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115)
115_독일에서 온 왕자(4)
“크림 판매는 시간이 좀 걸리겠군.”
나는 보고서를 받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결과가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매출액은 생각보다도 훨씬 좋았다.
다만, 그 매출이 전부 국내 매출이었을 뿐이다.
“영국 내에서 유행하는 건 좋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
아마 달팽이 크림의 홍보 방법 때문일 것이다.
나는 크림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나와 존 디의 이름을 팔았다.
존 디가 만든 명약 덕분에 여왕이 젊어졌단 식이었다.
이 홍보는 영국 내에선 큰 영향이 있었으나, 해외에선 힘을 쓰기 어려웠다.
“즉각적으로 하얘지는 화장품은 아니니까 여러모로 아쉽군. 존 디가 신성로마제국에서도 명성을 얻었다면 한결 쉬울 텐데.”
존 디를 해외 순행 공연이라도 보낼까?
그 마술 실력이라면 유명해지는 건 한순간일 텐데.
순간 떠오른 발상에 즉각 존 디를 불렀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왜 거절하는 건가? 유명해지는 건 그렇게나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에서 지원도 최대한 해주겠다니까?”
“그럴 때가 아닙니다. 저는 천문학 연구가 바쁘단 말입니다.”
그 진지한 대답에 순간 입이 다물어졌다.
너무 뜻밖의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동네 약팔이 마법사 노릇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무슨 저렇게 연구자 같은 말을 해?’
물론 존 디가 연구자는 맞다.
그렇긴 해도, 저런 타입 아니지 않았나?
“그, 혹시 자네를 향하던 안 좋은 소문이 신경 쓰이는 건가? 그런 거라면 이제 가라앉은 지 오래니, 더 신경 쓰지 않고 좋아하던 마법 공연을 마음껏 해도-.”
“소문이요? 마법 공연?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제게 중요한 건 오직 이 연구뿐입니다.”
으음, 거리감 느껴진다.
‘혹시 내가 망원경을 가져다준 여파가 이렇게 나타나는 건가? 사람들 사이의 유명세보다 과학 발전을 더 중시하는 학자가 되어버렸다고?”
어쨌든 그게 존 디가 원하는 거라면, 응원해줘야겠지.
나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의 연구가 그리 중요하다면 어쩔 수 없지. 처음 그대를 왕실 과학 고문으로 삼을 때부터 그대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주겠다고 말했으니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런데 무슨 천문학 연구를 한다는 것인가? 저번에 말한 목성 주위를 도는 별? 아니면 경도 측정? 혹 새로운 천문 현상을 관측하기로 했나.”
“아닙니다. 저는 새로운 천궁도를 만들고 있습니다.”
천궁도라면, 별자리 지도 같은 것 아닌가?
“새로 발견한 별을 기록하려고 하나 보군.”
“예. 그렇게 해서, 더 완벽한 천궁도를 만들 겁니다. 천체의 운행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천궁도를 말입니다.”
“담대한 포부로군.”
“그렇습니다. 이 천궁도가 완성된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존 디가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일식과 월식 정도가 아닙니다. 혜성이나, 유성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마법사가 되는 겁니다. 그리되면 그 누구도 제 마법을 의심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아니, 천문 연구 얘기를 잘하다가 무슨 마법이야?
“이제 제 예언이 틀리는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처음부터 별의 운행과 관련된 예언을 하면 되니까요! 제 명성은 완전무결해지겠지요!”
“으음, 그런가.”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아는 존 디가 맞아서.
‘천궁도를 잘 만든다고 그 정도 예견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는데.’
하지만 존 디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달리 말릴 방법도 없고, 내버려 두면 영국의 천문학을 잘 발달시킬 것 같으니까.
뭐,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나?
“그럼 연구는 열심히 하게. 그, 화장품 관련한 것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결국 나는 별 성과 없이 존 디와의 대화를 종료했다.
‘화장품 해외 판로 개척은 회의에서 이야기하는 게 낫겠군.’
이튿날은 정기 의회였다.
대단한 논의는 예정되어 있지 않았으니, 그 시간 동안 화장품의 해외 판로에 대해 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마음 급하게 먹을 필요는 없지.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고, 별 대수로운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하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 하던가.
바로 그날, 일이 하나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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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터졌다’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사건이었으니.
“···자네들.”
나는 의원들의 면면을 둘러보고 말했다.
“오늘따라 검은 옷을 많이들 입었군.”
모인 의원 중 6, 7 명이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별거 아니라면 아니지만, 이 시대 패션 감각으로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원색의 옷이 유행하는 시대니까.’
