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2
12
정적. 평소 때도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마치 사람 하나 살지 않는 것 같은 이 서늘함은 뭐란 말인가.
‘어째서.’
달라진 거라곤 윤희가 어제 수학여행을 간 것뿐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까. 피곤한 탓이라고 원인을 돌려보아도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만은 사실이다.
“오야는?”
“네?”
새로 들어와 일한 지 얼마 안 된 듯, 낯선 헬퍼가 못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오너는?”
나림동에선 당연히 통용되던 단어들이 하나씩 바뀌어 갔다. 오야는 오너로. 주먹, 어깨는 수행원으로, 따까리는 직원, 혹은 사원으로. 신참이 오야라는 단어를 생소하게 느끼는 건 당연하다. 석우만 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습관처럼 내뱉고 마는 것이다.
‘하긴, 창녀가 천사라고 불리는 마당에.’
언제부턴가 Ange noir의 손님들이 그곳의 여자들을 천사라고 부르고 있다. 석우로서는 그저 어안이 벙벙할 뿐이지만, 나름의 영업 전략인가 싶어 그냥 지켜보고만 있다. 속으론 웃기는 일이라고 가끔 실소를 터트리면서.
처음엔 윤락업소가 들어온다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지금은 몇 달치 예약이 밀려있는지 모른다고, 매니저가 호들갑 떠는 걸 관리 차 들를 때마다 듣고 있다. 그럴 때 오야, 아니, 오너의 표정을 살피는 석우지만, 이정후 속을 읽어내는 건 번번이 실패다. 기쁜 듯, 무심한 듯, 슬픈 듯. 어떤 때는 신경질 적으로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가 금세 풀어지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짜증스러워 했다가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팁을 주기도 했다.
‘언제는 내가 그 속을 알았으랴마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자가 있는 지하의 바를 찾아 똑똑 두들기자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
음, 석우의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술 냄새 때문이었다.
“석우 왔네.”
빙글빙글 웃는 얼굴, 갈라진 음성에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눈이 따끔거렸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독한 술을 마신 저 속은 어떨까. 분명 말이 아닐 텐데, 우직한 석우가 살짝 눈물을 닦아내는 것이 웃겼는지 이정후가 배를 잡고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니다.’
저건 웃음이라기 보단 신음에 가깝다. 주제 넘는 생각이긴 하지만, 발작적으로 웃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럽다.
“석우. 설마 내가 불쌍해? 응? 말해봐. 왜 우는 거야.”
어쩌면 이게 본 모습이 아닐까. 한없이 치밀하고, 한없이 차갑지만, 결국 혈기 왕성한 이십대의 청년일 뿐. 억지로 눌러왔을 것이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피살 소식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건만, 참혹하게 도륙된 시신마저 남김없이 보고 말았다. 그것도 어머니가 비구니가 된지 채 얼마 되지 않아서.
혼자 남겨진 십 대의 이정후는, 무슨 생각으로 그 시간들을 버텨왔을까. 온전히 자기만을 추스르기에도 모자랐을 시간이건만, 와해 직전의 조직을 맡아서 과거와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키워 놨다. 아무리 석우나 기존 조직원들의 도움이 있었다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석우 자신이라면 진즉 말아 먹고도 남았다.
‘게다가 웬 계집까지 거둬선.’
생각해보면, 윤희는 묘한 존재였다. 끼고 잔다는 소식에 은근히 사람을 풀어 물어보면, 관계를 가진 흔적 같은 건 없단다. 온갖 투자는 다 해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희를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다.
집에서만 데리고 있을 때는 그만의 방식으로 아끼는 건가 했는데 어느 순간 승수와 같은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시켰으며, 그렇다면 생각만큼 별스러운 건 아닌가 싶어 가볍게 입에 올렸다가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큼 차가운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요컨대, ‘뭔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 증거로 윤희가 이곳에 오고 나서 수학여행을 이유로 처음으로 그의 곁을 비운 지금,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자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평소엔 드시지 않던 거네요.”
