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ising my Fiancè with Money RAW novel - Chapter (23)
온 신경이 손으로 향했다. 카르한의 손은 일리아의 손바닥을 폭 감싸고도 남았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팔짱을 낀 적은 있어도, 손을 맞잡은 적은 없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계약 연애인데도 진짜로 연애하는 느낌이었다.
레베타의 시선이 맞잡은 손으로 향했다. 일리아는 문득 카르한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레베타의 얼굴을 살피느라 카르한을 볼 수 없었다.
레베타의 눈에서 의심의 빛이 사라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카르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대가 마음에 들어요.”
레베타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델로타 가문과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지요. 하지만 계속…… 마음에 걸려서 미루고 있었어요.”
일리아는 저번에 스텔라가 저를 찾아와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에반테온 공작부인은 내 편이에요.
스텔라는 공작부인이 제 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공작부인의 마음속에서는 스텔라가 지워진 듯했다. 스텔라의 성격은 공작부인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스텔라였을까?’
카르한과 스텔라 사이에 연애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에반테온 가문 정도면 더 좋은 가문과 약혼을 추진할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스텔라를 골랐는지 의문이 들었다.
‘사업을 함께 하기로 했나?’
어찌 되었든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렸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공작부인은 제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찝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영애에게 약혼자가 있다고 들었어요.”
일리아는 곧장 자세를 바로 했다.
“네, 파혼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쪽에서 좀처럼 놓아주질 않아서요.”
일리아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한 후, 완전히 끝난 관계라고 선을 그었다.
“약혼자가 리하트 테르시안이라고 했나요?”
아무래도 미리 조사한 듯했다. 일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테이블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모쪼록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군요.”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대화가 끊기자 침묵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소리 없이 차를 마시던 레베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어릴 적에 그렇게나 말썽을 피웠었죠.”
말썽을 피우는 카르한이라니……, 상상이 가질 않았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요즘은 표정이 다양하게 드러났는데, 지금만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레베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어찌나 사고를 치던지, 저 성격을 감당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분위기를 가볍게 하기 위한 농담 같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괴리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제야 일리아는 계속 찝찝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레베타는 단 한 번도 카르한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언제 약혼식을 치를 건가요?”
일리아는 상념에서 벗어나 퍼뜩 고개를 바로 했다.
“바로 결혼식을 치렀으면 하지만 그건 너무 급할 것 같고…….”
결혼식이라니. 일리아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아무래도 약혼식 날짜부터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일리아는 당황했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그런 것치고는…….’
일리아는 기시감을 느꼈다. 공작부인에게서 값어치가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물건을 팔아치우려는 상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후계자의 약혼인데…… 너무 성급하지 않나.’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자신과 카르한은 일 년짜리 시한부 계약 연애 중이었다. 서로의 약혼자, 약혼자가 될 사람과 무사히 파혼하기 위해 맺은 거래에 불과했다.
적당히 사귀는 척하다가 헤어졌다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약혼식이라니. 대강 생각해둔 핑계를 댈까 고민하는 사이, 카르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영애는 아직 파혼하지 못했으니, 바로 날짜를 잡는 것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평소처럼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비바람에 젖은 나뭇잎처럼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레베타의 시선이 처음으로 카르한을 향했다. 일리아도 덩달아 카르한 쪽을 바라보았다.
맑고 파란 눈동자는 파도가 몰아치는 것처럼 일렁였다. 레베타와 시선을 마주한 카르한은 거대한 해일을 목도한 뱃사람처럼 보였다. 공포의 끝자락에 서 있었지만, 그는 레베타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일단 올해 안으로 생각 중입니다.”
일리아가 차분히 말했다.카르한에게서 시선을 거둔 레베타가 일리아를 응시했다.
“파혼 후에 각 가문끼리 모임을 가지는 쪽이 좋을 듯하지만……, 공작부인의 의사를 우선시하겠습니다.”
일리아는 슬쩍 레베타에게 결정권을 주는 척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그것도 그렇군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레베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성급했던 모양이에요. 워낙 영애가 마음에 들어서.”
마치 이윤 높은 투자 상품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내 그녀가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어요. 편히 있다 돌아가도록 해요.”
