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5
15
지젤을 사랑하는 마음에 눈이 먼 힐라리온은 그만 지젤의 연인 알브레히트의 정체를 폭로하여 결국 그녀의 죽음을 부르고 만다. 그토록 연모하던 지젤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 원령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지젤의 무덤이 있는 숲으로 찾아온 힐라리온. 음울하고도 음산한 주제가가 낮게 깔리는 가운데, 힐라리온은 끝내 지젤을 보지 못한 채 다른 원귀들에게 홀려 늪에 빠져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늪.’
늪에 빠진 거다. 벗어날 수 없는.
힐라리온이 죽은 뒤로는 공연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물을 글썽이며 너무 아름답다고 중얼거리는 윤희가 눈에 들어왔다. 영혼이 되어서도 사랑하는 알브레히트를 지키기 위해 밤새도록 혹사해가며 춤을 추는 지젤, 그리고 지젤의 희생으로 살아남아 평생 동안 그녀를 그리워하며 생을 이어가는 알브레히트.
‘결국 사랑하는 여자의 뒤통수를 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원인 제공자일 뿐이잖아.’
그에 비해 힐라리온의 지젤을 향한 마음은 얼마나 곧고 거짓 없는지. 힐라리온에게 죄가 있다면 지젤을 너무나도 사랑한 죄 하나뿐이다. 귀족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약혼녀까지 있었던 알브레히트야말로 진정한 악역인데, 강윤희 넌 왜 그를 위해 울어주는 걸까. 그리고 난 왜 그런 네가 밉지 않을까. 언젠간 자신도 힐라리온처럼 강윤희라는 늪에 빠져 죽고 말 거라고,
‘아니, 이미 한 발 들어서 있는지도.’
그렇다 해도 이제 와서 발 뺄 생각은 없다. 뒤를 잇겠다는 자신의 말에 아버지는 두 말없이 휘하의 몇을 내주었다. 아직 학생이라 별 필요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때 요긴하게 쓰라며. 그들을 이용해 오늘부터 교대로 윤희의 뒤를 밟을 예정이다. 아저씨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러다 보면 뭐라도 하나는 건지겠지, 기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마치자. 다들 잘 봤어? 어때?”
저마다 감상평을 말하는 가운데 아직 눈가에 채 눈물이 마르지 않은 윤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언젠가 나만의 지젤을 그리고 싶어.”
뭔가를 하고 싶다고 자기 꿈을 이야기 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그만 윤희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 *“1막 마지막쯤 바리아시옹 부분에서요, 콩콩 뛰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요. 같은 여자인데도 안아주고 싶을 만큼. 깃털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는데, 아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이건 정말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바닥에 내려서서 발끝으로 서 살포시 톡톡 바닥을 차다가, 토슈즈를 신지 않은 탓에 발끝이 아파왔다. 흉내라도 내보려다가 그만 머쓱해졌다. 말없이 웃으며 그런 제 모습을 지켜보는 이정후의 곧은 시선에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렇게 멋있었어?”
“네! 파드 되 부분에서 알브레히트가 지젤 들어 올릴 때는 마치 공기 중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처럼, 정말 아름다워요! 니나는 정말 최고에요. 지젤 라인 자체도 예쁘고.”
갸웃하면서 제 목선과 어깨 그리고 팔로 이어지는, 소위 지젤 라인을 살펴보았다. 길고 가냘프게 이어지는 선이 꽤 봐줄 만 한 것 같기도 해 괜히 으쓱했다. 이정후도 예쁘게 봐주면 좋으련만. 알브레히트를 위해 두 번이나 기꺼이 제 온 몸과 마음을 바친 지젤처럼, 윤희도 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진 모든 걸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다음에 공연하면 데려가 줄게.”
“진짜요?”
뜻밖의 말에 얼이 빠졌다. 써클 활동 시간에 영상으로 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기쁜데,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니. 넋이 나간 제 표정에 이정후가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진짜로, 약속하면서.
“우와, 우와, 정말? 진짜로? 세상에,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요!”
기쁜 마음에 냉큼 자리로 뛰어 올라가 덥석 목덜미를 끌어안다가, 순간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닫고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감은 팔을 풀 생각은 없었다.
‘이젠 내가 먼저 다가갈 거야.’
이전의 저는 왜 그가 다가오기만을, 그가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기만 했던 것일까. 바보같이.