웃음소리가 가라앉길 기다려 잔을 들고 와 옆에 앉자 조르륵, 잔을 채워준다. 다시금 퍼지는 독한 향에 벌써부터 취한 것처럼 머리가 빙그르르 돌았다.
“수학여행 가본 적 있어?”
“저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습니다.”
“흐응. 우린 동지네. 수학여행도 못 가보고.”
피식 웃으면서 그 독한 술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털어 넣은 이정후가 중얼거렸다.
“재미있잖아. 사람을 지옥에 몰아넣고 그 녀석은 속 편하게 수학여행이라니. 좋아 죽던데. 좋아 죽겠지. 세상에 이런 꿈같은 일이 있나 했을 거야.”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야건 오너건, 그냥 인간 이정후가 좋았다.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 어릴 때부터 봐오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만이 갖는 아슬아슬한 매력이 좋았다. 마치 날 선 칼날 같다고. 그러나 그 비수는 쇠 아닌 유리다. 산산이 깨어져 그 자신 심장 곳곳에 박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줄지도 모를. 그래도 저만은 끝까지 남아 곁을 지킬 것이다.
“석우는 이상형이 뭐야.”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자는 독입니다.”
“딸 칠 때 상상하는 여자라도 있을 거 아냐.”
확실히 취했다. 저 입에서 그런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슬며시 웃음이 났다. 평소 같음 어림도 없을 일이지만, 오늘의 이정후는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아사쿠라 유우 스타일이 좋습니다.”
“아무튼, 그래, 그 여자가 눈앞에 딱 나타나면 어떨 것 같아?”
“웬 떡이냐 하겠죠.”
“그래. 바로 그거야.”
바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이정후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다 내 뜻대로야.”
고집스럽게 되뇐 이정후가 술병을 다시 기울였다. 붉은 액체는 절반 정도 차다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저 독한 걸 한 병이나 들이붓게 만든 원인은 뭘까.
“다 내 뜻대로 되어 가는데, 그런데 말이야 개운하지가 않아.”
“…….”
“왜. 왜 그런 걸까, 석우.”
마지막은 웅얼거림에 가까웠다. 그대로 바에 엎어져 의식을 잃어버린 정후를 가만히 업었다. 방으로 향하는 복도가 고요했다. 생각해 보니 이 정적에는 윤희뿐 아니라, 요 이틀간 그가 불러들이는 여자들이 없다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 석우 입장에선 또한 영문 모를 일이었다.
툭.
너른 침대에 눕히고 불편하지 않도록 겉옷을 벗기는데 지갑이 떨어져 벌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다. 곧잘 짓곤 하던 장난스런 표정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이정후의 아버지, 전 오야였다. 우직한 석우를 일러 ‘석우 네 이름 한자는 분명 소 우자 일 거다.’ 하고 놀리곤 했던.
그 사진 뒤쪽으로 다른 사진이 보였다. 누구 사진일까. 호기심에 살짝 끄집어내자 예상 밖의 인물이 환하게 웃고 있다. 왠지 눈에 익어 자세히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최환?’* * *처음엔 공항부터 늘어선 야자수가 신기했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신기했으며, 또래들끼리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가 지나자 어느새 적응이 된 건지, 별 감흥이 없어지고 말았다.
식물원이다, 올레길이다, 종일 걸어 다니고 나자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을 정도로 피곤해져선, 첫날 밤은 최환이 부르러 온 것도 모르고 쿨쿨 자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둘째 날은 선택형 체험으로 인원이 나뉘어져 최환하고 간단히 수상 보트를 타는 데 그쳤다.
“조금 이따가 우리 방으로 가자.”
“응. 어젠 못가서 미안. 재미있었어?”
“그냥 그렇지 뭐. 카드 게임하고, 술 마시고. 얼마 먹지도 못했어. 학주 돌아서.”
“우리 방도 다 뺏겼대.”
“여자애들은 베개 싸움하고 놀던데.”
“어, 그런데 난 그것도 모르고 잔 거 있지.”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네.”
“거기다 스트레칭 할 장소도 마땅치 않아서 몸이 좀 찌뿌듯해”
“지금 할까?”
“여기서?”
