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124
상남자 124화
저 사람 대체 어떻게 지점장이 된 거지?
피어오르는 의문을 뒤로하고 유현은 휴대폰을 꺼내 봤다.
어제 통화 후 그가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띄워졌다.
-고맙다, 유현아.
어쩌면 김현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받은 걸 고마워할 줄 알고, 소중한 사람에게 더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단 걸 말이다.
유현은 20년을 돌아서야 어렴풋이 알게 된 걸 그는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고마웠다.
지금의 다짐이, 살고자 하는 방향이, 그리는 미래가 잘못된 게 아니란 걸 알려 줘서.
이렇게 하면 분명 더 나아질 거란 길을 제시해 줘서.
그런 사람이 친구라서.
그래서 너무 고마웠다.
“고맙다, 현수야.”
오히려 그에게 더 큰 빚을 지게 되었지만 유현은 기뻤다.
이런 소중한 친구에게 더 크게 돌려줄 것이 있단 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앞으로 남은 긴 세월 동안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더 갚아 줄 생각이었다.
며칠 후.
사무실의 풍경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굳이 꼽자면, 오재환 팀장의 분위기가 전보다 어두워졌다.
딱 그 시점이 공모전 접수 기간에 들어선 시점이었다.
“박 대리, 잠깐 이리 와 봐.”
“네, 팀장님.”
“아니, 공모전 준비를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나.”
그는 박승우 대리를 더 빈번하게 불렀다.
그러곤 뒤늦게 공모전 내용 검토한답시고 박승우 대리를 들들 볶았다.
팀원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대체 왜 저런대?”
“글쎄요.”
이찬호의 물음에 유현은 어깨를 으쓱였지만,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김현민 차장을 의식하는 게 분명했다.
김현민 차장이 진급이 누락돼서 그렇지, 연차로 따지면 둘은 고작 일 년 차이였다.
당장 김현민 차장이 팀장이 되어도 문제 될 건 없단 소리다.
게다가 최근 김현민 차장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현일자동차 계약 건, 애플 이슈 대응 건, 공모전 준비 건.
상품기획팀에서 유일하게 조찬영 상무에게 인정받은 건들이 모두 3파트에서 나왔다.
물론 이건 유현의 시각일 뿐이다.
오재환 팀장이 거기까지 생각할 정도로 정치에 능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대응을 하는 이유?
이경훈 부장의 입김이 들어간 게 확실했다.
조찬영 상무를 끌어내려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 이번 공모전 건은 껄끄러울 테니 말이다.
그때 팀장석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아니, 이대로 외부에 나가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냐고.그때 가서 거짓말이었다고 할 거야?”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이런 부분들은 다 잘라서 보내란 말이야.책임질 수 있는 걸 쓰라고.”
박승우 대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조찬영 상무가 관련 부서에 연락해 다시 받은 일정들이다.
물론 예외의 경우가 생길 수 있지만 무리한 내용은 아니었다.
“박 대리, 표정이 왜 그래? 이게 이게 다 잘되라고 하는 일 아니야.페이지 수가 많다고 되는 게 아니라고.핵심만 간단히 몰라?”
“죄송합니다.”
‘핵심을 명확히’겠지.
그것도 첫째 페이지 한정이다.
한성전자 보고 문화 특성상, 페이지 많은 보고서가 갑이다.
비단 한성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고, 양이 많으면 누가 봐도 열심히 했다고 여겼다.
합격, 불합격 여부를 판단할 사람들이 문제였다.
바쁘디바쁜 휴대폰 사업부 임원들이란 걸 생각하면 첫인상부터 먹고 들어가야 한다.
오재환 팀장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쏘았다.
“하여튼 제대로 조치 안 해 오면, 결재 안 해 줄 테니 그렇게 알아!”
“……네.준비하겠습니다.”
문제는 공모전에 올리기 위해 팀장의 승인이 필요하단 점이다.
‘참 노골적으로 나오시네.’
유현은 혀를 찼다.
동시에 유현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대안들이 떠올랐다.
이 정도 문제야 결국 처리되겠지만 그동안 벌어질 잡음이 문제였다.
어쨌든 팀장 아닌가.
앞으로의 일에 더 태클이 걸릴 게 분명하다.
그때 사무실로 들어온 김현민 차장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미 몇 차례 같은 일로 오재환 부장과 마찰이 있던 그였다.
“또 한바탕 하겠는데?”
이찬호의 말처럼, 팀원들은 모두 기대하고 있단 듯 귀를 쫑긋거렸다.
