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4
14
“구역 밖으로 돌아.”
“네.”
얼마 전부터 같은 모델의 차가 계속 눈에 띄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듯 세 대 정도로 바꾸어 가며 미행하고 있다. 매일같이 같은 길을 오가긴 하지만, 그래도 눈에 익은 차가 생겼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한 바퀴 더 돌까요?”
“좀 더 외곽으로 빠져.”
평소와 다른 길로 빠지자 뒤따라오던 차는 몇 분 더 쫓아오다가 사라졌다.
‘괜한 기우였나.’
다시 본가로 차를 돌리는데 같은 일당으로 보이는 다른 차종이 다시 따라붙었다. 하는 짓거리가 잔챙이들 같지만, 석우의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애들한테 길 막아 놓으라고 해.”
본가는 외진 곳에 있어 길에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다. 듬성듬성 위치한 다른 주택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라, 차는 드나들어도 사람이 드나드는 일은 드물었다. 마침 대부분 집을 비운 낮이니 잘 됐다 싶다. 죽을 줄도 모르고 뒤를 쫓는 녀석들은 본가로 석우가 탄 차가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 속도를 늦춰 천천히 앞을 지났다.
“방금 지나간 회색. 놓치지 마.”
“알겠습니다.”
회색 쥐새끼. 어떤 놈인지 딱 저에게 맞는 차를 골랐군. 어디 상판 좀 구경하자 싶다. 간만에 힘쓸 일이 생긴 석우가 가볍게 어깨를 풀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곧이어 잡혀 온 남자는 촉새 같은 인상에 왜소한 체격으로 이쪽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해 보였다.
“너 뭐야?”
“그냥 지나가는 사람 이렇게 막 잡아도 되는 거야? 이 새끼들 이거 범죄자 아냐?”
주제에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꼴이 정말 억울한 것도 같다. 잘못 짚은 걸까. 아닌데. 이런 쪽에 있어서 석우의 촉은 항상 정확했는데. 그동안 오야의 사업을 돕는답시고 너무 신사적으로 살아왔나? 그래서 무뎌진 걸까?
‘어떻게 할까.’
팔짱을 끼고 잠자코 살폈지만, 그래도 역시 이상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있지만, 마구 흔들리는 눈동자라든가 지나치게 파들거리는 다리가.
“너 뭐 하는 자식이야?”
“알아서 뭐하, 우욱!”
무릎으로 명치를 세게 찍어 누르자 그대로 폭 고꾸라졌다. 동시에 쏟아낸 시큼한 토사물에 잠시 콧등을 찡그려야 했다.
“야, 나 귀 안 먹었거든?”
“비, 비켜!”
“다시 묻는다. 뭐 하는 자식이야?”
“영업! 영업 사원이야!”
“우리 차 왜 쫓았어?”
“쫓은 적 없, 아아악!”
“이 개잡놈의 새끼야, 네가 안 쫓았는데 내가 네 차를 기억해? 어? 이빨 깔 걸 까야지.”
이번엔 제대로 걷어찰 요량으로 발을 들어 올리자 전과 다른 분위기를 느꼈는지 길길이 날뛰던 상대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아, 아무 짓도 안 했, 안 했어요,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왜 쫓았냐고 물었지 뭔 짓 했는지는 안 물었는데?”
놈을 족치는 동안 녀석이 타고 있던 차가 차고로 들어왔다.
“샅샅이 뒤져.”
얼마 지나지 않아 석우의 앞에 주유소에서 나눠주는 휴지, 생수, 지갑, 카메라 등이 놓였다. 지갑 안에는 현금 몇 장과 아무렇게나 접혀있는 영수증이 있을 뿐, 쥐새끼의 신분을 알려줄 만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카메라뿐. 카메라를 집어 들자 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카메라에 달린 작은 화면으로 찍힌 걸 확인하던 석우의 얼굴도 못지않게 굳었다.
“이 새끼, 가둬.”* * *초소형 몰래카메라와 카메라를 흘긋 쳐다본 이정후가 농담을 던졌다.