“좀 그런가. 내가 주물러 줄게 그럼.”
“괜찮아.”
괜찮다는 말을 무시한 환이 어깨를 주물렀다.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목부터 시작한 안마는 척추를 따라 허리로 골반으로 이어졌다.
“으으.”
새된 신음에 주무르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왜?”
“……집합 시간 된 것 같아. 가자.”
“그래.”
요즘의 최환은 가끔 못 보던 표정을 짓곤 한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 그래서 순순히 따라나설 수밖에 없는 표정.
집합은 금세 끝났다. 길지 않은 캠프파이어가 전부였다. 마지막 날이라 선생님들도 봐줄 생각이었는지 온 복도가 시끌벅적 울리는데도 누구 하나 막는 사람이 없다. 곧 입시지옥에 뛰어들게 될 가련한 불나방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인지도 몰랐다. 약속한 대로 남자애들 방을 찾아가는데 중간에 최환에게 손목이 잡혀 복도 끝 비상구로 끌려 나왔다.
“마셔.”
생수병 가득 투명한 물이 찰랑였다. 하지만 물치곤 묘했다. 속에서 들척지근하면서 코를 톡 쏘는 기운이 올라왔다. 물이 아닌 걸 알면서도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양 한 모금, 두 모금. 번갈아 가면서 마시다가 결국 벽에 머리를 기대고 말았다. 벽을 의지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최환이 고개를 당겨 제 어깨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직선이어야 할 계단이 곡선으로 휘어졌다.
“어지러워.”
“너 안 울더라.”
“으응. 흐흐흐.”
괜히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캠프파이어에선 진풍경이 벌어졌었다. 집에 계신 부모님 어쩌고 하는, 상투적인 멘트에 처음엔 에이, 뭐야 하면서 비웃던 치들이 하나 둘씩 숙연해 지더니 결국은 대부분이 눈물을 쏟았다. 윤희로서는 부모가 없으니 울어야 할 이유도, 감동받을 이유도 없었다. 다만 조금 당황했을 뿐.
“강윤희. 윤희야.”
“왜에?”
“…….”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이, 응?”
길게 늘어진 말끝을 붙잡고 최환이 다가왔다.
“넌 나 어떻게 생각해?”
“뭐가아? 뭐가 어떻게야아.”
“난 너 좋아해.”
“으응?”
“너 좋아한다고.”
“…….”
“너는?”
“…….”
“너는, 응?”
이제는 반대로 윤희가 할 말이 없어졌다. 대꾸할 거리를 찾지 못하는 사이, 서서히 다가온 알싸한 술 냄새와 함께 뜨거운 입술이 포개졌다. 울렁거리는데, 주위가 빙빙 도는데, 도통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최환은 어깨를 밀어내는 손을 가볍게 제지하고 멋대로 입을 맞춰온다. 간신히 틈을 떼고 윤희가 애원했다.
“놔 줘, 응?”
살짝 밀어냈을 뿐인데 입맞춤이 더욱 집요해졌다.
“이건, 이건 아니야.”
결국 거부하는 몸짓에 흐느낌이 더해졌다. 그제야 뭉갤 듯이 누르고 있던 상체가 느슨해졌다.
“미안. 진짜 미안. 그런데.”
“…….”
“후회 안 해.”
어질한 가운데서도 마지막 말에 놀라 두 눈을 드니,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해오는 두 눈동자가 앞에 놓였다.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정직한 눈빛이었다.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친구잖아.”
“친구?”
재차 되묻는 말엔 부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우물쭈물 망설이자 이번엔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넌, 내 마음 몰랐어?”
모르진 않았다. 아무리 몇 년을 이정후의 울타리에 갇혀 살다시피 했던 윤희라도, 상대방이 제게 보이는 것이 단순한 친절함인지, 아니면 더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알고는 있었어.”
“그래?”
“응.”
“그런데?”
“…….”
“알면서도, 난 아니야?”
