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3
13
“몸 좀 살피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이정후 홀로 틀어박혀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한 달에도 몇 번씩 바꾸던 여자들도 딱 끊어냈다. 석우나 다른 조직원이 사업 보고 차 들리는 경우를 제외하곤 아무도 들이지 않으니 완벽한 바깥세상과의 단절이었다.
“할 말 없으면 나가.”
오늘도 역시 이렇게 조금의 틈도 내어주질 않는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석우가 눈치를 살폈다.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뭔데?”
“CCTV를 설치하는 게 어떨까 하고.”
고위직에 있거나 점잖은 손님들만 상대해 별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단골손님이 늘어나자 익숙해진 분위기 탓인지 슬슬 본성을 드러내는 작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단순히 술주정을 하거나 폭력을 일삼는 치들로 골머리를 앓던 과거와는 차원이 다른 비열한 수법들이 속속들이 발견되고 있다. 얼마 전에도 마음에 드는 아가씨에게 거절당하자 몰래 약을 섞어 먹이는 바람에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이미 있잖아.”
“복도나 공공장소엔 있지만, 룸 안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부쩍 변태 행위를 요구하는 놈들도 늘었지 말입니다. 안 그렇게 생긴 것들이 더 합니다.”
“잘못하다 걸리면 위험 부담이 너무 높아. 만만한 상대들도 아니고.”
“그거야 그렇지만.”
“그런 놈들이 많아?”
“아직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만, 이게 또 한 번 퍼지면 유행처럼 물드는지라…….”
“당분간은 관리 잘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업자한테 한 번 알아보고. 최대한 들키지 않게 설치할 수 있는지.”
“그럼, 견적 뽑아서 다시 들리겠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는데, 진열장에 즐비하던 양주병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해서 그대로 지하 바에 들려 확인해보자, 꽤 많은 빈 병들이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대부분 도수 높기로 악명 높은 술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업소에 진상이 조금 늘었다 해도, 지장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적당히 관리해주는 척만 해도 어느 정도 정리될 일이다. 대부업도 별다른 문제 없이 순탄하게 몸을 불려가고 있다.
‘여자 문제인가?’
몇 번 모델이나 연예인이 들어왔다며 소개시켜주려 해도 매몰차게 거절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최근에 만나던 게 누구였더라.’
애써 기억해보려다 고개를 저었다. 어떤 여자를 만나도 이정후의 시선은 늘 그녀들 멀리 다른 무언가를 향해 있었던 걸 알기에. 단순한 호기심 혹은 오락거리였을지는 몰라도 그 이상의 감정을 그에게 일으켰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대체 뭐가 문제람.’
결국은 석우의 투덜거림으로 마무리 됐다. 잠시 언젠가 절에서 내려오던 어둑한 길에서 들었던 홍등 어쩌고 떠오르기도 했지만, 곧 잊혀졌다. 그런 거라면 단순히 기분이 울적한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나서다 마침 복도로 들어서던 윤희가 저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눈짓으로 응하고 나가려는데, 이정후의 방을 지나쳐 복도 끝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보였다. 황급히 청소 중이던 헬퍼를 불러 세워 언제부터 윤희가 다른 방에서 머무르는가 물었다. 갸우뚱하던 헬퍼가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수학여행 다음 날부터였을 거예요. 그날 밀린 빨랫감 가지러 갔다가 방이 바뀌어서 한참 찾았거든요.”
“수학여행……?”
짚이는 게 있어 가만히 시간을 거슬러 따져봤다. 역시나, 이정후가 혼자 틀어박히기 시작했던 때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런 거였나.’
새삼 둔한 자신을 탓하며 괜히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 *“환아, 네가 부탁했던 자료다. 여기.”
서류봉투를 받아들며 다시 한 번 다짐 받았다.
“아버지한텐 비밀이에요.”
“알았다.”
“고마워요, 아저씨.”
비밀로 해주겠단 말에 마음이 놓여 웃자 상대방의 눈꼬리도 환의 눈처럼 둥글게 휘어졌다. 그러자 눈가에 죽 그어진 칼자국이 덩달아 같이 꿈틀거렸다. 냉혈한, 살아있는 칼날이라고 불리는 그였지만, 환에게는 어릴 적부터 보아온 자상한 아저씨였다. 무용도 그의 도움이 없었으면 시작부터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다.
“그런데 누구니? 여자친구?”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좋아하는 애야?”
“뭐, 대강.”
