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편린(2)
밤의 악마.
소피아의 설명은 간단했다.
차원 쐐기가 나타난 이변 초기.
당시에는 아직 도시에 주둔 중에 있던 군대와 협회의 협조를 받아. 해당 지역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대를 파견했고.
이들 중에 오직 두 명만이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돌아와 ‘밤의 악마’라는 존재에 대해 증언했다는 것.
이후 군대와 협회가 도시에서 후퇴했고.
외곽의 본가 저택까지 물러난 시점에서 그 존재의 진위를 확인하진 못했으나. 아마 녀석이 차원 쐐기와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 추측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조금 다르지만, 그 녀석과 비슷하긴 하군.’
현우는 꽤 오랜만에 오직 그만이 가지고 있는, 미래의 기억과 경험을 떠올릴 수 있었다.
서울 방어전.
수많은 게이트가 한꺼번에 열려 지옥도로 변모했던 서울에는, 당시까지는 듣도 보도 못했던 수많은 마족들이 새롭게 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밤의 악마’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존재는, 그 당시에 현우와 일부 생존한 헌터들이 경험했던. 최소한 보스 급에 해당하는 힘을 가지고 있던 마족 중에 하나였다.
‘물론, 그 정확한 정체까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다니엘 블랙에게 패배했고. 결국 서울 방어전의 끝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니까.’
결말이야 이미 알고 있다.
현우의 죽음은 천무그룹의 패배와 서울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그쪽의 빌어먹을 놈들이 넘어오기까지 했으니.
그러나.
그 가운데서 현우의 기억만은 유의미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기억들은, 이와 같은 일부 상황에서 여전히 유용했다.
‘밤의 악마인가.’
헌터의 정신을 헤집는 존재.
전생에서 그와 비슷한 녀석은 있었으나. 정확히 ‘밤의 악마’라고 불리진 않았다.
애초에 녀석을 부르는 명칭 자체가 정해질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인프라가 박살나 있기도 했고. 그 존재 역시, 몇몇 헌터들의 증언을 제외하면 명확하게 확인된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몽마, 혹은 서큐버스.
살아남은 일부 헌터들은 ‘그것’을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절대 이름 그대로의 달콤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직접 그것과 마주해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조사해볼 가치가 있겠군요. 도움이 되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정말로 별것 아니라는 듯, 소피아는 고개를 휘휘 저어 보였다.
“더 도움이 되어드려야 하는데. 현재 저희 상황에 그쪽으로 인원을 빼드리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런 걸로 죄송할 것 까지는 없습니다.”
현우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애초에 로마노프 측에게 당장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정보를 얻었으니.
일단 지금으로서는 외신의 편린에 한 발짝 다가간 것만으로도 커다란 수확이었다.
“그런데···.”
현우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로마노프 가문의 태상호법 드미트리 로마노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게 어색한 광경은 아니었다.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장로 중에서도 가장 배분이 높은, 가주에 이어 모두가 인정하는 서열 2위의 인물이었으니.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야 충분하고도 넘치는 수준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현우가 그에게 시선을 돌린 이유는 다름이 아닌 이질감 때문이었다. 뭐, 이상하거나 불길한 종류의 이질감은 아닌. 그저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이질감 말이다.
“뭐,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
현우로서도 그걸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바라보는 시선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일단 현우는 짐짓 모르는 척 드미트리에게 물었다.
“으음, 별것 아니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은 드미트리.
그는 이윽고 누가 봐도 어색한 기색이 다분히 드러나는 낯빛으로 현우를 향해 떨리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저 이번 일에 대해서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을 뿐. 혹여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소.”
“그렇게 공손하실 필요까지야. 그래도 로마노프의 태상호법께서는 저보다 연배도 높으신데···.”
“허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늙은이가 은인에게 연배를 따질 정도로 몰염치한 이는 아니오.”
당연한 소리였다.
만약 방금 현우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로마노프는 전멸을 면치 못했을 터. 여기서 연배를 따지고 들며 예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몰상식한 행동이다.
