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e Immortality RAW novel - Chapter 65
64화. 귀곡(鬼谷) (2)
“숙부님……! 아, 아니. 백무각주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모용학의 등장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중원 무림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에서, 심지어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모용학을 모를 무림인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알고 있는 사내.
“오랜만이요, 형씨.”
더욱이나, 고작 이립도 되어 보이지 않는 사내가 무려 무림맹 백무각주인 모용학에게 ‘형씨’라고 부르고 있었다.
“대체 이곳, 심양까지 어쩐 일로 온 것이더냐?”
“뭐, 여기에 볼일이 있는 건 아니고. 가는 길에 들렀는데 이렇게 됐네요.”
“…….”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무림이라지만, 저 청년은 언제나 그 중심에 있었다.
‘혈풍을 몰고 다니는 자…….’
“백무각주님께서 안면이 있는 자입니까?”
모용현웅의 물음에 백무각주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나와 함께 가서 얘기 좀 나누지.”
“뭐, 원하신다면야.”
한마디를 곱게 넘어가지 않는 정천을 보며 인내심을 다지는 모용학이었다.
“하, 하지만 아직 저자에 대한 검사 끝나질…….”
모용학은 고개를 저었다.
“저 청년이 귀곡주라면 또 납득할 법도 하네만, 적어도 귀곡도가 될 만큼 나약하지는 않네.”
“그, 그게 무슨……!”
모용학은 가볍게 그의 의문을 가볍게 무시한 채 정천을 데려갔다.
* * *
“다시 뵙게 되는군요, 공자.”
예쁜 미소와 함께 인사하는 모용인혜. 정천이 마주 웃음 지었다.
“앉게나. 차라도 한 잔 하겠나?”
“용정차라면 좋죠.”
천하의 모용학 앞에서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가 신기했는지 모용인혜가 빤히 그를 바라봤다.
“굉장한 분인 줄은 짐작했는데, 제 짐작보다 더 대단한 분이셨나봐요. 제 숙부께서 어찌나 동요하시던지.”
“어허, 내가 언제 동요를 했다 그러느냐, 끄응.”
“호호, 지금도요.”
마치 부녀처럼 화목한 둘 사이. 그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떠들고 있을 때, 시중이 차를 내왔다.
코로 살짝 향을 맡고, 입안을 적시는 정천. 그리고는 찻물을 그득하게 마신 후 천천히 목으로 넘기면서 맛과 향을 느꼈다.
“으음, 싱그러운 풀 내음에 달콤 쌉싸름한 끝맛도 일품이네요.”
가찬(加讚)까지. 가벼운 언행과는 사뭇 다르게 차 예절을 배운 티가 났다.
“신기한 분이시네요, 풋.”
대체 어떤 사내인지 짐작이 잘 가지 않는 정천의 모습에 모용인혜 살포시 미소 지었다.
“큼큼.”
그런 그녀가 못마땅했는지, 모용학이 미간을 좁혔다. 딸자식은 아니지만 딸자식을 가진 부모의 마음이랄까.
어쨌든.
“인사치레는 이쯤이면 된 듯하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모용학의 눈빛이 변했다.
– 혹시라도 나중에 적광(赤光)을 발하는 인물을 만나거든 행동을 조심해야 하느니라.
정사대전 이전, 즉, 구무림의 무림오검(武林五劍) 중 일인이셨던 조부께서 하셨던 당부였다.
‘이자가 조부께서 말씀하신 무명의 제자였다니.’
밀월효전부터, 정마비무대전, 그리고 송월동 사태까지. 이 청년에 대해 조사를 거듭할수록 조부의 말씀이 뜻하는 바를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아니, 형씨.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하고 있어요.”
정천의 말에 모용학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행이 가벼운 듯하면서도 자연스레 풍기는 자신감. 적으로 둘 시 큰 곤욕을 치를 게 확실했다.
반대로, 아군으로써의 활용 가치가 매우 충분하다는 의미였다.
“자네,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나?”
뜻밖의 원조 요청이라니. 정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모용학이 말을 이었다.
