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tory RAW novel - chapter 699
“하지만…….”
“니아를 상대하는 건 굉장히 위험해. 그래서 견습은 니아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게 우리 오랜 관행이야. 나도 여행할 땐 그랬어.”
“……알았어. 그럼 여기서 지켜보는 건 괜찮아?”
“지금은 괜찮아. 하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킬 거야.”
“알았어.”
인하는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인하의 일행은 경계하거나 신기해하는 눈으로 나를 흘끔거렸다.
인하랑 가장 가까이 선 유독 훤칠하게 생긴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조금, 아니 많이, 신경 쓰였다. 나랑 인하를 보는 눈빛이 묘하게 다정하기도 했고, 인하가 제 어깨를 짚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 게 특히 마음에 걸렸다.
‘…아니, 잠깐만.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이 영혼은, 어쩌면…….’
한순간 머릿속에 많은 상념이 휘몰아치며, 문득 든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감정적이고 사적인 것보단 현실적인 위험이 먼저다. 싸움은 점점 거칠어졌고, 나는 끊임없이 결계를 강화했다. 다른 도시의 침식을 소멸시키러 간 활을 쓰는 사도의 현황도 확인했다. 이 도시 바깥의 남은 오염된 생물은 이제 둘…….
“……어라?”
그 순간 묘한 감각이 영혼에 닿았다. 공명……이다, 아마도.
곧 달깍 하고 무언가가 풀려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멀리에서 새까만 어둠이 문양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오직 신에게만 보이는 힘이며 현상이었다.
──새로운 신이 각성했다.
그것도 니아에 대항하기 위한 자격과 권능을 가진 1계급 신이다!
인하가 깜짝 놀라 내게 물었다.
“저게 뭐야?”
“각성 현상이야. 1계급 신이 각성하는 건 나도 처음 봐. 그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유명한 실력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혹시 누군지 알겠어?”
인하는 혹시나 하는 얼굴로 눈을 홉떴다.
“설마, 오빠인가?”
오빠? 인하의 가족인가?
“…형이 각성했다고?”
당연하지만 인하의 곁에 선 이들 대부분은 일련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가까이에 친근하게 선 남자만은 달랐다. 우리의 말을 문제없이 듣고 이해했다.
“이 타이밍에 각성이라니, 그럼, 혹시 위험에 처한 거 아냐?”
신의 각성도, 각성의 메커니즘도 이해하고 있다. 아까 했던 의심이 확신에 점점 다가서는 걸 느끼며 나는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조금 전 이 도시 바깥의 니아는 전부 처리됐어.”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건 그렇고, 멀리서 솟아오른 어둠의 기척마저 어딘지 그립다고 느낀다면 착각일까?
“착각이 아닙니다.”
기억을 되짚은 나는 문이의 말에 수긍했다. 그러나 일단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그로부터 15분 후, 신과 사도에 의해 모든 니아의 힘이 전멸했다. 이제 뒷수습을 할 차례다.
니아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계의 법칙을 거슬러 탄생한 괴물. 그러므로 니아가 세계를 침식했다는 사실은 웬만해서는 세계에 의해 지워진다. 그로 인해 입은 피해도, 그에 관련된 기억까지 모두 지워진다.
하지만 침식이 대규모로 진행되었을 경우에는 드물게 일어나는 오류에 대비하기 위해 신들이 직접 흔적을 지우는 게 규정이다.
“뒷수습하는 데 협력해줘서 고마워! 우리는 시간을 건드리는 데 서툴거든.”
1계급 신은 니아 해결 전문 전투 신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를 관리하거나 세계의 법칙에 관여할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인 2계급 신보다는 뒤떨어진다.
그래도 니아가 남기고 간 흔적을 지우는 것에 한해서는 우리보다 뛰어났다.
세계에 따라 니아의 흔적을 지우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보통은 시간을 되감는다. 그게 가장 깨끗하게 흔적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와 신이 첫 번째 세계를 모른다면 그들의 기억 역시 지워 없애야 한다. 하지만 이 세계의 신은 첫 번째 세계를 알았고, 따라서 그럴 필요는 없었다.
