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78
-78-
에스티아 정벌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다.
실제로 이번에 화친을 운운하며 에스티아를 찾아갔던 것 또한 정벌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정확하게 구체적인 시일이 잡히는 것은 전혀 느낌이 달랐다. 회의장 안에 긴장된 기색이 감돌았다. 모르가가 다급히 발언했다.
“허나 주술은…….”
“내가 왕비를 산 채로 붙잡도록 하지.”
“……!”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모르가는 멍하니 이샤칸을 바라보았다.
“출전하기 전까지 레아에게 걸린 주술을 전부 파악하도록. 그리고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데…….”
이샤칸은 자신이 구상한 것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있던 모르가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가능한가?”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샤칸이 있다면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충분히 시도해볼 만했다.
모르가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여태껏 이샤칸이 걸어온 길이 평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처음 모시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샤칸은 항상 불가능한 길만을 걸어왔다.
모두가 안 된다고 했던 일들을 해냈고, 결국에는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모르가에게 이샤칸은 어떠한 이정표와 같았다. 아무리 불확실한 길이라도 그를 믿고 따르면 될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모르가는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곰족의 수장이 기운차게 발언했다.
“전사들은 모두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한 달 뒤에 언제든지 출정하실 수 있도록 만들어놓겠습니다.”
그러나 이샤칸은 담뱃재를 툭 털어내며 살짝 눈매를 좁혔다.
“대규모 전면전은 하고 싶지 않군.”
이유를 물으려던 부족장은 자연스럽게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왕의 신부가 에스티아의 왕녀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덕분이었다.
왕녀는 무너져가는 에스티아를 지키기 위해 홀로 발악했다.
그녀가 사랑했던 나라이니,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허면 왕궁부터 먹어치우고 나라를 삼키는 방식은 어떠십니까?”
새침한 눈매를 가진 여우족의 수장이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해보았다.
수도 근처로 비밀리에 병력을 집결시켜, 단 하루 만에 왕궁을 점거하는 것이다.
근래 대륙의 도마리들이 에스티아로 전부 모여들면서 치안이 엉망이었다. 그 탓에 경계가 느슨해진 상황이기에 잠입도 쉬웠다.
오베르데 변경백이 거슬리긴 하지만, 군사를 쪼개어 다른 쪽으로 유인해놓은 사이 수도를 삼키면 될 것이었다.
“하지만 차후 변경백놈과 전면전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샤칸은 픽 웃으며 말했다.
“서부 오베르데령 정도는 그녀도 너그러이 봐주겠지.”
전체적인 윤곽을 잡고 세부적인 계획을 맞추어 나갔다.
부족장들은 각기 자유롭게 의견을 냈고, 가끔 서로 안 맞아서 투닥거리면 이샤칸이 중심을 잡아주었다.
비단 에스티아뿐만 아니라, 다양한 안건들이 회의 주제로 올랐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으니 의논해야 할 것들도 많았다.
한참 동안 이어진 회의 끝에 잠시 휴식을 가지기로 하였을 즈음이었다.
담뱃대를 내려놓은 이샤칸이 불쑥 곰족의 수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쪽 영토에서 나는 대추야자가 특히 달고 맛있다 하던데.”
“……예?”
“좀 가져와보지 그래.”
“…….”
난데없이 지목당한 부족장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쩍 굳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샤칸은 이런 걸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당황해서 굳어있던 부족장은 뒤늦게 말했다.
“드, 드시고, 싶으시다면 얼마든지…….”
어찌나 놀랐는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말까지 더듬거렸다. 하지만 놀란 부족장과 달리, 이샤칸은 태연했다.
“가장 귀한 것으로 골라 오도록.”
그는 느긋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먹을 것이 아니니.”
……신부께 드릴 것이구나. 눈치 빠르게 깨달은 부족장은 냉큼 우렁차게 답했다.
“가장 귀하고 실한 놈으로 골라 보내겠습니다!”
이샤칸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것 말고도 무엇이든 맛있는 게 있거든 왕궁으로 가져와보아라. 내 신부는 입이 짧은지라 이것저것 많이 먹여볼 생각이야.”
신부를 언급하며 짓는 눈웃음은 고운 모래처럼 보드라웠다. 난생처음 보는 모습에 부족장들은 넋 놓고 이샤칸을 바라보았다.
아랫사람에게 너그러이 대해주시지만, 그것은 한 꺼풀 덮어놓은 겉모습에 불과했다.
일견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 뒤에는 언제나 잘 벼려진 칼처럼 날 선 본성이 숨어있었다. 보기만 해도 베일 듯이 서느런 본성이었다.
그러나 달콤한 설탕처럼 웃어 보이는 지금의 이샤칸은 알맞은 검집에 집어넣은 칼과 같았다.