“자네도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귀곡주가 나타났다네. 우리 세가는 그를 처단해야 하는 입장이고. 자네가 도와줬으면 한다네.”
“심양에서 장백산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팔백 리 이상. 열심히 걸어도 꼬박 보름은 걸릴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무림에서 정평이 난 명문세가인 모용세가가 귀곡주를 처단하고 민생을 구한다라. 모용세가의 위상이 한층 올라가겠군요.”
뭔가 비꼬는 듯 들리지만, 모용학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겠네. 우리 가문의 위상 또한 중요하니.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중원의 동북방에서 우리 가문보다 더 큰 세력은 존재하지 않아. 그렇기에 우리 가문이 나서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지.”
무림의 거대 문파, 그리고 명문가의 명성은 단순하게 지닌바 무력으로만 쌓아지는 게 아니다. 세력의 영향력만큼 그 영역에 대한 이바지도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귀곡은 우리 가문의 힘만으로는 상대하기 만만치가 않아. 아니, 역부족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삼십 년 전의 사례만 하더라도, 수천에 달하는 무림인을 희생하여 간신히 그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네. 당시, 우리 가문의 출혈이 가장 막대했지.”
그 출혈을 감내하며 허망한 명성을 쌓느니, 정천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다.
“무림맹이 도우면 될 문제 아닌가요?”
“현재 무림맹에는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서신을 보냈다네. 하지만 그들이 당도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게 자명하네. 그동안 귀곡의 세력이 팽창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야.”
가만히 듣고 있는 정천. 모용학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장백산을 향한다는 말은 들었네.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겠네만 자네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그 성의에 합당한 보답을 할 것이야.”
“합당한 보답이라.”
“원하는 게 있는가? 들어줄 수 있는 범위라면 그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하지.”
“그 무엇이든 말이죠?”
이제 본론을 꺼낼 때였다.
“그렇네만.”
정천과 눈이 마주친 모용학은 왠지 모를 불길한 느낌을 받았지만, 애써 무시했다.
“구체적으로 원하는 게 있는가?”
“그럼요. 그게 아니었으면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죠.”
모용세가에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니라 스스로 왔다는 말. 그를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참으로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크흠, 말해 보게.”
“그러면.”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정천. 차를 한 모금 들이켠 후, 천천히 손을 들어 가리켰다.
“저 여인이요.”
* * *
장백산으로 향하는 길.
“역시, 길잡이가 있으니 편하네.”
초행길 같지 않은 초행길. 정천이 길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정말, 원하는 게 그뿐이오? 내가 길을 알려주는 것뿐?”
“그럼 내가 형씨한테 더 원하는 게 뭐가 있을까?”
“…….”
구태는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마음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찜찜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용강문이라고 했나요?”
“그렇소.”
“호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내실이 대단한 문파인가 봅니다. 형씨 정도의 고수를 육성할 정도면.”
“무슨 뜻이오?”
“무슨 뜻이라니? 말한 그대로죠.”
“…….”
구태는 자꾸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 자는 대체 누굴까.’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의 어투에는 존경, 추앙, 감탄 등등 상대에 대한 동경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오히려 어른이 아이의 성장에 박수를 쳐 주듯 내려보는 형국이었다. 불안감과 그에 대한 궁금증이 일 수밖에. 그리고 또 한 사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요.”
모용인혜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녀의 입가는 알 수 없는 미소로 물들었지만.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작은 마을이 하나 나옵니다.”
근형이 산등성이 너머를 가리켰다. 그가 들어 올린 손가락 끝을 따라가자 마을의 윤곽이 살짝 드러났다.
“오늘은 저곳에서 머물러야겠어요.”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지만, 모용세가에서 꾸린 귀곡 토벌대와 적당히 속도를 맞출 필요가 있었다.
“흐음, 아무래도 그건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왜죠? 우리가 너무 서두를 필요는…….”
말을 하던 모용인혜의 시선이 구태와 근형에게 향했다. 듣기로 사문에 급한 일이 있어 일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었다.
