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535
상남자 535화
유현은 그런 동기를 어이없이 바라봤다.
“이거 진짜 웃긴 놈이네.”
“너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어.아, 메일 내용은 내가 작성할게.”
“선전포고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이 정도는 해야 실장님이 조직 생성 기념으로 술 한잔 사 주지 않겠어?”
“아주 좋은 자세야, 권 팀장.”
한결 가벼워진 동기에게 유현이 엄지를 내밀어 줬다.
그날 오후, 발신자를 유현으로 한 메일이 전달됐다.
내용을 보고받은 CTO 박범진 전무가 황당해했다.
“뭐야, 이거? 홍 전무가 지금 우리랑 해보자는 거야?”
“전략제품그룹에서 작정하고 미래기술TF를 미는 거 같습니다.”
마주 앉은 연구소장의 답에 박범진 전무가 되물었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기술 검토 결과 있지?”
“네.결과는 부정적입니다.혹시라도 말 나오지 않게 모든 케이스를 재검토 해보겠습니다.”
“좋아.TF 출범식 때 두고 보자고.”
박범진 전무가 이를 갈았다.
황당하긴 생산기술 센터장도 마찬가지였다.
“허 참.사장님께서 한다는 게 고작 이건가? 딱 봐도 생산성이 제로인데, 왜 하자는 거야?”
모바일 사업부장 또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되지도 않는 OLED 한다고 설치더니, 이젠 반도체 디스플레이? LCD로 번 돈 다 까먹으려고 꼴값을 떨고 있구만.”
일본 연구소장도 내용을 확인하고 고개를 저었다.
“소니도 마이크로 LED는 포기하고 미니 LED를 하고 있는데 말이지.”
경영혁심 담당은 다른 관점에서 골머리를 썩었다.
“벌려놓은 투자금 수습하기도 힘든데, 이러다 또 엉뚱한 공장을 짓는다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어디 하나 긍정적인 시선은 없었다.
다들 TF 출범식 날이 다가오길 벼르고 있었다.
미래기술TF가 사내 시스템에 뜨긴 했지만, 공식 출범한 건 아니었다.
아직 공지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왔다.
-한 과장, 아니 실장이라 불러야겠구나.축하해.
“선임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죠.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김선동 선임을 시작으로 유현은 꽤 많은 전화를 받아야 했다.
물론 좋은 전화만 걸려 온 게 아니었다.
메일의 파급 효과로 인해, 기술에 대한 문의 전화가 계속 걸려 왔다.
퇴근 후, 회사 근처 곱창집에 들른 지금도 계속 전화가 울렸다.
지이잉.지이잉.
스윽.
유현은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꾼 후 주머니에 넣었다.
옆자리에 앉은 권세중 대리가 물었다.
“왜 안 받고?”
“퇴근했잖아.업무 전화는 좀 생략하려고.”
“반응이 진짜 크긴 한가 보다.생판 모르는 사람에게서 연락 올 정도면.”
“속으로는 일 시켰다고 죽이고 싶을걸?”
실무자들 입장에선 느닷없이 엉뚱한 일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윗사람들이 칼을 갈고 있는 일이다 보니, 빠질 수도 없을 터였다.
한마디로 짜증날 만했다.
유현의 말을 들을 권세중 대리가 어깨를 들썩였다.
“하하.그룹장님이 알아서 커버해 주겠지.”
“자식, 제대로 배웠네.그런 의미에서 한 잔?”
유현이 잔을 들자, 권세중 대리와 장준식도 같이 들었다.
“좋지.”
“좋습니다.”
챙.
잔을 부딪친 세 사람이 기분 좋게 마셨다.
회사에서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만, 밖에 나오니 또 달랐다.
술까지 들어가니 그간 밀린 이야기를 서로 쏟아냈다.
“내가 혁신전략실에서…….”
“전 지난번 전시회를 겪으며…….”
“난 그룹전략실을 통해…….”
개개인의 이야기는 조직으로 옮겨 갔고, 자연스럽게 신화반도체 인수 건이 도마 위에 올랐다.
신화반도체 인수는 미래기술TF와 혁신전략실의 연결 고리였다.
또한 앞으로 계획에 있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권세중 대리가 혁신전략실 선배들을 떠올리며 말했다.
“다들 신화반도체 인수 건 정리하느라 고생하고 있어.아마 지금도 일하고 있을 거야.”
“알아, 고생 많은 거.진척이 꽤 된 것도 알고.”