“오늘은 석우가 재미있는 걸 많이 들고 왔네.”
시니컬한 웃음 뒤에 독한 술 냄새가 따랐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어두운 서재 안에서 그 혼자 밤이다.
“사진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카메라 속에 있던 사진들을 내밀자 별 흥미 없이 한 장 한 장 넘기던 이정후의 표정이 점점 살벌해졌다. 사진을 넘기면 넘길수록, 강윤희가 잔뜩 쌓여갔다. 간간이 이정후의 실루엣이 드러난 사진도 있다. 이미 술기운으로 붉어진 흰자위건만 핏발이 또렷이 섰다.
“어떤 놈이야?”
“입을 열지 않습니다.”
“끌고 와.”
“네.”
놈은 어지간히 두들겨 팼는데도 마치 벙어리라도 된 양 입을 꾹 다문 채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다. 잔챙이치고 맷집도 의리도 좋은 놈이었다. 이정후의 앞에 불려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시켰어?”
“…….”
요지부동인 놈의 눈앞에 별안간 이정후가 품속의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흔들었다.
“얘 알아?”
지금껏 묵묵부답이던 놈의 낯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아는구나.’
언젠가 석우도 본 적 있는 지갑 속 승수 또래의 남자아이, 최환. 그런데 그 사진이 지금 왜? 의아함도 잠시,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이정후의 기꺼운 웃음소리가 울렸다.
“얘 알지?”
“…….”
“말하기 싫어?”
여전히 요지부동인 놈과 시선을 맞추며 이정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잔뜩 얻어터진 놈이 걱정된다는 듯 눈썹을 살짝 모아선 다정하게도 물었다.
“입술이 없으면 말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무, 무슨…….”
독한 린치도 견디던 놈이 놀랐는지 입을 열었다. 당황한 것은 석우도 마찬가지였다. 말릴 틈도 없이 서랍에서 나이프를 꺼내든 이정후가 그대로 날을 세워 놈의 입술 가장자리에 대고 푹 찔러 넣었다. 고통 섞인 비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지만 이정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태연한 표정으로 칼날을 슬쩍 움직여 상처를 벌렸을 뿐이다.
“엄살 피우지 마.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무 짓이라니.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알게 모르게 석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잔혹해서가 아니었다. 이 정도야 익숙하게 봐왔다. 다만 낯설었다. 이런 모습의 이정후가.
“누가 시켰어?”
“이, 이름, 믈, 믈러, 요.”
입 안쪽에 칼날을 의식한 놈이 빠르게 입술을 놀렸다. 우물거리는 발음 속에서 이름은 모른다는 걸 대강 유추해냈다. 눈가에 칼자국으로 보이는 긴 흉터가 있었다는 정보도 추가로 얻어냈다.
“브, 비, 디…….”
“똑바로 말해.”
분명치 않은 발음이 짜증 났던지 이정후가 입에 물렸던 나이프를 빼냈다. 피 섞인 침을 몇 차례 뱉어낸 놈이 제법 똑똑히 실토했다.
“BD 캐피탈 쪽 사람이었어요.”
BD캐피탈이면 석우의 이름으로 돈을 대주는 그 회사가 아닌가. 물주를 염탐하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저 사진 속의 남자애는 무슨 연관으로? 눈가의 칼자국이라. 주변에서 칼자국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가.
‘잠깐.’
그런 사람은 없다고 고개를 젓던 석우의 기억 속에 희미한 잔상이 떠올랐다. 나림동의 맞은편 세력을 장악하던 남자. 정확히는 그 남자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눈가의 긴 흉터가 인상적이던 남자가.* * *‘……춥다.’
이상한 일이었다. 난방이 안 되는가 싶어 바닥에 내려서면 따뜻한 기운이 발바닥에 느껴지고, 공기가 찬가 싶어 온습도계를 확인하면 온도도 습도도 언제나 딱 적절한 기준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홀로 떨고 나서야, 항상 곁에 잠들던 그의 부재로 인한 심리적인 추위임을 깨달았다. 더불어 처음 이곳에 오던 기억들이 끊임없이 한기를 일으킨다는 것도.
