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819
상남자 819화
정다혜는 지점장실 안에서도 무척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다.
유현을 소개한 그녀는 마주 앉은 지점장에게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했다.
“전 이케아의 오프라인 쇼룸과 리비버의 온라인 집 리뷰 방식을 결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예를 들어…….”
보고서 한 장 없이 뱉는 말이 귀에 쏙쏙 박혔다.
“그렇죠.그렇고말고요.”
짧은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중년의 지점장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정다혜가 온라인에 취약한 이케아에 매력적인 제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리비버는 이케아의 오프라인 쇼룸과 유사한 형태의 리뷰 시스템을 웹과 앱을 통해 구축한 데다, 시장에서 이미 검증까지 마쳤다.
이케아 입장에선 그들의 신규 온라인 쇼핑몰을 리비버와 연동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후릅.
가만히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듣던 유현은 내심 감탄했다.
‘진행이 무척 빠르다 했더니.’
이케아의 러브콜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정다혜의 노력 덕분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실무자를 사전에 투입시켜 가능성을 미리 증명해 놓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척.
유현이 테이블 아래로 엄지를 들자, 힐끔 눈을 마주친 정다혜가 윙크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았다.
회의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유현은 목도리를 여미어 주는 정다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다혜, 참 능력도 좋아.”
“무슨 능력이요?”
“세계적인 기업을 파트너로 만들었잖아.정말 대단한 일이지.”
“제가 한 게 뭐가 있어요.다 주연 씨 공이죠.”
그러고 보니 집 리뷰는 장만복의 아내 홍주연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녀가 기타 리뷰란에 올린 글이 대박이 터지면서 예상치 못한 집 리뷰가 자리 잡게 됐고, 때마침 이케아의 한국 진출과 맞물렸다.
일련의 과정을 복기한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명예 직원이라도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안 그래도 돌아갈 때 선물 사 가려고요.”
“그게 좋겠네.”
꽤 오랜 기간 떨어져 있다 보니 챙겨야 할 사람이 많았다.
뭘 사야 하나.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앞서간 정다혜가 도로에서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정다혜가 남자로부터 뭔가를 받아 엄지로 꾹 눌렀다.
삑.
부저 소리와 함께 옆에 정차되어 있던 고급 SUV의 헤드라이트가 반짝였다.
“어?”
놀란 유현에게 조수석 문을 연 그녀가 손짓했다.
“뭐 해요? 타지 않고.”
“이게…….”
정다혜는 얼떨떨해하는 유현을 차에 태운 후,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철컥.
벨트를 맨 유현이 넓은 차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웬 거야?”
“유현 씨랑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죠.”
“그럼 내가 운전할게.”
“유럽은 제가 더 익숙하잖아요.오늘은 제가 모실게요.”
“이거 참…….”
유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가 출발했다
부르릉.
부드럽게 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 유현은 지도를 살폈다.
주요 지역마다 메모와 예약 번호가 가득 적혀 있었다.
코스까지 일일이 다 짜 놓은 모양이었다.
정다혜가 자신 있게 말했다.
“오늘 일정 기대해도 좋아요.”
“난 너만 있으면 어디든 좋아.”
“그보다 더 좋을 거예요.”
싱긋한 그녀의 미소에 유현은 가슴이 설레어 왔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 위를 한참 달려 도착한 곳은 스톡홀름에 위치한 바사박물관이었다.
거대한 목조 배가 전시된 그곳을 시작으로 스웨덴의 명소를 돌아다녔다.
정다혜가 트레이닝복과 따뜻한 어그부츠, 두툼한 파카를 준비해 준 덕분에 유현은 편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스웨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영어를 다 잘하다 보니 소통은 원활했다.
두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해했고, 유람선 위에서 아름다운 스웨덴 경치를 보며 함께 감탄했다.
들르는 곳, 스치는 곳마다 정다혜는 쫑알쫑알 설명하기 바빴다.