모름지기 싸움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다.
“팀장님, 그거 그냥 나갈 거란 건데 또 그러십니까.”
“이 차장, 또 왜 태클이야! 이거 우리 팀 일이야.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고.”
“에헤이, 담당님이 확인해 주셨잖아요.그냥 해도 된다고.제가 물어볼까요?”
김현민 차장은 평소 가볍던 성격과는 다르게 정석대로 대응했다.
지금 오재환 팀장의 아킬레스건은 조찬영 상무다.
그가 인정했으니, 오재환 팀장의 말엔 힘이 없다.
그래서일까?
오재환 팀장은 보다 감정적으로 나섰다.
“오호라.김 차장 너 요새 담당님한테 칭찬받았다고 너무 기고만장하는 거 아냐?”
“애들도 아니고 뭐 그런 걸로 질투하십니까.”
“질투? 너 인마, 그렇게 한다고 진급하고 팀장 자리 뺏을 수 있을 것 같아?”
감정적으로 나서다 보면 결국 끝엔 실수가 따르는 법이다.
오재환 팀장이 감춰 둔 검은 속내를 스스로 까발리자 순간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김현민 차장은 평소 웃는 인상을 싹 감춘 채 나지막이 말했다.
“진급 필요 없고, 팀장 자리도 원치 않습니다.그러니까 그냥 박 대리 스스로 판단해서 할 수 있게 해 주시죠.”
-내가 미친놈이지.아내가 마지막 길을 가는데 나는 그때 야근을 하고 있었거든.진급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집에도 안 들어갔지.
-절대 강요하지 않으려고.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나 같은 놈 또 만들 순 없는 거잖아.
-결국 판단은 본인이 해야 해.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원망을 어떻게 감당해.
순간 얼마 전 슬픔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가 내뱉었던 말들이 유현의 머릿속을 스쳤다.
늘 한량 같고 마냥 가벼워 보이지만 누구보다 무거운 남자였다.
오케스트라의 무게중심을 잡는 콘트라베이스 역할이다.
이젠 감출 수 없는 김현민 차장의 본모습이었다.
그 말에 오재환 팀장이 살짝 꼬리를 내렸다.
“……일단 수정한 것 보자고.”
“그냥 내겠습니다.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김현민 차장은 작정한 듯 마무리 지으려 했다.
오재환 팀장의 눈이 이리저리 돌아가던 순간이었다.
지이잉.
책상 위에 올려진 오재환 팀장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게 구세주인 양 휴대폰을 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발신자로 뜬 이름 때문이다.
오재환 팀장은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어, 김 과장.그 채널폰용 패널 말이야.그렇지.그렇지.맞아.채널사 미팅 때 보고하는 거? 물론 준비하고 있지.그럼.담당님도 참석하실 거야.”
채널폰 이야기가 나온 걸 보니 발신자는 누군지 뻔했다.
휴대폰 사업부 상품기획팀 김성득 과장.
안 그래도 유현이 다시 만나려고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뭐? 로라파커가 한유현 씨를 찾는다고?”
김성득 과장이 오히려 유현을 찾고 있었다.
담당자인 신찬용 과장도 아닌 그저 신입사원에 불과한 유현을 말이다.
그것도 회사 VVIP인 로라파커의 요청이었다.
동시에 모두의 시선이 유현 쪽으로 돌아갔다.
고혹스러운 분위기의 공간.
새하얀 털에 파란 눈, 고고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황금빛 카페트 위를 걷던 고양이가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냐옹!
그러더니 소파 쪽으로 달려와 바닥에 놓인 사탕을 게걸스럽게 핥기 시작했다.
찹찹찹찹찹찹찹.
고급스러운 느낌은 온데간데없었지만, 소파에 앉은 여자는 그런 고양이가 기특하기만 하다.
몸을 바짝 숙인 그녀의 입에서 억센 억양의 독일어가 튀어나왔다.
“슈페트, 그게 그렇게 맛있니?”
고양이, 슈페트는 주인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먹는 데 집중했다.
그럼에도 여자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음식을 너무 가리는 바람에 건강이 좋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젠 완전히 달라졌다.
“너한테 이 사탕이 정말 잘 맞는구나.”
사탕을 먹으면서 식습관이 완전히 개선됐다.
-약소한 선물입니다.아이가 좋아했으면 하네요.
얼마 전, 한국에서 만난 말끔한 남자가 미팅을 마친 후 작은 상자를 건넸다.