이불 속에서 오들오들 떨다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으면 일기장을 꺼내 들어 말없이 그를 향한 혼잣말을 적어 내려간다. ‘너무나도 보고 싶어요. 잘 지내고 계세요? 건강하세요. 거둬주셔서 항상 감사히 생각해요.’ 같은 짤막한 인사말부터 ‘오늘은 승수가 세 시간 연속 자서 선생님한테 혼났어요. 모의고사를 봤는데 영어는 백 점이 나왔어요. 발레 시간에 샹쥬망을 제대로 못 해내서 꾸중을 들었어요.’ 같은 소소한 이야기까지.
한번은 이정후를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몰래 살금살금 뒤꿈치를 들어 그와 함께했던 방으로 향했었다. 문고리를 살짝 돌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문에도 어찌나 심장이 두근거리던지. 그렇게 애써서 간신히 안을 살폈는데, 그는 자리에 없었다. 그녀의 방보다 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랫동안 사람이 머무르지 않았던 것처럼.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닐까?’
그래서 갑작스레 자기를 멀리했을지도 모르는 거라고. 생각이 많은 것도 병이 되는지, 윤희 자신도 안으로, 안으로, 저 속 깊은 곳까지 자꾸만 곪아가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애태우며 시간만 보내길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너 오늘따라 식은땀이 심해.”
“……그래?”
“동작도 무겁고.”
“으응…….”
수학여행 이후로 조금은 어색하게 지내는 최환의 말을 흘려들으며 집중하려 노력하던 오후, 잡고 있던 바가 빙 도는가 싶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는 양호실의 침대 위였다. 눈부신 형광등 불빛에 고개를 돌리자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최환이 눈에 들어왔다.
“몇 시야?”
돌아가야 하는데. 그가 있는 곳으로.
“더 쉬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어.”
“응.”
“바래다준다고 하면 싫다고 할 거야?”
“싫진 않은데 조금…….”
말끝을 흐리는 윤희에게 최환이 문득 표정을 굳혀 물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보자.”
“물어봐.”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 이름이 뭐야?”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어.”
“그렇겠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대답이 돌아온다.
“윤희야, 그 사람, 위험한 사람이야.”
“어?”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질 나쁜 자식이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언젠가 승수도 한 번 이정후에 대해 꺼림칙하단 식으로 말하던 기억이 났다. 너와 친해진 애들은 하나둘씩 전학 가거나 소식을 알 수 없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에 대한 반증으로 최환과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지금까지 잘 지내오고 있다. 수학여행에서의 고백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이 서먹한 분위기도 없었을 테고.
“다 아는 수가 있어.”
“환아, 있잖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난 그 사람이 좋아.”
“살인마라 해도?”
살인마?
험악한 단어에 뜨악해졌다. 가끔 눈매가 차갑게 변하긴 해도, 윤희가 아는 이정후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항상 윤희야, 부르며 다정하게 웃어주던, 오갈 데 없는 자기를 거둬 최고로 키우겠다고 약속했던, 그리고 그 약속을 몇 년째 꾸준히 지키고 있는 사람. 설령 살인마라 해도 지금의 윤희에겐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이정후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눈을 가리고 이지를 흐트러뜨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살인마라 해도 좋아.”
“그 칼끝이 너를 향해도?”
“기꺼이.”
“하!”
최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욕설을 작게 뇌까렸다.
“넌 미쳤어.”
“……미쳤다 해도 좋아.”
아파서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아픔이 그가 받을 고통을 제가 대신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 *넌 미쳤어.
윤희를 앞에 두고 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자신을 향해 던진 말이나 다름없었다. 살인마여도 좋다는, 그런 믿을 수 없는 대답을 하는 윤희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자신에게.
“더 이상 그쪽은 캐지 않는 것이 좋겠다.”