“결국 인수가를 낮추는 게 핵심인 거지?”
“맞아.그래야 인수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권세중 대리의 물음에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성그룹은 5년 전, 신화반도체 인수를 고려한 적이 있었다.
신현호 회장이 나섰지만, 결국 정치적인 이슈로 불발되고 말았다.
당시 한성그룹에서 최대치로 잡은 금액은 1조 원이었다.
현재 시세로 1조 5천억 원으로 맞출 수만 있다면?
신현호 회장을 비롯한 내부 설득이 가능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술잔을 비운 권세중 대리가 물었다.
“마이크론이 인수를 못하고 있는 것도 가격을 후려쳐서 그런 거라며?”
“약점을 잡고 물고 늘어지는 거겠지.버티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고.”
“그럼 그 약점을 정확히 찾아내는 게 중요하겠네.우리도 가격을 낮추려면 말이야.”
“정확해.역시 감 좋아.”
유현이 엄지를 치켜들자, 권세중 대리가 한발 더 나아갔다.
“그 작업을 돕기 위해서 우리가 반도체 디스플레이를 하는 거 맞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나도 그렇게만 생각했거든.그런데 좀 이상해.”
“뭐가?”
“사실 그런 거라면 이렇게까지 무리할 이유가 없잖아.”
권세중 대리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단지 신화반도체 인수에 도움을 줄 정도라면, 다른 부서 들쑤시면서 이렇게까지 요란 떨 필요가 없었다.
어느 정도 흉내만 내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유현이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봤다.
-유현아, 너랑 쭉 같이 일하고 싶다.내가 더 열심히 할게.
-대리님과 더 오래 함께하기 위해서라도 성장하고 싶습니다.
늘 옆에서 힘을 주고, 자극을 주는 멋진 동기와 후배가 마주하고 있었다.
꼭 함께하고 싶었던 두 사람을 향해 유현이 속내를 꺼냈다.
“신화반도체 인수는 중간 과정이지, 이 일을 하는 진짜 목적이 아냐.”
“그럼?”
“나, 이 회사를 제대로 한번 만들어 보려고.”
유현의 말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권세중 대리가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디스플레이로 돌아오길 잘했네.”
“왜?”
“이런 큰 뜻을 품은 조직의 서열 2위가 된 거잖아.안 그래, 서열 3위?”
“전 서열 3위가 아니라 100위라도 좋습니다.실장님을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권세중 대리에 이어 장준식도 뜬금없이 포부를 전했다.
유현은 언제나 한결같은 후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준식이 넌 이제 따라오지 말고 앞으로 가야지.서열 3위인데.”
“넵.더 성장한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합 가득한 장준식의 어깨에 손을 올린 유현이 잔을 들었다.
“당장 내일부터 바쁠 거야.앞으로 태클도 많을 거고.작은 조직이라고 무시도 많이 당하겠지.”
“걱정 없어.그 정도 각오는 됐으니까.”
“괜찮습니다.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유현이 의지를 전하는 서열 2, 3위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스윽.
자연스럽게 세 사람의 잔이 중앙에 모였다.
“그래.기왕 함께한 거, 우리 멋지게 잘해 보자.미래기술TF를…….”
유현이 분위기를 타 건배 제의를 하려 할 때였다.
등 뒤에서 굵직한 소리가 유현을 막아 세웠다.
“어쭈구리? 내 구역에서 무슨 작당 모의 하고 있어?”
먼저 반응한 건 권세중 대리와 장준식이었다.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여긴 어쩐 일이세요?”
뒤돌아본 유현의 물음에 김현민 상무가 황당해했다.
“어쩐 일? 메일 1통으로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든 놈이 할 소리야?”
“전화 안 받는다고 걱정했으면서 왜 그러세요.”
옆에 있던 최민희 팀장이 옆구리를 찌르자, 김현민 상무가 발끈했다.
“내가 언제?”
“저한테 어디 갔냐고 계속 물으셨잖아요.”
이어서 김영길 과장이 거들자, 김현민 상무가 모른 척 둘러댔다.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어쨌든 우리 앉아도 되지?”
“그럼요.술 값 내 주러 오셨는데 자리는 드려야죠.”
얼른 옆 테이블에서 의자를 가져오는 유현을 보며 김현민 상무가 혀를 내둘렀다.
“와.이 녀석, 볼 때마다 황당하네.”
“칭찬 감사합니다.”
넉살 좋게 말을 받은 유현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추가된 잔 3개를 채웠다.
