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39
상남자 439화
타이밍에 딱딱 맞게 영상들이 변했다.
압도적으로 다가왔던 화면은 놀라움을 넘어 전혀 다른 세계로 관람객을 초대했다.
마치 가상현실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놀라운 몰입감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대단하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던 유현은 내심 감탄했다.
디스플레이와 콘텐츠, 이를 아우르는 기획까지.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흥미로운 전시였다.
유현이 인정할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볼 것도 없었다.
전시가 끝난 후, 심사단이 극찬했다.
“원더풀.진짜 여행 온 기분이네요.”
“말로만 들었을 땐 와 닿지 않았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한마디로 엑설런트입니다.왜 한국이 단숨에 글로벌 리더의 자리에 올랐는지 바로 이해가 됐습니다.”
고무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발걸음은 3층 국제 회의장으로 이어졌다.
유현은 참석하지 못했지만, 1시간 이후 돌아온 심사단의 표정에서 정다혜의 발표가 성공적이었음을 확신했다.
심사단이 떠난 후였다.
다소 어수선하던 1층 전시장 분위기는 정부 관계자들로 인해 바로잡혔다.
저벅저벅.
양옆으로 길쭉이 늘어선 고위 공무원들 사이로 총리가 걸어왔다.
풍기는 위엄만 봐도 대한민국 2인자라는 위치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바일 전시관으로 다가간 그가 장준식의 가슴팍에 놓인 이름을 보며 말했다.
“장준식 씨, 전시 지원 감사합니다.덕분에 잘 마쳤습니다.”
“아닙니다.”
잔뜩 긴장한 장준식의 입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총리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양윤수와 정샛별에게도 인사했다.
“양윤수 씨, 정샛별 씨, 끝까지 지원해 줘서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총리에게 이름을 불렸다는 것만으로 모두 영광스러운 표정이다.
과거 유현도 저 자리에 있었다.
그땐 일성전자 직원 사이에 꼽사리 낀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던 기억이다.
이젠 일성전자 직원들이 아닌 후배들이 그 위치를 대신했다.
유현이 흐뭇하게 후배들을 바라볼 때였다.
정다혜가 다가와 속삭였다.
“유현 씨는 왜 뒤로 빠져 있어요?”
“제 무대가 아니니까요.”
유현이 어깨를 으쓱이자, 정다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아는 유현은 늘 이런 식이었다.
주목받으려고 나서지 않았고, 자신을 뒤로 감췄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황태자의 신임을 얻었을까?
궁금함을 내심 삼킨 그녀는 다가온 총리를 향해 말했다.
“총리님.”
“아, 정 팀장, 정 팀장이 정말 수고했어.오늘 발표도 무척 좋았네.”
“네.감사합니다.”
인사를 받은 정다혜가 유현에게로 손짓했다.
“그리고 여기 한성의 한유현 대리님이 전시에 신경을 많이 써 줬습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불필요한 소개였다.
유현은 황당함을 숨긴 채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한유현입니다.”
“그래, 한유현 대리, 수고했어.지원 고맙네.”
꽈악.
총리의 손을 맞잡는 순간, 유현의 뇌리에 잊혔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도 정다혜가 이런 식으로 유현을 떠밀어 줬던 기억이다.
신세를 졌었구나.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유현은 정다혜를 보며 눈웃음 지었다.
그러자 정다혜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그때 옆에서 보좌하던 신광세 과장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총리님, 얼마 전 한성 신경욱 전무가 와서, 한성 회장님도 이번 전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허허.회장님이?”
“네.그리고 그 총괄 책임자가 바로 한유현 대리입니다.”
신광세 과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유현을 띄워 줬다.
대한민국 거물의 이름이 들린 순간 총리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이 정도 수준의 전시를 쉽게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
“아닙니다.국가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죠.한성 전 직원들이 같은 마음입니다.”
뻔뻔하게 내뱉는 유현의 말이 총리의 어깨를 크게 들썩이게 했다.
“허허.말이라도 무척 고맙군.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나?”
기분 좋은 제안을 받은 유현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유치 성공은 시작일 뿐입니다.올 연말에 있을 G20 정상회담에 진짜 저희 한성의 저력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전시를 하겠다는 건가?”
