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34
-34-
이샤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허언은 집어치우라고 쏘아붙였어야 했는데, 입술만 달싹이다 망쳐버렸다.
우습게도 믿고 싶었다.
적국의 수장을 신뢰하고 싶어 하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일 자체가 어리석은데도 믿음을 주고 싶었다.
그와 엮이기만 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성과 논리를 잃어버리고, 감정적인 충동에 유혹을 느꼈다.
자색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싶었다. 오찬에서 마음껏 음식을 즐기고 싶었다.
블레언이 아니라 내가 노예상들을 잡아들였다고, 왕태자의 공으로 알려진 것들도 모두 내가 이뤄낸 일이라 말하고 싶었다.
여태 레아가 질서와 예법으로 억눌러왔던, 지극히 원초적인 욕구들이었다.
그는 자꾸만 레아를 들쑤셨다. 불티만도 못하게 스쳐 지나갔어야 할 감정도 거대한 불꽃으로 만들어버렸다.
절제 없는 욕망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를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이번은 그에게서 도망쳤지만, 계속 피할 수만은 없을 터였다. 결국 언젠가는 매듭을 지어야 했다.
왕비궁에서 벌어진 일을 들려주니, 멜리사 백작부인은 몹시 심란해했다.
특히 자색비단 드레스 때문에 속앓이를 심하게 하는 눈치였다. 당장이라도 범인을 색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녀를 침착하게 달랬다.
“부인에게만 따로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어요. 나는 이 일을 넘어가고 싶어요.”
“왕녀님, 허나!”
“시녀장으로서 시녀들이 분열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잡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부탁할게요.”
“…….”
“나를 팔아 재물을 얻은 시녀가 있다면,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차피 나는 떠날 사람이니…….
왕비 전하께서 무슨 짓을 하든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니까요.”
멜리사 백작부인은 답하지 않고 입술만 꾹 다물었다.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찌 다들 왕녀님을 가만두지 않는 것인지…….”
마르고 주름진 손등이 얼굴을 덮었다. 부인은 얼마간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조금 더 세력 있는 가문의 사람이었다면.”
꺼질 듯 속삭인 말에는 자책이 심하게 배어있었다.
레아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매번 이렇게 스스로를 나무랐다. 마음이 먹먹해왔다.
“부인.”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전부 내가 부족한 탓이니. 부인은 내게 과분한 존재예요.”
레아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당장 레아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뿌리 깊은 한숨을 뱉으며 답했다.
“저야말로 과분한 주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제게는 왕녀님뿐입니다.”
“그러지 말아요, 부인.”
“왕녀님께선 변경으로 떠나고 나면 새로운 분을 모시라 하시겠지만, 저는 절대 싫습니다.”
하려는 말을 미리 알아채고 하는 소리에 레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변경까지 쫓아올 태세였다.
그러나 힘겹게 따라와 봤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리라.
레아는 자신이 선택한 마지막을 떠올리며, 부디 그녀가 많이 슬퍼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머지않아 찾아올 안식을 생각하는 순간 목소리가 떠올랐다.
-내가 책임져주겠다고 하면 어찌할 것이지?
머릿속을 맴도는 그것은 아무리 내쫓아도 성가신 날벌레처럼 줄기차게 달라붙었다.
그때 그 말을 내뱉는 목소리, 눈빛, 표정, 그리고 다른 모든 것까지 생생하게 떠올라 눈앞에 펼쳐졌다.
원치 않게 기억을 되씹게 된 레아는 아주 잠깐, 정말이지 짧은 찰나 동안 생각했다.
살고 싶다고.
* * *
쿠르칸 환영 연회 동안 온갖 가십거리들이 생겨난 덕분에, 사교계의 귀족들은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호사가들을 특히 배부르게 한 것은 역시 왕녀와 쿠르칸의 왕 사이에 벌어진 염문이었다.
에스티아의 꽃이라 불리는 미모의 왕녀와 젊고 강인한 쿠르칸의 왕은 나란히 세워놓기만 해도 그림이 되었다.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왕녀는 그야말로 모든 귀족들이 선망하는 고귀한 얼굴의 표본이었다.
그녀가 늙은 변경백의 약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야만족의 왕이 새로이 혜성처럼 나타난 겁니다! 다들 변경백이 속 끓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기대 중입니다.”
발테인 궁정백은 신나서 사교계의 가십을 떠벌렸다.
“왕녀님께서 워낙 미모가 출중하시니 모래먼지 퍼먹고 사는 야만족 눈에는 어땠겠습니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열심히 왕녀님 자랑을 늘어놓던 궁정백은 로랑 재무대신이 눈치를 주고 나서야 겨우 말을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입이 근질근질한지, 이번에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탁자 위에 상자를 올려놓은 그는 자랑스럽게 뚜껑을 열어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것이 들어있었다.
발테인 궁정백이 으스대며 말했다.
“요즘 이게 최신 유행입니다.”
“대추야자인가요?”
“예.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야만족들이 먹는 말린 대추야자인데, 아주 어렵게 구했습니다.”
