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0
10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어김없이 미사 주보의 마지막 장엔 석우의 이름으로 된 적잖은 액수의 헌금을 볼 수 있었다. 천 단위는 예사요, 억 단위도 종종 등장했다. 총액이 눈에 띄게 불어나는 동안 석우는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 세례를 받았다. 구역 남성 모임에 참가 한 어느 날, 한 남자가 석우에게 접근해 왔다.
“강석우 씨 맞으시죠?”
“네, 절 아십니까?”
“강석우 씨야 유명하죠.”
석우의 이름에 빨갛게 동그라미를 친 주보 뒷면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인 남자가 씨익 웃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무슨 일을 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석우가 대답하지 않자, 머쓱한지 헌금으로 이렇게 많이 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요즘 얘기가 많이 나오고 있던 차에 오늘 만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염치 불구하고 말을 걸었다며 묻지도 않은 얘길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석우가 아무 말 않고 있던 건 어색하거나 갑작스러워서가 아니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걸 미리 내다보기라도 했는지 얼마 전 정후가 석우에게 몇 가지 지시했던 걸 떠올리고 속으로 감탄하는 중이었다. 남자의 중언부언이 끝나자마자 정후가 시켰던 그대로 대꾸했다.
“그냥 사업 하나 작게 하고 있습니다. 능력 이상으로 버는 건 은총이라 생각해 후원도 하고요.”
“후원이요?”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뒤론 성경 공부 모임이 있을 때 마다 바짝 붙어선 친근하게 굴었다. 석우는 그저 정후가 시키는 대로 여지를 줄 듯 말 듯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애가 탄 남자는 더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술이나 한잔 하자며 석우를 졸랐다.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 술집에서 재미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웃긴 일도 다 있다.’
알고 보니 이 남자는 BD캐피탈의 직원이었다. 이 또한 이정후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캐피탈 소유의 부동산을 상당수 담보로 잡는 조건으로 석우에게 돈을 빌려 갔다. 대부업체가 대부업을 하기 위해 또 다른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다니. 물론 상대방은 석우를 그저 재야에 묻혀 조용히 지내는 자산가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나저나 기막힌 우연이 다 있다.’
용케 적의 뒤통수를 칠 기회를 잡다니 하늘도 우리 편인가 보다. 이래서야 상대방이 마치 이쪽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것 같지 않은가. 역시 이정후의 말대로 종교를 가지길 잘했나 흐뭇해하다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성당에 석우를 데려온 사람이 누군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석우는 종교가 뭐지?’
꾸준한 교리 공부, 세례, 거액의 헌금. 몇 개월에 걸쳐 석우를 신실한 신자처럼 보이게 만든 남자가.똑똑.
“접니다.”
“……잠시만.”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여자가 문을 나서다가 석우를 보고 볼이 붉어져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운만 걸친 채 비스듬히 앉아있는 정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잔뜩 달아올랐던 여자와는 달리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표정에 이질감을 느꼈다.
“제가 방해를 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따분해지려던 참이었어.”
그러고 보니 벌써 여자가 몇 번째 바뀐 건지. 오야가 여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흥미가 돋아 숫자를 세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만큼 무의미해 보였다.
“윤희는?”
이정후가 무심한 눈초리로 석우가 넘긴 계약서를 대강 훑으며 물었다. 시계를 보자 막 수업이 끝났을 시간이었다.
“곧 있으면 오겠네요.”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는 하교는 다시 승수가 맡았다. 그나저나 여자가 샤워를 천천히 마친다면 강윤희랑 마주칠 수도 있겠는데. 석우야 워낙 하는 일이 그렇다 보니 헐벗은 여자를 봐도 아무 감흥이 없지만 윤희는 놀리고 싶을 정도로 심하게 당황하곤 했다.
‘그래서 그러나.’
여자들을 부르는 시간과 윤희의 하교 시간이 교묘하게 겹치는 건. 악취미야,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이유가 없잖은가. 악취미를 가진 건 자신인지도 모른다. 잠시 딴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어느새 계약서의 마지막 장까지 모두 살핀 이정후가 다시 서류를 건넸다.
“……권승수는 숨기는 게 많던데.”
사실이었다. 윤희에 관해 시시콜콜하게 다 이야기하곤 하지만, 듣다 보면 의도적이라고 생각 될만큼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거나 축소되어 있었다. 윤희가 종알거리는 말들 속엔 항상 들어있지만, 승수의 입에선 좀처럼 나오지 않는 그 인물. 최환.
“다그쳐 볼까요?”
“아니. 그냥 잘 대해줘.”
“네.”
순순히 대꾸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허튼짓 못하도록 단속해도 모자랄 마당에 잘 대해주라니 거꾸로 된 것 아닌가. 이해하지 못하는 석우를 보며 짧게 덧붙였다.
“믿고 따를 때까지.”
지시하는 내용과는 딴판으로 서늘한 눈빛에 어쩐지 소름이 쭉 끼쳤다.* * *한동안 멍하니 빌딩 숲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들을 온몸으로 맞다가,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은 강윤희는 한참을 일어나지 않았다. 들썩이는 어깨 사이로 끅끅, 흐느낌이 새 나왔다. 간신히 진정하고 나서 승수에게 이리저리 말해준 기억의 파편들은 실로 비참했다.