일리아에게 사근사근하게 속삭인 레베타는 카르한을 보지도 않고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것은 정적이었다. 레베타의 태도를 곱씹어 보던 일리아는 한쪽 손이 무척 따뜻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까 갑자기 잡아서 놀랐죠?”
미안하다며 일리아가 손에서 힘을 풀자 손가락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카르한은 가만히 손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이 얽혀 있었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벌써 약혼 이야기를 꺼내실 줄은 몰랐어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일리아는 미간을 좁혔다가 풀었다. 일단 최대한 약혼을 미룰 핑계를 생각해야 할 듯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카르한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공작저를 구경하시겠습니까?”
“좋아요.”
응접실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복도를 걸었다.
“사실 블로든 저택에 비하면 별것 없습니다.”
“충분히 훌륭한 저택인걸요.”
에반테온 공작저는 규모나 화려함은 블로든 저택보다 못했지만, 고저택만이 줄 수 있는 중후한 분위기가 있었다. 복도를 걷다 보니 고용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은 카르한을 못 본 것처럼 지나쳤다.
인상이 사나워서 피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아까 공작부인의 태도도 그렇고, 카르한은 이곳에서 이방인 같았다. 그것도 환영 받지 못하는…… 마치 역병 같은.
일리아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한 발자국 앞서서 걷고 있던 카르한이 계단이 놓여 있는 복도를 지나쳤다. 뒤따라가던 일리아는 아래로 뻗은 계단의 끄트머리에 멈춰 섰다.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거대한 초상화 속에는 세 사람이 담겨 있었다. 아까 만났던 공작부인과 중년의 사내가 장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일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일리아?”
카르한은 일리아가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일리아가 보고 있는 걸 확인하고 굳어졌다. 카르한만 존재하지 않는 가족 초상화였다.
“……제가 전장에 나가있을 때 그린 거라서.”
카르한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일리아는 초상화 속의 젊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공작부인과 마찬가지로 진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다. 카르한과 별로 닮지 않은 그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분은 형님입니다.”
일리아는 문득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 중 하나를 떠올렸다.
-야망 때문에 형제를 몰아내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다지.
카르한의 성격을 아는 지금은 그 소문을 믿을 수 없었다. 도리어 가문에서 후계자 자리를 억지로 떠넘겼다면 몰라도 말이다.
-서로를 무척 신뢰하는 것 같아서…… 단란해 보였습니다.
이전에 백작 저택에 방문했을 때 카르한이 했던 말이었다. 그때 가족들이랑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지만……, 아무래도 가족들에게 소외당하는 건 아닐까?
“앉아서 이야기 나눌 곳은 없을까요?”
“제 방으로 가시겠습니까?”
“좋아요.”
일리아는 카르한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걸었다. 가장 조용하고 어둑한 복도 끝에 도착했다. 아무리 봐도 후계자의 방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카르한이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문을 열자, 환한 빛이 밀려나오며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공간이 드러났다.
문 하나만 열고 들어왔을 뿐인데 세계가 바뀐 것 같았다. 근엄하지만 어딘가 음울하던 공작저의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깔끔하면서도 어딘가 정감 가는 방이었다.
카르한은 곧바로 구석에 치워둔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카르한을 응시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던 일리아는 공작부인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카르한 당신, 어렸을 때 말썽꾸러기였어요?”
상상이 안 간다며 일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카르한은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사고를 쳤는데요?”
“그냥…… 식사 시간인 것도 잊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거나, 정원 구석에 땅을 파거나…….”
“……?”
그게 무슨 말썽꾸러기란 말인가. 일리아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아끼는 검을 가지고 놀며, 비싼 도자기를 깨고 다녔다. 침실 이불과 벽지에 낙서하거나 연못에 장난감을 왕창 띄운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일리아의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말썽 피운다고 말하지 않았다.
“공작부인께서는 왜 말썽을 피웠다고 하셨을까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묻자, 카르한이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그건…… 제가 구제 불능이라서 그렇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그리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당신이 구제 불능이라니!! 그럼 이 세상 사람들은 전부 쓰레기라고요!”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당신같이 착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요.”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일리아는 카르한의 착한 심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오해 받는 한이 있어도 꿋꿋하게 남을 도왔다. 지켜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었다.
“……제가 착하다고 하는 사람은 일리아 당신뿐입니다.”
“아니에요. 내 눈은 제법 정확하거든요.”