난 아니냐고 묻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이정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술기운에 어질하던 기운이 가라앉고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응. 미안해 정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단호하게 대답하는 윤희를 바라보는 최환의 시선에 복잡한 감정이 실렸다. 이런 강윤희는 낯설다. 여리기만 한 줄 알았는데. 무슨 일에건 조용히 웃어주는 윤희였는데. 그래서 낙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윤희가 자신의 애정표현을 받아주는 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거라고.
“이런 상황에 우습지만, 이유, 물어봐도 돼?”
뭐라고 말해야 할까. 최환, 네가 아닌 이유를. 아니, ‘그’여야만 하는 이유를. 그 전에 이건 누군가를 좋아하고 말고를 이미 떠난 문제 아니었나. 이정후는 자신의 전부. 피와 살, 숨결이고 목숨, 하늘이자 신앙인데.
“별 이유 없다면, 앞으로 나 희망 가져도 돼?”
“아니.”
이번에도 단호한 대답에 최환의 눈빛이 짙어졌다.
‘왜? 어째서?’
이번엔 최환이 소리 내어 묻진 않았지만,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간 또 이 눈빛을 마주해야 될 것만 같아서.
“이미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니, 사랑. 어쩐지 낯이 뜨거워져 좋아한다는 말로 대신했지만, 그를 향한 윤희의 감정은 사랑이 맞았다. 그 증거로 벌써 여러 밤을 그 생각에 눈으로 지새우지 않았나. 지난번 입맞춤 이후론 이정후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 달뜨곤 했다.
“…….”
예상치 못한 대답에 그만 최환의 말문이 막혔다.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는데. 그도 그럴 듯이 방학 때도, 학교에서도 늘 저와 붙어 있다시피 했으니까. 그 외의 시간은 분명히 집에서만 보낸다고 했는데.
‘혹시?’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건 아닐까? 확인해야 할 쪽은 어쩌면 이쪽이었는지도 모른다.
“……승수야?”
“어?”
“좋아하는 사람, 권승수냐고.”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등하교를 같이하는 것 말곤, 별 감정이 있어 보이진 않았는데. 초조함에 검지 관절을 꾹 눌러 꺾는 최환에게 윤희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승수 아니야.”
“그럼, 누군데?”
“너는 모르는 사람이야.”
너는 모르는 세계라고 선을 긋는 윤희의 모습에도 최환은 끝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얼마나? 얼마나 좋아하는데?”
간절한 목소리, 애타는 몸짓이었다. 윤희의 고개가 미안함을 못 이기고 그만 푹 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왁자지껄하던 소리도 어느덧 잠잠해지고, 비상구 불빛만이 깜박이는 계단 위, 둘의 침묵이 버겁게 느껴질 때쯤, 최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 가자.”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 별 이견 없이 돌아가는 윤희를 제 방으로 돌려보내고, 저는 아까 나와 있던 계단으로 다시 돌아가 전화를 걸었다.
“저 환이에요. 뭐 하나만 알아봐 줘요.”
이래도 될까. 망설였지만 잠시였다.
“윤희, 강윤희요.”
상대에게 기억나는 인적사항을 모두 알려주려 입을 열었지만 그래봤자 생년 정도였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 보니 강윤희에 대해 신기하리만치 아는 게 없었다.* * *피곤하다. 말없이 옆자리에 앉아서 모자로 얼굴을 덮은 채, 모른 척 잠을 자는 최환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피곤했고, 처음 마신 술로 인한 숙취가 피곤했고, 짧다면 짧은 사흘 동안 원래 있던 곳을 벗어나 낯선 곳에 긴장했던 것이 피곤했다. 기어코 수학여행에 참석하지 않았던 권승수의 선택이 가장 현명했다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래도 어쨌거나 끝났다. 그건 곧 이정후를 볼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잘 지냈어?”
역시, 좋아. 잘 지냈냐는 네 마디에 이렇게 붕 뜬 것처럼 기분이 들뜨는데.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짜릿함에 발끝이 살짝 저려오는데. 요즘 자주 보이곤 했던 여자들도 어쩐 일인지 눈에 띄지 않아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간만에 고요한 저택, 그와 단둘이 마주 앉은 방 안,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식물원에서요, 별 모양 과일이 있었는데, 단면이 정말 별 모양 같아서, 이름도 스타 프룻이예요. 색도 예쁜 노란색이구.”