임원들이 뒤로 건네는 선물들은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넣었다.
그런데 고작 사원 신분인 그에게 받은 선물은 뜯어보고 싶었다.
‘아이’란 말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로라파커가 호칭하는 아이는 자신의 고양이 슈페트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불쾌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남자는 느낌이 달랐다.
역시나 그는 슈페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친절하게도 사탕의 성분까지 독일어로 다 써 놓았다.
심지어 필체까지 좋았다.
“미스터 한은 어떻게 네가 이걸 좋아할 줄 알았을까?”
복장, 자세, 말투, 독일어 억양까지.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는 남자였다.
“아니, 내가 널 키우는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마치 그는 자신의 취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행동하는 것만 같았다.
그건 자신의 비서도, 슈페트의 유모도 맞추기 어려웠다.
냐옹.
그때 슈페트가 돌아보며 소리 냈다.
마치 로라파커의 말에 반응하는 것만 같다.
“너도 궁금하니?”
냐옹.
“그래.나도 궁금하구나.한국에 가서 직접 만나 보면 알겠지.거기서 사탕을 더 사 주마.”
냐아옹.
행복해 보이는 아이의 표정에 로라파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슈페트에게 줄 사탕을 사고, 유현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로라파커가 한국에 가는 목적이었다.
며칠 뒤, 한성타워 로비 앞.
정장을 입은 중년의 남자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듯 나란히 서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남자, 휴대폰 사업부 프로모션 담당 홍일섭 상무가 농담 섞인 말로 투덜댔다.
“대체 왜 직접 와서 확인한단 건지 모르겠습니다.그룹장님, 안 그렇습니까?”
“허허, 한번 확인하고 싶었나 보지.”
“하여튼, 신경 좀 써 주십시오.이번엔 공식 방문입니다.노리는 바도 있는 것 같고요.”
홍일섭 상무의 가느다랗게 변한 눈빛에 LCD 사업부 모바일 그룹장 안준홍 전무는 뜨끔했다.
채널사 마케팅 총괄 담당인 로라파커가 공식 방문을 요청하며 온 이유가 LCD 패널 일정과 관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옆에 서 있는 모바일 영업마케팅 담당 조찬영 상무는 긴장된 나머지 침을 꼴깍 삼켰다.
끼익.
곧이어 검은 리무진이 도착했고, 로라파커가 우아하게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자 이리로.”
“감사합니다.”
로라파커의 차분한 응대가 이어졌다.
홍일섭 상무가 직접 에스코트하여 VIP 회의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참석한 임원만 7명.
관련 직원까지 총 15명이 로라파커에게 맞춤형 안내를 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실에서 로라파커는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으로 채널폰2의 콘셉트 및 주요 일정에 대해 들었다.
“여긴…….”
“잠시만요.”
조찬영 상무가 LCD 패널 일정에 대해 보고하려 했지만, 로라파커의 고갯짓 한 번에 묻혀 버렸다.
이미 그걸 쓰기로 했으니 일정에 맞춰 갖다 바치기나 하란 의미였다.
짧은 보고가 끝난 후.
스크린엔 채널에서 제안한 초기 콘셉트와 휴대폰 사업부에서 보완한 콘셉트 3개가 떠 있었다.
“제안하신 것처럼 초슬림형에 금속 재질로는 현재 수준으로 만들기가 어렵습니다.우선 배터리가 문제고 발열 및 무게도…….”
“그래서 어쩌겠단 거죠?”
휴대폰 사업부 김성득 과장은 로라파커의 차가운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하필 LCD 패널 목업을 봐 버려서…….’
LCD 패널 일정 때문에 끊어질 뻔한 채널폰2 끈을 다시 잡은 건 성공적이었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높아질 대로 높아져 버린 로라파커의 눈을 맞추는 게 불가능했다.
몇 차례의 미팅이 모두 실패했다.
이렇게 임원들을 총출동시킨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란 강력한 메시지임이 분명했다.
이대로 끝나 버리면?
담당자인 김성득 과장은 물론, 여기 있는 임원들, 그리고 한성전자 이미지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저희가 제안하는 방향은 B안입니다.금속 재질로 고급스러움은 살리면서 슬라이드 형식으로 쿼티 키보드를 부착해 두꺼워진 부분을 감성적으로 완화시키려 합니다.”
배에 힘을 주어 말을 뱉은 김성득 과장은 긴장된 마음으로 로라파커의 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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