긴 기다림 끝에 결심했다. 더 이상은 소극적으로 있지 않겠다고. 나도 내 마음을 다 표현하겠다고. 이런 마음은 곧 행동으로 이어졌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기색을 살피면서, 가만히 입술을 포갰다. 이윽고 곧은 콧날이 바로 눈앞에 왔을 때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려, 그만 눈을 질끈 감고, 아무렇게나 말랑한 입술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수줍게 내밀어 할짝거리는 혀를 받아 응해주는 입술의 놀림이 섬세했다. 따스한 숨결에 더욱 용기 내 한참을 머뭇머뭇 서툴게 키스하다가 제가 먼저 덮친 주제에 민망해져 또 얼른 놀라 고개를 뗐다.
그는 어떤 표정일까. 당돌한 저를 웃기다고 생각할까, 아님 귀엽게 여겨줄까. 여전히 부끄럽지만 궁금한 마음이 수줍음을 이기고 말아, 살며시 올려다본 시야에는,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한 것 같기도 한,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이 잡혔다.* * *“승수야, 수업 끝나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낮게 깔린 최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오늘은 제가 윤희를 데려다주기로 한 날인데. 망설이고 있자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최환이었다. 바로 뒤에 앉아서 말로 하면 될 것이지 굳이 번거롭게 구는 이유가 뭘까. 잠금을 해제하고 나서 무심코 바라본 화면에 가슴이 철렁했다.
[오늘은 네가 강윤희 당번이라 안 돼?]‘뭔가 알고 있구나.’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곤 어쩔 수 없이 다른 조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종례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 남아있지만, 평소 때와 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옆을 흘긋 보니 강윤희는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는지 가볍게 발목을 까딱거리며 필기를 옮겨 적고 있다. 분명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건드리기만 하면 눈물을 툭 쏟을 정도로 우울해했었는데. 요즘은 실없는 농담에도 숨넘어갈 듯 웃으니 승수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눈길을 돌리자 저마다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제 반년 남짓 남은 고등학교 생활, 대부분은 입시에 매진하고 있다. 몇몇은 명확한 목표와 꿈이 있어 진로를 정해놓고 거기에 매진하지만, 대부분의 무리들은 그저 불분명한 미래에 혼란스러워하며 남들이 하니까 어영부영 따라 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와는 동떨어져 저 홀로 세상에 있는 녀석들도 있지만.
그 ‘녀석들’ 중에는 승수도 포함되어 있다. 하고 싶은 것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한 것도 무엇 하나 명확히 알지 못한다. 춘재가 세상을 달리한 뒤 그저 하루하루 목적 없이 부유하는 자신의 모습에 석우는 뒤를 봐주겠다며 언제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 뒤에 가려진 게 대체 뭘까.’
명확히 알아낼 때까진 어떤 도움도 받고 싶지 않다. 떠안아서는 안 될 빚을 진다는 생각에. 언제쯤에야 의문의 해답을 알 수 있으려나. 아니, 영영 모르는 채 끝나게 되는 건 아닐까. 해가 바뀌도록 강윤희 옆에 있어 봐도, 석우의 잔심부름을 하느라 이정후가 운영하는 업소에 수십 번을 들락거려도 나림동 화재에 대한 건 실마리조차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불꽃이 모든 걸 삼켜버린 것처럼 사람들의 기억들도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저만 아직도 그 매캐한 현장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다. 후우, 답답함에 한숨을 크게 쉬는 순간 종례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너, 강윤희랑 가는 방향이 같다더니.”
“…….”
“알고 보니 한집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더라?”
“…….”
“……이거.”
말없이 내미는 사진들을 받아드니, 윤희를 데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사진, 석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들이 여러 날에 걸쳐 찍혀 있었다. 굳게 다문 승수의 입술에 최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정체가 뭐야, 너.”
대답은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최환이 내민 사진들을 받아들어 찬찬히 훑었다. 그런 제 모습을 바라보는 최환의 모습도 딱히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진 않다. 기다린다 해도 그것이 정말 승수의 ‘정체’에 대한 건 아닐 게다. 환에게 이미 답은 나와 있을 테니.
“이런 사진까지 찍어가면서 원하는 게 뭔데. 아니, 그 전에.”
“…….”
“넌 뭔데.”
딱딱하게 되묻는 제 태도에 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누군지 알면?”
승수를 바라보는 환의 눈동자는 깊고도 음습하다. 승수 저의 눈도 같은 어둠을 띠고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 알아.”
“너한테 넘겨준 게 다야.”
“강윤희 때문이야?”
“…….”
“너에 대한 건 하나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나한테만 말하라고 해.”
“…….”