“그래? 누구랑 주로 다녔어? 승수 없어서 심심했지.”
“음, 환이랑요.”
“아아.”
만족한 듯 씩 올라가는 입매를 보자마자 이상한 낌새를 챌 겨를도 없이 바로 어젯밤 계단에서의 입맞춤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입술을 슥 닦고 말았다. 맞은 편 이정후의 시선이 입술로 모아져 바로 손을 떼기는 했지만. 어쩐지 긴장된 분위기에 더듬더듬 할 말을 찾아냈다.
“그리고, 음, 둘째 날엔 수상 보트를 탔는데, 어?”
뭐라고 더 하려다가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는 손길에 흠칫 놀랐다. 이정후의 손이 지나간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다 못해 화끈거렸다.
“탔는데?”
“그냥, 어, 그냥, 빨라서, 그러니까, 바람도, 많이 불고.”
귀를 넘겨준 손이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와 감싸더니 엄지로 턱선을 따라 쓸기 시작했다.
“술은?”
“마셨어요.”
“어땠어?”
“…….”
바로 지금처럼 어찔했다는 덧붙임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목구멍 안에서 웅웅 울리다 끝을 맺었다. 기습적으로 입술을 벌리고 깊숙이 들어온 살덩이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피하는 혀를, 상대의 그것이 놓치지 않고 얽었다.
꽉 들어차 압박해오는 바람에 숨도 쉴 수 없었다. 안을 채우던 것이 미끄러져 나가 잠시 호흡이 트였다가, 입천장을 자극하듯 강하게 문지르며 들어오는 탓에 다시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답답함에 주먹을 말아 쥐고 가슴께를 밀었던가, 동시에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프게 혀를 물렸다. 비명조차도 거친 혀 놀림에 묻혀버렸지만. 결국, 짙은 피비린내가 나고 나서야 갑작스런 입맞춤은 끝을 맺었다.
“좋았어?”
“…….”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이정후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물었다. 흐트러지지 않은 담담한 음성이었다. 그런 이정후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좋았냐니? 뭐가?
“술이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제 얼굴을 내려다보던 이정후의 입에서 큭, 하고 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대체 속을 짐작할 수 없었다. 급기야는 못 참겠다는 듯 윤희에게 기대 어깨를 심하게 들썩이는 이유도. 그 바람에 몸에 힘이 들어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터진 입술이 다시 벌어져 비릿한 피 맛이 후각을 자극했다.
‘달라.’
최환은 저를 좋아한다고 했다. 거칠지도, 그렇다고 마냥 부드럽지만도 않던, 진득한 입맞춤이었다.
그렇다면 이정후는? 그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얼마 전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과 함께했던 달콤한 키스. 그리고 조금 전 폭력과도 가까운 그것. 이 둘이 뜻하는 바는 무얼까.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강윤희.”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문득 그가 이름 석 자를 딱딱하게 뱉었다. 언제 그렇게 웃었냐는 듯, 차갑게 변한 냉기 서린 얼굴에 추운 것도 아닌데 오싹해졌다.
“네?”
깜짝 놀랐다. 이정후가 갑자기 웃음을 멈춰서도, 또 갑작스럽게 제 이름을 불러서도 아닌. 그가 자신의 이름에 ‘강’이라는 성을 붙여 부른 건 처음이었기에. 마치 전혀 사정을 모르는 남처럼. 강석우가 생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이정후는 언제나 저를 부를 때 윤희야, 하고 나직하게 불렀었다.
“내일부턴 원래 쓰던 방으로 돌아가.”
‘원래 쓰던 방……?’
그런 게 있었나? 찬찬히 되짚다가 문득 첫 생리 때 혈흔이 묻은 이불을 둘둘 감싸 안고 당황해서 돌아다니던 밤이 떠올랐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녀에게 주어진 방, 사용하지 않은 지 벌써 몇 년이었다. 거기로 돌아가라는 건가? 지금에 와서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올려다보는데, 이정후는 이미 등을 보이며 방문을 나선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