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82)
282화
리드의 주변 기류가 변화한 건 그때였다.
무엇인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반밖에 남지 않은 카르페이오스의 전신이 혼란으로 경련하던 어느 순간.
“……!”
대악마의 기괴한 동공이 크게 벌어졌다. 혼돈악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죄업처럼 검었던 흑발이 찬연한 은발로.
질척이는 혈해 같았던 두 눈동자의 색은 햇살이 쏟아지는 천해로.
정화되었다.
마족들이 흠모해 마지않았던 위대한 악의 힘과 격이 일시적으로 걷혀 나간다.
비로소 영혼의 본질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의 존재는 인간.
그것도 카르페이오스가 익히 알고 있는 인간이다.
“기억하나?”
혹시 기억을 하지 못할까 싶었는지 리드는 제 정체의 증거도 꺼내 보였다.
힐트의 푸른 스퀘어 보석이 인상적인 새하얀 검이 소환되어 모래 바닥에 아무렇게 꽂힌다.
“너, 너는…….”
“이 모습은 알아보는군.”
“네, 네가 왜……. 어, 어떻, 어떻게 이런……. 그 벌레 같던 인간이…… 말도 안 되는…….”
눈앞의 존재는 분명 혼돈악이다. 그에게 복종하려는 카르페이오스의 본능이 이를 확실하게 증명한다.
그렇다면 상대는 당연히 가장 순수한 악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만마와 만악의 도가니 속에서 최고로 정제된, 불순물 하나 없는 악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왕조차 머리를 조아려 마땅한 격을 가진 존재. 그것이 혼돈악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이제껏 믿고 섬겨왔던 존재가 한낱 인간이라니!
위대한 혼돈악의 의지가 고작 인간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니!
그것도 저가 유희 거리로 삼았던 그 은색 가축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충격을 금치 못하는 카르페이오스의 귀에 중저음의 미성이 꽂혔다.
“그러고 보니 이게 열다섯 번째던가.”
“뭐……?”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
리드가 싸늘한 선고를 뇌까렸다.
“신릉이 완공되었으니 네 쓸모는 끝났다.”
“우, 웃기지 마라!”
마기를 소모시켜 육신을 수복한 카르페이오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영혼에 각인된 복종의 본능을 애써 부정하며 혼돈악에 맞서고자 했다.
대악마의 전신에 핏대가 꿈틀거리고 흰자위가 붉게 변하며 음성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너는……!”
“…….”
“과연 그럴까.”
사나락에 광풍이 몰아쳤다. 두 존재의 격이 부닥치며 만들어진 파괴의 기류였다.✠천지를 무너뜨릴 듯 격렬한, 그러나 일방적이었던 전투는 오래 걸리지 않아 막을 내렸다.
너덜너덜해진 검은 종이 인형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 그러나 리드는 용케 머리 부분을 찾아내어 손을 뻗었다.
갈고리 같은 손이 머리털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자비한 악력이 대악마의 머리채를 잡고 넝마 같은 몸뚱이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퍼서서석.
생명 있는 것의 육체라기보다는, 무기질적인 무언가가 가루로 화하는 소리가 울렸다.
파스스스…….
사나락의 주인, 카르페이오스.
그는 제 영토와 어울리는 모습으로, 한 줌 모래가 되어 허망하게 흩어졌다.
소멸시키지는 않았다. 그건 호상이니까.
미천한 벌레로 태어나 수십만 번쯤 환생하는 것이 징죄가 될 것이다.
바닥에 곱게 깔린 카르페이오스의 잔해를 짓밟으며 리드는 걸음을 옮겼다.
고작 세 걸음 만에 주변의 풍광이 이지러지고 새로운 장소로 변모한다.
그것은 마치 그가 이동했다기보다는 공간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찾아온 듯했다.
위대한 혼돈악을 마중한 장소는 피라미드 형태의 탑, 혼돈 신릉이었다.
그는 그 어떤 제재도 받지 않은 채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산보하는 듯한 느긋한 걸음이 지하를 향하고 복잡한 미궁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혼돈의 제단은 마지막에 왔을 때와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동심원을 그리며 아래로 파고드는 원형 계단의 형태가 잘 드러나 있었다.
검은 우물이 바닥에 아주 얕게 차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만수위까지 물이 차오른 탓에 내부가 보이지 않는다.
이제 우물이라기보다는 저수지에 가까워진 물이 느릿느릿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수면의 면적은 이곳과 연결된 어느 던전의 게이트 크기를 의미했다.
충분히 벌어진 출입구를 확인한 리드가 한 손을 들어 수면에 댔다.
그의 외견이 다시 검고 붉게 물든 순간이었다.
콰과과광!
부여받은 악의 권능을 사용하자 고요하던 수면이 솟구쳤다. 수맥이 터진 것처럼 물이 폭발적으로 세력을 부풀려 나갔다.
리드의 몸마저 그 강력한 수세(水勢)에 휩쓸려 물속에 갇혔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수중에서 차분히 무언가를 기다렸다.
곧 강대한 존재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좁은 구멍을 비집고 나온 거대한 혼돈악의 진체가 마침내 신릉에 광림한 순간이었다.
사방의 물이 리드를 쥐어 터뜨릴 듯이 감쌌다.
“…….”