‘아, 저들을 배려하는 건가?’
모용인혜는 정천이 보여주는 의외의 배려심에 한 번 더 놀랐다. 물론 그것은 잠깐일 뿐이었다.
“저긴 죽은 마을이니까.”
“예? 죽은 마을이라니요?”
근형의 물음.
“단 하나의 생기도 남아 있지 않아.”
“그게 무슨! 저희가 달포 전에 지나쳤을 때만 해도 분명히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었다고요.”
“그랬겠지.”
‘생(生)의 기운은 없지만 사(死)의 기운은 가득하니까.’
마을 내 모든 주민이 죽었다는 말이었다.
“아니, 대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걸 어떻게 아나요?”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그 형체만 아스라이 보일 뿐이었다.
“가 보면 알지.”
어깨를 으쓱하며 먼저 걸음을 옮기는 정천. 일행은 의심의 눈초리를 걷지 못한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세 사람은 정천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자의 무공은 얼마나 고강한 것인가.’
족히 십 리는 떨어진 거리였다. 그런데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눈앞의 사내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눈으로 파악한 게 아니었다.
‘사(死)의 기운을 느낀 것인가? 설마, 사부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던……!’
구태가 상념을 이어가는 중에 일행은 마을에 도착했다.
“…….”
“……!!”
“말도 안 돼…….”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수많은 시체, 코를 찌르는 역겨운 악취, 그리고 음산한 바람까지.
까악- 까악-
까마귀 떼만이 불청객들을 향해 소리칠 뿐, 마을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
“어째서…….”
끔찍한 광경에 모용인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귀곡이군.”
정천이 읊조렸다.
마치 메마른 고목처럼 모든 생기를 빨려 거죽만 남은 시체들.
“그것을 어떻게 단정하죠?”
“귀곡주는 계속해서 인간의 양기를 보충하여 살아가니까요.”
마을 그 어디에도 사람의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귀곡의 영향력이 미쳤다니…….”
근형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형……!”
“걱정 말거라.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근형!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면 될 뿐이다. 네가 걱정하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사부님은 강한 분이시다. 잘 버티고 계실 거야.”
근형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구태. 그런 그라고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럼, 서두르도록 하죠.”
그때, 모용인혜가 나섰다.
“아까는 본대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면서요?”
정천의 물음에 모용인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들의 사문이 위험하다는데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소저…….”
근형의 눈에 그녀는 선녀로 비추어졌다. 어찌 아름다운 얼굴만큼 마음씨까지 고울까.
“마음은 고맙소만…… 저희 사문의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 터이니 계획대로 진행하는 게 옳은 것 같소.”
그는 원칙주의자였다. 누군가의 편의를 봐준다면 또 다른 누군가의 편의도 봐줘야 하는 법. 배려받지도, 주지도 않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형씨, 그러지 말고 마음을 받아주쇼. 나도 형씨한테 도움받을 게 좀 있어서 말이요.”
“무슨 도움을 말이오?”
정천의 시선이 모용인혜로 향했다.
‘가면서 감안(感眼)으로 봐줄 게 여럿 있어.’
모용세가를 떠나기 전 정천이 했던 말.
정천의 의도를 알아차린 모용인혜는 구태의 검을 유심히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 검. 정천 공자의 검에서 느껴지는 기운과 유사한 기운을 뿜고 있어요. 같은 장인이 제작한 검은 아니겠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 검을 제작한 장인을 만나러 장백산으로 가는 길이었거든요.”
“내 혼백검을 말하는 것이오?”
정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를 하자는 것뿐이니 배려니 뭐니 따질 필요는 없슈. 어때요, 형씨? 나와 거래를 하는 게.”
“굳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정천은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 필요할걸요? 사부를 귀곡주의 망령에서 벗어나게 해드리려면.”
정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태의 검이 날아들었다.
채앵.
엄청난 속도의 발검이었다. 흑산오패에게 보였던 한 수는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듯.
“어이쿠야.”
그렇다고 당할 정천은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