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244
상남자 244화
사업부장, 그룹장의 차가 울산에 진입했단 보고가 들려왔을 때였다.
타이밍 좋게 고준호 상무가 내려왔고, 옆에는 3담당 이태룡 상무가 함께했다.
로비 입구에 서 있던 이태룡 상무는 이곳이 마치 자신의 담당인 양 여유로운 태도였다.
이 사람, 저 사람 인사하더니 유현에게까지 허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오, 자네가 파견 온 그 친구.반가워.”
“네.반갑습니다.”
유현이 손을 잡자, 쭉 찢어진 그의 눈이 반달을 그렸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 보조개가 잡혔다.
유현이 기억하던 과거 모습 그대로였다.
이태룡 상무가 사람 좋은 얼굴로 상투적인 말을 뱉었다.
“회사 생활 즐겁게 하고.혹시나 도움 필요하면 찾아와도 좋고.”
“명심하겠습니다.”
유현도 속내를 감춘 채 적절히 응해 줬다.
조만간 그의 말처럼 따로 만날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좋은 일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잠시 후, 로비에 검은색 고급 승용차 2대가 섰다.
차 문이 열린 순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크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허허! 뭐 이렇게들 나와 있나.어서 들어가지.”
그러자 앞 차에서 내린 풍채 좋은 남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양 끝이 삐쭉 올라간 눈썹과 호탕한 웃음이 인상적인 그가 바로 사업부장 임준표 부사장이었다.
그때, 뒤 차에서 내린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부사장님이 오시는데 어떻게 안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나 때문이 아니라 여 전무 때문인 거 같은데?”
“저 혼자 오면 아마 온 줄도 몰랐을 겁니다.”
“허허.이 사람, 농담도 참.”
모바일 그룹장 여태식 전무는 자연스럽게 임준표 부사장을 보좌했다.
머리를 깔끔하게 옆으로 넘긴 그는 얇은 은테 안경이 무척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유현은 사람들에 섞여 과거 인연이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유현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계단 아래로 내려간 고준호 상무가 두 사람을 보좌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무슨 고생이라고.자네들이 고생이지.허허.”
“맞습니다.고 상무가 준비한다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임준표 부사장이 웃으며 그를 격려하자, 여태식 전무가 살을 보탰다.
고준호 상무는 겸손하게 공을 아래로 돌렸다.
“아닙니다.제가 아니라 실무자들이 고생했습니다.”
“허허! 뭐, 일단 한번 보자고.”
“네, 부사장님.모시겠습니다.”
고준호 상무가 앞장섰고, 사업부장과 그룹장이 뒤를 따랐다.
시작부터 화기애애한 그 모습에 보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껌뻑였다.
다혈질이라 소문난 사업부장이 화를 내지도 않았고, 냉혈한이라 불리는 그룹장이 지적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나들이 나온 듯 입가에 미소 짓고 있었다.
밝은 분위기는 대회의실 앞에서도 이어졌다.
임준표 부사장이 테이블에 놓인 데모 모듈을 만지며 물었다.
“이게 OLED 공장에서 만든 패널인가?”
“네, 사업부장님.”
대답은 고준호 상무가 직접 했다.
여태식 전무는 팔짱을 낀 채 옆에서 살필 뿐이었다.
기존 애플폰 패널과 데모 모듈을 꼼꼼히 비교하던 임준표 부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젤이 좀 걸리기는 한데, 이렇게 비교해 보니 확실히 해상도가 높긴 해.”
“맞습니다.기존 애플폰 대비 4배가 높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임준표 부사장이 여태식 전무를 바라봤다.
“흠, 여 전무 말대로 이거 제법 쓸 만하겠어.”
“네, 부 사장님.쉬운 기술이 아닙니다.”
여태식 전무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며 답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임준표 부사장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이 해상도는 일성 OLED로는…….”
“네.하신 말씀이 맞습니다.덧붙이자면…….”
대부분 고준호 상무가 대응했고, 김호걸 수석과 맹기용 선임도 거들었다.
