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n Psycho's British Empire RAW novel - Chapter (118)
118_독일에서 온 왕자(7)
작은 방에서 가벼운 침묵이 돌았다.
나도, 왕자도, 상에 대해서 말하진 않았다.
어차피 그건 핑계일 뿐이었으니까.
‘오늘이야말로 왕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겠어.’
그때, 왕자가 먼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조금 전 보여주신 그림의 활용이 실로 대단하더군요. 폐하의 배포를 보이면서도 친근한 이미지를 쌓는 기술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림을 통해 자연스레 치적을 알리는 방법도요.”
“과찬이군. 그대의 화가가 그린 그림 아닌가.”
“하지만 그에게 무슨 사물을 그려 넣을지 알려주신 건 폐하 아닙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처음, 화가가 그린 그림은 말 그대로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그림.
어떤 잡동사니로 나를 이룰지 언질 준 건 바로 나였다.
“그저 그대가 그림을 활용한 방법을 응용해봤을 뿐이네.”
일전 왕자가 자연스레 귀족들을 조종한 건 꽤 인상 깊었다.
이번 일 역시 그 응용일 뿐이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차를 한 잔 마신 뒤, 그에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나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한다네.”
왕자의 태도엔 어딘가 현대적인 구석이 있었다.
명령보단 뒤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데 익숙한 모습.
그는 기본적으로 영리하고, 눈치가 빠른 인물이기도 했다.
바로 그렇기에, 나는 더욱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자네가 대체 어째서 이리도 내 눈에 들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대체 무엇을 원해서 그러는 건가?”
“일전에 말했던 대로,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그렇습니다.”
“굳이 나와 결혼하지 않아도, 평범하게 살아갈 방법은 많아. 신분 격차가 나는 상대와 결혼해 계승권을 포기해도 되지 않나. 아니면 먼 지방의 총독 자리에 자원할 수도 있을 테고.”
“저는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평화롭게 살고 싶지, 평화롭게 죽어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내가 멈칫했다.
그 말에 묻어나온 감정 때문이었다.
“저는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형제와 자유롭게 소통하고,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며, 암살당할 걱정 따위는 하지 않고요.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들을 마음껏 후원하고, 제 행동이 혹여 누군가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긴장하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내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런 삶을 원한다면, 차라리 황제 자리를 노리는 게-.”
“제국의 황제위 말입니까?”
왕자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 그 자리는 비천한 자리입니다.”
유럽의 대제국 황제 자리를 비천하다고 말하다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눈치 보는 자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거머쥔 것을 지키기 위해선 끊임없이 선제후의 비위를 살펴야지요. 제 삼촌인 카를 5세 폐하를 보십시오. 신성로마제국의 근간인 가톨릭을 지키려다가 모든 권력을 잃고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제 아버지께선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 선제후들의 눈치를 살피지요. 작센 선제후의 돌발 행동에도, 화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리 가엾고 불쌍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 보려면 그리 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 해도, 그리 폄하될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황제가 가엾고 눈치나 보는 자리라니.
“그렇다면, 자네는 대체 무엇이 되려 하는가?”
“황제조차 눈치를 보는 그 자리.”
왕자의 눈이 불탔다.
“바로 그 자리에 제가 앉고자 합니다.”
대화의 문맥상, 그 자리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했다.
그러나 그렇기에 믿을 수 없었다.
“저는 선제후가 될 것입니다.”
“그건 말도 안 돼.”
내가 딱 잘라 대답했다.
“일곱 선제후 중, 현 황실의 핏줄이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오직 하나뿐이야. 바로 보헤미아 국왕직. 그러나 그건 황제의 것이니 불가능하지. 자네가 앉을 수 있는 선제후 직위는 없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하나 늘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습니까?”
왕자는 얼굴을 굳히고, 결연히 말했다.
“저는 8번째 선제후가 되겠습니다.”
8번째 선제후라니.
그건 제국이 성립된 이래 존재한 적이 없었다.
황제 선출권을 가지는 제국의 선제후는 오직 7명.
1356년에 정해진 이 신성한 자리는 주인이 바뀔지언정, 숫자는 그대로였다..
“알고 있겠지만, 많은 황제가 선제후 자리를 늘리려고 했어.”
황제가 2개의 선제후 작위를 가지면, 황권은 더욱 튼튼해지기 때문이었다
“비옥하고 강대한 오스트리아의 대공직을 선제후로 승격시키려 했어. 그래서 그 선제후 직위를 황실이 가지면, 황위는 조금 더 안정될 테니.”
“알고 있습니다. 제가 노리는 것도 오스트리아입니다.”
“하지만!”
나는 왕자의 눈을 바라보며, 위협하듯 말했다.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어. 그 어떤 강대한 황제도.”
그러나 그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
왕자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실은 저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폐하를 보기 전까진 말입니다.”
뭐? 나?
갑작스러운 그의 지목이 나를 놀라게 했다.
왕자는 씁쓸히 웃으며 내게 말했다.
“폐하가 말씀하신 대로,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제게 최선의 삶은 가문이 조금 천하고 성품이 훌륭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돈을 걱정하느라 마음껏 화가를 후원하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형의 눈치를 보며 쥐 죽은 듯이 사는 삶. 그런 삶이, 제 눈 앞에 펼쳐진 듯 선명히 보였습니다.”
왕자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제 머리를 짚었다.
