파의 태극권이구나!”
사람들은 부드러움 속에 거대한 힘을 담아 상대를 압박해 가는 청운의 태극권에 감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비무를 바라보는 후기지수들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대단하기는 한데…….”
도도히 흐르는 물결처럼 쏟아지는 태극권의 절초들.
하지만 그 초식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말인즉슨, 상대가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실제로 사완악은 청운의 공세에 뒤로 물러나고는 있었으나, 그 와중에도 그의 검은 청운의 초식을 막아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순간 복잡한 마음이었다.
처음에는 청운이 이겨 명문대파의 자존심과 무당파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지켜 주길 바랐지만, 비무를 보다 보니 마음 한편에서는 중소 문파 출신의 사완악이 모두를 꺾고 새로운 영웅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훌륭한 검법이군요.”
이때, 높은 관람석에서 결승전을 지켜보는 정도맹주 양천상의 두 눈은 사완악의 검술에 집중되어 있었다.
양천상의 말에 그의 좌우로 앉아 있는 무림의 명숙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자께서 무림오십공 중 하나로 꼽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말을 꺼낸 이는 공동파의 도사이자, 정도맹의 원로장을 맡고 있는 일양자(一陽子)였다.
일양자는 일흔의 나이로, 배분으로 치면 정도맹의 가장 큰 어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는 새롭게 정립된 강호 팔대고수의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을 만큼 뛰어난 무인이었다.
특히 검술에 대한 이해는 팔대고수들보다 오히려 뛰어나다는 평이 있었고, 검의 마음을 읽는다 하여 별호는 공명검(共鳴劍)이었다.
“다만…….”
양천상이 고개를 돌려 일양자를 바라봤다.
일양자가 말했다.
“아니오. 왠지 검술이 낯이 익은데 확실히 떠오르는 건 없구려.”
양천상은 일양자가 말을 아끼자 더 묻지 않고 다시 비무대를 바라봤다.
“어쨌든 정도무림의 홍복(洪福)입니다. 청운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인재가 나타났군요.”
양천상은 사완악의 검술과 무공을 극찬하면서도 한마디를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이대로라면 청운이 이기겠지만 말입니다.”
* * *
‘이것 참 곤란하네.’
사완악은 청운의 태극권 초식을 흘려 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청운의 무공은 사완악이 감탄할 정도로 정말 뛰어났다.
결코 여유를 부리며 가볍게 볼 수 없는 상대.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정도일 뿐이었다.
사완악에게 가히 충격을 안겨 주었던 현종과 비교하면 청운은 그에 못 미쳤다.
마음만 먹는다면 사완악은 바로 청운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사부들의 무공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말이지.’
정유검법은 충분히 훌륭한 무공이지만, 사완악의 손에는 잘 맞지 않았다.
그건 무공의 성격과 비무 대회의 규칙 때문이었다.
정유검법은 부드럽고 방어적이며, 상대를 해하지 않고 제압하는 것에 의의를 둔 무공이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이고 상대의 뜻대로 움직여 주기 싫어하는 사완악의 성미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또한 사완악은 예측 불허하고 재기 넘치는 공격이 특기였으나, 비무 대회의 규칙상 눈이나 낭심의 급소를 노리는 살초를 펼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대악인의 무공을 사용할 수는 없는 일.
누군가 알아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대악인의 무공은 정유검법과 달리 비무의 얌전한 규칙을 지켜 가며 펼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
‘아니, 사실 해결책은 간단하지.’
비무 대회의 준우승.
그것만으로도 정유문과 사완악 자신의 명성은 충분히 널리 알리는 셈이었다.
청운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해결되었고, 그렇다면 굳이 청운을 상대로 사부들의 무공을 사용해 가며 싸울 필요가 없었다.
사완악은 마음을 정한 뒤, 청운의 태극권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세 번 정도의 초식을 피하고 막은 사완악의 중심이 순간 흔들렸다.
고수가 아니라면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작은 허점.
그 순간, 청운의 심후한 내력이 담긴 장력이 돌풍처럼 사완악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사완악은 당황한 듯 황급히 검을 세워 청운의 장력을 가르려 했지만, 청운의 일장이 더 빨랐다.
“윽!”
사완악은 왼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열 걸음 정도 뒷걸음친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
잠시간의 정적.
사람들의 얼굴에는 감탄이 흐르고 있었고, 청운은 무표정했다.
이윽고 사완악은 땅을 향해 검 끝을 늘어뜨리고 자세를 바로 한 다음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관람석 곳곳에서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무당파의 무림일룡이 보여 준 놀라운 신위와, 그를 상대로 분투한 중소 문파 신성의 등장.
모든 강호 동도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 만한 장면이었다.
집법당주 서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비무였소. 제일회 정도 비무 대회의 우승자는 무당파의 청운, 준우승자는 정유문의 사완악이오! 올바르고 수준 높은 비무를 보여 준 두 사람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 주시오.”
장내에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청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이런 영광스러운 성적을 내고도 덤덤해하는 것을 보고 성품이 매우 겸손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에게는 맹주님께서 상품을 하사하실 것이오. 저 계단으로 올라가시오.”
* * *
양천상은 사완악과 청운의 성적을 축하하면서 준비한 상품을 주었다.
우승자인 청운에게는 곤륜파의 보물이라 불리는 태을보령신단(太乙保寧神丹)이 주어졌고, 사완악은 강호제일의 대장장이 명생자(銘生子)가 만든 보검 한 자루를 얻었다.
“이야, 생각보다 때깔이 더 죽여주는데?”