“스웨덴은 제조업이 무척 발달되어 있는 나라예요.복지 국가로도 유명하지만, 빈부 격차는 대한민국보다 심하죠.재벌 세습 문화와 사회민주주의가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로…….”
피식.
웃는 유현의 어깨를 정다혜가 툭툭 때렸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그녀가 툴툴댔다.
“자꾸 웃을래요? 저 나름 공부 열심히 한 거란 말이에요.”
“알아, 알아.귀여워서 그랬어.”
“자꾸 그러면…….”
쪽.
유현이 입을 맞추자 오랜만에 그녀의 턱에 호두 주름이 잡혔다.
“한 번만 더…….”
쪽.
이어진 유현의 입맞춤에 그녀도 떨리는 입술을 닿으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파랗던 하늘에 정다혜의 볼처럼 붉은 노을이 졌다.
근사한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한 후, 해안 절벽으로 이동했다.
밤중에 절벽엔 무슨 일인가 했더니, 절벽 가장자리에 위치한 등대가 바로 오늘 묵을 호텔이었다.
필로티 구조로 된 등대 안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노란 등대 조명을 따라 절벽 아래 바다가 보였다.
철썩.철썩.
절벽에 부딪힌 파도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조금 더 밤이 깊어지자 돔 형태로 된 유리 천장 위로 은하수가 펼쳐졌다.
침대에 누운 유현이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이애미 해변이 생각나네.”
“그때도 참 하늘이 예뻤죠.”
“그랬지.정말 분위기 딱 좋았었는데…….아, 잠깐만.”
몸을 돌린 유현이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바꾼 후 뒤집어 놓았다.
정다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요?”
“이번엔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미국에서 캠핑카로 여행을 다녔던 그때.
너무나 달콤했던 분위기가 체육관 관장의 전화로 급반전되었다.
사랑을 나누는 대신, 이장우를 돕기 위해 밤새 차를 몰고 뉴욕으로 갔었다.
돌이켜 보면 재미있는 기억이지만, 무척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었다.
정다혜가 살짝 걱정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중요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려구요.”
“이젠 그때처럼 달려갈 곳도 없는데, 뭐.방법도 없고.”
빙긋 웃으며 답한 유현이 한쪽 팔을 뻗었다.
팔베개를 한 정다혜가 몸을 돌려 유현을 꼬옥 안았다.
콩닥콩닥.
맞닿은 가슴 위로 그녀의 두근거림이 전해졌다.
오늘의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해 준 그녀가 애틋한 시선으로 유현을 바라봤다.
“유현 씨와 이곳에 꼭 같이 와 보고 싶었어요.”
“내가 한국으로 바로 갔으면 어쩔 뻔했어.”
“그럼 다음으로 미루면 되죠.유현 씨와 하고 싶은 걸 하나씩 쌓아 두는 것도 제겐 행복이니까요.”
애정이 듬뿍 담긴 그녀의 한마디가 저릿하게 다가왔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그 모습에 유현의 가슴이 쉴 새 없이 뛰어 댔다.
행복하다.
과거 결혼 생활에서는 왜 이런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걸까?
스윽.
정다혜의 긴 머리칼을 넘겨준 유현이 감탄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예쁘네.”
“은하수가요?”
“아니.그 어떤 것보다 네가.예뻐.진심으로.”
유현이 미소 지은 정다혜와 눈을 마주쳤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사랑이 전해졌다.
고맙고,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함께하고픈.
이런 마음을 이번엔 꼭 놓치지 않을 테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위한 삶을 살겠다고 다시금 마음에 새겼다.
그런 유현을 정다혜가 빤히 바라봤다.
“유현 씨, 제가 말했나요?”
“뭘?”
“사랑한다고.”
“나도.사랑해.”
그렇게 두 사람은 잊지 못할 밤을 보냈다.
다음 날도 유현은 정다혜와 스웨덴에 머물렀다.
햇볕이 쨍한 날이라 그런지 산책하는 커플들이 제법 많았다.
번화한 길거리뿐만 아니라 공원 곳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닐고 있었다.