“자, 이곳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가주, 일단은 은인들을 본가 저택으로 초대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으음, 그렇군요.”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인들께 큰 실례를 범할 뻔 했습니다. 다들 괜찮으시다면 저희 로마노프 본가 저택에 잠시 머물며 피로를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그 후에 이어가도록 하고요.”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는 제안이었다.
***
잠시 후.
로마노프 본가.
그곳에는 대욕장이라는 화려한 시설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우는 홀로 그 거대한 욕탕에 홀로 몸을 담그고 있었다.
이는 소피아의 권유 덕분이었다.
‘이미 다들 보신 것처럼 상황이 여의치는 않지만, 본가의 은인에게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겠지요.’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은 이해하니. 굳이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가능한 부분에서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드리고 싶습니다. 일단은 본가에 대욕장이 있으니. 그곳에서 차례로 여독을 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욕장이라면···.’
‘그냥 겉보기에 화려한 목욕탕은 아니고. 저택이 처음 세워질 때부터. 주위에 존재한 온천을 끌어와 여러 가지 마법적 가공을 하여 만들어낸 시설입니다.’
대욕장이라는 말에 류한나가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아무래도 아까 스노우 오크 군단의 잔당을 소탕하며, 이래저래 찝찝함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럼 우선은 주현우 님부터···.’
물론, 그 사이에 웃지 못 할 일도 하나 벌어지긴 했었다.
‘···대욕장.’
눈을 빛내는 아그네스.
그때부터 현우는 뭔가 묘하게 불길한 감각을 느꼈고. 어김없이 그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았다.
‘저도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예?’
충격적인 것을 넘어.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발언에 로마노프 가문 일동은 물론이고. 곁에 서있던 류한나, 그리고 네크로맨서까지 입을 반쯤 벌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어우, 그거는 좀 노골적이다.’
‘성녀님, 실례가 아니라면 한 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혹시 저희가 알지 못한 사이에 미쳐버리신 겁니까.’
그때 현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류한나의 싸늘할 정도로 굳은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농담이었습니다.’
안면몰수.
매우 뻔뻔하게도 아그네스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그렇게 선언했다.
그게 과연 농담이었을 지는 그녀 외에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지만. 현우에게 있어서는 농담의 여부를 떠나 매우 부담스러운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신화(神火)를 보인 이후로 묘하게 태도가 이상한 방향으로 바뀐 아그네스였고. 이건 현우에게 있어 또 하나의 복잡한 고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당장 고민해봐야 답도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현우는 이내 고개를 가볍게 저어 상념을 털어버렸다.
“하, 씁···.”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현우는 늘어지듯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금 보이는 것은 차원 쐐기로 인해 붉게 물든 하늘뿐이었지만, 평소라면 하늘조차 아주 장관이었겠지.
“혼자 쓰니 좋네.”
뜨끈한 온기가 몸을 감싼다.
돌아보면 그동안 너무 바쁘게만 살아왔다.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은, 현우를 그저 계속해서 앞만 보고 달려갈 수밖에 없도록 등을 떠밀었으니까.
신체의 긴장을 느슨하게 늘어뜨리는 열감 속에서. 현우는 평소라면 생각하지 않았을 여러 상념들을 떠올렸다.
특히, 그 상념 중의 대부분은 과거에 대한 것들이었다. 이번의 두 번째 생에서 경험한 과거가 아니라. 첫 번째 생에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지나온 과거들 말이다.
‘후회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
하지만 이제는 그 과거에 속박되어 있진 않았다. 대부분의 후회들은 이번 생을 통해 전부 씻어낼 수 있었다.
다만···.
딱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곳에 두고 왔다고 생각한 미래가 이제는 과거일 터인 이쪽 세계로 조금씩 넘어오고 있다는 걸까.
네크로맨서, 그리고 주형석.
벌써 두 명이나 되는 미래의 적이 이쪽으로 넘어왔다. 여전히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또 하나.
“외신의 편린인가···.”
현우는 천천히 욕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바로 심연 속에서 만났던 아자토스였다.
물론, 그게 아자토스의 본신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현우가 목격하고 경험한 그 녀석 역시도 편린··· 그러니까 아자토스의 일부이니. ‘외신의 편린’이라는 조건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온통 애매한 것들 투성이군.’
그러나 그 중에서도.