거기까지 말한 일리아가 덧붙였다.
“리하트 테르시안은 제외하고요.”
그때는 진짜 콩깍지가 꼈었다. 리하트는 저를 사랑하는 척 꾸준히 먹이를 던져주었고, 그것도 모른 채 열심히 주워 먹었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하여튼 당신은 제가 보기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
“내 안목을 폄하하는 거라고요.”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한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좋은 사람. 그 단어가 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카르한은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테시온조차 착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부정적인 단어들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일리아가 인정해주는 순간, 정말로 좋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제가 어릴 적엔 얼마나 사고뭉치였는지 알아요?”
일리아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책을 읽는데, 스무 척의 배를 띄우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보자마자 따라하고 싶었죠.”
그래서 일리아는 장난감 배를 전부 가져가서 후원 연못에 띄워보았다.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은 침몰했고, 나머지는 연잎처럼 둥둥 떠다녔다. 나중에 부모님이 그걸 보시고 말씀하셨다.
-다음부터는 진짜 배를 띄워주마.
그때를 떠올리며 일리아가 말을 이었다.
“한참 동안 내버려뒀다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결국 전부 침몰해버렸어요.”
워낙 어릴 적이라 사고 쳤다는 인식도 없을 때였다. 일리아는 그것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요리 할 거라고 난리쳤다가 주방을 밀가루 범벅으로 만든 일. 아버지께서 아끼시는 명화에 낙서를 한 일…….
“걸음마 시작하면서 재앙이 되었죠, 뭐.”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한의 눈꼬리가 풀어졌다. 사르르 내려간 눈매가 일리아에게 향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일리아를 눈에 담았다.
“하여튼…… 아무래도 공작부인께서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정신을 차렸다.
“가족이지만 서로를 모르는 일도 많이 있거든요.”
카르한이 가족들에게 소외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일리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특히 카르한은 오랫동안 전장에 나가있어서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적었을 것이다. 거기다 장남을 제치고 후계자가 되었으니, 사이가 좀 더 껄끄러워졌을지도 몰랐다.
“혹시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언제든 말해요.”
가족사이니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려워도 도울 수 있는 건 돕겠다고 일리아가 말했다. 카르한은 그런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왜 저를 도와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일리아는 항상 카르한을 도와주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사람은 일리아가 처음이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서 카르한은 조금 긴장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일리아가 대답했다.
“한 배를 탄 사이니 당연하죠.”
일리아가 계약 연애를 언급하자, 가슴께가 지끈거렸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손가락까지 타고 흘러왔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당연한 대답인데, 뭘 바란 것인지…….
카르한은 문득 자신이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존재이자, 빈껍데기 후계자라는 것을 일리아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했다. 그때도 일리아는 제게 잘해줄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르한은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마주했다. 맑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를 가득 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저 눈동자가 실망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카르한은 일리아가 주는 온기가 얼마나 달콤한지 알아버렸다. 모르고 있을 때와 알고 나서 잃었을 때 느끼는 상실감은 천지 차이였다.
그는 그저 일리아의 옷자락만 겨우 쥐고 있는 상태였다. 일리아가 뿌리치면 바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자신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카르한이 눈을 내리깔았다. 일리아가 말한 것과 달리, 자신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카르한, 왜 그래요?”
표정이 심각해 보인다며 일리아가 걱정하자, 카르한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가슴의 따끔거림을 무시하고 그가 표정을 풀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카르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방 구경 시켜드리겠습니다.”
지금 일리아와 카르한이 있는 공간은 복도와 연결된 응접실이었다. 응접실을 중심으로 문이 세 개 더 있었다.
“저 방은 침실이고 반대쪽은 집무실로 쓰고 있습니다.”
사실 후계자 정도면 집무실은 완전히 따로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헤인리도 침실과 집무실 등이 모두 분리되어 있었다.
“남은 방은요?”
“창고입니다.”
침실과 창고를 함께 두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은 공작저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 집에 살았으면 아예 한 층을 내어주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일리아는 익숙한 물건을 발견했다. 저번에 오르골 가게에서 직접 추천해준 물건이었다.
“이거 선물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그게…….”
카르한은 난감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실은 오래전부터 하나쯤 갖고 싶다는 생각에 산 것이었는데…… 제 겉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카르한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전에 오르골 가게 앞에서 서성이던 그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왠지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일리아가 말했다.