“더 할 말 없으면 난 간다.”
“…….”
어느 순간 시선을 발끝으로 떨어트린 최환을 등진 어깨에 늦여름의 열기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더불어 최환의 담담하면서도 느릿한 목소리도.
“나, 무용 그만뒀어.”
“…….”
이번엔 승수가 할 말을 잃었다. 무용을? 그만둬? 왜? 잠깐의 쉬는 시간에도 짧은 틈새를 못 참고 복도를 빙글빙글 돌면서 가로지르던 너였잖아. 그런데 왜.
“이런 얘기 부끄러운데.”
“…….”
“우리 집.”
꽉 말아 쥔 최환의 주먹 위에 심줄이 섰다. 푸른 정맥도 불거져 힘줄 위를 가로지르다 어느 순간 탁 풀리며 기운을 잃는다. 동시에 환의 입이 트였다.
“대부업 한다. 말이 근사해 대부업이지, 콩알만큼 빌려주고 수박만큼 삥 뜯는 양아치 새끼들이나 다름없다. 그 전엔 뭘 했더라. 물장사도 하고, 아, 그리고 여자도 팔았다. 너도 알지. 나림동 창녀촌. 거기 절반이 우리 아버지 거였어. 우리 아버지는.”
차마 거기까지 밝히고 싶진 않았는지, 이를 꽉 물고 있던 최환의 고개가 푹 꺾였다.
“깡패야.”
“…….”
“절대 닮고 싶지 않았다, 나는.”
둘 사이에 뜨겁고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을까. 어느새 지기 시작한 땅거미에 나란했던 그림자가 어지러이 섞였다. 마치 둘이 하나인 것처럼. 그 모양을 미동도 없이 가만 바라보고 섰던 승수가 무언가를 결심하고 입을 뗐다.
“네 사진엔 한 명이 빠져있어.”* * *비스듬히 누워 오른팔을 이마에 얹은 채 눈을 감고 있는 이정후를 몰래 훔쳐봤다. 손등이 만드는 그늘 아래로 시원하게 뻗은 콧날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폭, 나왔다. 진짜, 진짜 잘 생겼다, 싶어서.
“무슨 걱정 있어?”
한숨 소리가 그의 휴식을 방해했는지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조차도 멋있단 생각을 하는 제 모습을 깨닫곤 윤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걱정이 있는 게 아니라요.”
“그럼?”
아직 채 졸음기가 가시지 않은 나른한 질문에 고민했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너무 멋있어서요, 하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선생님께서 대학 추천서 써주신다고.”
낮에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더라, 곰곰 생각해 본 후에 떠오르는 것을 대강 둘러대었다. 진로에 대해서 딱히 걱정하는 부분은 없었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항상 이정후가 시키는 대로만 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막연히 그러려니 생각한 것이다.
“추천서? 무용과?”
“네.”
선생님이 추천한 대학교 이름을 언급하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힌 이정후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라면 무용과 중에서도 탑이니까.”
“네.”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는 윤희의 가슴이 뿌듯하게 부풀었다. 탑. 최고. 최상. 그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으뜸인 것’만을 안겨준다.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건 바로 이정후, 그 자체지만.
‘천사니까.’
해서, 최환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얼마 전 최환이 저를 붙잡고 진지하게 설득하려고 했었다. 당최 믿기지 않는 소리를 해가면서.
‘영화 속에서나 조폭이 멋지지, 그냥 속된말로 여자들 가랑이 벗겨 먹고 사는 포주라고. 뿐인 줄 알아. 고리대금 업자야.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도 모자라 다신 일어설 수 없도록 잘근잘근 짓밟는 게 그 자식들 속성이라고.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다 빨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야. 모르겠어? 그 사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 아니야. 그 사람 옆에 계속 있으면 위험해. 제발 한 번만 내 말을 믿어 줄 순 없어? 아니, 넌 나를 믿어야만 해.’
대꾸하지 않자 사진까지 늘어놓아 보여줬었다. 정갈한 느낌이 드는 어떤 건물의 입구를 드나드는 여자들의 사진과 검은 세단에 오르는 이정후의 모습들이 찍힌 사진들을. 몸을 파는 여자들이라기엔 옷차림도 고급스럽고 단정한 데다가 생김새며 몸가짐도 다들 하나같이 참하고 조신해, 도통 그런 일을 하게 생기지 않은 사람들뿐이어서 증거라고 내놓은 사진들이 최환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는커녕 되레 반박하는 자료로 보일 지경이었다.
