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95
상남자 695화
그런 모습들을 떠올리며 풋! 하고 웃는 정다혜 앞에서 아이들이 뛰놀았다.
“꺄르르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한때는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일상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어느새 비워진 그녀의 마음속엔 행복한 감정들이 꾹꾹 채워졌다.
그래서 더없이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그녀는 일상의 행복을 알게 해 준 유현이 무척 고마웠다.
하지만 이제 함께하는 이 시간에, 잠시 쉼표를 찍어야 한다.
이대로 안주할 수 없다는 갈망이 가슴 한편에 있었다.
스윽.
그녀는 몰래 준비한 티켓을 꺼내 들었다.
-대관람차 2인석.
‘더 늦기 전에 말해야지.’
유현과 계속 함께하고 싶지만, 더는 마음을 속일 수 없었다.
결심을 굳힌 그녀 앞으로, 한 아이가 다가와 큰 눈을 껌뻑였다.
얼굴이 새하얀 아이를 보며 그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니?”
“이거 받으세요.”
배시시 웃던 아이가 등 뒤에 숨겨져 있던 카라 다섯 송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곤 또박또박 카라 다섯 송이의 꽃말을 말했다.
“엘리스 씨, 당신 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
정다혜가 멍하니 꽃을 받자, 아이는 웃으며 쪼르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로 유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마치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미소였다.
언제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늘 먼저 앞서 마음을 알아줬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울컥한 마음에 정다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달려가 유현에게 안겼다.
와락.
지금만큼은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유현은 품에 안긴 그녀를 보듬어 주었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고, 놀이동산엔 아름다운 조명이 들어왔다.
그 빛은 맞닿은 해변까지 퍼져 나갔다.
유현은 천천히 돌아가는 커다란 대관람차 안에서 그 풍경을 내려다봤다.
둘만의 공간에서 손을 잡은 정다혜가 물었다.
“유현 씨는 어떻게 안 거예요?”
“뭘요?”
“제가 오늘 유현 씨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거요.”
“몰랐어요.”
“거짓말.그런데도 이걸 줘요? 꼭 마지막 고백 하는 것처럼요?”
정다혜가 카라 다섯 송이를 내밀어 보였다.
유현은 답 대신 질문했다.
“다혜 씨, 아직 뭘 할지 못 정했죠?”
“역시 알고 있었네요.”
“가만히 안주하는 건 다혜 씨가 아니니까요.하고 싶은 일은 있어요?”
“글쎄요.아직 못 정했어요.그냥 당분간 뉴욕에서 혼자 머물며 찾아보려고 해요.”
뉴욕은 정다혜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생각의 정리가 필요한 게 당연했다.
한국엔 가족 문제도 얽혀 있다 보니, 한국으로 넘어오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할 터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라, 유현은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진심으로 그녀의 앞날을 빌어 줬다.
“다혜 씨는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야죠.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금방 갈게요.”
“그럼 하루 빨리 한국에서 터를 닦아 놓고 있어야겠네요.”
“네.그래 주세요.저 편하게요.”
“얼마든지요.그게 제 특기잖아요.”
유현의 넉살에 정다혜가 피식 웃었다.
그는 늘 웃음을 주는 남자였다.
정다혜가 받았던 질문을 되돌려 줬다.
“유현 씨는 어떤 일 하고 싶어요?”
“글쎄요.저도 고민이네요.”
“정말 그냥 쉴 거예요?”
“아마 당분간은 그럴 거 같아요.지금 생활이 전 만족스러워서요.”
유현은 이미 몇 차례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었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던 그녀가, 이번엔 그 부분을 콕 짚고 넘어가려 했다.
“유현 씨는 야망이 없어요?”
“야망이요?”
“네.유현 씨는 마음만 먹으면 분명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너무 안 나서려는 거 같아서요.”
순간 유현의 뇌리에 스티브 잡스가 했던 조언이 떠올랐다.
-자네의 마음속 깊은 곳엔 분명 타오르는 불꽃이 있을 거야.난 자네가 그걸 찾았으면 좋겠어.내 삶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면 말이야.