허점을 잡고 공격할 만하건만 그런 시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임준표 부사장은 아직 설익은 테스트 패널을 감싸고돌았다.
“허허.이 정도면 시작치곤 준수해.”
“감사합니다.”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발 뒤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유현에게 김현민 부장이 물었다.
“분위기가 좋네.”
“그러게요.생각보다 좋은 거 같습니다.”
“에이, 넌 이미 이렇게 될 거 다 알고 있었잖아.”
“뭘요?”
유현이 모른 척 묻자, 김현민 부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보지도 않고 사업부장 심리는 어떻게 안 거야? 혹시 사진만 봐도 아는 건가?”
“대체 무슨 소리예요?”
“에이, 말해 봐.”
김현민 부장이 옆구리를 찌르자 유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하여간 자식, 비밀이 많다니까.그럼 오늘 회의가 어떻게 될지나 말해 봐.”
“잘되지 않을까요?”
“그냥 잘되라고 보고서를 그딴 식으로 만든 건 아닐 거 아냐.”
“흠, 그럼 아마 많이 잘될 거 같습니다.”
유현의 넉살 좋은 답에 김현민 부장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재밌겠네.그래서 온 거야.”
“압니다.”
김현민 부장이 웃었고, 유현도 웃으며 답했다.
두 사람의 모습에서 중요한 보고를 앞둔 긴장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잠시 후,
큰 디귿 자 안에 작은 디귿 자로 테이블이 배치된 대회의실에 사람들이 가득 자리했다.
사업부장, 그룹장을 비롯한 4담당, 3담당이 1열 상석에 앉았다.
발표는 스크린 우측 단상에 선 김영길 과장이 맡았다.
유현은 김영길 과장과 가까운 쪽, 그러니까 2열 가장 자리에서 노트북을 조작했다.
그 옆에 김현민 부장이, 남은 자리엔 선행제품팀 사람들이 위치했다.
임준표 부사장이 가벼운 농담으로 운을 띄웠다.
“괜한 자리에 내가 낀 건 아닌지 모르겠어.”
“그럴 리가요.사업부장님께서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 있던 그룹장이 기름칠을 했다.
두 사람은 앞선 데모를 떠올리며 성과를 단정 짓듯 말했다.
“데모 보니까 할 만한 거 같던데?”
“네.OLED 공장을 가동시킬 핵심 기술로 적당한 거 같습니다.”
발표 시작 전, 두 사람의 가벼운 만담이 이어졌다.
분위기만 보면 따로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이태룡 상무가 고준호 상무 옆으로 의자를 끌고 다가와 미소 지었다.
“선배님, 미리 축하드립니다.”
“잡소리 말고 집중이나 해.”
“에이, 이렇게 예민할 필요 없다니까요.”
“쉿.회의 끝나고 이야기하자.”
고준호 상무는 굳은 표정으로 이태룡 상무를 물렸다.
그러곤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유현을 바라보았다.
사업부장까지 온 회의임에도 유현은 너무나 태연한 모습이었다.
순간 얼마 전 그와 했던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사업부장이 직접 내려오신다더군.어쩌면 자네 사표는 받지 않아도 될지 모르겠네.
-단순히 오케이만 받을 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기대 이상의 결과를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기대 이상?
-네.그렇게 됐을 때, 담당님께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겠단 거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기대되는 게 사실이었다.
고준호 상무의 감이, 이번 회의에서 뭔가 일어날 거라는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자, 시작하지.”
여태식 전무의 사인을 시작으로 발표가 시작되었다.
단상에서 옆으로 한 발 나온 김영길 과장이 정중히 인사했다.
“발표를 맡은 상품기획팀 김영길 과장입니다.그럼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달칵.
그에 맞춰 유현이 페이지를 넘겼고, 도입부 페이지가 스크린에 떠올랐다.
으레 프로젝트 보고를 하면, 개요를 시작으로 진행 방법 등이 차례로 나오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 보고는 달랐다.
시작부터 임준표 부사장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OLED와 LCD의 하이브리드 기술에 대해 설명드릴까 합니다.이는 기판을…….”