언젠가 승수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정후는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때 뭐라고 반문했었더라.
“네가 말한 게 모두 사실이라고 쳐.”
“…….”
“그렇게 나쁜 사람이 왜 오갈 곳 없는 나를 거뒀을까. 아무 대가 없이.”
“…….”
“네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악인이라 해도, 나에겐 하나뿐인 은인이야.”* * *‘왜 오갈 곳 없는 나를 거뒀을까.’
그건 환도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위험한 남자란 것도, 더러운 세계에 몸담고 사는 자라는 것도, 증거를 대라면 얼마든지 갖다 댈 수 있었지만 정작 ‘그렇다면 왜 강윤희를 데려다 키웠는가.’에 대한 실마리는 아무리 뒤를 밟고 배후를 캐내어도 터럭만큼도 건져지지 않았다. 이쯤 되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윤희 주위를 맴도는 것뿐이었다. 승수가 그랬듯이. 이래서는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기 전이나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나. 답답한 마음에 숨을 크게 내쉬자 권승수가 입 모양으로 ‘왜’하고 물어왔다.
“강윤희한테 그 남자는 뭘까.”
“신앙.”
짤막하지만 정확한 한 단어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하긴, 강윤희의 그 남자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신앙이라고 밖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제 어쩔 셈이야.”
나림동 화재 사건에 대해서 뭔가 단서를 얻을까 했는데 최환네 쪽에서도 딱히 아는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피해를 입은 핑계로 리모델링한 덕에 한때 호황을 누렸던 것 말고는.
얼마간 가졌던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승수도 맥이 풀린 상태였다. 뒤는 생각해두지 않았던 듯 답이 없는 환과 나란히 앉아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자니 겨울바람을 머금은 낙엽 하나가 툭 떨어졌다. 환에게 이정후의 존재에 대해 일러 준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무용 그만둔 건, 후회 안 해?”
“후회해. 하는데, 이쪽으로 뛰어든 것도 후회 없어.”
“…….”
“넌? 계속 그 밑에 있을 거야?”
“일단은.”
“내 밑으로 와. 곧 사업 확장할 거라 일손 부족해.”
“무슨 사업.”
“텐프로라나 어쨌다나. 다시 물장사 손대려나 봐.”
“돈놀이는 어쩌고?”
“자금 회수가 잘 안 돼서. 나한텐 쉬쉬하지만 뒷돈 대주던 쪽에서 요즘 은근히 압박 주는 눈치야.”
이제 입시와 졸업만을 남겨둔 고등학생들치곤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서로를 오갔다. 둘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사실상 학교에 나오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 없어진 지 오래건만, 승수는 윤희를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환은 윤희 곁에 있고 싶다는 명목으로 성실하게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뭐가.”
“우리가 의심하는 것처럼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자기 구역에 있던 고아가 불쌍해서 거둔 건지도 모르지.”
“그 자기 구역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든 놈이야.”
“그것도 심증뿐이잖아.”
“…….”
“나도 미심쩍고 의심스러운 건 마찬가지야. 그런데 윤희한테 하는 걸 보면…….”
윤희는 명문대 진학이 거의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로 요즈음엔 마지막 다지기에 열중하고 있다. 승수는 잘 모르지만, 환의 말로는 지금 윤희의 실기를 준비해주는 무용가들은 그 쪽에선 알아주는 인사들이라 했다. 한 시간 레슨에 몇 백은 껌이라 그만한 비용을 대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며. 속내야 어떻든 이정후가 강윤희에게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환의 말대로 오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겉으로만 보면.
“춥다. 들어가자.”
“그냥 그 자식한테 가서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으니 윤희를 제게 주십시오! 해볼까?”
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이가 없어져 한마디 해주려다 장난스런 말투와는 다르게 생기 없는 낯빛에 시선을 돌렸다. 그토록 좋아하던 춤을 그만둔 최환에게선 특유의 활기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재즈 스피릿 몰라? 재즈 스피릿?’
마냥 활짝 웃으며 제 주위를 어지러이 수놓던 최환은 이제 없다. 잔뜩 시들다 못해 시꺼멓게 타들어 가는 억지 미소만 남았을 뿐.
이런 최환을 단념시키기 위해서 몇 번이나 말할까 말까 망설였다. 네가 지키기 위해, 결국 네 모든 걸 버리게 만든 강윤희를, 이정후는 아무렇지 않게 매일 밤 품고 잔다고. 본가에 오가는 자라면 누구나 아는 그 내용이 차마 최환 앞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환에게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