그러곤 먼저 잔을 들었다.
“그럼 다 모인 기념으로 제가 건배 제의하겠습니다.”
“해 봐.술 값 같은 소리만 안 하면 들어 줄게.”
김현민 상무가 투덜대며 잔을 들자, 어느새 6개의 잔이 모였다.
모두 유현과 뜨거운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다.
너무나 좋은 동료들 앞에서 유현이 한마디 했다.
“미래기술TF의 성공을 위해 손발을 걷고 도와주실 김현민 상무님을, 위하여.”
“위하여.”
챙.
얼떨결에 잔을 부딪친 김현민 상무가 어이없어 했다.
“이 자식, 나 엿 먹이는 거 맞지?”
“하하하하하.”
그런 김현민 상무를 보며 다들 기분 좋게 웃었다.
이날, 미래기술TF의 첫 회식이 끝날 때까지 테이블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 문 앞에 미래기술TF의 명패가 붙었다.
사실 명패가 별건 아니지만, 조직이 만들어졌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여러 인연들이 11층 사무실에 하나 둘씩 들렀다.
유현에게 잔디 인형을 건네는 조미란 대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받아든 유현이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뭘 이런 걸 들고 오셨어요?”
“사무실이 방 안에 있어서 그런지, 뭔가 들고 와야 할 거 같았어요.꼭 새집 방문하는 느낌이에요.”
“다들 그 말씀 하시면서 하나씩 들고 오시더라고요.어? 인형에 이름표도 달려 있네요?”
작은 화분에 담긴 잔디 인형을 살피던 유현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조미란 대리가 셋 중 하나를 콕 집었다.
“네.여기 눈이 가장 크고 잘생긴 게 실장님 거니까, 물 잘 주세요.쑥쑥 자라면 멋있을 거예요.”
“하하.예쁘게 잘 키울게요.”
기분 좋게 웃은 유현이 잔디 인형 3개를 창문 앞에 쪼르르 나뒀다.
한유현, 권세중, 장준식의 이름이 붙은 잔디 인형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덕분에 사무실이 한층 밝아진 느낌이다.
물론 유현이 받기만 한 건 아니었다.
받은 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성의를 보였다.
“팀장님, 떡 좀 드세요.”
“어머, 시루떡이잖아.언제 이런 걸 준비했대?”
떡을 받아 든 최민희 팀장이 놀라 묻자, 유현이 옆쪽을 턱짓했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장준식이 받은 선물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준식이 아이디어입니다.저 녀석이 은근 이런 거 잘 챙기잖아요.”
“하긴.한 실장 연태리 갈 때도 진짜 돼지머리 앞에서 고사 지냈잖아.”
“하하.그러게요.저 녀석 덕분에 별 경험을 다 합니다.”
“재밌고 좋지, 뭐.쉽지 않겠지만 즐겁게 일해.언제든 도와줄게.”
“그럼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유현은 빙긋 웃으며 최민희 팀장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들이 떡을 받아가며 지원을 약속했다.
확실히 마음 쓰는 만큼 돌아오는 게 있다는 걸 유현은 새삼 느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난 후였다.
3명만 남은 사무실 안에서 권세중 대리가 혀를 내둘렀다.
“진짜 집들이라도 한 것 같네.”
“그러게 말이다.다들 고생했어.특히 준식이 네가 수고가 많았다.”
“아닙니다.정작 일은 하나도 못했습니다.”
장준식은 아쉬운지 자꾸 모니터 쪽을 살폈다.
척 봐도 불안한 눈치지만, 벌써부터 무리할 이유는 없었다.
“틈틈이 메일까지 정리하더라.그 정도면 됐지.”
유현이 장준식을 다독이자, 권세중 대리가 한마디 했다.
“메일이 많이 오긴 했더라.특히 CTO 쪽에서.”
“거긴 발등에 불 떨어졌으니까 그럴 만하지.”
“근데 이렇게 긁어 놔도 괜찮을까 모르겠네.”
“왜?”
“그쪽 사람들이 미래제품연구소와 연관이 많긴 하잖아.어떻게든 도움 받아야 될 거 같아서 말이야.”
미래제품연구소를 움직이는데 CTO 인원들을 쓴다?
솔깃한 아이디어를 뱉은 동기에게 유현이 물었다.
“생각해 둔 방법은 있고?”
“대략적으로만.”
“고민 많이 한 거 같은데, 한번 들어 보자.”
“지금?”
권세중 대리가 묻자 유현이 직진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