“다음에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말만 하면 오르골로 방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일리아는 다시 방을 살폈다. 검소한 편인지 비싼 물건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책, 꽃다발, 디저트를 담았던 종이 상자……. 찬찬히 방을 둘러보던 일리아는 깨달았다. 이곳은 자신이 선물해준 물건으로 가득했다. 별것도 아닌데 전부 깔끔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리하트는 지겨워지면 바로 버렸는데.’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의식적으로 계속 리하트와 카르한을 비교하고 있었다. 진짜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얼추 다 둘러보고 나니, 굳게 닫혀 있는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지고 있던 옷은 다 버렸어요?”
“옷은 왠지 버리기 아까워서…….”
카르한이 변명을 빠르게 덧붙였다. 그래도 예전 옷은 안쪽에 정리해두었다고 말하며 옷장을 열어주었다. 화사한 옷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 옆으로는 온통 짙은 색감을 띤 옷들이 걸려 있었다.
끄트머리로 갈수록 오래된 옷들이었다. 거의 십 년 전에 유행한 디자인도 보였다.
“이 디자인 되게 오랜만에 보네요.”
일리아는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옷 한 벌을 꺼내들었다. 예전에 유행했던 연회복이었다. 옷을 살피던 일리아는 잠시 멈칫했다.
가지런히 채워져 있는 단추 중 하나가 떨어지고 없었다. 왠지 익숙한 모양새라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하는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일리아와 카르한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가씨.”
말렉의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늦어서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옷을 다시 걸어놓으며 말했다.
“이만 가야 할 것 같아요.”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 프란체와 말렉 그리고 테시온이 있었다. 일리아는 반가워서 테시온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못 보고 가는 줄 알았어요.”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일하다 뛰쳐나왔습니다.”
테시온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은 나란히 복도를 걸었고, 남은 세 사람이 뒤따랐다.
길어 보이던 복도가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어느새 일리아는 현관에 도착해버렸다. 밤이라 그런지 조금 추워서 어깨를 떨자, 카르한이 외투를 벗어 주었다.
“괜찮아요. 이제 마차 탈 거니까요.”
“그래도 가시는 동안 추울 수 있으니…….”
성의를 거절하기도 조금 그래서 고민하는데, 카르한이 속삭였다.
“다음에 돌려주십시오.”
일리아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자, 그가 물었다.
“……또 만날 핑계를 만드는 건, 안 될까요?”
순간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이 전부 지워졌다. 잠잠하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연애 책에서 배웠나.’
정말이지 습득이 너무 빨랐다.
“알겠어요. 다음에 갖다드릴게요.”
“흘러내릴 것 같으니, 단추 잠가드리겠습니다.”
이윽고 기다란 손가락이 단추를 매끄럽게 잠갔다. 일리아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덩치 차이가 꽤 나서, 외투에 파묻힌 것 같았다. 특히 소매가 무척 길어 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떨어져 나간 카르한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직접 입어보니까 정말 체격이 크시네요.”
일리아는 설핏 웃었다. 마치 아빠 옷을 훔쳐 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 불자, 옷에 묻어 있던 서늘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마치 그에게 폭 감싸인 것 같았다.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타자 카르한이 인사를 건넸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리아는 멀찍이 서 있는 고용인들을 확인하고 그에게 손짓했다. 카르한이 얌전히 앞으로 다가서자 일리아가 손을 뻗었다.
“잘 자요. 카르한.”
두 팔로 카르한을 가볍게 안고 속삭였다. 버쩍 굳어진 카르한에게서 팔이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카르한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하고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카르한 님, 이만 들어가시는 것이…….”
테시온이 슬쩍 말을 걸었다가 멈추었다. 카르한의 표정이 이상했다. 오랫동안 함께해왔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카르한 님?”
심장 뛰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주위의 소리가 멀어져갔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비 내리던 날, 일리아와 함께 우산을 썼을 때 그랬다.
카르한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마차를 눈으로 좇다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아픈데…….”
헉, 하고 테시온이 숨을 들이켰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닙니까! 얼굴도 조금 붉으시고…….”
테시온이 무척 심각한 얼굴로 소리쳤다.
“당장 의원을 부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