“왜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캐묻는 자신에게 말없이 내민 상자 안에는 망가진 카메라와 길쭉한 살덩이가 말라붙어 있었다. 부스러진 채 엉겨 붙은 손톱에 그것이 손가락임을 알고 토기가 올라왔다. 명백한 경고였다. 잔혹한 방법에 치를 떨었다.
‘강윤희, 네 뒤에 있는 남자는 위험해.’
말려들어서 좋을 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조직의 보스니, 나림동을 휘어잡는 두목이니 해도, 결국 제 아버지는 깡패 아닌가.
더러운 깡패.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조금 머리가 굵어진 다음부턴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겠다고 누누이 말해왔고, 일부러 무용에 심취한 척하기도 했다. 그냥 자유로운 예술인으로 살고 싶은 욕심을 더해서.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다.
‘포기가 안 돼.’
흔들림 없이 그 사람이 겨누는 칼끝을 받아들이겠다는 강윤희를 도저히 놓을 수가 없다. 저 맑은 눈망울은 내 거여야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게 꼭 들어맞는 강윤희. 너는 날 위해 태어난 내 운명인데 왜 그걸 몰라.
‘인내심을 갖자.’
조금만 더 참으면, 조금만 더 네 곁에 있으면, 언젠간 나 하나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나겠지. 가까스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전처럼 장난스럽게 불렀다.
“윤희야, 강윤희!”
“응?”
“미안, 내가 너무 흥분했다. 너 많이 좋아해서.”
“…….”
“친구로라도 곁에 있고 싶어. 네가 정말 힘들 때 버팀목이 될 수 있는.”
“…….”
“전처럼 무용도 같이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스트레칭도 도와주고.”
“…….”
“나, 솔직히 고백하고 힘들었어. 너랑 어색하게 지내는 거, 못 견딜 일이야. 넌? 괜찮았어?”
말이 이어지는 동안 의아함을 띠던 얼굴이 점점 씁쓸하게 변했다.
“나도, 힘들었어.”
작은 중얼거림 하나에도 마음이 놓이는 자신이 바보 같아서 헛웃음이 났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안심을 해.
“이제 좀 쉬어. 네가 몸이 안 좋으니까 나도 덩달아 늘어진다. 책임져, 책임.”
부러 투덜대듯 장난치자, 싱긋- 미안한 듯 저를 향해 눈꼬리를 내리며 웃어주는 강윤희의 모습에 그제야 수학여행 이후로 꽉 막혀왔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뚫리는 것 같다.
“미안해. 얼른 낫도록 할게.”
“그래. 난 나가 볼게.”
계속 남아 곁을 지키고 싶지만, 편안한 친구인 듯 널 안심시키기 위해 한 발 물러서 양호실을 나왔다.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댄 시선 끝에 쓰러진 윤희를 급하게 업어 옮기느라 채 갈아 신지 못했던 재즈화가 놓였다.
처음 재즈화를 신고 행복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일 년에도 몇 번씩 갈아치웠던. 그만큼 닳도록 연습했던 지난 제 모습이 새삼 애달팠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는데. 정말 닮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보다 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아버지.’
‘무슨 일이냐.’
당신의 뒤를 따르고 싶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재즈화 위로 겹쳐졌다. 완강히 자신을 부인하던 아들이 한순간 변한 이유를 아버지는 묻지 않았다.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을 돌릴까 봐서인지는 몰랐지만, 차라리 묻지 않아서 그나마 귀찮은 일 하나를 덜었다고, 애써 스산한 마음을 달래었다.* *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더니 결국 윤희가 쓰러졌다. 밤중에 물을 마시려 했는지, 침대에서 내려와 일어났다가 그대로 기절해 버린 듯했다. 모두 잠든 밤이었는데 그런 강윤희를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이정후였다.
“석우. 의사 불러. 지금 당장.”
“네? 갑자기 무슨 의사요?”
“어서!”
다급한 지시에 비몽사몽 간에도 조직원이 다쳤을 때면 부르곤 했던 의사를 급히 모셔왔다. 다행히 건강상 별문제는 없다던 의사가 의미심장한 얘길 건넸다.