성직자라면 몰라도, 일반적인 귀족은 흑색을 선호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흑색 옷을 종종 입었지만 말이다.
‘현대의 기억 탓에 무채색 옷이 끌린단 말이지.’
하지만 나를 제외한 이들은 보통 검은 옷을 입지 않았는데···.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자, 의원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하하, 어울리지 않습니까?”
“예. 저희는 폐하의 기사이니 말입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그래, 잘 어울리긴 하는군.”
눈이 아파지는 강렬한 원색보단 훨씬 나았다.
차고 있는 보석도 화려한 종류가 아니라 흑옥이고.
“보기 좋아.”
“하하, 감사합니다.”
잠깐 칭찬이 오가자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래도 옷에 대해 더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테고,
이제 슬슬 회의를 시작해볼까.
“자, 그러면 첫 번째 사안부터 논의해보도록 하지.”
나는 의원들의 옷을 사소한 촌극으로 치부한 채, 회의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니 옷에 대한 건 순식간에 잊어버렸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리되었군.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마저 하도록 하지.”
그러나 다음날.
나는 ‘검은 옷’이 일시적 우발사건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의원들도 검은 옷을 입고 온 것이다.
‘···이게 무슨 장례식인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내 표정에도,
의원들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후로도, 검은 옷은 점점 늘어났다.
왕궁을 집어삼킬 기세로 검은색이 퍼져갔다.
“아니, 이게 대체 뭐야.”
검은 옷?
이게 요즘 귀족들 사이의 최신 유행인가?
이상한 건 의원들만이 아니었다.
며칠 전, 1557년을 맞이하는 신년 연회에서도.
“폐하.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검은 옷으로 치장한 귀부인이 넘쳐났다.
분명 작년까지만 해도 원색의 드레스를 입던 이들인데 말이다.
‘검은 옷이 어마어마한 유행인가 보군.’
연회에 맞게 붉은 옷을 차려입은 내가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보통 유행이 이렇게 빠르고 급작스레 번지나?’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때마침 내 눈에 띈 여자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어머, 언니.”
그녀 역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무얼 궁금해하시는지 알 것 같네요.”
역시 엘리자베스였다.
그녀가 곧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뭐?”
내 동공이 확장되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페르디난트 왕자의 솜씨라고?”
아니, 그가 대체 왜.
그보단, 그가 대체 무슨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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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2 왕자, 페르디난트.
신성로마제국의 대사가 되어, 런던에서 지내게 된 인물.
그는 당연히 런던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제국의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래요!”
“그런 사람이 영국에 왔다니, 역시 틀림없네요!”
“맞아요! 이건, 구혼이 틀림없어요!”
귀부인들이 꺅꺅대며 비명을 질렀다.
이국에서 온 잘생긴, 미혼의 왕자.
자국의 여왕에게 청혼하러 먼바다를 건너왔다.
그야말로, 로망 소설에나 나올 이야기 아닌가.
“그분을 초대해 이야기라도 나눠보면 좋을 텐데.”
“어림도 없어요. 그 왕자님은 대사관에서 나올 생각도 안 하시는 걸요.”
“소문엔 화가들을 불러 모아 그들과만 시간을 보내고 있대요.”
여인들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희소식이 나타났다.
“세상에, 그분이 아끼시는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신대요!”
“왕자 전하가 직접 그림을 설명해주려고 하신다는데요?”
왕자가 후원하는 화가들의 그림 전시회.
게다가 그림을 사랑하는 왕자가 직접 그들을 안내한다.
이런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흠, 차후 폐하와 결혼할 수도 있는 분이니, 미리 잘 보여둬도 나쁜 것 없겠지.”
“가능하다면 그곳의 그림을 하나라도 사두는 게 좋겠어. 나중에 배로 값이 뛸지도 모르니까.”
구미가 당긴 건 남성 귀족들도 마찬가지.
결국, 런던의 귀족들은 삼삼오오 손을 잡고,
왕자의 전시회로 향했다.
“하하, 제 전시회에 와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왕자는 한순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국적인 외모의 미남, 게다가 우아한 프랑스어.
“제가 아직 영어를 잘 못해서, 양해해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왕자 전하.”
영어를 쓰는 게 궁정의 추세였으나,
본래부터 프랑스어는 영어보다 고급으로 취급되던 언어.
프랑스어를 못하는 귀족은 적어도 이 자리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제없다는 듯 웃어 보이며, 내심 왕자와 프랑스어로 대화하는 자신들의 모습에 취했다.