진실로 안정되어 보이는 모습에 부족장들은 서로 민첩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맛있는 게 없어도 만들어내야겠다고 말이다.
* * *
에스티아의 왕녀가 야만족 왕에게 약탈혼을 당했다.
유명인의 추락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반기고 즐기는 가십거리였다.
모든 이들이 납치당한 왕녀와 야만족, 신부를 빼앗긴 변경백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름다움으로 명성 높았던 왕녀를 천박한 야만족이 어찌 욕보였을지 상상하며 씹어대는 일은 예사였다.
온갖 낯 뜨거운 이야기들이 나도는 가운데, 에스티아 왕궁은 날이 갈수록 개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나라 망하겠습니다.”
발테인 궁정백이 괴롭게 한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로랑 재무대신도 마주 한숨 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은 말없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왕녀의 최측근이었던 세 사람은 주인을 잃은 왕녀궁에 모여서 함께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한데 모였으나, 분위기는 한없이 칙칙했다. 모든 게 엉망이기 때문이었다.
왕녀가 납치당한 날, 왕태자 블레언은 곧장 왕실기사단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기세 좋게 나선 모양새가 우습게도 그는 기사 상당수를 잃고 돌아왔다. 야만족의 야습에 당한 것이다.
신부를 잃게 된 오베르데 변경백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그는 왕실에 맹비난을 퍼부으며 야만족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왕실에는 왕녀를 위해 지불했던 지참금을 전부 토해내라며 통보했다.
위로금을 받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이긴 하지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자신이 야만족들에게서 왕녀를 되찾아오면, 예정대로 부인을 삼겠다는 것이었다.
순결을 잃은 새신부의 처지가 어떠한지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변경백이 너그럽다고 칭송했으나, 측근들 입장에선 그냥 열 뻗치기만 했다.
멜리사 백작부인이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단호히 발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왕녀님께서 계속 그곳에서 지내셨으면 합니다.”
“부인……!”
발테인 궁정백이 놀라서 쳐다보는데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 쿠르칸이 난폭하고 사나워도 왕녀님께는 잘하였지요. 그리고 지금 왕녀님께서 에스티아로 돌아와 봤자…….”
멜리사 백작부인은 눈을 쓸쓸히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이전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실 뿐입니다.”
“…….”
발테인 궁정백도, 로랑 재무대신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침울하게 입을 다물었다.
왕실업무는 언제 마비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간신히 돌아가는 수준이고, 변경백도 난동을 부리며 귀족들과 함께 연일 왕실에 압박을 가하는 중이었다.
사실 진즉 무너졌어야 하는 왕실이었다. 억지로 붙잡아 버텨내던 왕녀가 사라진 지금,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던 로랑 재무대신이 문득 말했다.
“그런데 왕비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교활함은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아들에 대한 집착적인 애정을 지닌 왕비는 왕태자가 왕위에 오르는 날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 왕비가 아무런 손도 쓰지 않고 무너져가는 나라 꼴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이상했다.
평소 지랄맞은 성정으로 유명한 왕태자도 왕녀를 추격하는 데 실패한 뒤로는 얌전하기만 했다.
꼼짝 않고 침묵하는 그들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사실 요새 왕비 쪽이 수상하기는 합니다. 그거 아십니까? 왕비궁 정원의 식물들이 싹 말라비틀어졌다고…….”
괴이한 일을 언급하는 로랑 재무대신의 말에 멜리사 백작부인이 살포시 눈썹 사이를 좁혔다.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있던 그녀가 잠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 왕궁 내에 못 보던 고용인들이 많아졌습니다. 왕비 전하께서 뽑았다고 하던데…….
어디 길에서 주워 왔는지, 행동거지에서 교육을 받은 태라곤 조금도 나지 않더군요.”
그들이 왕궁의 위계질서를 어지럽히는 탓에 요즘 시녀들이며 고용인들 사이에서 여러모로 말이 많다는 것이었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발테인 궁정백이 초조하게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빠르게 다각거리던 그가 못 참겠는지 불쑥 말을 내던졌다.
“이건 아직 확실치 않은 소문이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슬쩍 주변을 살피고서 말했다.
“왕비가 집시들을 궁으로 들이고 있다는 말이…….”
멜리사 백작부인과 로랑 재무대신의 눈이 서서히 커지던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요란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웅성거림 끝에 노크조차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이 시뻘게진 시녀가 급하게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전하께서……!”
앉아있던 세 사람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눈을 부릅뜬 그들에게 찰나 예사롭지 않은 느낌이 스쳤다.
감각을 공유한 것처럼 동시에 찾아든 느낌이었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시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서거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왕의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