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8
08
“안 돼, 바로 가봐야 해.”
“하나만 마시고 가자. 응?”
대답 없이 시계만 내려다보던 윤희의 모습에 오늘도 안 되려나 싶었는데, 망설이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빨리 마시고 가야 해?”
“알았다니까.”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이대로라면 훨훨 하늘을 날 것만 같다. 특활 활동을 같이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혼자서만 수십 번을 애태운 채 한 학기가 지났다. 이번 방학은 참 길고도 지루하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정확히 이틀째, 무용학원에서 개인 교습을 받는 강윤희와 마주쳤다.
“어? 너 여기 다녀?”
“응, 너도?”
알고 보니 한참 전부터 같은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강습 시간이 달라 마주치지 않았을 뿐. 이번 방학 때 학기 중에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레슨을 늘렸다고 했다. 덕분에 함께할 기회가 늘었다.
‘우린 정말 어떤 질긴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는 거라고. 우연의 일치가 계속되면 그건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 운명 아닐까.
“뭐 마실래?”
“나, 잘 몰라, 이런 거.”
집안이 엄한지 또래 친구들이 자주 가는 이런 생과일주스 전문점에도 처음 와봤다는 윤희는, 주문대 앞에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서툰 모습도 환의 눈엔 그저 귀엽게만 비쳤다. 강윤희는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도화지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윤희에게 자기 색깔을 입히고 싶다. 그래서 온전히 저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유욕이 고개를 들었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어때?”
“응! 진짜 맛있어.”
“윤희 너도 제일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것 같아. 엄청 맛있는데?”
시원하게 갈아 넣은 딸기 과즙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윤희의 긍정에 환의 얼굴이 제 손에 든 음료수보다도 붉게 물들었다.
‘아쉽다.’
처음엔 방학 때도 강윤희를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했지만, 지금은 만날 기회가 겨우 일주일에 두 번이라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손만 뻗으면 언제든 윤희에게 닿을 수 있는 지금에도 환은 윤희가 아득하다.* * *“아, 앗! 아읏!”
연신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 다리를 감아 허리를 조이더니, 급기야는 양팔을 등 뒤로 돌려 안는다. 이어 등에 깊게 박히는 손톱에 그만 짜증이 치솟았다. 허리를 세워 팔을 잡아 누르자 뭘 생각하는지 자지러지는 모습에 몸을 뒤로 빼버렸다. 허겁지겁 달려든 여자가 정후의 것을 입에 물고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았다. 겨우 파정한 후에도 불쾌한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키스해주면 안 돼?”
굴욕적인 정사 끝에도 자존심도 안 상하는지 연신 졸라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 앞에서 콧대를 세우며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티를 팍팍 내던 도도한 여자였는데. 지금은 흡사 뒷골목 창녀 같은 모습이다. 언제든 그를 위해 다리를 벌릴 준비가 되어있는. 징징거리는 걸 모른 척하고 옷을 주워들었다.
“또 나만 놔두고 가게? 자기는?”
애교 섞인 콧소리를 뒤로하고 문을 나서는데 석우가 전할 말이 있는지 이쪽으로 오다가 셔츠를 풀어헤친 채 서 있는 그를 보고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언젠가 석우가 ‘여자는 독입니다.’ 라고 했던가. 석우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정사 후 손톱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따끔한 정도의 독이라면.
“무슨 일이야?”
“저쪽에서 좀 보자고 하는데요.”
“저쪽?”
“BD캐피탈이요.”
슬슬 애간장이 타나 보군. 턱없는 이율 경쟁으로 인해 어느덧 30% 밑까지 내려갔다. 이래서는 대부업의 의미가 없다는 건 서로 잘 알고 있다.
“볼 이유 없다고 전해.”
“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참, 온 김에.”
온 김에 방 안에 있는 여자가 채비를 다 하면 데려다 주라고 지시하려는 찰나, 석우의 시선이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는 걸 눈치챘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발레를 끝내고 돌아왔는지 윤희가 인사를 하다가 제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윤희야.”
“네…네?”
다가가서 묻자, 눈앞의 맨살에 윤희의 두 눈동자가 둘 곳을 모르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다 어깨의 손톱자국에 이르러서는 충격으로 입술까지 멍하니 벌어졌다. 어느덧 물기어린 눈망울에 묘한 쾌감을 느끼며 태연하게 물었다.
“발레는 할 만했어?”
“네…….”