“안정을 좀 취하면 될 것 같은데, 심리적 문제가 큰 것 같습니다.”
“심리적 문제?”
“환자가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으면, 전혀 말을 하려고 하질 않아요.”
심리적 문제로 아플 게 뭐람. 칼에 찔리면 아프고 주먹에 맞으면 아프다. 하지만 마음 때문에 아프다는 건, 단순한 석우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때문에 자기 식대로 결론 내렸다.
‘몸에는 별 이상이 없다니 괜찮다고 전해도 되겠지.’
의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서재를 열었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니터만이 홀로 부연 불빛을 내보내고 있을 뿐. 별생각 없이 가까이 다가간 컴퓨터 화면에는 윤희의 방안과, 곤히 잠든 윤희 곁에 서 있는 오야의 모습이 잡혀 있었다. 의사의 얘기를 듣느라 잠시 나와 있는 동안 길이 엇갈렸던 모양이다.
‘CCTV는 언제…….’
윤희를 원래 쓰던 방으로 돌려보낸 게 관심 밖에서 멀어져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보다. 달라진 건 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늘어서 있던 양주병도 오늘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제야 그간 독주에 절어 지내던 이유가 혹시 윤희였던 건 아닐까, 막연히 짐작하던 것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오야는 윤희를 마음에 둔 것이 분명하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화면 속 남자의 그림자가 침대 쪽을 향해 움직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다시 여린 체구에 손을 뻗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이어 윤희의 이마를, 뺨을,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리기까지도. 그나마도 이내 거두고 돌아섰지만.
순간, 자는 줄 알았던 윤희가 이불 속에서 팔을 내밀어 남자의 소매를 힘없이 잡았다. 기운이 없는지 이내 툭 떨어지는 손길에도, 남자는 무언가에 단단히 붙잡힌 듯,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움직이질 않았다.* * *정상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데도 온몸에 서리가 낀 것처럼 마디마디가 시렸다. 간신히 돌아와 침대에 몸을 누이고 나서도 으슬으슬함에 턱이 덜덜 떨렸었다. 꿈인지, 환영인지 모를 안개 속을 헤매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약이라도 먹을까 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는데 그대로 눈앞이 빙 돌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의사가 다녀간 후, 희미한 의식 속에 두런거리는 목소리들 속에서 이정후를 찾았지만, 그의 음성은 들리질 않았다. 그만 포기하려는 순간, 조용히 닿았던 따뜻한 손길에 본능적으로 그라는 걸 알았다.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어 주길 바라며 자는 척 눈 감고 있었지만, 이내 멀어지던 온기에 힘겹게 팔을 뻗어 돌아선 그를 잡았다.
“가지…… 가지 말아요…….”
“…….”
“네……?”
한마디 뱉는 것도 버거워, 그를 잡았던 손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안 되는데. 놓치면 안 되는데. 또 이렇게 가버리면, 언제 만날 수 있는 건데요? 언제 다시 찾아 줄 건데요? 소리 없는 외침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진심이 통했던 걸까. 곧바로 문을 향해 떠날 것만 같던 그림자가 제 쪽으로 돌아섰다.
“일 년만…….”
“……일 년?”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되물었으나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대신 언제나 그리웠던 품이 이마에 닿았다. 시트를 걷어 번쩍 안아 올리더니 항상 함께 잠들곤 했던 방으로 옮기는 걸음에 눈물이 고였다. 일 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알고 싶지도, 묻고 싶지도 않았다. 되찾은 품 안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주길 바랄 뿐.
분명 그토록 추웠는데, 얼음장 한가운데 갇힌 기분이었는데, 쉬지 않고 흐르는 눈물도 뜨겁고, 안은 그의 가슴에 닿은 손도 뜨겁고, 저릿하게 조여 오는 심장도 뜨겁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려 살포시 겹쳐오는 그의 입술도.
이 뜨거움이 설령 지옥불의 그것이라 해도 벗어나고 싶지 않다. 불꽃이 온몸을 삼켜 들어가 온통 재가 되어 타 죽을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