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69
상남자 469화
전시장 앞에 선 유현은 사람을 기다리며 실내 벽면에 붙은 큰 전광판을 살폈다.
전광판에 흘러가는 뉴스 타이틀처럼 오늘 한국엔 유명한 기업가들도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는 지난 4차 회의 때까진 없었던 일로, 덕분에 전시의 중요성이 급부상했다.
오늘 전시회에 신명호 부회장을 비롯한 한성전자의 주요 인사들이 급히 참석하기로 결정한 이유였다.
한성전자만 참석한 게 아니었다.
더 자세한 부분을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오은비 기자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전시장 맞은편 커피숍에 앉은 유현에게 오은비 기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성도 발등에 불 떨어져서 오늘 온다잖아요.최민용 부사장도 온다던데요?”
“그래요?”
“당연하죠.아무리 배가 아파도 안 올 수가 있나요? 빌 게이츠도 온다는데.”
“그렇긴 하네요.”
“대리님은 안 놀라워요?”
“놀랍죠.너무 놀라워서 어젠 잠도 못 잤습니다.”
유현이 오버하며 답하자, 오은비 기자가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일성에게서 전시 뺏은 당사자라 그런지 여유가 있구나?”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조사하면 다 나오죠.저 오은비예요.”
오은비 기자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전시장 안으로 일성전자 고위 간부들과 산업부 인원들이 들어갔고, 기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 그녀에게 유현이 턱짓했다.
“기자님 대단한 거야 다 알죠.근데 저기 안 가보셔도 돼요?”
“제 후배들이 있잖아요.”
“역시 차장이 되시더니 다르네요.”
“에이, 진급한 건 맞는데, 아니라니까요.전 발로 뛰는 게 편해요.그러는 대리님은 안 가 봐도 돼요?”
“아직 전시 시작한 것도 아니잖아요.저 말고도 윗사람 많습니다.”
유현이 비슷한 답을 내놓자 오은비 기자가 눈웃음 지었다.
“역시 여유 있다니까.”
“기자님께 배운 거죠.”
“넉살도 여전하고요.”
“좋은 사람과 함께해서 그런가 봐요.”
유현이 반가운 인연과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옆으로 신명호 부회장과 임준표 부사장, 그리고 신경욱 전무가 지나갔다.
입구 앞에 선 그들에게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가 이어졌다.
유현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오은비 기자가 말했다.
“LCD 사업부 분사 이슈 때문에 기자들이 몰리는 거예요.”
“사업부 분사가 이렇게 주목받을 줄 몰랐네요.”
“이번 한 방으로 황태자 싸움이 더욱 재밌어질 텐데 당연하죠.일성 측과 경쟁하는 것도 나름 볼만할 거 같기도 하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현이 상투적으로 답하며 커피를 마시자, 오은비 기자가 특유의 촉을 발동했다.
“뭐 알고 있는 게 있나 본데요? 분사는 언제 해요?”
“매출 역전이 나오면 하지 않을까요?”
“에이, 선수끼리 왜 이래요.미리 준비하고 있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유현은 대답을 아꼈다.
대신 입구 앞에서 능숙하게 기자들을 대하고 있는 신경욱 전무를 바라보며 그가 얼마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곧 LCD 사업부 분사가 결정될 거야.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어.
오은비 기자의 예측대로 분사 논의는 이미 진행 중이고, 결과가 나올 시기가 다가왔다.
어쩌면 매출 결과와 상관없이 LCD 사업부의 분사는 이뤄질 가능성도 존재했다.
상황은 이렇듯 잘 풀려 가는데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유현은 답답한 기색을 감춘 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고자 했다.
“머지않은 시기가 될 겁니다.그땐 기자님께 가장 먼저 알려 드릴게요.”
“당연하죠.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스타일인 거 알죠?”
“그럼요.이제 슬슬 일어나 보실까요? 진짜 별들이 올 시간이 됐는데.”