더 가까이 다가가자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매일 밤 한자리에 들면서 뭐가 그리 부끄러운 걸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은근히 사이를 벌리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일반적인 다른 여학생들과 자신이 놓인 환경이 다르다는 걸 알았겠지. 차츰차츰 성에 눈떠가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요즘의 윤희를 보는 건 색다르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단순히 벗은 몸만 보고도 이러는데 정사 장면이라도 보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반응할지.
“흠흠.”
석우가 헛기침 소리를 내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아쉽지만 오늘은 이쯤 해둬야겠다.
“이제 그만 들어가 봐.”
공부방을 향해 재게 놀리는 강윤희의 발걸음을 보던 정후가 석우를 대수롭지 않게 불렀다.
“석우.”
“네. 말씀하십시오.”
“종교를 가져볼까?”
“종교요? 갑자기 무슨?”
“이제 슬슬 착한 일도 하면서 살아야지. 남도 도우면서.”
“…….”
“아, 그리고 뒷정리 좀 부탁해.”
이정후의 고갯짓을 따라 무심코 바라본 문틈 사이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희부연 나신이 보였다. 여자는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모습이건만, 더는 그쪽으로 돌리지조차 않는 눈길은 무심하기만 하다.* * *방학이 끝난 후에도 더운 열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승수는 유난히 땀이 많은 편이라 이 더위가 괴로웠다. 진득하니 달라붙어 있는 교복 상의를 떼어내며 부채질을 해봐도 잠시뿐. 뒤에 앉은 최환의 묘하게 거리를 두는 행동도 가뜩이나 찝찝한 승수를 더욱 짜증 나게 만들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이쪽에서 먼저 불러냈다.
“최환. 잠깐 보자.”
“왜?”
“뭔데 너.”
“……뭐가.”
곧바로 따라 나와서도 좀처럼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녀석이 수상할 따름이다. 답답한 건 딱 질색이다. 더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나한테 죄지은 거라도 있어? 왜 자꾸 피하는데.”
“미안하다.”
“……뭐가?”
이번엔 저도 최환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되물었다. 갑자기 뭐가. 왜 미안한 건데.
“나 윤희랑 방학 내내 만났어.”
아, 강윤희 얘기인가. 방학 때는 석우가 데리고 다녀서 도통 그쪽 소식을 알 수 없었는데. 최환을 만나고 있었다니. 의외다. 꽁꽁 싸고도는 거 아니었나.
“알고 보니까, 같은 무용학원 다니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주절주절 이야기할 땐 언제고, 한참을 망설이던 최환이 무겁게 입을 뗐다.
“나 강윤희 좋아해.”
“…….”
“네가 좋아하는 걸 알아도 포기가 안 돼. 그래서 미안.”
그만 맥이 탁 풀렸다. 제 깐에는 방학 내내 고심했을 것이 뻔해 이번엔 오히려 제 쪽에서 미안해지고 말았다. 강윤희 따위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최환이 강윤희와 친해지는 것이 어쩐지 꺼림칙해 아무렇게나 지어낸 핑계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내가 미안하다.”
“응?”
“네가 강윤희하고 친해지는 거 싫어서 그랬어.”
“왜?”
강윤희는 네가 만나기엔 위험하니까. 이정후가 밤마다 품고 자는 계집이니까. 출신을 알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이 다 베일에 가려진 이상한 여자애니까. 하지만 승수가 환에게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네가, 내 친구라서.”
“그게 무슨 소리야. 야, 내가 강윤희랑 친해지면 너랑 안 놀까 봐서?”
“…….”
“권승수, 너 보기보다 유치하네. 초등학생도 아니고.”
마음의 짐을 덜어낸 최환이 환하게 웃으며 승수의 어깨를 툭 쳤다.
“나 얼마나 방학 때 속 끓였는지 알아? 네가 좋아하는 거 아니까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하겠지, 그렇다고 마냥 참자니 속상하지. 진짜, 걔한테 잘해주고 나면 너한테 미안해지고.”
“너는 도대체 강윤희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
“그냥, 첫눈에 끌렸다고 할까? 어딘지 모르게 자꾸 눈에 들어와서. 나, 이런 적 처음이야 진짜.”
그게 왜 하필 강윤희일까. 이유가 없다는 데도 어딘지 모르게 자꾸 석연찮은 건 제 기우일까. 승수의 낯빛이 어두워진 것도 모르고 최환은 신이 나서 떠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내 이상형하고 딱 들어맞기도 하고. 참, 그거 알아? 알고 보니까 강윤희랑 나, 종교도 같다? 저번 주에 우리 성당에서 마주쳤을 때 아, 이건 운명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니까?”
“성당?”
강윤희에게 종교가 있었나. 또한 금시초문이라 잠시 얼떨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