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93
-93-
발목을 휘감은 검은 연기를 보는 순간, 모든 사고가 멈췄다.
귓가에 쇠사슬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렸다.
세르디나가 부르고 있었다. 레아를 다시 에스티아로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극도의 공포심이 눈앞을 까맣게 물들였다.
“……레아!”
오한이 든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레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아!!”
번쩍 정신이 들었다. 뒤늦게 상황이 인식되었다. 검은 연기에 휘감겨 몸이 떠올라있었다.
모르가가 쿠르칸어로 소리 지르며 주술사들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고, 깔려있던 붉은 카펫은 어느새 걷힌 채였다. 바닥에는 미리 그려놓았던 것처럼 보이는 주술진이 펼쳐져있었다.
결혼식장을 예쁘게 장식했던 생화들은 바닥에 떨어져 엉망으로 짓밟혔다.
흙발자국이 찍힌 하얀 꽃더미 속에서 이샤칸은 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마치 실재하지 않는 허상처럼, 손은 레아를 그대로 통과했다.
다른 쿠르칸들도 달려들었으나 아무도 잡을 수 없었다.
레아도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다행히 이샤칸이 만져졌다. 그가 손을 맞잡으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오직 레아만이 타인을 붙잡을 수 있는 상태였다.
간신히 이샤칸의 손을 잡은 찰나, 연기가 레아를 끌어당겼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놓는 순간 에스티아로 끌려갈 것이다.
팔이 빠질 것처럼 아파왔지만 레아는 있는 힘껏 이샤칸을 붙잡았다.
“이샤칸 님……!”
모르가의 외침에 이샤칸은 다른 쪽 손으로 단도를 뽑았다. 그가 곧장 제 팔뚝을 베어냈다.
터져 나온 붉은 핏줄기는 고스란히 주술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기가 술렁였다. 주술진의 한 귀퉁이에 서있던 주술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모르가는 창백해진 얼굴로 재차 외쳤다.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말씀드렸던 것보다 훨씬…….”
그가 말하다 말고 헛구역질을 했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으나, 모르가는 개의치 않았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더…….”
이샤칸은 망설임 없이 새로운 상처를 냈다.
그가 칼날을 내리그을 때마다 핏줄기가 터져 나와 주술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레아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난도질되어 피 흘리는 자신의 반려를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주술진이 핏물을 끊임없이 집어삼키는데도, 레아를 휘감은 검은 연기는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꿈틀거리며 점차 기세를 높였다.
이샤칸은 연이어 서너 개의 상처를 더 그어냈다.
그의 몸에 붉은 선이 생겨날 때마다 누군가 모난 돌로 내려치는 것처럼 가슴이 아파왔다.
이미 위험할 만큼 상당한 양의 피를 쏟아냈다.
그러나 더 많은 피를 들이붓는다고 해서 가망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결과는 같았다. 검은 연기는 조금씩 레아를 뒤덮어갈 뿐이었다.
이샤칸도, 레아도 알고 있었다. 이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샤칸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레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제 인생에서 얼마 되지 않았던, 한 줌의 모래와 같았던 시간들을 생각했다. 꿈처럼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였다.
기묘할 정도로 침착한 기분이었다. 예고되었던 순간을 받아들이듯 담담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으리라.
발목에 묶여있던 쇠사슬은 아주 가늘고 작아졌지만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여 언젠가는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레아의 자리는 정해져있었다. 빛 한 점 없이 새까맣게 어두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고통 받고 괴로워할 이는 하나면 충분했다.
레아는 이샤칸을 바라보았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그에게 다른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이샤칸.”
황금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치 빠른 남자이니 레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벌써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레아는 그에게 속삭였다.
“나 찾지 마.”
이샤칸의 동공이 좁아졌다. 그가 목이 졸린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를 내었다.
“레아, 안 돼…….”
이샤칸은 간절히 레아를 보았다. 그러지 말라고,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듯 그리 보았다.
레아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따뜻한 온기가 스르륵 사라졌다.
검은 연기가 빠르게 레아의 몸을 집어삼켰다. 이샤칸은 절박하게 손을 내뻗었다.
레아를 끌어안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손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로 외쳤다.
“레아!!”
심장에 칼을 박았어도 이토록 아프진 않았을 터였다. 부서지는 반려의 모습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검은 연기가 몸을 뒤덮고, 얼굴을 덮고, 하여 마침내 눈과 귀를 모두 가릴 때까지 이샤칸을 보았다.
새까만 연기가 다시 걷혔을 때, 레아는 딱딱한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대리석 바닥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싸늘했다. 몸이 떨렸다. 추워서, 너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겨울바람처럼 레아를 파고들었다.
“오랜만이구나, 레아.”
고개를 들어올렸다. 익숙한 장소였다. 에스티아 왕궁의 홀, 이샤칸을 쿠르칸의 왕으로서 맞이했던 장소.