이 시간선에서 첫 만남이었으나 혼돈악은 모든 인과관계를 읽어냈다.
리드가 혼돈악의 힘과 격과 권능을 흡수하되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버스트를 일으켜서 혼돈악을 인세에 풀어놓는 계약 조건이 있었던 덕분이다.
던전 버스트는 던전의 주인을 바깥으로 풀어놓는 동시에 힘의 크기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효과를 일으킨다.
이런 버스트의 수혜에서 혼돈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공간을 완전히 장악한 비정형의 존재가 해방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만 망령들의 귀곡성이 합쳐진 듯한 음성이 낮아진다. 그를 감싼 유체의 수압이 그의 몸을 으스러뜨릴 듯했다.
그러나 리드는 지극히 담담했다.
“한 번 더 던전 버스트를 일으키겠다.”
물속이었음에도 성대는 무리 없이 기능했다.
“네 격을 더 끌어올리려고.”
파격적인 선언이 떨어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혼돈악.”
“너를 신으로 만들어주지.”
리드의 계획은 두 번의 버스트를 이용하여 혼돈악을 두 번 격상시키는 것.
그러나 이것은 비단 세상을 철저하게 파멸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세계는 그의 회귀로 겨우 소멸을 피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가 망가진 이유는 하나.
바로 신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신이 있으면 이 세계는 수복된다.
신이 있어야 이 세계에는 미래가 생긴다.
신만 있으면 이 세계에는 더 이상 회귀가 필요하지 않다.
신만.
오로지 신만 있으면.
그렇다면.
‘그 신이 ‘마신’이어도 상관없겠지.’
이제껏 고장 난 시계 부품으로서 살아왔다. 100번의 삶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는 한계였다.
그 혼자만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하다고, 그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무자비한 세상의 공리주의에 더 이상 굴종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선을 찾는 수밖에. 비록 그것이 최선과 아주 큰 격차가 나는 차선일지라도.
돌아올 기약 없는 신을 대체할, 새로운 신을 이 땅에 세운다.
마신이 지배하는 세계는 필연적으로 마계화될 것이다. 예상 가능한 인류의 생존률은 5% 미만.
이 생존자 인구는 ‘성지 구축’ 아티팩트의 영역 안에 밀어 넣는다. 그것이 바로 인류 최후의 보루다.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하지만 세계의 존재 자체를 흔적도 없이 멸망시키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지이지 않은가.
그래서 이 계획은 멸망인 동시에, 리드의 구원이자 선(善)이기도 했다.-어서 타락해 줘.
-…….
-나와 같이 멸망한 세계에서 살자.비록 그녀는 그의 구원을 거부했지만.
어둡게 침잠하는 리드를 대신하여 혼돈악이 사악하게 웃었다.
45장. 묵시전쟁
바닥에 물이 찰박이는 음침한 신전.
회색과 보라색의 제례복을 입은 미소녀의 맨발이 수면에 둥근 파문을 그리며 이동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춘 소녀가 짤랑거리는 법봉 끝을 바닥에 찍고 무릎을 꿇었다.
끝으로 갈수록 민트색을 띠는 긴 금발이 물에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녀가 모든 행동을 갈무리하자 공간도 멈춘 듯했다. 주변 환경은 완벽한 정물화가 되어 소리와 움직임을 죽였다.
그때였다.
둥, 둥, 둥.
물속에서부터 규칙적인 울림이 전해져 온다.
그것은 물을 매질로 타고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였다. 누군가가 물속의 계단을 밟고 소녀가 있는 곳으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수면 위로 장신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젖은 흑장발의 미남자, 그는 모든 마족들이 흠모하고 숭앙해 마지않는 존재였다.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혼돈악이시여.”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푸른 눈이 기쁨으로 번들거렸다.
리드는 마력으로 제 몸의 물기를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곧 퇴폐적인 붉은 입술이 열렸다.
“어빅시니스.”
“예.”
“상황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혼돈악의 복음을 전파할 준비를 마쳤나이다. 66,666체의 악마 사도들이 대기 중이니 뜻대로 쓰소서.”
“그래.”
무심한 대꾸가 지고한 결정을 대신했다.
마왕과 혼돈악. 두 존재를 중심으로 원형 파문이 연달아 펼쳐졌다. 곧이어 바닥에 얕게 차오른 물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빅시니스는 희열을 감추지 못했다. 주변의 변화가 똑똑히 느껴진다.
이곳은 인세와 마왕령을 잇는 공간 계면으로 바뀌고 있었다.
‘드디어 인세에……!’
인간세계로 나가는 것은 모든 악마의 숙원. 악의 정점에 선 혼돈악의 진체마저 바라는 일이었으니 어빅시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자장!
공간의 한쪽 면이 유리벽처럼 깨졌다. 파편이 떨어져 나간 자리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갈음되었다.
마침내 모든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을 때, 공간 계면에 펼쳐진 것은 새하얗고 성스러운 공간이었다.
리드가 불러내 고정시킨 좌표는 다름 아닌 성황청.
한 걸음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계와 인세가 접붙었다. 그것은 고요하게 이루어진 던전 버스트였다.
“나가지.”
등을 돌린 리드가 먼저 인간들의 세상을 향해 앞장섰다.
뒤따라 어빅시니스가 설레는 낯빛으로 첫 걸음을 내디뎠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