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33
-33-
세르디나가 입술을 벌렸다가 천천히 닫았다. 그녀의 눈꺼풀이 짧게 경련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파국에 레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실 세르디나가 레아의 드레스를 훔쳐 입고 나온 시점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과였다.
애써 수습하고 틀어막았지만, 닥쳐올 미래를 조금 늦추는 데 불과했던 것이다.
이샤칸은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조소가 선명했다. 무서운 표정으로 굳어있던 세르디나가 살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새 드레스는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녀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꽃피웠다.
야외정원의 꽃처럼 해사한 미소는 술에 범벅된 얼굴과 뒤섞여 괴이한 광경을 자아냈다. 세르디나는 우아하게 손짓했다.
“잠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오찬장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떠난 뒤, 오찬장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왕은 초조하게 눈치를 살폈다.
이샤칸에게 무례를 따질 생각조차 못 하는 듯했다. 마치 주인을 잃어버린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조금이나마 갖추고 있던 위엄마저 어디 날려먹은 듯한, 일국의 왕이라 칭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꼴이었다.
레아는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어놓은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어찌 이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국운이 걸린 협상이건만, 도와주기는커녕 망치려 들다니…….
쿠르칸의 왕 앞에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에, 다들 우습지도 않은 자존심만 세워대고 있었다.
지독한 외로움이 사무쳤다. 목에 피가 나도록 소리쳐도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홀로 사투하는 기분이었다.
참담한 감정에 빠진 채, 레아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오찬장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전부 파투 났으니,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러 떠나는 것이 나았다.
걸음을 옮기려는 레아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왕녀님.”
해를 가린 남자는 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아는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선뜻 붙잡지 못하고 망설였으나, 이샤칸은 재촉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 진득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제멋대로 밀어붙이고 마구잡이로 행동하다가도, 이럴 때는 이상하게 인내심이 많은 남자였다.
한참 머뭇거리다 살며시 잡으려는 찰나였다.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아.”
블레언이 싸늘하게 말했다.
“어딜 가는 거지? 아직 오찬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블레언은 여전히 식탁에 곧게 앉아있는 채였다. 우습지도 않은 오찬을 핑계 대며, 그는 레아에게 명령했다.
“가지 말라고 했어, 레아.”
레아는 답하지 않았다. 반응 없는 레아를 견디지 못하고, 블레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성난 표정으로 레아를 잡아채려 했다.
그러나 이미 레아는 이샤칸에게 손을 내뻗은 뒤였다. 손끝이 닿은 순간, 이샤칸은 재빠르게 확 움켜쥐었다.
깜짝 놀랄 만큼 강한 악력이었다. 물어뜯듯 잡아채고서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블레언의 손이 뒤늦게 허공을 갈랐다.
“…….”
블레언은 텅 빈 손을 천천히 움츠렸다. 아주 잠깐, 시선이 스치듯 맞닿았다. 푸른 눈동자는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샤칸은 곧장 레아를 끌고 오찬장을 빠져나갔다.
오찬장 입구를 지키고 서있던 기사들이 놀라서 앞을 막아섰으나, 이샤칸에게 함부로 검을 들이대지 못하고 금방 주춤주춤 물러났다.
누구도 막지 못하는 가운데, 레아와 이샤칸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샤칸의 걸음이 너무 빨랐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걷다가 발을 멈춘 곳은 대리석 기둥들이 줄지어 늘어선 회랑이었다.
모여서 재잘재잘 떠들고 있던 잡부 아이들이 흉흉한 기세의 이샤칸을 보고는 물 맞은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난 뒤에야 이샤칸은 손목을 놓아주었다.
레아는 붙잡혔던 손목을 드레스 뒤로 감췄다. 하지만 이샤칸은 도망치는 손을 잡아 끌어냈다.
가느다란 손목에는 손자국이 벌겋게 찍혀있었다.
살살 잡는다고 잡았는데도, 워낙 레아의 피부가 약하고 이샤칸의 힘이 세니 자국이 남은 것이다.
“왜 너는……!”
언성을 높이던 그가 말을 멈췄다. 커다랗게 숨을 뱉으며 손으로 제 눈을 덮었다. 한풀 꺾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프다고 말을 했어야지.”
사실 아픈 줄도 몰랐다. 그만큼 레아도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깟 것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레아는 가장 먼저 해야 할 말부터 꺼냈다.
“왕족들의 무례는 대신 사죄를…….”
그러나 레아의 말은 거칠게 잘려나갔다.
“그만.”
낮의 햇빛을 가득 받아 호박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동공이 바짝 줄어들어있었다.