원래는 뒷수습을 끝낸 다음엔 바로 세계를 떠나는 게 좋다. 하지만 1계급 신이 각성한 것도 있고, 인하가 첫 번째 세계의 견습 신인 것도 있어 관계자들끼리 대화할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 세계 신의 도움 덕에 그 자리는 신계에 마련되었다. 대화의 참가자는 1계급 신 1명과 신도 1명, 나, 인하, 붉은 머리 남자, 이번에 신으로 각성한 검은 머리 남자…….
“……은하?”
검은 머리카락의 갓 각성한 어린 신은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내 외모는 각성한 순간부터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 환생할 때마다 유전에 따라 머리색이며 피부색이며 외모가 조금씩 달라졌지만, 그래도 본판은 남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다. 인간 유은하일 때보다는 훨씬 예뻐졌지만, 인간 유은하를 아는 이는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닮았다고 느낄 것이다. 나만이 아니라 전생을 기억할 정도로 강한 영혼을 가진 자의 외면은 그런 경향이 있다.
내가 아는 인하도, 환생한 인하도, 조금씩 다르지만 많이 닮았다. 붉은 머리의 남자는 아니었지만, 눈앞의 남자도 그랬다. 내가 아는 이와 꼭 닮은 외모를 지녔다.
인하가 그를 ‘오빠’라 불렀던 이유를 아주 잘 알겠다.
“제현 오빠, 맞나요?”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호칭은 아주 오래 전에 만날 수 없게 된 이를 향한 것이며, 이제는 그립기 이전에 낯설었다.
어딘지 멍하게 나를 보던 남자의 눈동자에 이내 기쁨이 가득 찼다. 다급히 다가온 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아, 나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그를 막았다.
“오빠, 저 남친 있어요.”
“…엇.”
“그리고 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러니 끌어안는 건 좀 그래요.”
“풉….”
인하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 말을 한 나도 조금 웃겼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당황하는 상대를 두고 나는 일단 내 의문부터 해결했다.
“그보다 이제 제현 오빠라고 부르는 건 좀 그렇겠네요. 지금 이름은 뭔가요?”
“……아드리안 디사이드. 리안이라고 부르면 돼.”
그는 한 번 숨을 내뱉고, 빠르게 이어 말했다.
“예전처럼 불러도 괜찮아.”
“감사해요.”
어떤 호칭으로 부를지 고민하며 나는 이번엔 인하 옆에 딱 붙어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의 외모는 제현 오빠와는 달리 예전의 그림자가 없다시피 하다. 하나로 묶은 붉은 머리카락, 다소 예민해 보이는 눈꼬리 안쪽의 진녹색 눈동자, 금테 안경. 거기에 단정한 옷차림이 합쳐져 학자 같은 분위기였다.
외모는 물론 영혼도 상당히 낯설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다. 영혼은 그 세계와 새로 입은 육체에 맞춰 계속 바뀐다.
그래도 나는 중학생 때 이미 영혼을 볼 수 있었다. 기억을 되짚어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보았던 영혼과 지금의 영혼을 비교해 봤을 때, 본질이 같은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하가 내 확신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가깝고 친근한 태도도 그렇지만, 붉은 머리 남자와 인하의 영혼이 깊은 인연으로 묶여 있는 게 보인다. 인하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예전부터 줄곧……줄곧 한 상대를 좋아했다.
“그…….”
남자는 내 시선을 마주하며 머뭇거렸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박한수, 맞지?”
그는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안심한 기색으로 환히 웃었다.
“맞아. 진짜, 진짜 오랜만이다.”
“응. 오랜만이야.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영혼만이라면 언젠가 마주칠 수도 있다.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스스로 만나러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인하 말고 이렇게 나를 기억하고 있는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다시 만나서 기뻐.”
“…나도.”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한수의 손을 잡고 한 번 악수를 했다. 예전과는 사뭇 달라진 나의 태도에 한수와 제현 오빠 모두 조금 낯선 눈빛을 보냈지만, 이내 예전처럼 다정히 웃어주었다.
☆
재회는 기뻤지만, 지금은 제현 오빠의 각성 문제가 먼저였다. 제현 오빠는 1계급 신으로 각성한 만큼 나와는 조금 다른 단계를 거쳐 동료 신에게 신위에 관한 안내를 받았다. 나랑 인하, 한수는 그 곁을 지키며 짧은 잡담을 나눴다.