“그러면, 안쪽으로 드시지요.”
왕자가 전시회의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전시된 그림은 무척이나 다양했고, 또 정교했다.
영국에서 그린 그림만은 아닌지,
그림 중에는 적어도 수년은 투자했을 법한 그림도 존재했다.
전시된 그림을 보던 한 귀족이 그림들의 공통점을 빠르게 파악했다.
“종교화는 존재하지 않군요. 성인이나 천사를 그린 그림도 없어요.”
왕자는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 때문입니다.”
실제론 종교화에 관심이 없었던 영향이 더 컸으나,
왕자는 그 말을 입안으로 삼켰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왕자의 안내는 곧 한 방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그곳엔 두 점의 그림이 천에 가려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걸린 두 점의 그림은 제가 가장 아끼는 그림입니다. 이 전시회장의 모든 그림보다 가치 있는 그림이지요.”
잔뜩 기대감을 올린 왕자가, 천을 걷었다.
“아···.”
그림을 본 귀족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럴만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흑옥 귀걸이를 한 소녀입니다.”
그려진 것은 강렬한 흑백의 대비.
짙푸른 밤에 둘러싸인, 백옥처럼 고운 소녀.
소녀는 찰랑이는 흑옥 귀걸이를 그 하얀 귀에 걸고 있었다.
자칫 흑옥 귀걸이가 밤의 어둠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으나,
이 그림은 어딘가 달랐다.
“귀걸이에서 광택이 나는군요?”
“그렇습니다. 그 부분은 상아를 안료로 썼거든요.”
그 말에 귀족들이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이 시대 검은 안료는 보통 잿가루를 사용했다.
짐승의 뼛가루나 과일의 씨앗 따위를 까맣게 태운 안료.
그러나 뼛가루는 칙칙한 느낌을 주었고, 과일 씨앗을 태운 것은 완전한 검은색이 아니라 은은한 푸른빛을 띠었다.
그림의 배경 역시 이런 색을 사용한 것 같았다.
그러나, 흑옥 귀걸이만은 달랐다.
그것은 상아를 태워 만든 검은 안료.
황금보다 비싼 물감으로 그려진 귀걸이였다.
그래서인지, 소녀의 흑옥 귀걸이는 죽음처럼 어두웠고
그러면서도 은은한 광택을 발산하였다.
“세상에, 아름답군요.”
이 시대에 이렇게 비싼 안료는 잘 쓰이지 않았다.
쓰이는 경우는 오직 한가지, 성인을 그릴 때뿐.
하지만 그림 속 소녀는 성인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야살스러운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귀걸이가 하얀 목덜미와 어우러져
사람을 홀릴듯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말,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귀족들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왕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아니라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대단하지요.”
겸양을 표한 왕자가 그림을 설명했다.
“이 그림은 말 그대로 어둠 속, 흑옥 귀걸이를 한 소녀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검은색이 흰색을 인상적으로 돋보이는 그림이지요. 단순히 하얀 것보다, 검은색과 대비되는 하양이 더 밝아 보이지 않습니까.”
귀족들이 분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래 보였다.
“이 그림을 보니, 최근 떠오르는 화장품이 떠오르는군요.”
“화장품이요?”
“예. 귀부인들이 사용한다는 헤르메스의 비약 말입니다.”
몇몇 귀부인들이 새삼스레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헤르메스의 비약으로 멋을 낸 이들이었다.
“피부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지만, 비약을 바를 뒤에는 분이 잘 먹지 않는다면서요?”
왕자의 말대로였다.
끈끈한 달팽이 크림 위에 분을 얹을 수는 없었다.
여왕이야 납과 수은이 들어간 화장분을 쇠퇴시킬 수 있어 좋다고 생각했지만, 당장 하얀 얼굴을 원하는 여인들에겐 불만스러운 일이었다.
“하얀 분을 얼굴에 바르는 것도 좋지만, 이처럼 검은 장신구로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 것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왕자의 말에, 한 귀족이 익살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전하께서 이리도 여인네의 살결에 관심 많은 줄 몰랐군요.”
“하하, 어디까지나 예술적 관점에서 말입니다.”
왕자가 한쪽 눈을 깜빡이며 멋지게 웃어 보였다.
적어도 이 시대에, 이 정도 가벼운 농은 흠이 아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왕자가 말을 이었다.
“자, 말이 길었군요. 그러면 이제, 두 번째 그림을 한번 열어보도록 할까요?”
이내, 베일에 싸인 두 번째 그림이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