“어째서 항상 네가 사과하는 거지. 죄인처럼.”
이샤칸은 잔뜩 화가 나있었다. 하지만 그가 분노하는 이유는 레아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에스티아가 네게 대체 무얼 해줬다고! 변경백에게 팔아치운 것으로도 부족해 방패막이로 써먹다니…….”
그가 보기에도 오늘 오찬장에서 레아 혼자 애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반박할 말이 없어 고개만 아래로 떨어트렸다.
“왕실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 왕태자놈을 감싸줄 정도로?”
분노를 터뜨리던 이샤칸은 간신히 제 화를 억눌렀다. 레아가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대는 것을 본 탓이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이샤칸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눌렀다. 레아는 그의 손가락을 깨물 뻔하다가 겨우 멈췄다.
“너도 화내고 소리 질러. 억울하다든지, 그게 아니라든지, 무슨 소리든 해보라고.”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았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말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데?”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무엇도 바뀌지 않았다.
당장이야 제가 가엾고 불쌍해 보이니 이리 굴어대지만, 이샤칸은 어차피 떠날 이였다.
그가 책임감 없이 저질러놓은 일들은 레아가 수습해야 할 터였다.
뻔히 알면서도, 다 알면서도…….
들쭉날쭉한 감정들이 가시처럼 심장을 찔렀다. 레아는 멋대로 튀어나오려는 그것들을 쑤셔 넣으며 경고했다.
“책임지지 못할 동정은 하지 마.”
“동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군.”
“그럼 몸정이야?”
“…….”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이샤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레아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뒤돌아서는 레아를 이샤칸이 다시 붙잡았다.
“놔!”
하지만 이샤칸은 놓아주지 않았다. 레아는 마구 발버둥 쳤다. 자꾸 자신을 건드리는 그가 미웠다. 그에게 끌려가는 스스로도 싫었다.
이샤칸은 힘껏 몸부림치는 레아를 간단히 제압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레아는 이샤칸을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 흥분으로 끓어올라있던 금안은 이제 차분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내가 책임져주겠다고 하면.”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주술에 걸린 것처럼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바라보는 레아에게, 이샤칸은 질문했다.
“그러면 어찌할 것이지?”
* * *
블레언은 텅 빈 의자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러나 아무리 바라보아도 사라진 이가 다시 나타날 리는 없었다. 굳어있던 입매가 뒤틀렸다.
“하, 씨발…….”
바로 옆에 왕이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욕설을 내뱉었다. 겨우 그 정도로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블레언은 결국 식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쾅 소리와 함께 식탁이 크게 흔들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식탁 위에 놓여있던 식기와 접시를 마구잡이로 집어던졌다.
날카로운 포크와 나이프는 뒤편에서 덜덜 떨고 있는 시종시녀들을 맞히고 떨어지기도 했지만, 아무도 블레언을 말리지 못했다.
왕조차도 블레언에게 입 한번 벙긋하지 못했다. 그는 불안하게 눈치만 살펴댈 뿐이었다.
날뛰던 블레언이 겨우 멈춘 것은 세르디나가 오찬장으로 되돌아왔을 때였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망가진 화장을 고친 세르디나에게선 술 냄새 대신 향긋한 향수 내음이 흘렀다.
고상한 자태를 되찾은 그녀는 이샤칸과 레아가 떠난 오찬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혼자 덩그러니 남은 블레언을 보고선 손으로 가슴을 꼭 눌렀다.
“블레언…….”
저를 보자마자 반색하는 왕은 안중에도 없었다. 세르디나는 오직 블레언만을 눈에 담았다. 블레언이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내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초점이 잡히질 않는 눈동자를 하고서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왕이 된다고 하여도 저자를 꺾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단순히 에스티아의 왕으로는 부족합니다.”
번들거리는 눈빛에 광기가 흘러넘쳤다. 블레언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더 큰 힘을 가져야 하건만…….”
목소리에 배어나는 찐득한 감정이 새까맸다. 세르디나의 눈이 커졌다. 괴로워하는 아들을 보며 가슴 아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세르디나는 벅차오르는 희열에 가득 차 속삭였다.
“힘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분한 일이란다. 그러니 욕심을 가지렴. 야망을 품고 권력을 탐하도록 하렴.”
“어머니…….”
질투와 자괴로 고통스러워하는 그 모습을, 세르디나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뚤어진 애정이 담뿍 담긴 속삭임이 부서진 오찬장에 내려앉았다.
“너는 대륙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서게 될 거란다, 블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