“생각만 해도 형편없는 이미지지요. 제가 후원하는 화가가 그딴 지루한 그림을 보여줬다면, 저는 그 그림을 찢어버리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울 만큼 파격적인 광경이 보였습니다. 제 어떤 상상보다도 파격적인, 주세페 선생의 그림보다도 놀라운 광경이요. 바로, 영국이 한자 동맹의 도시를 공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왕자는 다소 흥분한듯했다.
“한자 동맹의 자유 도시, 하노버. 그곳이 작센 선제후에게 정복당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이걸 보았지요. 이건, 전쟁의 서막입니다.”
그의 말이 빨라졌다.
“탐욕스러운 이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곧, 자유 도시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고, 이는 전쟁으로 번질 겁니다.”
왕자는 미래를 정확히 예견했다.
그는 30년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이 전쟁이 틈을 만들 거로 생각합니다. 새 선제후가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을 말입니다.”
내가 왕자의 말에 찬물을 끼얹었다.
“아, 유감이지만 그 부분엔 동의하지 못하겠군.”
내가 선언했다.
“그건 틈 정도가 아니라, 제국을 부수는 균열이 될 것이야.”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지, 왕자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게 폐하의 예견입니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벌어진 일은 그랬으나, 벌어질 일은 몰랐다.
내가 끼어든 이상 역사는 절대 같지 않을 테니.
왕자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 혼란 속에서 제국을 먹어 치우는 이들을 제가 먹어 치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탁자에 찻잔 내려놓았다.
“그대는 제국의 완전한 멸망을 원하진 않는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의 가족이 제국의 지배자였으니까.
‘하지만, 권력에 심취한 이라면 제국의 시체를 먹어 치우는 길을 택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의 꿈은 그의 말대로 소박할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계획은 터무니없이 거창했지만 말이다.
“정리해보지.”
내가 다시 차를 홀짝거리고는 말했다.
“자유 도시 쟁탈전으로 시작될 제국의 분열. 그대는 그 난장판에서 영국의 저력을 빌려 세력을 키우고, 선제후가 생긴 이래 존재한 적 없던 8번째 선제후가 되겠다는 건가?”
“말씀대로입니다만, 한가지 틀린 것이 있군요.”
왕자가 말했다.
“저는 영국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믿는 건 오직 하나, 폐하뿐입니다.”
왕자 라틴어도, 영어도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투박한 독일어를 꺼내 들었다.
바로 그의 심장의 언어를 말이다.
“저는 이곳에서 당신을 지켜보았고, 당신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뛰어나고, 영리하며, 욕심으로 가득하지요.”
“내가 욕심으로 가득하다고?”
영 떨떠름한 평가였다.
내가 반박하려 입을 열었다.
“내 꿈은 소박해. 나 하나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지.”
“제 꿈이 눈치 안 보는 평화로운 삶인 것과 비슷하군요.”
그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왕자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왕자가 욕심쟁이라면 나도 그렇지.’
나는 안전한 삶을 원했다.
그걸 위해 위협적인 적을 없애겠다 다짐했다.
그래서 반란 세력을 정리했고, 스코틀랜드를 반쯤 정복했다.
그래서 신대륙에 진출했고, 한자 동맹을 몰락시키려고 한다.
힘을 키운 뒤엔 에스파냐를 공격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그래, 남들 보기엔 좀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겠지.
평화를 위해 8번째 선제후가 되겠다는 왕자만큼이나.
“···좋아. 그렇다고 치지. 나는 욕심이 많아. 그래서?”
다소 심술궂은 대꾸에도 왕자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런 폐하의 욕심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폐하와 손을 맞잡고 싶은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이 먼 나라의 탐욕스러운 여왕과 손을 잡으면,
그는 반드시 제국의 8번째 선제후가 되리란 확신이.
“그러니, 폐하께선 저를 믿으시지요.”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왕자를 믿을 수가 있을까?
저 야심 가득한, 그러나 평화를 꿈꾸는 왕자를?
나는 잠깐 생각하고, 이내 피식 웃었다.
“내 남편이 오스트리아의 주인이 된다라, 나쁘지 않군.”
“그 말은?”
“약혼부터 하도록 하지.”
물론 왕자와 내 사이에 사랑은 없다.
하지만 우린 닮았고, 서로를 신뢰한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우리는 좋은 사업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물론입니다.”
왕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으려다, 멈췄다.
분장이 거슬렸다.
“이런, 이걸 아직도 치우지 않았군.”
나는 내 몸을 둘러싼 거추장스러운 분장을 벗어버렸다.
탈 형태였기에 쉽게 제거할 수 있었다.
한결 시원한 기분을 느끼며, 내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잘 부탁하지. 페르디난트.”
나는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
그런데, 왕자가 이상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왕자?”
“아, 죄, 죄송합니다.”
왕자가 허둥지둥 손을 놓았다.
8번째 선제후 되겠다던 패기 넘치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딘가 헛똑똑이 같은 모습에, 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잠깐, 좀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 말하는 왕자의 볼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냥 피곤할 뿐이라면 다행이군. 사랑이 없어도, 우린 좋은 파트너 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그, 렇죠. 사랑 없이도 말입니다.”
무언가 침울한 말투였다.
나는 잠깐 고개를 기울이다가, 이내 뒤돌아 나왔다.
‘어쨌거나 좋은 동맹이 생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