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cious Beverage RAW novel - Chapter 89
정도마신 88화
사완악은 현종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설린 문주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군.’
현종이 사완악에게 말해 준 것은, 설린이 함정에 빠져 남궁준휘에게 큰 욕을 당할 뻔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현종과 설린은 그날 있었던 일을 사완악에게 함구하기로 약조했으나, 현종은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사완악은 설린이 받은 서찰에 정유문에서 사라진 구휘의 목숨에 대한 협박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는, 바로 천기자와 그 제자들의 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남궁준휘로 하여금 설린 문주를 겁탈하거나 죽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틀림없이 남궁준휘를 찾아가 되갚아 주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오대세가인 남궁세가와 나 사이에는 전쟁이 시작되었겠지. 결국 내가 정파인들과 싸우게 만들려는 계획이었다. 그때의 나였다면 어쩌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현종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다시 이번 음모를 꾸몄던 것이었구나.’
사완악은 앞뒤의 정황으로 그들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사완악이 그들을 향해 더욱 특별한 분노를 느낀 것은 아니었다.
‘재미있군. 사대악인의 제자인 나는 정도 무인들의 목숨을 해치지 않으려 하고, 강호를 위한다는 그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고 있으니.’
하지만 사완악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와 웃음 가운데서도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천기자. 반드시 네놈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오게 만들고, 너희의 가식적인 민낯을 세상에 모두 밝혀 주마.’
사완악은 상념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의 신형은 한 걸음에 서너 장씩 쭉쭉 나아갔다.
구득소가 천하제일의 경공술이라 자부하는 승광신법은 짧은 거리를 폭발적으로 이동할 때와, 중거리와 장거리를 일관성 있게 이동하는 방법이 달랐다.
지금 사완악의 승광신법은 장거리를 이동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발끝은 매우 경쾌했고 지면을 디딜 때는 깃털처럼 가벼우며 땅을 박찰 때는 화살이 쏘아지는 듯한 힘이 있었다.
사완악의 안색은 매우 밝았고, 몸에는 기운이 충만해 보였다.
운기조식을 통해 내상이 모두 완쾌했다는 뜻이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듯 광야를 달리던 사완악은 관도(官道: 나라에서 관리하는 도로)가 나타나자 조금씩 속도를 늦추었다. 여기부터는 일반 사람들이 모두 통행하는 곳이므로 경공을 펼쳤다가는 이목을 끌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사완악은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관도를 따라 걷다가 뒤쪽에서 따그닥, 따그닥,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눈을 빛냈다.
사완악은 뒤를 돌아 말이 달려오는 경로에 미리 서서 손바닥을 올려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워, 워!”
말을 타고 가볍게 달려오던 중년인은 백의 장삼을 입은 청년 한 명이 난데없이 길을 막아서자 조금 놀라며 말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오?”
“잠깐, 할 말이 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사완악이 대뜸 반말을 하자 중년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사완악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말했다.
“어느 집안의 공자이신지 모르겠으나, 달리는 말의 앞길을 막다니 참 위험한 행동이오.”
사완악이 말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렇다. 말을 나한테 넘겨라.”
“말을 넘기라고? 그 무슨…….”
“돈을 주겠다. 나한테 팔아라.”
중년인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부잣집 자제라는 것은 알겠지만, 안 될 말이오. 도시에 서둘러 갈 일이 있소.”
“하지만 나는 말을 타야겠다.”
그 순간 사완악이 중년인의 발목을 잡아당기자 중년인은 중심을 잃고 떨어졌고, 사완악은 어느새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중년인은 벌떡 일어나 화난 음성으로 외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도대체 네놈은 누구인데……!”
중년인은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갑자기 사완악이 품에서 황금덩이 한 개를 꺼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저 정도 황금이라면 튼튼한 준마(駿馬) 열 필은 살 수 있는 크기였다.
사완악은 황금덩이를 햇빛에 빛나도록 흔들더니 중년인에게 휙 던져 주었다.
중년인은 깜짝 놀라며 허겁지겁 손을 뻗어 날아오는 황금덩이를 받았다.
그리고 그사이, 사완악의 말은 이미 관도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중년인은 그 뒷모습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세상에, 뭐 이런 강도 같은 횡재가 다 있지…….”
그런 횡재를 당한 것은 이 중년인만이 아니었다.
사완악은 관도를 따라 산서성의 양동(洋東)이라는 큰 도시에 들어섰다.
그리고 마구간이 있는 큰 객잔을 찾아 말을 맡겨 놓고, 객잔 주인에게 이 도시에서 가장 비싸고 유명한 옷집을 소개받아 그곳으로 향했다.
“저 옷이 마음에 드는군.”
사완악은 푸른색과 남색이 섞여 있는 옷 한 벌을 지목했다.
“공자님, 죄송합니다. 저 옷은 다른 분께서 한 달 전에 주문하신 옷입니다.”
“값이 얼마나 하지?”
“저 옷은 원단이 좋고 활동도 편하도록 특별히 신경 쓴 옷이라 굉장히 비쌉니다. 금자 석 냥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군.”
사완악은 그 남색 옷을 집었다.
“아니, 손님! 그건 정말 안 됩니다. 이 동네에서 가장 깐깐하신 조 공자님의……!”
옷 가게 주인은 말 탄 중년인과 마찬가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황금 한 덩어리가 빛을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헤…… 그 다른 분께는 제가 자,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사완악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객잔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혼자서 네 개의 요리를 시키고, 음식값과 숙박비로 또 금 한 덩어리를 주었다.
객잔 주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질 때 사완악이 말했다.
“내가 있는 동안 잘 대해 준다면 한 덩어리를 더 주겠다.”