한성이란 울타리를 벗어나서일까?
당시 유현이 느꼈던 마음속 불꽃은 어느새 더 커져 있었다.
단지 갈망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얼마 전 떠오른 뉴스에서 볼 수 있듯, 뭐든 할 수 있는 기반이 착착 갖춰지고 있었다.
이 외에도 유현이 가진 자산이 많았다.
유현은 여기서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꺼내는 대신, 정다혜에게 지금의 마음을 전했다.
“저도 당연히 야망이 있죠.”
“어떤 야망이요?”
“다혜 씨요.제겐 다혜 씨가 야망이에요.”
유현의 진지한 표정에 정다혜가 쿡쿡 웃었다.
예전 같았으면 장난치지 말라며 툭툭 때렸을 텐데, 그녀의 눈빛이 이내 진지해졌다.
유현의 양손을 잡은 정다혜가 그의 눈을 보며 고백했다.
대관람차는 어느새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렇게 유현 씨가 함께 있어 준 것만으로 제겐 큰 행복이에요.”
쪼옥.
브루클린의 야경을 뒤로한 채, 유현은 정다혜와 진하게 키스했다.
그날 밤, 유현은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유현이 떠날 날이 다가왔다.
예고했던 대로 정다혜와 함께가 아닌 혼자 떠나는 일정이었다.
장소도 한국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유나이트 항공 2374 비행기는…….
뉴욕 공항에서 울려 퍼지는 방송을 흘려들으며, 유현은 정다혜와 작별의 키스를 했다.
잠깐 떨어지는 것뿐인데 무척 아쉬운 마음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남긴 유현이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였다.
지이잉.
휴대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들어왔다.
-다혜 : 유현 씨, 사랑해요.
그 속에 지난 4개월 동안 유현이 한 일에 대한 성적표가 들어 있었다.
유현은 사랑의 마음을 듬뿍 담아 바로 답장을 보냈다.
유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6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유현은 비행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정다혜 앞에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유현도 내심 고민이었다.
가진 게 많아진 만큼, 어떻게 써야 할지 정해 둘 필요가 있었다.
유현은 그 답을 찾고자 샌프란시스코에 들렀다.
D-DAY봇 : 미국 도착일로부터 120일.
메신저 위드의 알림을 확인한 유현이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웅성웅성.
길게 늘어진 사람들 사이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아!”
고개를 돌려 보니 친구 현진건이 서있었다.
피식 웃은 유현이 캐리어를 끌며 다가갔다.
“뭐야, 바쁜 사장이 여기에 왜 와 있어?”
“백수 친구 놈이 온다는데 당연히 와야지.”
환하게 미소 지은 현진건이 유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현진건이 주도한 JK통신의 신규 모뎀 개발은 성공적이었다.
퀄컴 AP와 연동한 호환성 검증을 끝냈고, 한성의 신규 휴대폰 회로에도 장착하여 1차 테스트를 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와는 별개로, 중간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현진건은 JK통신 사무실 야외 테라스에서, 마주앉은 유현에게 이 부분을 언급했다.
“너네 회사 휴대폰에 칩 하나 넣는데 왜 이렇게 태클이 많냐?”
“이제 우리 회사 아냐.”
“어쨌든.일성에서 우리 칩을 사겠다며 계약하겠다고 하질 않나, 일본 업체들이 한성보다 단가를 배로 쳐주겠다고 하질 않나.심지어 퀄컴에서도 압박을 주더라.”
최재기가 물러난 뒤에도 신경수의 수작질은 멈추지 않았다.
차기 한성 스마트폰의 성공이 곧 신경욱 부사장의 성공을 의미하는 만큼, 그는 어떻게든 막아 내려 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게 될까?
유현은 지금쯤 꽤나 애가 타 있을 신경수의 모습을 떠올리며 되물었다.
“퀄컴은 뭐래?”
“우리 쪽 기술을 팔라고 하더라고.거절하니까 자기네들 AP를 한성에 안 주겠다나?”