사완악은 설린을 처소로 데려다주는 길에 검을 뽑아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설린이 보기에도 명생자의 보검은 일반적인 철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예기를 품고 있었다.
“마침 마땅한 검이 없었는데, 잘되었다.”
사완악은 만족한 얼굴로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설린이 그런 사완악을 묘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죠?”
“응?”
“아까 마지막에 당한 공격이요. 하나도 안 아프죠?”
“그거야 당연히…… 아프지. 크윽,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거 같군.”
설린이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일부러 져 준 거였군요.”
“그럴 리가. 문주님, 지금 무림일룡을 무시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그런데 그때였다.
“정말 아닙니까?”
사완악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설린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사완악은 이미 누군가 자신들의 뒤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중얼거렸다.
설린이 돌아보니 조금은 왜소한 체구의 청년이 서 있었는데, 바로 무림일룡 청운이었다.
청운이 사완악을 보며 말했다.
“왜 양보하셨습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일부러 허점을 보이신 것 아닙니까?”
사실 처음에는 청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완악의 몸에 자신의 손이 닿는 순간,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완악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바로 패배를 시인하는 모습까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감쪽같을지 몰라도, 당사자인 청운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완악은 뻔뻔한 표정으로 청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가? 내가? 증거 있어?”
“증거는 없습니다만…….”
“그리고 설령 그렇다 해도 그거야 내 마음 아닌가?”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청운은 일순 대답할 말이 궁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수긍할 수 없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다음에는 꼭…… 제대로 된 비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은 무슨 다음? 난 너랑 다시 비무할 생각이…… 야! 아니, 자기 할 말만 하고 가 버리네.”
사완악은 등을 돌려 사라지는 청운의 뒷모습을 황당한 듯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완악은 별안간 뒤를 돌아봤는데, 그곳에는 건장한 체격에 이목구비가 조각처럼 수려한 승려가 서 있었다.
“일부러 우승을 양보하다니,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는군.”
그 음성에 뒤늦게 뒤를 돌아본 설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현종 스님!”
현종은 설린을 보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설 문주님도 본선까지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가셨던 일은…… 잘 해결되셨나요?”
설린이 말하는 일이란 남궁준휘에 관한 것을 뜻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완악이 의아한 듯 말했다.
“일? 무슨 일?”
현종이 말했다.
“본사와 관련한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너를 만나러 갔던 건데, 하인들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더군. 급한 일이라 설 문주님에게만 말씀드렸었다. 청운과의 비무를 보고 싶어서 열심히 달려왔는데, 조금 늦고 말았군.”
현종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완악은 그런 현종을 바라보며 내심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놈은 진짜 괴물인가?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청운과 현종을 번갈아 만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청운은 무림일룡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말 뛰어난 기재이지만, 현종은 그를 뛰어넘는다.
이 정도의 압도감은 사부들 중 염라대사 영환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던 정도였다.
이때 현종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각오?”
“청운 그 친구는 보기와 달리 무공에 대한 열망이 매우 뜨겁거든. 나한테도 보기만 하면 비무를 하자는 통에 난감할 정도였는데, 이번 비무로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더군. 조만간 반드시 너에게 비무를 청하러 찾아올 거다.”
“뭐? 듣기만 해도 벌써 귀찮은데…….”
사완악은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현종을 노려봤다.
“잠깐, 너 설마…… 야이 땡중아! 이거 때문에 나에게 비무 대회에 참가하라고 했던 거냐?”
현종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땡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다니! 역시 자네는 눈치 빠른 친구일세. 그에게는 나와의 비무보다 새로운 무공과의 교류가 도움이 될 테니…… 잘 부탁하네.”
사완악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현종을 바라봤다.
어려서부터 사부들을 속이고 골탕 먹이는 것에 매우 뛰어났던 그로서는 누군가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설린은 사완악의 표정을 보고는 풋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사 공자님이 당하신 것 같네요.”
사완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웃기지 마. 찾아온다고 누가 비무를 해 준대?”
“상당히 끈질길 텐데.”
현종은 재밌다는 듯 다시 한번 웃음을 짓고는 설린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제 정유문으로 돌아가시겠군요.”
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요.”
현종은 설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사완악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바로 헤어져야 하니 아쉽군. 그때처럼 함께 식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사완악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쉽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사완악은 누군가와의 만남이나 헤어짐에 대하여 좋거나 싫은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현종은 달랐다.
그는 사완악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생긴 벗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부들에게 혹독한 수련을 받으며 자란 이 두 명의 천재는 서로를 진정한 호적수로 여김과 동시에, 남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서로만의 유대감이 있었다.
“그래, 술도 안 먹고 헤어질 수는 없지. 술 마시러 가자, 땡중아.”
설린이 못 말린다는 듯 사완악을 쳐다봤다.
“사 공자님, 여긴 정도맹이에요.”
“나가서 마시면 되지.”
“밤에는 출입이 금지된다고요.”
“아침에 들어오면 되잖아.”
“예? 그, 그렇긴 한데…… 그래도 이 주변이면 보는 눈도 있을 테고…….”
그러자 이번에는 사완악 대신 현종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멀리 갔다 오면 되겠군.”
돌아보니 현종의 얼굴에도 아주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완악은 푸핫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멀리 가서 진탕 마셔 보자고.”
설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다 이미 마음을 정하셨군요.”
그런데 그때였다.
사완악은 문득 설린의 처소 쪽에서부터 두 명의 사내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사람들, 왠지 우리한테 볼일이 있는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