“네.역대급 규모의 전시를 통해 대한민국의 힘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는 게 윗분들의 생각이십니다.”
유현이 윗분이라는 말로 뭉뚱그렸지만, 총리는 당연히 신현호 회장을 떠올렸다.
오고 가는 거래에 정이 싹트는 법.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는 신현호 회장의 도움이란 그에게도 꼭 필요했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한 총리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럼 우리가 뭘 지원해야 하지?”
“일단 개최 때 어떤 전시를 할지부터 여기 정 팀장님과 먼저 상의해 보겠습니다.규모가 워낙 큰 사안이다 보니, 지금 바로 움직여야 할 거 같습니다.”
“그렇지.그렇게 하나씩 나아가는 게 맞지.얼마든지 준비하게.”
“네.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아냐.우리가 고맙지.이참에 한성에 감사 표시를 한번 해야겠군.”
총리가 너털웃음을 짓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뒤에서 말을 못 들은 사람까지도 분위기를 타고 덩달아 웃었다.
한편, 정다혜는 미소 짓는 유현을 보며 황당해했다.
‘왜 그걸 지금부터 하려 하지?’
앞으로의 일정을 뻔히 아는 그녀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날 오후, 총리는 즉각 뱉은 말을 실천했다.
신현호 회장에게 감사의 회신을 보냈고, 이는 신명호 부회장을 통해 직원들에게 공문으로 내려왔다.
-이번 G20 정상회담에서 디스플레이 전시 지원을 통해 우리 한성의 저력을 알렸으며…….
이번 전시를 사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시답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신명호 부회장의 공문을 받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달라질 수밖에 없게끔 동시다발적으로 지원이 내려왔다.
각 그룹 전시 담당자에 개별 포상이 나왔고, 담당을 지원한 팀에게도 격려금이 지급됐다.
이를 주도했던 혁신제품TF 역시 포상의 대상이었다.
외교부 청사 건물에 남아 있던 유현은 이러한 내부 분위기를 최민희 팀장을 통해 들었다.
-결국 한 대리 말대로 전시 담당을 만들길 잘했네.
“얻어걸린 거죠.”
-선견지명이 있는 거지.G20 개최 때도 우리가 전시한다며?
“네.그땐 크게 할 예정입니다.”
유현은 분주한 실내를 벗어나 입구 앞 벤치에 앉았다.
최민희 팀장의 흥분한 목소리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유현의 귀에 닿았다.
-그때쯤이면 레티나 프리미엄으로 한창 뜨겁겠다.전 세계 유력 정치인들과 기업인들 앞에서 우리 패널들이 소개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되도록 해야죠.”
-진짜 타이밍이 이렇게 맞아 들어가네.
최민희 팀장은 오랜만에 마음껏 소리쳤다.
예전 그녀와 현일자동차 건으로 함께했던 때를 떠올린 유현은 쿡쿡 웃으며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한땐 몸이 비비 꼬일 정도였는데, 이제는 기분 좋게 들어 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떠든 최민희 팀장이 입을 열었다.
-거긴 지금 한창 바쁘겠다.준식 씨도 고생하고 있지?
“안 그래도 지금 열심히 철수하고 있습니다.”
전화를 받던 유현은 고개를 돌려 건물 입구를 봤다.
장준식은 카트를 끌며 전시품을 옮기고 있었다.
소문을 통해 포상 소식을 들어서인지 얼굴엔 사기가 충만했다.
-내일이면 이야기 좀 들을 수 있겠네.아, 한 대리는 거기에 더 남는다고?
“네.추가 전시 관련해 정리할 게 좀 있습니다.”
-그래.그렇게 해.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애플 쪽에 로고 디자인 넘어간 건 무사통과했어.
“그래요? 잘됐네요.”
-확실히 휴대폰 사업부 디자인센터가 일을 잘하더라.
정확히 하면 한재희의 공이었다.
여동생은 당겨진 일정을 맞추느라 혼이 나가 버렸다.
내심 미안한 마음에 유현은 나중에 가서 좀 챙겨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장은 모른 척 웃어넘겼다.