“네.알겠습니다.안에서 설명해 주실 거죠?”
“그럼요.빌 게이츠보다 기자님이 제겐 더 VIP입니다.”
지금만큼은 유현의 말이 사실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어떤 상황을 고려해 봐도 오은비 기자의 도움은 필요했다.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유현의 살가운 말에 오은비 기자의 눈이 반달이 되었다.
그날 전시관엔 예정대로 수많은 별들이 참석했다.
전 세계 유명 기업의 CEO부터, G20 참여국 정상들과 관련 부처 장관들까지 전시장에 들렀다.
여기에 한국의 대통령 및 총리와 장관들까지 더해졌다.
유럽 전시회 프라이빗 룸의 전시 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팍.
시작과 함께 넓은 공간을 두른 디스플레이들이 빛을 뿜으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기존 전시회와 달리 스토리가 담긴 전시에 사람들이 탄성을 뱉었다.
그중에는 미국 대통령도 있었다.
“와.정말 대단하군요.이런 전시는 처음입니다.”
“하하.한국에 오시면 제가 종종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국 대통령의 한마디에 전시 지원 인원들이 기겁하긴 했지만, 그만큼 전시 분위기는 성공적이었다.
이후에 있는 G20 정상회담 내용보다 전시회 관련 뉴스가 더 많이 나올 정도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기저기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독일 명품 TV 브랜드 로에베와 덴마크 명품 가전 브랜드 뱅앤울룹슨이 그 자리에서 냅킨 위에 간이 계약서를 썼다는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다.
덕분에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도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잔뜩 얼어 있던 정샛별이 유현에게 다가와 소리쳤다.
“꺅.대리님.저 대통령님 손 잡았어요.손 안 씻어야지.”
“냄새나.좀 씻어.”
유현이 냉정하게 자르자, 이번엔 양윤수가 다가와 흥분해 소리쳤다.
“전 아까 빌 게이츠에게 설명도 했어요.저 영어 하는 거 보셨죠?”
“무슨 얘긴지 못 알아듣고 딴 데 가던데?”
유현의 철벽에도 희희낙락인 두 사람 뒤로 멍하니 있는 장준식이 보였다.
다가간 유현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수고했어.”
“대리님, 꼭 꿈꾸는 거 같습니다.”
“네 노력이 꿈을 현실로 만든 거야.”
“감사합니다, 대리님.”
장준식이 허리를 꾸벅 접었다.
유현은 또 한 차례 성장한 후배를 대견하게 바라봤다.
유현과 이야기 나누던 세 사람은 한 남자의 등장에 쪼르르 물러났다.
유현에게 다가온 신경욱 전무가 말했다.
“자네야말로 고생 많았어.”
“이번엔 정말로 제가 한 게 없습니다.후배들이 다 해 줬죠.”
빈말이 아니라 장준식은 유현의 공백을 완벽히 메웠다.
과거처럼 혼자 일한 게 아니라 양윤수와 정샛별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도 알았다.
신경욱 전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이번 전시와 관련된 인원들은 내가 확실히 챙겨 줄 걸세.”
“네.지원 나온 개발팀까지 챙겨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지.자네에겐 뭘 챙겨 줄까?”
“저는 김치볶음밥에 계란 2개로 충분합니다.”
“하하하.자네다운 대답이군.”
유현의 답에 신경욱 전무는 모처럼 시원하게 웃었다.
오늘 온종일 귀빈들 접대하느라 썼던 가식의 가면을 시원하게 날려 버린 기분이다.
한결 어깨가 가벼워진 그가 유현에게 말했다.
“오늘 분위기를 보아하니 곧 분사 발표를 할 거 같아.”
“매출이 넘는다고 확신하는군요?”
“이미 그룹전략실도 계산이 끝났겠지.그러니까 내어주는 느낌이야.”
“그렇군요.좋은 소식이네요.”
“그런데 왜 그렇게 고민이 있는 표정인가?”
