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16
16
“BD 쪽에 풀었던 자금 다 거둬.”
모조리.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압박해.”
싸늘한 명령에 무뚝뚝한 석우의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이날을 위해서 오야는 얼마나 오랜 시간 이를 갈고 있었던 걸까. 늘 본인은 소위 조직에서 말하는 엘리트도 아니며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그저 힘이나 좀 쓰는 것이라 말하는 석우지만, 그래도 눈치만은 있다고 자부하던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반년 전, 몰래 사진을 찍으며 이쪽을 염탐하던 놈을 잡아 족칠 때, 그 입에서 나온 ‘칼자국’이란 말에 은밀히 믿을만한 녀석들을 풀어놓았었는데, 조사해보자 과연 석우의 촉이 좋았던지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BD캐피탈의 전신이 청룡파라는 것, 그 쪽에선 아직 이쪽의 존재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윤희라는 자기 핏줄이 태어난 것도 모른다는 점 등등.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바로 최환의 정체 아닐까. 윤희의 입에서 나오는 학교생활 속엔 항상 등장하지만 승수에게선 좀처럼 들을 수 없던 이름의 주인공이자, 오야의 지갑 내피에 감춰져 있던 사진 속 남학생, 그리고 청룡파 보스의 유일한 아들, 최환.
여기까지 밝혀졌을 때 등줄기를 관통하는 짜릿함에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었다. 오야가 쳐놓은 그물망은 실로 촘촘해서, 윤희가 다니는 무용 학원에서 같이 레슨을 받던 상대도, 성당에서 마주쳤다던 같은 반 학우도 알고 보니 모두 같은 인물, 최환이었다.
해서 그간 BD 쪽에 석우의 이름으로 대주던 자금줄을 끊어버리고 그동안 투자한 것을 모두 회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때, 이미 이런 내막을 알고 있던 석우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단순히 죽음으로 보복하지 않고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그 심정을 이해했기에 언젠간 떨어질 명령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가령, 윤희를 데려온 목적 같은. 그리고 그 결심이 아직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지도. 하지만 최대한 오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하고 싶은 질문은 혀 밑에 꾹 숨겨두고 차분하게 물었다.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성탄절에 연말이라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다소 느슨해진 분위기인데. 그러나 이정후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지금 당장.”
그리하여 크리스마스이브, 온 세상이 구원을 맞이한 밤, 청룡파는 종말을 예고하는 전언을 접했다.* *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눈꽃들이 가볍게 나풀거린다. 손등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 동그랗게 맺히는 결정들. 눈 내리는 날씨치곤 의외로 포근한 데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도 적당히 시원해 저도 모르게 팔을 흔들다 달각거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멈췄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그와 함께 축하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용돈을 헐어 케이크를 샀다.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고른 넥타이도 준비했다.
원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하려던 것이었는데 그에게 바쁜 일이 있는지 며칠 동안 들어오지 않아 결국 혼자 보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는 꼭 함께 보내자고 매일 같이 말하던 최환도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했다. 덕분에 이브는 심심하고 쓸쓸하게 보냈다.
‘하지만 오늘은 내게 할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까.’
반드시 볼 수 있겠지. 벌써 수백 번은 살폈지만 다시 한 번 쇼핑백 틈새를 살짝 벌려 포장 상태를 확인하곤 기분 좋게 방으로 향했다. 이정후가 오기 전에 미리 케이크랑 선물을 세팅해놓을 셈으로.
‘이렇게 해야 눈에 잘 띄려나? 아님 이렇게……?’
세팅이라 해봤자 고작 두 가지 뿐인 것을, 케이크 옆에 비스듬히 선물을 세워놨다가, 아닌가 싶어 나란히 놓았다가, 앞뒤로 두었다가. 별것도 아닌 일에 기운을 빼다 결국 처음에 했던 대로 사선으로 기대 놓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어서 빨리 이정후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할 말이란 게 뭘까.’
연말연시니까 덕담을 해줄 것도 같다. 무난히 합격증을 손에 쥔 것이라든가,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한다든가. 그도 아니면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된 것이라든가. 이왕이면 후자였음 좋겠다.
‘더 이상 어리지 않아.’
이제 여자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당당하게 그 앞에 서고 싶다고.* * *본가로 향하는 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야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석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본가가 가까워질수록, 이정후의 표정이 어두워질수록, 석우의 가슴속 납덩이도 차츰차츰 무게를 더해갔다.
‘강윤희…….’
생각하자마자 절로 한숨이 나오는 것을 꾹 눌러 잡았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석우는 자기 귀를 의심했었다.
“내일부터 여기서 일할 거야.”
“네? 누가요?”
설마 제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재차 확인했건만 이정후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같았다.
“강윤희.”
언젠가 계집을 다른 방으로 쫓아냈을 때와 같이 딱딱하게 대답하던 굳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
“BD 쪽은?”
석우가 의문을 제기하려 하자 바로 말을 돌렸었던가. 마치 더는 관심 없다는 듯. 덕분에 ‘그 아이를 무척 아끼지 않으셨습니까.’하고 물으려던 말은 공중에서 분해되고, 바로 청룡파로 화제가 전환되었었다.
“자꾸만 대표끼리 독대하고 싶다며 제안해 오고 있습니다.”