“하하.중요한 프로젝트니까 당연히 신경 써 줘야죠.”
-그거야 우리사정이지.뭐, 애플 발표회에 나갈 로고니까 중요하기도 하겠다.
“그럼요.이번 일로 많은 게 바뀔 겁니다.”
-그쪽 일도 정신없을 텐데 너무 신경 쓰진 마.애플 발표회 준비는 우리가 알아서 해 놓을게.
“네.그럴게요.팀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기분 좋게 몇 마디 더 주고받은 유현은 전화를 끊으며 애플 발표회를 떠올렸다.
표면적으로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아니었다.
내부에 얽힌 문제가 터지는 만큼 곧 있으면 움직여야 했다.
과연 그 전에 유치 결과가 나올 것인가?
아니면 그 전에 정다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일단 두고 보자고.”
가볍게 마음먹은 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유현은 외교부 청사 건물로 출근했다.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G20 유치 결과도 나오지 않았지만, 유현은 개최 당시 대규모 전시를 기획한다는 핑계로 외교부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
총리가 직접 하라고 했으니 뭐라 할 사람도 없었다.
휴게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유현에게 신광세 과장이 다가와 물었다.
“슬슬 일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아직 기획안 검토도 제대로 못했습니다.정 팀장님과 이야기를 좀 해야 하는데, 너무 바쁘시네요.”
“아무래도 뒷정리할 게 많아서 말이야.”
“그렇군요.그렇다면 조금 더 기다리겠습니다.”
“끙.”
신광세 과장은 마치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유현이 무척 거슬렸지만, 별다른 말을 못했다.
정다혜를 빼 주려면 그 일을 자신이 대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유현은 그의 속내 따윈 상관없이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날 오후.
건물 앞 야외 벤치에 앉아 있는 유현에게 정다혜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회의 시간을 또 미뤄야 할 거 같아요.유치 발표에 맞춰 할 일이 좀 많네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바쁘시면 안 해도 그만이고요.”
“네? 빨리 정해야 한성이 전시 대비할 수 있다면서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나중에 해도 되는 일입니다.”
유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손을 휘휘 젓자, 정다혜가 황당한 듯 눈을 껌뻑였다.
이럴 거면 왜 여기 남아 있는 걸까?
피식 웃은 유현이 정다혜의 생각을 꿰뚫는 말을 꺼냈다.
“이참에 일 핑계 대고 좀 쉬려고요.하루 종일 놀고먹고 좋잖아요.아, 출장비도 꼬박꼬박 나옵니다.”
유현의 넉살에 고개를 저은 정다혜가 툭 하고 말했다.
“그래요, 그럼.나중에 시간될 때 연락드릴게요.”
“네.파이팅입니다.”
환하게 인사한 유현은 멀어지는 정다혜의 뒷모습을 보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결국 실컷 고생만 하고, 정작 유치 발표가 나오기 전에 포기해 버렸죠.그때가 무척 후회돼요.만약 더 버텼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으면 실장님을 못 뵀겠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뱉은 정다혜의 말처럼, 이번에 그녀가 프로젝트를 성공하면 미래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녀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같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함께 일하며 쌓은 좋은 추억들을 모두 지워 버려야 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유현은 보고 싶었다.
새장 안에 갇힌 모습이 아니라, 세상을 훨훨 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유현이 굳이 이곳에 남아 그녀를 지켜보는 이유였다.
며칠이 더 흘렀고, 유치 발표가 임박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유현은 어쩌면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유현도 모를 변화가 문제를 미연에 막았을 수도 있다.
1층 휴게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인 채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리고 있던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일 없으면 더 좋지, 뭐.”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난 유현은 시계를 확인했다.
생각을 꽤 오래했는지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이래도 크게 상관없는 게 정다혜는 지금 회의 중이었다.
정우혁 실장 및 신광세 과장도 그 회의에 참석해 있는 터라, 마땅히 신경 쓸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휴게실에 더 있는 것도 방법이지만, 유현은 외출을 택했다.
너무 오래 안에 있다 보니 답답한 마음이 든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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