“제현 오빠가 신으로 각성할 줄이야.”
“그러게. 그런데 놀라긴 했지만 별로 의외는 아니야.”
인하가 내 감상에 동의했다.
“그건 그래. 환생자기도 하고, 같은 세계에 살 때 우리 다음으로 품은 운명이 커다랬잖아.”
로타가 한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다 제현 오빠는 영혼도 커다랬다. 그러니 신으로 각성했다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냐. 하아, 난 듣는 이야기마다 스케일이 너무 커서 정신이 혼미하다, 진짜.”
하지만 신인 우리와 달리 냉정하게 그런 걸 논할 수 없는 한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는 잠깐, 우리는 곧 1계급 신들과 제현 오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제현 오빠는 니아와 접촉한 것을 계기로 본능을 따라 영혼의 근원적인 힘을 이끌어 냈다. 그렇게 1계급 신으로 각성했다. 칭호는 아직 발현되지 않았다.
1계급 신의 선택지는 우리 2계급 신과는 조금 다르다. 일단 견습 기간 때 반드시 1계급 신 이상만이 쓸 수 있는 힘의 사용법을 따로 배워야 한다. 신이 되지 않기로 결정하면 그 힘을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힘을 제한하는 특수한 제어장치가 영혼에 따로 채워진다.
세계와 영혼의 근원적인 힘은 무분별하거나 제어하지 못했을 시 아주 위험한 힘이었다.
“힘의 사용법을 배울 때 동료를 당신의 세계에 보내는 게 좋은지, 아니면 당신이 첫 번째 신계에 올지, 편한 대로 결정하세요. 이건 힘의 폭주에 대비한 제어장치예요. 당분간은 항시 착용해 주세요.”
때문에 1계급 견습 신은 힘을 다루지 못하는 동안에는 액세서리 형 제어장치를 반드시 끼고 다녀야 한다. 제현 오빠는 귀걸이형 제어장치를 건네받아 바로 귀에 걸었다. 그러자 조금 불안정했던 오빠의 신력이 안정되었다.
“건넨 통신기를 통해 첫 번째 신계 측에서 연락이 갈 거예요. 신이 될지 말지는 힘의 사용법을 배우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1계급 신과 신도는 나보다 먼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이곳은 내가 다스리는 세계와는 궤를 달리하는 다른 세계다. 이 세계와 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도 나는 여기에 오래 있을 수 없다. 그것을 전제로 우리 네 사람은 비로소 재회를 기념하는 대화를 나눴다.
세 사람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제현 오빠는 이번이 5번째 환생이었고, 인하가 사는 제국과 인접한 왕국의 왕세자였다. 전생에 이미 세계의 규격을 뛰어넘은 초월자가 되어 차원 도서관에도 진입했다.
그래서 나를 만나기 이전부터 인하가 신이라는 것도, 나와 성진이에 대한 이야기도 제한에 걸리지 않고 이해했으며 받아들였다.
제한에 걸리지 않은 건 한수도 마찬가지였으나, 한수는 좀 더 특이한 경우였다.
한수는 나이가 7살이 되었을 때 자신이 박한수였을 때의 삶을 떠올렸다. 초월자의 자리에 오른 것도, 영혼이 특별히 진화한 것도 아니었는데 인하의 많은 이야기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참고로 한수와 인하는 이 세계에서 몇 년간의 약혼 기간을 거쳐 결혼했다. 나와 성진이가 올릴 예정인 결혼식과는 다른 상황인 걸 알지만,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지 못해 많이 아쉬웠다.
참고로 한수의 현재 이름은 레이먼 체르넬리언이었다.
두 사람이 부부이기에 더더욱 나는 내 추측을 거리낌 없이 이야기했다. 고민 끝에 한수와 제현 오빠가 원한 대로 예전의 이름을 불렀다.
“한수 네가 세계의 제한 없이 인하의 말을 이해한 건 인하가 널 반려라고 생각해서 일거야. 신의 반려는 특별하거든.”
“그래?”
