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9
상남자 9화
이제 다른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런 자신의 선택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했을 때 끝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는지 보고 싶었다.
적어도 혼자 정상에 섰을 때처럼 허무한 풍경은 아니니라.
생각을 정리한 유현이 입을 떼려 할 때였다.
“에이, 근데 유현이 저 녀석은 너무 숙맥이라 안 돼.사회생활이 결코 쉬운 게 아니거든.”
“하하하.”
반대편에 앉아 있는 하준석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자 다른 녀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현은 그저 웃었다.
한성전자 사장까지 한 사람 앞에서 사회생활 논하는 게 참 우습다.
그리고 하준석은 취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홧김에 회사를 때려치웠다.
식당 차린다고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때도 못 갔다.
유현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볍게 웃는 걸로 넘겼다.
아, 그러고 보니!
유현이 김현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현수야, 어머니 건강은 괜찮아?”
“응? 괜찮지.왜?”
“그냥.혹시나 해서.”
“자식.싱겁긴.”
“그래도 혹시 모르니 건강검진 받게 해 드려.”
“알았어, 인마.”
그냥 뱉은 말은 아니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김현수의 어머니는 지병으로 돌아갔다.
유현의 가슴속엔 바쁘단 핑계로 장례식장에조차 못 갔던 미안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김현수는 나중에 유현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내 옆에서 위로해 주고 마지막 운구까지 도와줬다.
고마운 녀석.
김현수에겐 뭐라도 꼭 도움이 되고 싶다.
유현이 김현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강준기가 뭔가 생각난 듯 박수를 쳤다.
“맞다.현수 네가 현이 어머니 쓰러졌을 때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냐?”
“준기야!”
“아…….”
김현수가 검지를 입에 대자 강준기가 실수한 듯 입을 얼버무렸다.
누가 봐도 뭔가 감추는 듯한 표정이다.
“그게 무슨 말인데?”
“아, 그냥.작년 초에 우연히 도와드린 거야.그냥 큰 병은 아니고 빈혈이셨어.준기 저 녀석이 진짜.”
유현의 물음에 답하던 김현수는 강준기를 다시 한번 째려본 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현이 너 걱정한다고 말하지 말랬는데.”
“…….”
그랬구나.
김현수에겐 여러모로 참 많이 신세를 졌다.
유현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고맙다, 현수야.정말로.”
“무슨.네 어머니면 우리 어머니도 되는데.”
“……고마워.”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너무 바보같이 살았구나.
주변에 돌아가는 것도 몰랐다.
앞만 보고 살았던 결과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진 탓일까.
김현수가 유현의 여동생 얘기를 꺼내며 화제를 돌렸다.
“재희한테 한번 전화해 봐라.너 단단히 벼르고 있을 테니까.”
“어쩐지 전화하니까 살갑진 않더라고.”
“원래 그렇잖아.자, 분위기가 갑자기 또 무거워졌네.한잔하자.”
“그래.자, 원샷.원샷.”
벌컥벌컥.
얼큰하게 술이 취하니 기분이 좋았다.
이 녀석들과 함께라서 더 좋았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취기가 올라서일까?
유현이 어울리지 않게 간지러운 말을 뱉어 내자 친구 녀석들이 질색했다.
“딸꾹.있잖아.난 니들이 너무 좋다.”
“이 자식 미쳤네.완전 술 취했네, 술 취했어.”
“아냐.진짜 좋다고.돈, 성공 다 필요 없어.진짜라니까.”
“크크크, 유현이 이렇게 풀어진 모습 처음 보네.이 자식 오늘 사고치는 거 아냐?”
“이럴 땐 술 깨러 가야지.고고씽?”
하준석의 제안이었다.
“오.한번 휘둘러?”
“좋지.”
강준기와 김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뭘 말하는 걸까.
유현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친구들을 따라 간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바로 옆 블록에 있는 배팅 머신 숍이었다.