왈왈!
함께 나온 강아지도 많이 보였다.
공원을 걷던 정다혜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설명해 줬다.
“스웨덴에서는 인권만큼 동물 권리도 중요해요.실제로 재산을 동물에게 상속하는 사례도 많죠.”
“그래도 입마개는 해야 하는 거 아냐? 큰 개들도 많은 거 같은데.”
“목줄을 꼭 하기도 하고, 교육도 워낙 철저하게 한대요.사고를 낸 반려견들은 주의 대상으로 등록되어 집중 관리를 받고요.그리고…….”
사고가 몇 차례 반복되면 안락사를 시키기도 한다고 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공부했는지 궁금했지만 유현은 묻지 않았다.
꼬옥.
사랑스러운 그녀의 손을 잡고 걷는 이 순간이 그저 좋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넓은 잔디밭이 보였다.
그 위에서 한 아이가 바람개비를 양손에 든 채 웃으며 달려갔다.
“까르르르!”
앞에 서 있던 엄마가 두 팔을 벌리자 아이가 퐁당 안겼다.
캠코더를 들고 쫓던 아빠가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찍으며 아내와 아이에게 얼굴을 비볐다.
너무 화목한 가족을 보며 유현이 중얼거렸다.
“다혜 너 닮은 딸 하나 낳으면 좋겠다.”
“딸, 1명만요?
“응? 부끄럽다고 뭐라고 할 줄 알았더니.”
“유현 씨와 함께한 시간이 벌써 얼마인데요.전 혼자 자라서 그런지 적어도 둘은 낳았으면 좋겠어요.유현 씨와 재희나 원석 씨와 원영 씨를 보면 남매가 딱 좋을 거 같고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정다혜가 답을 내놓자, 유현이 피식 웃었다.
“다혜 넌 이미 계획이 다 있었구나.”
“유현 씨와의 미래를 꿈꾸면서 생각해 본 거죠.”
“그래.그 미래는 여기 앉아서 같이 얘기하자.커피 마시면서.”
유현은 햇볕이 잘 드는 벤치 위에 담요를 깔고 정다혜를 앉혔다.
그러곤 길거리에 있는 커피 트럭으로 다가갔다.
1인당 커피 소비량이 가장 많은 스웨덴답게 트럭 안엔 꽤나 고급의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었다.
원두도 무척 좋은 걸 사용하는지 커피를 내리는 내내 진한 커피향이 퍼져 나왔다.
치이이잉.
기다리는 동안 유현은 마카롱과 바나나치즈케이크를 골랐다.
진열대엔 정다혜 취향의 디저트들이 가득했다.
무척 좋아하겠지?
기대에 찬 유현이 디저트 박스와 커피 컵 2개가 꼽힌 캐리어를 받아 든 순간이었다.
“꺄악!”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정다혜에게 목줄 풀린 검은 대형견이 달려들고 있었다.
파파파파팍!
커피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뛰쳐나간 유현이 정다혜의 팔 쪽을 물고 늘어진 검은 개의 목덜미를 손날로 쳤다.
깨개개갱!
개를 떼어 낸 유현이 당황한 정다혜를 살폈다.
유현에게 쓰러지듯 기대어 안긴 그녀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괘, 괜찮아요.옷만 조금 찢어진 거 같아요.”
조금이 아니었다.
들고 있던 목도리는 물론 두툼한 점퍼가 다 찢겼다.
자칫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점퍼를 찢어 놓은 날카로운 송곳니에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토닥토닥.
“걱정 마.내가 있잖아.”
정다혜를 안아 준 유현이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안심시켰다.
쿵쿵대는 그녀의 심장이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그때였다.
“알렉스! 알렉스!”
하얀 피부에 밝은 금발 머리, 큰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뛰어와 고통스러워하는 개를 꼭 끌어안았다.
키이잉.키이잉.
“알렉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사람이 다칠 뻔했으면 사과를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목줄만 제대로 해 놓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였다.
그런데도 자신의 개만 챙기는 주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