“그러던 차에 그 사람이 나타난 거야. 최고로 키워주겠다고.”
종합해 보면 강윤희 입장에서는 이정후가 구세주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왜 아무 연고도 없는 강윤희를 데려다 그렇게 애지중지 뒤를 봐준 걸까.’
강윤희는 별달리 수업에 집중하는 것도 아닌데 성적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배운 무용은 수준급이었고, 다른 과목도 상위권이지만 역사나 사회 문제는 막힘없이 토론해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이 해박하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차림새도 어딘지 모르게 누군가 엄청나게 공들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승수가 알아낼 수 있는 건. 거대한 벽 앞에 가로막힌 듯, 그 이상은 아무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강윤희는 이정후가 공들여 기른 고아다. 여기까지만 보면 선의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강윤희의 곁에 접근했던 아이들은 모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강윤희에게서 멀어졌다. 자신과 최환, 단둘만을 제외하고.
‘그렇다면 남은 건 최환 밖에 없는데.’
자신이 아는 최환은 그저 무용에 푹 빠진 평범한 고등학생일 뿐이다. 지금도 여기저기 테이핑을 하며 불만을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어제 너무 다리를 무리해서 찢었더니 지금 걸을 때마다 안쪽이 너무 아파.”
하긴, 최환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석우에게 축소해서 말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은 적도 많으니까. 나름의 이유를 들어 납득을 하곤, 그런 이유로 더더욱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키고 싶다.’
해맑게 웃는 최환과 그런 최환을 보면 시무룩해져 있다가도 어느새 같이 따라 웃는 강윤희를 지켜주고 싶다고.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보내면서 어느덧 정이 많이 들어 버린 모양이라고.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이거 봐. 구도 죽이지.”
다른 사람이 심각해져 있는 꼴을 도통 눈 뜨고 못 봐주는 최환이 잡지를 펼쳐 코앞이 들이밀었다. 옆에 앉은 강윤희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어깨를 기울여 보더니 갑자기 당황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페이지에 실린 사진은 요즘 한참 뜨고 있는 신인 연기자였다. 글래머러스한 몸매와는 상반되는 소녀같이 앳된 얼굴로 인지도를 쌓고 있다. 교묘하게 가슴과 다리 사이를 가리고 선 여체와, 그런 자신의 목을 잘라서 들고 있는 기이한 자세가 시선을 끌었다.
이런 사진을 보고도 윤희는 말이 없다. 평소라면 신기해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을 텐데. 환은 혹시 제가 무얼 잘못한 것일까 싶어 불안해졌다. 윤희가 웃으면 제게도 기쁜 일이 생긴 양 호흡이 가빠지고, 윤희가 우울해하면 물속에 잠긴 양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금처럼 굳어진 얼굴로 앉아있을 때면, 제 심장도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 같다. 견딜 수 없어진 환이 조심스레 윤희의 안색을 살폈다.
“어디 불편해?”
“아니, 괜찮아.”
늘 제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최환을 잘 알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답했지만 윤희는 속이 몹시도 쓰렸다. 사진 속의 여자와는 오늘 아침에도 마주쳤었다.
– 고등학생이야?
– 네.
– 나도 한 잔 줄래?
물을 따라 내밀다 발견했다. 대강 여민 가운 사이로 보이는 가슴 위의 붉은 자국들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여자는 가릴 생각도 없이 앉아있는데 외려 제가 부끄러워 먼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전날 밤 이정후가 제 옆자리에 들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내면서.
– 부끄럽니?
황급히 고개 돌리는 윤희가 우습다는 듯 일부러 상체를 앞으로 숙여 노골적으로 자국을 드러내던 여자는 몹시도 뻔뻔스러웠다.
– 남자친구 있어?
– 아니요.
– 정후 씨랑은 무슨 관계야?
그러게. 저와 그는 무슨 관계일까. 자신은 차마 그 이름을 입에도 담지 못하고 별명을 지어 속으로만 부르는데 저 여자는 그의 흔적을 몸에 남긴 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정후 씨라고 부른다. 그 차이가 윤희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랬던 여자가 잡지에서조차 잔뜩 입술을 꼬아 올려 자신을 비웃고 있다.
– 넌 아무것도 아니구나.
슬픈 건 아무 반박도 할 수 없는 제 처지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 지금이라도 그녀를 거두었던 이정후가 마음을 바꿔 자신을 내치기라도 한다면? 이제 세상에 과거의 윤희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무연고. 천애 고아. 제 어미를 잡아먹고 나온 독한 년. 쓸모없는 년. 죽어 마땅한 계집. 음습한 단어들이 스멀스멀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동안 익숙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두렵게 다가왔다.
“윤희야? 왜 그래 갑자기?”
날이 춥지도 않은데 입술이 파랗게 질려선 잔뜩 웅크려 가늘게 떠는 어깨를, 환이 흔들었다. 불안하다고 중얼거리는 눈동자는 어느새 초점을 잃었다.
“윤희, 윤희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환이 얼른 팔을 뻗어 윤희를 품에 안아, 멈출 것 같지 않은 떨림을 온전히 제 몸으로 받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