신경욱 전무의 물음에 유현이 담담히 답했다.
“너무 잘 풀려서 그런가 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긴 하지.”
“맞습니다.분명 다른 노림수가 있을 겁니다.”
손태범 부회장이 전면으로 나섰고, 신경수가 배경으로 있는데 그냥 내어줄 리는 없다.
분명 머지않아 큰 태풍이 불어올 터였다.
내년에 회사의 미래를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만큼 더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유현은 이미 마음의 결정은 내렸지만, 신경욱 전무에게도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일부러라기보다는 유현의 결심을 주저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런 유현의 고민을 읽기라도 한 듯, 신경욱 전무가 유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자네가 지금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날 믿어도 되네.”
“당연히 믿습니다.하지만…….”
툭툭.
어깨를 두드린 신경욱 전무가 미소 지었다.
“이번에 집에 내려가서 머리 좀 비우고 오게.자네는 생각이 너무 많아.”
“네.그래야겠습니다.아버지에게 고민 상담도 좀 하고요.”
“하하.그래.어르신들 말 허투루 들을 거 하나도 없어.”
“그래서 전무님 말씀 제가 잘 듣잖아요.”
유현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신경욱 전무가 간만에 정색했다.
“난 아직 젊어.”
“네.충분히 젊으십니다.”
“왠지 비꼬는 거 같긴 하지만 받아들이지.”
“그게 바로 젊은 자세죠.대단하십니다.”
유현이 엄지를 내밀자 신경욱 전무가 피식 웃었다.
그 시각, 한성미술관 관장실 안 분위기는 매섭기 그지없었다.
미술관 관장이자 회장 부인인 홍진희는 마주하고 있는 윤주탁 전무를 한껏 비꼬았다.
“윤 전무는 참 대단해.경수가 돌아올 자리를 세팅해 놓으랬더니, 경욱이 그놈한테 비단길을 만들어 줘 버리네.”
“죄송합니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걸 보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홍진희의 차가운 한마디에 윤주탁 전무가 이마를 박았다.
쿵.
그 앞으로 다가간 홍진희가 차가운 목소리를 뱉었다.
“경수가 원하는 대로 기존의 잔여물들을 싹 정리할 생각이야.신명호나 신천식도 포함되겠지.”
“…….”
“손태범 그 늙은이가 그 역할을 직접 해 주고 떠날 거고.그럼 남는 자리는 누가 대신하게 될까?”
홍진희의 물음에 윤주탁 전무의 머리가 번뜩였다.
비로소 모든 상황을 이해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럼…….”
“그래.그래서 한 번 더 윤 전무를 믿어 볼까 해.”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윤주탁 전무가 기합 들어간 답을 내놓자, 홍진희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마지막 기회야.난 윤 전무가 필요 없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명심하겠습니다.”
이미 버려진 선배들의 최후를 본 윤주탁 전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다음 날 오전, 유현이 고향에 내려갈 채비를 마쳤을 때였다.
와이콤비네이터의 세레나 리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그녀는 바로 얼마 전 유현이 요청했던 결과를 알려 주었다.
-스티브, 당신이 방문한 날 전후로 폴 그레이엄과 면담한 인원을 확인할 수 있는지 문의가 있었어요.두둑한 사례금과 함께요.
“방문자는 혹시 동양인이던가요?”
-아뇨.잘생긴 미국인이요.영국식 억양이고,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 되겠네요.
역시 신경수가 직접 움직일 리는 없었다.
외국인까지 동원한 걸 보면 의심을 사지 않게 신중하게 접근했다는 의미다.
“그렇군요.혹시 명함은 받으셨어요?”
-네.CCTV에 찍힌 사진이랑 명함 같이 전달해 드릴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답은 안 궁금하세요?
“사례금까지 있는데 제가 요청드리긴 민망하죠.”
대답은 안 들어도 알지만, 그래도 한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