분명하게 아는 것들은 있었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두 가지.
이곳에서 네크로맨서와의 거래를 마치고. 약속대로 그녀에게서 천무그룹 유럽지부에 일어난 사건의 전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
그리고 스위스에 있을 거라 들었던.
다니엘 블랙과의 진짜 마지막이 될 결전을 시작하는 것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주양태 회장의 안위가 걱정되긴 하나.
현우는 그가 자신의 걱정 따위는 필요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대욕장 밖으로 나서는 순간. 현우는 그 앞에서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낯선 기척은 아니었고.
숨지 않고 대놓고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주현우.”
네크로맨서였다.
“하, 씨.”
미간을 찌푸리는 현우.
네크로맨서에게는 현우의 반응이 재미있게 보이기라도 한 건지. 녀석은 비죽,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현우를 향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반응이 묘하네?”
장난기 섞인 질문이었으나.
현우는 대놓고 혀를 차며 그녀의 장난을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거기서 물러날 그녀가 아니었다.
“헤헤, 그 대단하신 천무그룹의 잠룡도. 이렇게 완벽한 미인 앞에서는 부끄러운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긴 하나봐?”
미친년.
현우의 입술이 비틀렸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꺼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딱 한 번이라는 생각으로 폭력에 다다르는 것은 참았다.
주먹 말고도.
네크로맨서를 상대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놀라기 보다는 짜증을 낸 거다.”
“···짜증?”
“그래, 기분 좋게 목욕을 마치고 나왔는데. 눈앞에 바퀴벌레가 지나가면, 누구나 이런 반응을 보이기 마련 아닐까.”
“바···.”
바퀴벌레.
네크로맨서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엄밀히 따지면 언데드의 신체이긴 하지만, 그래도 외형만큼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당연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이건 네크로맨서, 그녀의 심미안이 그대로 반영된. 그녀가 생각하기에 ‘완벽함’에 한 없이 가까운 신체였으니까.
응당 미모 또한···.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영역에 도달한 수준이다.
속된 말로 하면, 이대로 길거리를 걸어도 남자 셋에 둘은 돌아볼 법한 미모를 가진 육체란 말이다.
“이, 이익···!”
네크로맨서는 분노했다.
생기가 돌지 않는 시체이기에 망정이지. 만일 혈색이 있었다면, 벌써 그녀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너,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아주 멀쩡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현우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 태도가 네크로맨서의 심기를 매우 건드리고 있음은 굳이 묻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혹시 고자야?”
“아니, 시체에 관심이 없을 뿐이지.”
애초에 그런 것을 모두 떠나.
저런 음흉한 흑마법사 보다는 나은 여자가 세상에 수두룩하다. 굳이 저런 기분나쁜 녀석에게 설레일 이유 따위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현우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침 좋아진 기분이 녀석 때문에 아주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만약, 녀석과의 거래가 없었다면 이미 진작 출수하여 저 시체를 흙으로 돌려주었겠지.
“이딴 시답잖은 짓거리나 하려고 찾아온 거라면. 이만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고 싶으니. 거기서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꺼져주었으면 좋겠는데.”
“너, 진짜 얄미워.”
“네가 멍청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애초에 이런 꼴을 당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싶은데.”
그건 진심이었다.
그러나 현우는 이렇게 진심이 담긴 말로도. 네크로맨서가 전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연기일수도 있어.’
그녀는 멍청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현우보다도 교활한 면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니. 절대로 녀석의 앞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현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그녀가 괜히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분명히 아까 나눈 ‘밤의 악마’에 대해서 파악한 것이 있어서 찾아온 거겠지.
“새로 알아낸 것이 있다면, 이런 재미도 없는 농담은 여기서 그만두고. 그것부터 빠르고 간단하게 말해라.”
“하, 예리하긴 하네.”
네크로맨서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 ‘밤의 악마’라는 존재 말이야. 나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아무래도 예전 스위스에 나타났던 미래의 나처럼. 그쪽에서 넘어온 것 같거든.”
미래에서 넘어온 마족.
이건, 수많은 변수와 이변이 산재하게 된 이번 회차의 세계에서도. 단 한 번의 전례가 없는 초유의 사태라는 것만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