“신에게 반려가 생겼을 때, 영혼의 등급이 대등하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서로 다르다면 보다 낮은 쪽이 높은 쪽에 이끌리게 돼. 설령 반려 계약을 맺지 않았다 해도 신이 반려라 여긴다면 상대방은 영향을 받아. 만약 다른 사람이 너에게 이번에 나눈 이야기를 했다면 너는 이해하지 못했을 거야.”
“흠.”
“그리고 내가 보기에 너는……이번이 박한수의 삶을 살고 난 뒤 첫 번째 환생은 아니야.”
그렇다기엔 레이먼의 영혼은 내가 아는 박한수의 영혼과 많이 달랐다. 한수는 정말로 제현 오빠랑은 전혀 다른 케이스였다.
“그럼에도 네가 이번 삶에서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건 앞서 말했듯이 인하가 널 반려로 여겼고, 그런 인연이 너와 인하 사이에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런 전제에서 두 사람이 같은 세계에 환생했기 때문일 거야.”
인하는 예상하지 못했었는지 긴장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인하의 마음이 그리 약하지 않음을 알기에 나는 결코 좋은 일이라고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결론을 말했다.
“즉 네 기억은 인하에게 영향을 받아 깨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여행 중인 인하와 달리 나는 보다 많은 자격을 손에 쥐고 있고, 보다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다. 무엇보다 나는 감지능력에 있어 손에 꼽히는 신이었다.
“그게 맞는다면 한수 너는 이 삶이 끝날 때, 혹은 끝나기 전에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해.”
“…신의 정식 반려가 될지 말지?”
한수는 내 이야기를 올바르게 이해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반려가 된다면 넌 인간이 아니게 될 거야. 신이 되거나, 신을 보조하는 사자가 되거나.”
“…….”
“어찌되었건 신의 반려는 신과 함께 영원히 살아. 신중히 고민하기를 바라.”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한수가 물었다.
“만약 내가 인하의 반려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어떻게 돼?”
“박한수의 기억을 잃고 영혼의 안식이 찾아올 때까지 평범하게 환생을 반복하겠지.”
불안해 보이는 인하와 한수의 표정에 나는 다른 선택지를 알려주었다.
“임시로 반려 계약을 맺어서 선택을 유보하는 방법도 있어. 인하만 해도 아직 정식 신이 될지 말지 정하지 못했는걸.”
“……아니야.”
“아니야?”
“난 신이 될 거야. 그동안 마음을 정했어.”
그게 인하에게 좋은 선택일지는 그녀 자신의 문제이니 그렇다 치고, 절친한 친구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기뻐 나는 웃었다.
“그랬구나. 그럼 신입 환영 준비를 하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응. 곧 너희한테 돌아갈게.”
그런 식으로 피치 못하게 무거운 이야기가 나왔지만, 기본적으로는 서로가 모르는 서로의 추억을 이야기하는데 주력했다.
그들이 서로를, 인하와 제현 오빠를 알아본 건 얼굴과 기술 덕분이었고, 한수를 알아본 건 기술과 성격 덕분이었다. 이곳의 힘은 상상이 중요하다는 점부터 시작하여 우리 세계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김현호와 비슷한 기술을 쓰는 친구가 있다기에 혹시나 하여 영혼을 확인해 보았다. ……현호의 환생이 맞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우리 세계와 상당히 가까웠다. 우리 세계보다는 시간의 흐름이 빠르고 계급이 낮았지만 우리 세계와 희미하게나마 연결성이 있었다. 혹시 몰라 세계 전부를 훑어보았다. 민희의 영혼도 있었다. 이번에도 제현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성격부터 기술까지 전혀 달라서 몰랐어.”
“우리가 인연이 많이 깊은가 봐.”
하지만 역시 본질만 같을 뿐 내가 아는 친구들과는 영혼의 성질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나만의 여행을 하는 사이 그들의 영혼도 여러 번의 환생을 겪었을 테고, 그러면서 달라졌겠지.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날 죽었다. 그래도 한 번 트라던트에 흡수되었던 영혼이 멀쩡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갔다는 것을 확인하니 생각과는 달리 꽤 위안이 되었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따라 나도 나만이 아는 이야기를 했다.
세 사람과 친했던,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최근 내가 무엇을 했는지. 나와 성진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들은 나와 성진이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 특히 관심을 보였다.
나에 관한 추억이 학생 때에서 멈춰 있는 한수와 제현 오빠는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정말로 걔랑 결혼해도 괜찮겠냐?”