“뭐? 걔네들이 JK통신에 왜 그 얘길 해?”
“한성이 자기네 최신 AP를 못 쓰게 되면, 우리 모뎀도 안 쓸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뭐.”
“재밌네.”
유현이 피식 웃고 말자, 현진건이 의외인 듯 물었다.
“넌 신경 안 쓰여? 우리보단 한성이 더 문젠데?”
“어련히 알아서 잘 대처했겠지.”
“하여간, 정을 떼긴 했구나.”
정을 뗀 게 아니라, 한 발 떨어져 보고 있을 뿐이다.
물론 장준식 대리의 보고를 통해 이미 내부 사정을 알고 있기도 했다.
-퀄컴 AP 계약 문제로 구매팀과 재협의를 했습니다.퀄컴 측에선 단가를 올리겠다고 했지만, 과장님이 제안하셨던 대로 사전 계약을 끝내서 문제가 없는 걸로 결론 났습니다.
그보다 신경이 별로 안 쓰이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신경수가 날고 기어 봤자, JK통신의 대주주는 유현이었다.
상대가 어떤 방법을 써도 막을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진 않았다.
“정을 뗀 게 아니라,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 거지.”
“그래.안 그래도 한성에서 사전 계약에 위약금을 잔뜩 걸어 놨나 봐.덕분에 퀄컴이 결국 꼬리를 내렸다더라.”
“잘했네.”
유현이 모른 척 답하자, 현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센스 있게 선 대응을 잘한 거지.근데 다음 버전에는 불이익을 줄 수도 있어.”
“보복 대응 할 거라는 거지?”
“아마도 그렇겠지.아직까진 한성에 힘이 없으니까.”
“잘 팔아서 힘을 키우면 되겠네.설령 안 되더라도 나중엔 너희가 개발한 거 쓰면 되잖아.”
“AP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실제로 스마트폰의 두뇌에 해당하는 AP를 만드는 건 고난이도의 일이다.
AP 설계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손에 꼽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AP를 제대로 만들 수만 있다면?
단숨에 메이저 반도체 설계 업체가 될 수 있다.
특히 모뎀 기술을 보유한 JK통신의 경우, 시너지가 어마어마할 터였다.
현진건은 과거에도 못했던 일을 지금 도전하려 하고 있었다.
“ARM에서 AP 설계 핵심 인력들을 데리고 왔다며?”
유현이 그 부분을 짚자, 현진건이 황당해했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대? 아직 오픈 안 한 이야기인데?”
“누구겠어?”
“폴인가 보네.비밀이라고 했으면서 잘도 말한다니까.”
“힘 좀 쓴 게 먹혀서 기분이 좋았나 보지.”
피식 웃은 현진건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그래서 나한테도 네 얘기 많이 했나 보다.”
“무슨 얘기?”
“네 일 돕는다고 루카스필름에 전화도 해 줬다던데?”
얼마 전, 폴 그레이엄과의 통화를 떠올린 유현이 실소했다.
“뭐? 그건 생색 낼 것도 없대 놓고는, 참.”
“그래도 폴이 너 신경 많이 쓰는 거 같더라.은근 네 얘기 많이 해.원래 남 얘기 별로 안 하는 편이거든.”
“안 그래도 내일 만나기로 했어.나한테 알려 주고 싶은 게 있다나 봐.”
“뭘 알려 주려는 거야?”
현진건이 물을 때였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며 현진건의 동생 현진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현재 JK통신에서 회계와 영업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형, 대화 중에 미안한데, 화웨이 M&A 부서장한테서 또 전화가 왔어.”
“안 그래도 아까 나한테 전화 오더라.왜 또 그런대?”
“지난번에 하던 매각 얘기지, 뭐.우리 회사 20억 달러에 조건 없이 인수하겠다는데, 어떻게 할까?”
화웨이? 20억 달러?
예상치 못한 중국 거대 기업의 등장과 큰 액수에 유현이 귀를 쫑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