갑자기 돈줄이 끊긴 상대방은 상도덕 운운해가며 거세게 반발해왔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으나, 인자한 자선가의 모습에서 순식간에 무자비한 폭력배로 변한 석우의 느릿하고도 느물거리는 한마디 한마디에 그 논리를 잃고 말았다.
“이것들이 단체로 쳐 돌았나, 깡패 새끼들 놀음에 상도덕 찾고 자빠졌네.”
상식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건 구타와 폭력이었다. 수적으로도 형편없이 열세인 상대를 꿇리는 것은 어린 애를 겁박하는 것보다 쉬웠다.
“가서 똑바로 전해.”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붓고 깨진 놈들 중에 그나마 양호한 놈의 머리채를 쥐어 치켜들고 경고했다.
“해 넘기기 전까지 다 갚지 않으면,”
“…….”
“한 놈도 남김없이 공구리쳐버릴라니까.”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한마디로 그냥 죽으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그게 3일 전 일인데 벌써 오늘이군.’
석우가 예고한 ‘해 넘기기 전’의 마지노선인 올해의 마지막 날, 그 날도 벌써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아직 BD가 돈을 갚지 못했을 때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앞으로 윤희의 거취에 대해서만 언급되었을 뿐.
마침내 현관에 당도했을 때, 다시 한 번 농도 짙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제 속이 이럴진대, 저 속은 어떨 것인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계속 창문에만 매달려 있던 윤희는 멀리서 들려오는 시동 소리에 얼른 거울 앞으로 달려가 매무새를 정리했다. 오랜 시간 발레로 다듬어진 몸매가 돋보이는 흰색 플레어 원피스에 언젠가 최환의 생일에 하라며 이정후가 직접 걸어주었던 진주 귀걸이를 했다. 서툴지만 정성스레 펴 바른 붉은색 립스틱도 한층 성숙한 분위기를 더했다.
‘마음에 들어 할까?’
최대한 활짝 웃으며 인사한 후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올려다본 이정후의 얼굴은 어떤 이유에선지 차갑기만 하다. 서늘한 눈초리에 그만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어느 밤의 이정후가 겹쳐졌다. 그때의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히 펼쳐지는 걸 애써 외면하느라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어, 저, 새해 축하하려고, 그러니까, 12시 되면, 준비했는데…….”
온몸을 덮쳐오는 섬뜩한 느낌에 준비한 말을 늘어놓는 입술이, 선물을 전하기 위해 집어 드는 손이, 이정후에게 향하는 발이 덜덜덜 떨렸다.
“그 동안 돌봐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 하고 싶은데, 어려운 말도 아니건만 목구멍에서만 맴돌 뿐, 왜 쉽사리 소리가 되어 나오질 않는지.
“강윤희.”
언젠가도 한번 들었었던, 성을 붙여 냉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불길한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안다. 저를 또다시 내치려 함을. 그러고 보니 그 일이 있은 후 꼭 일 년 만이다. 그가 말했던 ‘일 년만’의 의미가 이것이었나. 왜, 어째서.
“내일부턴 Ange noir에서 지내도록 해.”
Ange noir, 익숙한 단어인데 지금은 왜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 뭐였더라, 아, 그래, 검은 천사, 그를 부르는 이름, 그리고 또, 맞아, 그래. 최환이 보여줬던 사진 속, 그가 운영한다는…….
‘어……?’
이정후의 말이 의미한 바를 깨달은 순간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진, 진짜로요?”
“…….”
“정말, 정말이에요?”
“…….”
“아니, 아니죠? 그런 거 아니죠?”
놀리는 거였으면 좋겠다. 제가 심각해지는 꼴이 보고 싶어 잠시 장난쳐본 거라고. 그럼 저는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초에 불을 붙일 텐데. 진심만 아니라면 그런 장난쯤, 얼마든지 당해도 된다고 웃어 보일 텐데. 하지만 거듭되는 질문에 대한 무언의 응답으로 알 수 있다. 번복은 없을 거라는 것을.
“석우. 나머진 알아서 처리해.”
끝내 등을 보이는 이정후를 보자, 간신히 지탱하던 다리의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 말 없이 문가에 서서 이 모양을 지켜보던 석우가 다가와 일으켰다.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저를 붙잡은 석우를 거세게 뿌리치고 박박 기어가 돌아선 이정후의 다리를 두 팔로 꽉 그러안았다.
“내일이라면서요. 내일부터잖아요. 오늘은 그냥 같이 있으면 안 돼요?”
“…….”
“같이 있어 주세요, 제발……!”
흐느낌에 목소리가 묻혀, 몇 번이고 목울대를 쥐어짜 빌었다.
“오늘만, 오늘만이라도, 네? 내일부턴 하라는 대로 말 잘 들을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네?”
간절하다 못해 애가 녹아 끊어질 것 같은 간청에도 이정후는 미동조차 없었다. 석상이라 한들 이보다 더 견고할까. 결국 먼저 무너져 내린 건 윤희다. 다리를 꼭 붙들었던 팔에서 힘이 풀리고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싸늘한 지시가 떨어졌다.
“데리고 나가.”
이미 반은 실신한 채 엎어진 윤희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나가버린 뒤엔 흐느낌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