반면 보다 긴 시간동안 나를 보아온 인하는 기쁘게 나와 성진이의 사이를 축복했다.
“몇 번이나 말했지만, 괜찮아. 그래 봬도 걔가 은하한텐 엄청 잘 해줘. 변화의 격차가 너무 심해서 두 사람이 사귀고 얼마 안 됐을 무렵엔 나랑 함께 성진이와 친했던 모든 사람이 기겁했을 정도야.”
인하의 변론에도 한수와 제현 오빠는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이었다.
“여러 번 들어도 역시 상상이 잘 안 가. 내가 아는 이성진이랑 격차가 너무 심하기도 하고.”
인하도 그런 두 사람을 이해했다.
“하긴, 그것만은 직접 봐야 실감이 가겠지.”
“그래, 은하 네가 좋다면……해야지. 연애도 결혼도 원하는 대로 해야지…….”
제현 오빠는 말만 그렇게 했지 대놓고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그 표정이 정말로 오랜 과거 속 나와 친구들의 오빠를 자청했던 예전과 다를 바가 없어서 나는 실실 웃음을 흘렸다.
“결혼식 때 우리도 초대해 줄 수 있어?”
“인하랑 오빠는 신이니까 가능할 것 같은데, 한수 넌 지금으로선 잘 모르겠어. 신이 아니면 세계를 넘는 데 부담이 많이 가서……. 일단은 방법을 찾아볼게.”
단, 거기에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인하의 반려로 신계에 올 게 아니라면 오래 살아야 해. 여기의 시간은 첫 번째 세계보다 상당히 빠르거든. 적어도……130살까진 살아줘야 할 것 같은데.”
“130살…….”
“힘든가?”
“힘들어. 이 세계 인간의 평균 수명은 80살 정도거든.”
그런가. 그렇다면 확실히 힘들겠네.
“그럼 우리 결혼식 때까지만이라도 어떻게 기억 버리지 말고 있어봐. 이렇게 된 이상 넌 반드시 우리 결혼식에 와야 돼. 제현 오빠도요.”
결혼식 날짜를 점지한 많은 신들이 그 날 우리에게 많은 인연과 행운이 함께할 거라고 그랬다. 두 사람도 그 인연인 게 틀림없다.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한수와 제현 오빠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그렇게 할게.”
“그럼. 우리 은하 결혼식은 꼭 봐야지.”
“킥킥.”
두 사람을 따라 웃던 인하는 무엇을 떠올렸는지 문득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러다가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를 한 바퀴 돌리고는 내게 제안했다.
“혹시 꿈으로 결혼식 장면을 보여줄 생각은 없어? 그, 하다못해 소영이랑 인성이한테만이라도.”
“가능하면 나도 그러고 싶지.”
“……힘드나?”
“실시간으로 보여주거나 직접적으로 두 사람의 꿈을 건드리는 건 할 수 없어. 너무 개인적인 이유에 의한 접촉이라 세계의 간섭 허용 범위가 아니야. 그래도 단편적으로 꿈 조각을 꿈길에 실어 흘려보내는 건 가능해.”
인하는 내 말 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운에 맡겨야 한다는 거네. 친구들이 그 꿈을 못 볼 수도 있다는 거지?”
“또 꾸더라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꿈이잖아. 보더라도 일부분만 볼 수 있겠지. 그래도…….”
나는 내가 관리하는 나의 세계를 떠올렸다. 그래도 착실히 세계를 향한 우리 신들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언젠가는 원하는 사람한테 원하는 꿈을 보여줄 수도 있을 거야. 그때를 대비해 결혼식 장면을 세세히 기록해 놓으려고.”
그때까지 보다 많은 지인들이 살아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런 속내를 삼키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한동안 모두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 세계가 나를 밀어내려는 느낌이 났을 때쯤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된 것 같아. 난 이만 돌아가 볼게.”
“어…….”
이런 헤어짐에 익숙한 인하와 달리 한수와 제현 오빠는 무척 아쉬운 표정이었다. 아쉽다 못해 슬퍼했다.