이렇게 틈틈이 한두 개씩 먹어주는 게 진짜 먹을 줄 아는 방법이라며, 다른 귀족들은 이걸 모른다고 발테인 궁정백이 자신의 지식을 뽐냈다.
로랑 재무대신도 흥미로워했다. 그는 다과용으로 쓰던 포크를 가지고 하나 찍어 먹어보았다가, 곧장 홍차를 들이켰다.
“아니, 무슨 설탕을 이렇게…….”
“설탕이 아니라 대추야자에서 이리 단맛이 나는 걸세.”
궁정백의 타박에도 로랑 재무대신은 찌푸려진 미간을 쉽사리 펴지 못했다.
발테인 궁정백은 홍차를 두 잔째 마시는 재무대신을 보며 클클 웃었다.
궁정백도 단것을 잘 먹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는 대추야자를 기어코 두 개나 집어먹었다.
“정력에 좋다 해서 더 유행인 것 같습니다.”
“…….”
대추야자를 즐겨 먹던 이샤칸이 곧장 떠올랐으나, 레아는 생각을 쫓아냈다.
왕국에 쿠르칸의 문화가 큰 유행이었다. 새로운 흥밋거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귀족들에게 이국의 문화는 몹시 매력적이었을 터였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너무 크게 유행을 타지 않았으면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것이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었다.
협상이 끝나고 쿠르칸들이 사막으로 돌아가면 자연스럽게 사그라지기를 바라야 했다.
궁정백은 레아에게도 대추야자를 권했으나 거절했다. 레아는 연하게 우린 홍차만 조금 마신 뒤 본론을 꺼냈다.
“부탁드린 일은 어찌 되었나요?”
“예, 왕녀님.”
발테인 궁정백이 마시던 찻잔을 곧장 내려놓았다.
“알아본 바, 쿠르칸들은 에스티아에서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움직이는 듯합니다.”
첫 번째는 각계 주요 인사들을 만나 회유하는 일이었다. 이는 이미 발테인 궁정백에게도 접근하여 포착된 바가 있었다.
두 번째는 집시들을 추적하여 잡아들이는 일이었다.
본래 쿠르칸과 집시들 사이가 좋지 않으니 있을 법한 일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무슨 내막이 있는 것 같다고 궁정백은 견해를 내놓았다.
“마지막 세 번째는 왕녀님의 예상 그대로입니다. 에스티아 내에 노예로 붙잡혀있는 쿠르칸들을 찾고 있습니다.”
발테인 궁정백의 말에 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제도는 불법이나, 돈 앞에서 질서 따윈 존재하지 않는 법이었다.
쿠르칸 노예에 대한 수요가 존재했고, 노예상들은 불법으로 쿠르칸을 잡아들여 거금을 벌어들였다.
“허면 제가 이야기한 대로 처리해놓았나요?”
“물론입니다. 왕녀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흘러갈 것 같습니다.”
레아는 살짝 미소 지었다. 만족스러운 표현에 발테인 궁정백은 칭찬 들은 어린아이처럼 표정이 환해졌다.
“궁정백이 큰일을 해주었어요. 덕분에 우리도 협상에서 내보일 패가 하나 정도는 생기겠군요.”
로랑 재무대신이 어두운 얼굴로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협상은 이미 어렵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들도 있었고…….”
왕비궁에서 맞이한 파국을 들은 뒤로, 그는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재무대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사실 그처럼 반응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최대한 살려봐야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요. 다들 아시잖아요.”
레아는 그들과 눈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그리고 분명하게 확언했다.
“협상은 에스티아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예요.”
“…….”
발테인 궁정백과 로랑 재무대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무대신은 깊은 침음을 흘렸다.
“벌써부터 왕녀님께서 변경으로 떠나신 뒤가 막막합니다. 협상을 체결한다 하여도, 다 썩어문드러진 나라를 저희끼리 어찌 이끌어갈지…….”
“저도 요새 그 때문에 밤잠을 설칩니다. 왕비 전하께선 진심으로 왕태자께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신답니까?”
“아마도요. 왕태자 저하를 끔찍하게 여기시는 분이니.”
“매사 여우같이 굴면서 제 아들 일에는 왜 그리 어리석은지 모르겠습니다.”
무심결에 투덜거린 궁정백은 얼른 주변을 살폈다. 시녀들도 전부 물러나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제 생각엔 왕녀님께서 변경으로 떠나시면, 왕비 전하는 땅을 치며 후회할 겁니다. 그리고 금방 다시 불러들이겠지요.”
혼자서 저런 생각까지 해둔 모양이었다.
왕비가 무릎 꿇고 빌어도 받아주지 말고 애를 태워야 한다며 열변을 토하는 궁정백의 말에 로랑 재무대신도 은근슬쩍 동의를 표했다.
레아가 그만하라 손을 내저은 후에야 궁정백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뭐 잘못 말했냐는 듯 콧잔등을 찡그려 보였다.
레아는 옅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발테인 궁정백.”
그리고 궁정백은 뒤이은 레아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내가 직접 노예상들을 찾아갈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