그러자 객잔 주인은 충성스러운 개처럼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이고, 공자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무엇이든 분부만 하십시오. 제가 그래도 이 도시에서 모르는 것이 없고, 제법 쓸 만합니다.”
“그래?”
“그렇고말고요.”
“그럼 앉아. 혼자 식사를 하려니 적적하군.”
객잔 주인은 얼른 사완악의 앞에 앉았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양념이 조금 싱거운 느낌이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
“어이쿠! 주방장에게 가서 제대로 다시 내오라고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우선 먹어.”
“예, 예.”
사완악은 객잔 주인이 한두 젓가락 음식을 집어 먹는 것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객잔 주인이니 소문에 밝겠지? 혹시 무림인들의 이야기도 많이 아는가?”
객잔의 주인은 눈치가 빨랐다.
“그럼요. 이곳은 하남성에서 섬서성으로 진입하는 경로의 객잔이라 외지 손님들이 정말 많이 오십니다. 하여 오며 가며 여러 이야기를 듣지요. 특히 무림의 이야기는 손님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것이라 재담꾼들이 많은 말을 합니다. 혹시 뭐 물어보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사완악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사대악인이라든가, 그 제자라든가, 뭐 그런 말을 들어 본 적 있나?”
객잔 주인은 반색하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지금 그 얘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관심을 많이 받는 이야기입죠.”
“들어 본 소문을 모두 말해 줬으면 좋겠군.”
객잔 주인은 다섯 가지 정도의 소문을 말했다.
사대악인의 제자 사완악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 정파인으로 위장해 정도맹의 비무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는 것, 이후에 맹주를 음모에 빠트려 시해했다는 것, 도망치는 과정에서 수많은 정파인들을 죽였다는 것, 사완악은 무공이 고강하고 아주 사악한 술법을 쓴다는 것이었다.
사완악은 그 이야기를 듣고 씩 웃음을 지었다.
‘아주 기본에 충실한 수법이군.’
소문은 대부분 사실이었지만, 거기에 몇 가지의 거짓을 더하여 사완악을 천하의 악인으로 잘 만들어 내고 있었다.
“소문이 상당히 많이 퍼졌겠군?”
“그럼요. 원래 팍팍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처럼 재밌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정파의 무인들은 모두 분개해서 그 사완악이라는 자의 인상착의를 주변에 알리며 신고를 받고 있습니다.”
객잔 주인이 이어서 말했다.
“공자님도 조심하십시오. 그는 백의 장삼을 입고 다니고, 약관 정도 되는 나이에 여인처럼 곱상한 느낌의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웃음이 많지만 말투는 거침이 없고, 특이하게도 식탐이 많아서 맛있는 음식을…….”
객잔 주인은 문득 말을 멈추고 사완악을 쳐다봤다.
사완악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왜 그러지?”
객잔 주인은 사완악의 옷 색깔을 한 차례 바라본 후 빠르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 아무튼 그렇다고 하더군요. 무서운 사람이라고 하니 조심하시는 게 좋습니다.”
사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무튼 알겠어.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군. 말을 준비시켜 줘.”
“아, 바로 가십니까? 하루 묵고 가시지요.”
“아니, 할 일이 생겨서.”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완악은 객잔 주인이 대령한 말을 타고 그곳을 떠났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다는 건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천기자의 계획과 행동력은 철두철미했다.
그러나 사완악은 도리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좋아.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는군.”
사완악의 말은 의아함을 자아냈다.
천기자와 그 제자들은 사완악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강호 전체의 무림공적이 되도록 사방팔방 소문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고 있다니,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이럇!”
사완악은 말을 달려 도시를 벗어났다.
그리고 관도를 따라 밤새도록 달렸다.
새벽에 말이 지쳐 점점 속도가 느려지자, 사완악은 말을 버리고 경공을 펼쳐 달려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어느 한 마을 앞에서 멈추었다.
사완악은 마을 입구로 들어가, 다시 중심가에 있는 크고 번듯한 객잔을 찾아갔다.
아직 손님이 찾아오기에는 이른 시각.
마침 객잔의 뒷마당에서 장작을 정리하고 돌아온 객잔 주인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침 일찍 먼 길이라도 떠나시는…… 엇! 그때 그 공자님 아니십니까?”
신기하게도 객잔 주인은 사완악의 얼굴을 보고는 매우 반가워하며 인사를 했다.
사완악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반년이 넘었는데, 아직 기억하는군.”
객잔 주인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공자님처럼 생기신 분은 흔치 않지요. 그리고 머리 깎은 스님과 함께 와서 객잔의 술을 모두 동나게 주문하신 분은 십 년 넘도록 공자님뿐이었습니다.”
사완악이 찾아온 객잔.
이곳은 바로 현종과 함께 육사괴를 제압하고 와서 술을 마셨던 곳이고, 설린이 사령문의 가종후에게 납치를 당했던 객잔이기도 했다.
사완악은 스님과 와서 객잔의 술을 모두 마셔 버렸다는 주인장의 말에, 당시의 추억이 떠올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었지. 빈방 있나?”
“그럼요. 얼마나 묵으실 겁니까?”
“글쎄. 당장 내일 떠날 수도 있고, 한동안 머무를 수도 있는데. 이 정도면 충분한가?”
사완악이 습관처럼 금덩이 하나를 꺼내 주자, 객잔 주인은 입이 귀에 걸려 버렸다.
“하하, 저번에도 그랬지만 공자님은 정말 귀인이십니다. 한 달이든 일 년이든 머무르십시오. 필요하신 것은 뭐든 말씀하시고요.”
사완악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객잔 주인이 안내해 준 방으로 들어갔다.
* * *
그로부터 칠 일 뒤.
마침내 사완악이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