그래, 그렇지. 하물며 첫 번째 신계에 올 자격이 있는 제현 오빠와 달리 한수는 나를 만나기까지 어쩌면 10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세계가 거부하는 데 내가 억지로 이 세계에 눌러앉거나, 강제로 비집고 이 세계를 방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신이 지녀야 하는 공정성에 어긋난다.
나는 눈빛으로 인하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수의 양 손을 꼭 모아 쥐었다.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뻤어.”
잃어버린 인연 모두 원래는 다시 만날 수 없다. 죽음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잃어버린 과거의 인연과 만날 수 있어 정말 반갑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이 앞으로 최소한 한 번은 더 있을 예정이다.
“내가 결혼할 때 또 만나자.”
한수는 마주 쥔 손에 힘을 주며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냐.”
나는 한수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후 이번엔 제현 오빠와 악수를 했다.
“오빠는 신계에 들르면 가끔씩 얼굴 봐요.”
“그래.”
제현 오빠는 다정한 미소와 함께 내 손을 마주 쥐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오랜만의 재회를 마무리했다.
☆
나와 성진이의 결혼식까지 우리 세계의 시간으로 2년 하고 조금 남았을 때 인하의 여행이 끝났다. 인하는 한수와 만나 반려의 맹약을 맺는 것으로 그녀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정식으로 의 신이 된 인하는 금색 머리카락에 태양의 홍염을 닮은 다홍색 눈동자를 가졌다. 참고로 한수는 고동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이었다.
반려의 맹약을 맺은 한수는 신계의 사자, 식물계열의 천사가 되었다. 첫 번째 신계의 사자에는 10단계의 계급이 있다. 한수는 중간, 5계급의 천사가 되었다.
천사의 날개는 하얀색과 검은색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20% 정도는 그 외의 다양한 색을 지닌다. 천사가 된 한수의 날개는 갈색과 흰색이 그러데이션 된 베이지색이었고, 외모는 인간일 적 내가 만난 한수를 꼭 닮았다.
“외모? 내가 선택했어. 레이먼의 모습으로 더 오래 있었지만, 너희를 처음 만난 건 박한수였을 때니까. 그래서 이 모습이 더 좋더라.”
그래서 인하의 신명은 ‘강인하’였고, 한수도 자신의 이름을 ‘박한수’로 정했다. 나도 ‘유은하’고 성진이도 ‘이성진’이니 다들 피장파장이었다.
“너희는 결혼할 거야?”
“우리는 반려 의식이 사실상 결혼식이긴 한데.”
“그건 그러네.”
거기다 두 사람은 나와 성진이랑 달리 신과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었다. 영혼의 등급 차이가 많이 나는 만큼 우리처럼 동등하고 무거운 계약은 맺기 어렵다.
이내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신의 결혼식에 관심은 많지만, 신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경험하고 배울 게 많기도 하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결혼식은 조금 천천히 생각하려고. 어차피 시간은 많잖냐. 신계의 결혼식 문화가 어떤지 조사할 필요도 있고.”
“그래도 식은 꼭 올릴 거야. 우리가 너희 식을 기대하는 만큼, 너희도 우리 식을 기대할 거 아니야.”
“그때는 꼭 초대할 테니 걱정 마라.”
“킥킥, 응.”
같은 이유로 한수는 아직 인하의 전담 사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 일단은 사자의 일을 확인하고 배운 다음에 가장 적성에 맞겠다 싶은 의무를 선택할 생각이란다.
그래, 이왕 오랜 삶을 살게 되었으니 멀리까지 보는 게 좋다. 나는 두 사람의 미래를 또 한 번 응원했다.
제현 오빠는 인하와 한수보다 좀 더 오래 살았다. 그동안 이라는 칭호도 발견했다.
왕의 삶을 끝낸 제현 오빠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환생자 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여행을 떠났다. 1계급 신은 여행 중에도 가끔씩 임무가 내려진다. 결혼식에는 꼭 부르겠다고 약속하고, 우리는 다 함께 제현 오빠를 떠나보냈다.
……여담이지만, 인하가 말했던 대로 한수와 제현 오빠는 성진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는 정말로 기겁했다. 하긴, 그들이 아는 학생 때 성진이의 성격은 실로 대단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덕분에 그들은 나와 성진이가 사귄다는 것에 대한 걱정을 조금……정말 조금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