날아오는 공을 치면 점수가 표시되는 곳으로, 점수에 따라 인형도 줬다.
“아…….”
문득 옛 추억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이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내기를 했었다.
추억이 새록새록 돋을 때, 김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꼴찌가 2차? 오케이?”
“좋지.좋지.좋지.”
“크크크, 유현이 맛 갔네, 진짜.넌 좀 쉬고 있어.엉아들 먼저 할 테니까.”
유현이 벤치에 앉자 강준기가 힘찬 모습으로 먼저 나섰다.
깡.깡.
상당히 빠르게 날아오는 공 앞에서 녀석은 야구배트를 휘둘러 댔다.
꽤나 맞히는 걸 보니 연습 좀 했나 보다.
김현수와 하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가 질세라 열심히도 휘둘렀다.
어느새 유현은 자세를 고쳐 잡고 날아오는 공을 봤다.
어질어질 일렁거리던 눈앞의 풍경이 점차 선명해졌다.
잠재되어 있던 승부욕이 취기를 누르며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한성전자의 사장에 오르는 건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늘 승부의 세계에 있었던 유현에게 이런 내기는 간만에 피를 끓게 했다.
툭툭.
3번째로 친 강준기가 내려오면서 유현의 등을 두드렸다.
“유현아, 부담 갖지 말고.”
그의 얼굴엔 이미 승리의 확신이 어려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주어진 10개의 공을 모두 때려 냈다.
땅볼도 있었지만 안타와 홈런도 있어 점수가 꽤나 높았다.
3명 중 기록은 1등.
그리고 이 가게에서 3등이라는 꽤나 높은 기록이었다.
다른 친구도 점수가 높은 편이라 그런지 모두 유현을 위로했다.
“괜찮아, 인마.울지 말고.크크.”
특히 하준석 저놈.
사람을 약 올리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유현은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후.”
타석에 선 유현은 짧게 숨을 골랐다.
배트의 차가운 감촉이 손에 느껴졌다.
이렇게 배트를 휘두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회사 들어가선 특히나 야구 배트를 휘두를 일이 없었다.
‘골프와 크게 다르지 않아.’
유현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체를 고정시킨 유현은 배트의 끝을 잡고 크게 돌렸다.
부우웅.
허리까지 제대로 쓰니 배트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렸다.
“오오오.네가 무슨 베리본즈냐? 그렇게 하면 하나도 못 쳐.”
유현은 뒤에서 들려오는 배경음을 신경 쓰지 않고 몇 차례 더 휘둘렀다.
눈앞에 공이 있다고 생각하고 정확히 같은 지점을 향해 배트를 날렸다.
친구들의 눈엔 보이지 않겠지만 세 차례 휘두른 배트의 궤적은 자로 잰 듯 같았다.
딸캉.
돈을 넣자 머신이 웅웅 소리를 내며 공을 뱉을 준비를 했다.
두근두근.
취기 때문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꼭 중요 발표장에 선 느낌이다.
눈앞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고, 수십 대의 카메라와 기자들이 있었다.
모두 유현에게 집중한 사람들.
서서히 고개를 돌리며 가득한 인파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의 숨소리, 표정, 손의 움직임까지 하나씩 느껴졌다.
그 정도로 예민하게 주위의 변화하는 공기의 흐름까지 잡아낼 수 있었다.
팍!
공이 하나 튀어나왔다.
코스는 예상대로 중간 코스였다.
지금!
꽉.
배트를 움켜쥔 유현은 앞서 연습한 자세 그대로 허리를 돌렸다.
과할 정도로 큰 폼으로 휘두른 배트는 매섭게 공기를 갈랐다.
정확한 시점, 정확한 위치에 배트가 날아갔다.
깡!
다만 유현의 배트가 조금 더 높아서인지 공이 땅 쪽으로 갔다.
