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35
-35-
달마저 구름에 가린 밤이었다. 눈앞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이 곳곳에 내려앉았다.
짐마차 앞에 달린 작은 등불이 힘겹게 몸을 불태웠으나 역부족이었다.
줄지어 달리는 마차 행렬의 가장 선두에서 마부는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오랫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는데, 바로 직감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더러웠다. 당장에라도 마차를 내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 음산한 숲에서 빨리 빠져나가고 싶건만,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들은 끝이 날 기미조차 없었다.
함께 짐마차를 호송하고 있던 용병들도 불길한 기운을 느꼈는지, 아까부터 죄다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부는 혼자 욕설을 내뱉으며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채찍을 몇 번이나 내려쳤는데 말들이 도통 속도를 내주질 않았다.
겁에 질린 것처럼 자꾸 기죽은 울음소리를 내며 낑낑거릴 뿐이었다.
막막한 기분으로 앞만 보고 있을 때였다. 휘이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마부는 눈을 부릅떴다.
“야, 야만족이다!!!”
내지른 외침은 때가 늦었다. 하늘에서 검은 인영이 휙휙 떨어졌다. 그들이 짐승처럼 날렵하게 마차 위에 올라앉았다.
선명한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났다. 그것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용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뽑아들었다. 쿠르칸들은 마차 위에서 땅으로 뛰어내리며 달려들었다.
뼈가 우드득 꺾이는 소리가 곧장 뒤를 이었다.
“헉……. 허억…….”
마부는 간신히 마차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온갖 끔찍한 소리들이 귀를 찔러왔다.
입을 틀어막고 벌벌 떨던 그는 비명을 질렀다. 제 몸을 숨겨주고 있던 마차가 통째로 뒤집혀 넘어간 것이다.
주변에는 이미 시체밖에 남지 않았다. 뜨끈한 피가 흐르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마부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달을 등진 사내가 나른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샛노란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저자는 무리의 대장이었다.
“이샤칸 님.”
거구의 여자가 사내에게 잎담배를 물려주었다.
그녀가 수발을 드는 동안, 날씬한 체구의 남자는 다른 쿠르칸들과 함께 짐마차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수색했다.
등불로 노예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던 남자가 외쳤다.
“없습니다!”
“……허탕인가.”
사내는 잠시 잎담배를 입에 물고서 침묵했다. 입술 사이로 연기를 뱉어낸 그가 천천히 중얼거렸다.
“신기하군. 꽤 정확한 정보였는데.”
그의 시선이 정확히 이쪽으로 향했다. 금빛 시선에 꿰뚫리는 순간, 마부는 그만 소변을 지렸다.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공포에 질린 마부 앞에서 금안의 사내는 슬쩍 웃었다.
“아는 게 있나.”
아랫니와 윗니가 딱딱 부딪혀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닥치고 있으면 바로 죽음이었다.
마부는 안간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다, 다, 다른 노예상이…….”
“다른 노예상이 쿠르칸을 사갔다?”
“예, 예에에…….”
사내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는 제 옆의 여자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살려주어라. 마차를 몰았을 뿐이니 죗값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여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먹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마부의 뒤통수를 퍽 하고 내려쳤다.
마부는 그대로 찍 소리도 못 내고 기절했다.
앞으로 고꾸라진 마부를 바라보던 이샤칸은 짤막히 질문했다.
“죽은 것 아닌가?”
“힘 조절 잘했습니다.”
게닌의 우직한 대답에 하반이 촐랑거리며 한마디 보탰다.
“죽은 것 같은데.”
“아니다. 안 죽었다.”
짧은 실랑이는 하반이 직접 마부의 맥박을 확인해보며 싱겁게 끝났다.
“안 죽었네…….”
하반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게닌은 거 보라는 표정으로 턱 끝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에 잠시 웃던 이샤칸이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세 번째인가.”
하반이 발을 탁탁 구르며 약 오른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현재 이샤칸은 에스티아 내에 노예로 잡혀있는 쿠르칸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이미 귀족가나 부유한 상인들에게 팔려간 쿠르칸의 소재 파악은 끝내놓았다.
그리고 새롭게 붙잡혀와 팔려갈 위기에 처한 쿠르칸들을 중간에서 낚아채는 중인데, 의외로 일이 어렵게 돌아갔다.
분명 쿠르칸을 사간 것을 확인하고 노예상의 행렬을 덮쳤는데, 까보면 없었다. 사유는 같았다. 다른 노예상이 직전에 사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꾸만 간발의 차로 놓치는 일이 벌써 세 번째였다.
“누군가 우리보다 한 발 앞서서 움직이고 있군.”
이샤칸이 내린 결론에 하반은 두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모습에 이샤칸은 넌지시 달래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다, 하반. 도마리들까지 쫓으려니 그런 것이지.”