단순히 OLED 기판을 사용하는 LCD가 아닌 하이브리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어감상 OLED보다 상위의 혁신 기술이라는 이미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그 한 단어에 반응하듯 사업부장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김영길 과장은 사족을 다 쳐 내고 핵심만 말했다.
“이 혁신 기술을 접목시킨 차세대 패널을 우선 SHR(Super High Resolution, 초고해상도) 패널로 명명했습니다.그리고…….”
끝까지 LCD라는 말을 쓰지 않고 새로운 패널의 이름을 만들었다.
하이브리드, SHR, 이 두 단어가 사업부장의 뇌리에 콕 박혔다.
딱 원하던 말인지라 그의 입가에 벌써 미소가 지어졌다.
뒤 이은 페이지에선 OLED와 SHR을 비교하는 도표가 보였다.
이미 OLED와 LCD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건 미래 대 미래의 싸움이었다.
일성과 한성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승자가 한성이 될 거라는 걸 김영길 과장이 말해 주고 있었다.
“OLED는 현재 어떤 기술을 쓰더라도 SHR 패널의 해상도를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생산성과 기술력 모두 SHR 패널이 우위로…….”
짝짝짝짝짝.
“아주 좋아.”
김영길 과장이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임준표 부사장이 박수를 쳤다.
단지 두 페이지 보여 줬을 뿐이다.
그간 준비했던 기술적인 많은 내용은 발표하지도 않았다.
이 상황을 예측한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때, 3담당 이태룡 상무가 끼어들었다.
“부사장님, 제가 보기에도 이 아이디어가 딱 좋은 거 같습니다.”
“허허! 그렇지.이렇게 밀고 나가면 되겠어.”
“네.애플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언론에서도 확실히 포장해 줄 겁니다.”
“맞아.애플이 달갑지 않긴 하지만, 확실히 지명도가 높긴 하지.”
이태룡 상무의 입 발린 말에 임준표 부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준표 부사장과 이태룡 상무는 가전사업부에서 동고동락했던 사이였다.
그래서인지 여태식 전무를 중간에 두고도 발표 중에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했다.
여태식 전무는 무슨 생각인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때, 이태룡 상무가 검은 속내를 드러냈다.
“부 사장님, 이 패널, 저희가 맡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하긴, 3담당이 애플 전문이라서 시너지가 나겠어.”
“네.그래서 말인데…….”
이태룡 상무가 점점 도를 넘고 있었다.
고준호 상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여태식 전무가 닫았던 입을 열었다.
“부 사장님, 발표 내용이 남은 거 같은데, 더 들어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허허! 그렇지.그래.일단 듣고 이야기하자고.”
임준표 부사장이 손짓하자 이태룡 상무가 눈치껏 발을 뺐다.
고준호 상무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불안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그는 옆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 개자식이!’
그러자 이태룡 상무가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서 발끈할 정도로 고준호 상무가 모자라진 않았다.
일단 표정 관리를 했지만, 내상을 입은 건 사실이었다.
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이태룡 상무가 시시콜콜 검은 속내를 드러낼 게 확실해서였다.
이대로라면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뺐길 수도 있다.
그런 고준호 상무의 우려와는 별개로 김영길 과장이 발표를 이어 나갔다.
“네.그럼 이어서 발표하겠습니다.아까 언급했던 걸 다시 말씀드리자면…….”
유현이 보기에 이미 프로젝트 통과는 기정사실이었다.
이유?
사업부장이 딱 원하는 그림을 봤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이 프로젝트의 진정한 성공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딱 지금의 곤란한 상황을 면피할 도구가 필요했다.
그 말인즉, 이대로 프로젝트가 통과한들 제대로 힘을 받긴 어려웠다.
어쩌면 3담당의 입김까지 가해질지도 모른다.
유현은 당연히 고작 그 정도 수준의 성공을 바라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게끔 확실한 서포트를 받길 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상대방의 입맛에 맞춘 보고로는 부족했다.
그 이상을 얻기 위해선, 상대방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을 건드려 줘야 한다.
그리고 지금.
유현은 목표했던 성공에 다가설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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