워낙 세게 맞은 탓일까, 공은 강한 파열음을 내며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오, 땅볼로 홈런 때릴 기센데?”
뒤에서 들려오는 친구들은 장난스런 반응을 보였지만 유현은 달랐다.
됐다.
정말 골프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위에서 찍어 치듯 내리치는 걸 옆으로 돌려 친다고 생각하면 된다.
공이 날아오는 게 다른 점이지만 정확히 도달할 위치와 도착할 시점만 알면 정지되어 있는 공과 다를 바 없었다.
첫 번째는 한번 시험해 본 터였다.
‘5센티미터 정도 아래로.’
직선으로 궤적을 그었을 때보다 공이 그 정도 떨어졌다.
확실히 멀리서 봤을 때와 가까이 봤을 때는 다르다.
부우웅.
유현은 배트를 한번 휘두르며 집중력을 올렸다.
술기운은 이미 가신 지 오래였다.
주위가 고요했고, 마치 무대 위에 혼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날아오는 공이 보였다.
깡!
유현이 휘두르자 이번엔 정말 제대로 맞았다.
촤악.
높이 날아간 공은 상단에 부착된 초록색 그물망을 흔들었다.
-홈런
라는 표시가 LED 전광판에 뜨면서 점수가 대번에 확 올라갔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위치로 정직하게 날아오는 공은 마치 정지되어 있는 골프공같이 느껴졌다.
대회에 나간 건 아니지만 프로 수준으로 골프를 잘 쳤던 유현의 실력이었다.
하물며 커다란 공을 치는 건 유현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깡! 깡! 깡!
촤악.촤악.촤라락.
유현이 마지막 공까지 치고 내려왔을 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반쯤 얼이 나간 친구 녀석들의 표정이 보였다.
특히 하준석의 표정이 볼만했다.
“2차는 준석이가 쏘는 거지?”
“어? 어…….”
가게 1등 위치에 유현의 점수가 올라가 있었다.
어느새 커다란 하얀 곰 인형이 유현의 품에 들렸다.
“뭐 해.가지 않고.”
“…….”
유현이 먼저 나서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현수가 말했다.
“저놈 저거 진짜 공부하는 놈 맞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에 한 말이었다.
2차, 3차 노래방에 이어진 4차까지.
유현은 친구들과 함께 고삐를 완전히 풀고 놀았다.
지금껏 유현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탈을 제대로 했다.
“아흑.”
유현이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며 탄식을 뱉었다.
눈을 뜨자 환한 조명이 드는 낯선 실내가 보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의자에 널브러져 있는 친구 녀석들이 보였다.
“…….”
이상한 느낌에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니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뭔가 확실히 잘못됐다.
“야, 야, 일어나.”
“흐으음, 왜.좀 더 자자.”
유현이 친구들을 깨울 때 뒤에서 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우리 취객님들 일어나셨어?”
“…….”
상황 파악은 확실했다.
기억의 퍼즐을 맞춰 가니, 술 먹고 길거리에서 누웠던 게 생각났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답지도 않은 말을 저놈들과 같이 지껄였던 게 떠오른다.
길거리에서 뻗은 네 놈을 누군가 신고했고, 그다음은 뻔했다.
상황 파악이 끝난 유현이 짐짓 넉살을 부렸다.
“하하, 죄송합니다.너무 오랜만에 본 친구들이라 과음했네요.”
“아이고, 술 냄새.아휴.”
경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도 자고 있는 친구 놈들의 머리를 강하게 쥐어박고 싶단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딸랑.
경찰서에서 나온 유현은 친구들과 함께 다시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엔 피로회복제 한 통이 들려 있었다.
“어이구, 왜 또 왔어?”
“이거 받으세요.너무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한참 혼났으면서 뭘 또 이런 걸 다.”
“생명의 은인이신데 이걸로 부족하죠.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유현이 친구들과 함께 깍듯하게 인사하자, 경찰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허허,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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