단호하게 저를 거절했던 윤희를 떠올리자 쓴웃음이 났다. 그런 자신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일이 생겼는지 다음에 또 필요하면 언제든 부탁하라며 곁을 떴다. 그제야 천천히 사진들을 살펴볼 마음이 났다.
무용학원에서 나서는 모습이나, 하교할 때 승수랑 같이 들어가는 모습들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 잘 사는 집인 듯, 기사 딸린 차에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같이 찍혀있다. 하지만 그중에 윤희의 마음을 빼앗을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호적이나 인적사항도 평범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이지.’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차였다고 뒷조사나 부탁하다니. 또 그걸 들여다보고 있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한심해 잠시 치워뒀다가 어차피 벌어진 일, 까짓 어때 하며 다시 사진 더미를 집어 한 장씩 심드렁하게 넘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사진에는 한 저택의 입구가 집중적으로 찍혀 있었다. 차고를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들은 하나 같이 짙은 선탠이 되어있었다. 그 차창 안의 검은 실루엣이 어쩐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
차량 사진만을 모아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자기가 느낀 위화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챈다. 윤희의 아버지인 석우가 운전을 하지 않을 땐 늘 조수석을 차지하는 데 반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꽤 젊은 느낌의 ‘그 남자’는 항상 뒷좌석 중앙에 홀로 앉아있다. 몇 장 찍히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진에서 그는 언제나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누굴까, 강윤희와 한집에서 지내면서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 남자는.
아직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강윤희가 말한 좋아하는 누군가가 이 남자라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승필 아저씨, 한 가지만 더요.”* * *“뭐래? 우리 아들이?”
“이 사람 알아봐 달래.”
품속의 사진을 꺼내어 내밀자, 함께 들여다보던 얼굴에 요염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웃을 때 입매가 그녀의 아들과 똑같다. 그러고 보면 최환은 외탁한 게 분명했다. 자신과 닮은 구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드니.
“흐응, 꽤 근사하네. 뭐 하는 사람이야?”
“아직 몰라. 다 막혀있어.”
그라고 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근 한 달 가까이 끈질기게 따라다녔는데도 이름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그 남자에 관해서는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오히려 이쪽을 감시하는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중간에 그만두었지만, 석우나 그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신경 쓰여?”
“조금.”
“그래봤자 애송이일 텐데 뭘.”
찌푸린 미간을 검지로 쓰다듬으면서 살짝 웃어주는 그녀, 최환의 생모. 그녀의 말대로 어쩌면 별 것 아닌데 자신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 또래 청년들이 흔히 그렇듯 정말 보잘것없기에 오히려 아무것도 안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부잣집 도련님 정도는 되려나.
“요즘 많이 힘든가봐.”
“돈놀이에서 미련을 버리질 못해.”
단란주점 같은 걸로 다시 시작하자고 설득해도 청룡파의 두목은 좀처럼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무리하게 일수를 놓았다. 화려했던 과거는 어디 가고 거의 망해 가는가 싶더니 성당에서 알게 된 사업가에게서 후원을 받았다며 다시 꿈에 부풀어 있다. BD 캐피탈은 Blue Dragon의 약자였다. 청룡파라니.
‘도대체 언제 적 얘기인지.’
촌스런 이름에 실소가 나왔다. 대부업체에서 급하게 돈을 빌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뿐이라, 지금 남아있는 조직원들은 그런 치들을 달달 볶아대는 그저 그런 뒷골목 양아치로 전락해 버렸는데.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사람 죽이는 것밖에 모르는 무식한 영감쟁이.”
붉은 혀가 날름, 그의 칼자국을 핥았다.
“빨리 뒈져버렸으면 좋겠어.”
“그래도 남편인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치.”
토라져 비죽 내밀어져 있던 여자의 입술이 장난임을 눈치채고 보기 좋게 둥글어졌다. 이어 성급한 손길이 승필의 벨트를 풀었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와 동시에 서슴없이 들어온 손이 그의 물건을 능숙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릿한 교성이 울려 퍼졌다.
“우리, 아! 환이 건, 흐으, 잘 챙겨두고 있는 거지? 흣, 응?”
“당연하지. 걱정 마.”
제게 고맙다며 활짝 웃어 보이던 환의 얼굴을 떠올리곤 흐뭇해졌다. 서글서글한 눈매, 육감적인 입술. 역시 그는 제 어미를 쏙 빼어 닮았다. 자기를 닮지 않은 것이 서운하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자의 배 위에 뜨겁게 쏟아내면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