드넓은 홀의 양옆으로 늘어선 대리석 기둥과 에스티아 왕실 문장이 새겨진 휘장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눈앞을 바라보니, 왕좌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는 왕관을 쓴 블레언이 앉아있었다.
세르디나가 블레언의 옆에 서서 생긋 웃어보였다.
레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알고 있었다.
또다시 인형의 집에 갇혀 죽느니만 못한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장난감으로 굴려지다가 질리면 쓰레기통에 처박힐 터였다.
그러나 레아는 이미 자유를 맛보았고, 그것이 얼마나 달콤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허리춤의 단도를 움켜쥐었다.
이제 레아는 아주 유용한 인질이 되었다.
쿠르칸의 왕과 반려의식을 치렀으니,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협박거리였다.
하지만 결코 그런 일이 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스스로 선택하리라.
딱딱한 손잡이를 꽉 붙들고서 듣지 못할 사과를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미안해, 이샤칸.
당신 사랑해서 미안해.
손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움직였다. 칼날이 목줄기를 꿰뚫으려는 순간이었다.
“……아흑!”
레아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블레언이 왕좌에서 뛰어 내려와 레아를 뒤로 밀친 것이다.
툭 떨어진 작은 단도는 블레언의 발에 채여 구석으로 날아가버렸다.
시퍼렇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레아를 노려보았다. 레아는 그를 마주 노려보다가, 곧장 혀를 깨물었다.
으득, 살점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깨물었어도 죽지 못했다.
더 깨물기 전에 블레언이 입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은 것이다. 비릿한 피 맛이 가득 번졌다.
손가락을 뱉어내려 발버둥치자, 블레언이 소리 질렀다.
“이 씨발년이 진짜……!”
분노에 찬 외침에 세르디나가 웃었다.
그녀는 사뿐사뿐 드레스자락을 끌며 걸어와 우아하게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간 사막에서 즐거웠니? 주술이 많이 옅어졌구나.”
그녀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집으로 돌아와야지, 레아.”
블레언이 세르디나의 손에서 유리병을 낚아챘다. 레아는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입 안의 손가락을 마구 깨물고, 허벅지를 짓누르는 무릎을 밀어내려 발작하듯 날뛰었다.
고상하지 못한 모습에 세르디나가 눈매를 찡그렸다.
“가만히 있으렴. 뭘 하지를 못하겠구나.”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몸이 멈췄다. 발버둥 치던 팔다리가 추욱 가라앉았다.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을 비틀어 보았으나, 줄 끊어진 인형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블레언이 씨근덕거리며 유리병의 마개를 뽑았다. 눈물이 고인 채 애타게 그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못하는 입술을 달싹여 소리 없이 몇 번이나 속삭였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 죽여줘.그냥 죽여줘…….
“…….”
블레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아주 찰나일 뿐이었다.
그는 곧장 새까만 액체를 입에 밀어 넣었다.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핏물과 묘약이 뒤섞여 목구멍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금빛 모래의 사막이 떠올랐다. 소중한 순간들이 하나씩 눈앞을 스쳐갔다.
-나와 사막에 있어줘.
그는 우는 레아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결혼식을 해야겠어. 사막에 있는 모든 이들을 초청해서 아주 화려하게…….
용기 내어 청혼한 것에 벅차게 답해주기도 했었다.
-이제 먼저 달려와서 안길 줄도 알고.
하나라도 먼저 표현하면 기쁘게 받아주었다.
-사랑해, 레아.
레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던 남자였다. 레아는 깊은 구덩이에 몰아넣어지는 기억들을 붙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의 이름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기억은 가장 안쪽에 처박혔다.
혼자서 들어 올릴 수 없는 쇠문으로 굳게 닫아버리고,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로 칭칭 휘감고, 열쇠 없는 자물쇠로 잠가버렸다.
빛나던 순간들이 전부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기억이 생겨났다.
제멋대로 주물러지며 짜 맞춰지던 기억들은 어느 순간 매끄럽게 연결되었고, 원래부터 있었던 양 레아의 머릿속을 차지했다. 흐느끼던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레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왜 울고 있었지?
손으로 흥건하게 젖은 뺨을 더듬었다.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시야에 푸른 눈동자가 들어찼다.
블레언은 얼굴을 바짝 가져다댄 채 레아에게 명령했다.
“웃어.”
턱 끝에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뚝 떨어졌다. 이유 모를 눈물을 흘리며 레아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가 눈을 새파랗게 빛내며 질문했다.
“날 사랑하지, 레아?”
지끈, 가슴 안쪽이 아파왔다. 둔탁한 통증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속이 메스꺼웠다.
허나 구역질이 올라오는 와중에도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적당한 빠르기로 콩닥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정답을 알려주었다.
레아는 아주 당연하단 듯 블레언에게 대답했다.
“……네.”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속삭였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