집시들도 추적하는 상황인지라 여러모로 힘에 부치긴 했다. 그럼에도 하반은 최선을 다했다.
“이는 누군가 실수했다기보다는……. 저쪽이 훌륭하게 움직였을 뿐이니.”
“뭐 하는 노예상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놈부터 해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반은 저도 잎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얼른 연기를 쭉 들이마신 후에 다시 조잘조잘 말했다.
“마침 하나 봐둔 것이 있긴 한데, 공교롭게도 보름날입니다. 이건 그냥 보내고 다음 건을…….”
“그것으로 하지.”
하반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게닌과 마주 보았다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할 일이니.”
이샤칸이 낮게 웃었다. 어둠 속으로 연기를 흘려보내며 그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나는 자제를 잘 하는 편이잖아?”
* * *
쿠르칸 환영 연회 이후 첫 국무회의였다.
회의에는 오직 레아만이 왕실을 대표하여 자리하고 있었다. 왕은 피로하다는 이유로, 왕태자는 사냥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종종 있는 일이기에 다들 익숙하게 넘겼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재무대신 로랑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의 얼굴에서 엷은 긴장감이 버석거렸다.
“기존의 세제를 개편하려 합니다.”
서두를 꺼내는 순간부터 장내가 술렁였다. 레아는 무표정하게 회의장 안을 훑었다.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는 이들이 절대 다수였다.
“안건의 통과 여부는 화친협상 이후 결정내릴 것입니다. 오늘은 개편안에 대한 설명을…….”
재무대신의 말이 이어질수록 회의장의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다들 머리 굴리느라 바쁜 기색이 훤히 보였다.
레아는 속으로 조소를 삼켰다. 일부러 시간을 준 것이었다.
협상 이후 개편안을 통과시키기 전까지, 반대파들은 있는 힘껏 세를 모아 결집할 터였다.
그걸 한 번에 꺾어놓아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없어도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개편안에 대한 발의가 끝난 후, 여전히 웅성거리는 회의장에서 레아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알릴 사항이 있습니다.”
수군대던 귀족들은 일제히 말을 멈추고 레아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노예상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이는 쿠르칸과의 화친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뤄내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평소 같으면 그깟 노예상들에게 무슨 신경을 쓰냐며 투덜거렸을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제법 동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쿠르칸 노예들을 찾아서 풀어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이까지 있었다.
다들 뇌물 받아먹은 티가 여실했다. 레아는 과거 쿠르칸들에게 적대적이었다가 갑자기 노선을 비튼 귀족들을 주의깊게 확인했다.
저들을 집중적으로 캐봐야 할 것 같았다.
국무회의가 끝난 뒤,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아 또한 발테인 궁정백과 로랑 재무대신하고 함께 대화를 나눴다.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왕녀님…….”
다소 초췌해진 재무대신을 다독여주었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제 임무야 여기서 끝이지 않습니까. 오늘 밤에 노예상들을 찾아가시는 것입니까?”
레아가 그렇다고 답하는데, 발테인 궁정백이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쑥덕였다.
“변경백 옵니다, 변경백.”
과연 목발을 짚고 다가오는 오베르데 변경백이 보였다. 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레아에게 다가왔다.
다른 귀족들도 모인 자리이니, 약혼녀와의 관계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 저러는 듯했다.
궁정백과 재무대신은 다분히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서 뒤로 물러났다. 오베르데 변경백은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
참으로 몰염치한 자였다. 어찌 이리 뻔뻔하게 굴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레아는 말없이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그러나 변경백은 레아의 무시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가 쓸데없는 말을 떠들었다.
“오늘 밤은 침실 문을 단단히 잠그고 창문에 걸쇠를 거십시오. 덧창을 대면 더 좋을 겁니다.
왕녀궁 주변을 환히 밝히시고, 시녀들에게도 잠을 자지 말라 명령을…….”
횡설수설 떠드는 모양새에 기가 막혔다. 레아는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끊어냈다.
“오베르데 변경백.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헛소리는 다른 곳에 가서 하라는 말을 거의 대놓고 쏘아붙이니, 변경백은 벌컥 화를 냈다.
“이게 다 왕실이 야만족을 왕궁에 들인 탓이지 않습니까! 죄다 그놈들의 화려한 껍데기에 홀려서는!”
귀족들도 야만족들 따라하느라 바쁘지 않느냐며 그가 외쳤다. 회의장의 귀족들이 모두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화친협상 같은 우스운 짓거리는 그만두십시오. 왕녀님께선 그놈들이 얼마나 천박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레아가 아무 반응 없이 고요하게 쳐다보고만 있자, 변경백은 얼굴을 구겼다.
“아무튼 왕녀궁으로 제 기사들을 보내겠습니다. 밤새 주변을 감시하라 명할 테니, 오늘 하루만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무례한 통보만을 남긴 채 휙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