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편린(1)
노보시비르스크의 자작나무 숲.
여름의 이곳은 비교적 시원한 기후와 빽빽이 자라 있는 자작나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여유로운 피서를 즐기는 명소였다.
어디 그 뿐인가.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되면, 땅과 자작나무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이 세상이 아닌 것처럼 환상적인 자연의 신비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며칠 사이 수북이 쌓인 눈에도 불구하고. 자작나무 숲의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사뭇 다른 감정을 자아내게 만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끝이 없군.”
로마노프 가문의 태상호법.
드미트리 로마노프는 주름으로 가득한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탄식에 가까운 말을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방어선을 조금 물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자칫 돌파당할 위험이 있을 겁니다.”
이반 블론스키.
비가문 출신 헌터 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 로마노프에 충성을 바친 그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드미트리에게 요청했다.
“안타깝지만 그럴 수는 없네.”
“하지만, 태상호법님···.”
“방어선을 여기서 조금만 더 뒤로 물리게 된다면, 저택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져 버릴 걸세. 만약, 한 마리의 마족이라도 놓쳤다간 비전투원이 몰살당하는 끔찍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어.”
그의 대답에 이반은 침음성을 흘렸다.
자칫 잘못되어 비전투원이 몰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여기서는 전략적으로 옳은 판단을 내리는 편이 생존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외람된 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는 저택을 포기한다는 선택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크흠···.”
드미트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냉정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반의 말이 맞았다. 애초에 비전투원을 보존하기 위해 전투에서 위험을 무릅쓴단 전재부터가 틀려먹었겠지.
하지만···.
냉정과 냉혈은 다르다. 그렇기에 군대와 협회가 도망쳐버린 이 지옥에 로마노프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네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네. 그러나 미안하네만,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걸세.”
“감히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본가의 저택엔 민간인들이 머물고 있고. 가주님께서 그들에게 안전을 약조하셨으니. 여기서 물러나면 그 약조를 깨는 꼴이 되지 않겠나.”
“···.”
이반은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아무리 냉정하고 논리적인 판단이라 해도. 가주의 명령이 우선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여기서 물러나는 것 역시, 엄밀히 따지면 그저 시간을 버는 행위에 불과할 테니까.
“또 옵니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닌지. 떨리는 외침이 그들에게 잠시 주어졌던 대화의 여유마저 끝났다는 것을 알렸다.
쿵─ 쿵─ 쿵─
질서 있는 발울림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스노우 오크의 군단이었다.
“꾸에에!”
귓가에 거슬리는 괴성.
가장 선두에 서서 이들을 이끌고 있던 스노우 오크의 우두머리. 워로드가 내뱉은 전투함성에 대열을 유지하고 있던 로마노프 가문의 헌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으으···.”
“끄, 끝이 없겠어.”
이미 몇 시간에 걸친 전투를 경험한 바.
안 그대로 이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란, 버틸 수는 있어도 계속해서 정신을 갉아먹기 마련이니.
“큭···.”
로마노프의 가주 소피아.
그녀는 어금니가 으스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이를 세게 악물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도 너무 좋지 않았다.
‘이 이상 물러날 곳은 없어.’
그녀의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전멸.
그녀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마땅한 전략도 계획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만일 운이 좋아 저 군단을 모조리 토벌한다 하여도. 결국, 그 다음이 몰려올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죽음은 두렵다.
하지만 그녀는 로마노프의 가주이며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그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 두려움에 몸을 맡겨 이곳에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최대한 가까이 올 때까지 대기하세요. 녀석들이 수적 우위를 활용하기 어렵도록, 우린 합격진을 활용해서···.”
그런데 그때.
“저, 저기!”
누군가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고.
덕분에 이들의 시선은 잠시나마 하늘을 향했다. 그리고 곧, 모두가 뜻밖의 광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뭐야, 저거?”
분명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별이 떨어지고 있다. 그렇게 착각할 만큼 밝은 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이쪽으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이들은 빛의 정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순백의 유성.
그건 마치 밤하늘을 가르듯, 스노우 오크 군단이 득시글거리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꽈아앙─!
터져 나오는 폭음.
그리고 그 즉시.
유성이 떨어진 지점을 기점으로 온후한 불꽃이 파도처럼 일어났다. 화아악! 주위의 공기를 거세게 밀어내며 연소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불꽃.
“꿰에엑!”
미처 불꽃의 영향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개 중대 규모의 스노우 오크가 불꽃에 휘말렸고. 저마다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몸부림도 잠시.
이들은 불과 몇 초 남짓한 사이에 전신의 수분이 끓어오르며. 뼈나 피부 한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극한에 달한 열기.
그리고 저항조차 불가한 증발.
“허어···.”
태상호법 드미트리 로마노프는 연륜에 맞지 않게. 마치 아이처럼 입을 반쯤 벌리고 탄성을 흘리고 말았다.
이건, 보는 이로 하여금.
잠시나마 처한 상황마저 잊고 넋을 잃은 채 빠져들게 하는 광경이었고. 아무리 연륜이 쌓인 호법 장로들이라 해도. 그 법칙에서는 절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곧···.
사그라든 순백의 불꽃 너머로 한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깔끔한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한 명의 사내였다.
드미트리와 소피아.
그리고 이반 또한, 그 사내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평온한 인사.
주현우가 이곳에 도착했다.
***
‘이 정도면 멋진 등장인가.’
현우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겠으나. 처음으로 신화(神火)를 다른 이들 앞에서 선보이는 자리다.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
그리고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스노우 오크 군단의 반응까지. 이만하면 신화의 첫 데뷔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현우는 가볍게 전율하고 있는 로마노프 가문의 헌터들을 향해. 격려의 의미로 오른 주먹을 치켜들어 보였다.
“오···!”
“저 스노우 오크 군단을 한 번에!”
“사, 살았어! 천무그룹의 지원이 왔다고!”
헌터들 사이에 화색이 돌았다.
이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현우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돌아서려던 찰나.
“저길 봐!”
누군가 또 소리쳤다.
“서, 성녀다!”
허공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성녀, 아그네스 그레고리오가 낙하. 아니, 서서히 활공하여 이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마치 전설 속의 천사와 같은 네 장의 날개가 돋아 있었다.
‘저건 또 처음 보는군.’
저런 것도 할 수 있었던 건가.
현우는 그녀의 등 뒤에서 펼쳐진 네 장의 날개를 보며 새삼스런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용사님!”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외친 아그네스.
“정말 멋진 일격이었습니다!”
그녀는 환호성을 지르며 주위의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물론 그건, 비꼬는 소리 따위가 아닌.
순도 백 퍼센트의 순수한 진심이 담긴 환호성이었겠지만. 현우는 왠지 모르게 안면이 화끈 달아오르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씁···.”
입맛이 쓰다.
현우는 뻗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회수하며 눈을 찡그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었다간 그녀에게 쏟아진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뻔했으니.
바로, 지면을 박차고 스노우 오크 군단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건 절대 부끄러운 상황에서 도망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이고.
일렁이는 신화로 전신을 감쌌다. 이글대는 순백의 불꽃 속에서 현우는 가볍게 스노우 오크 군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로 여기부터.’
창천무는 없다.
창천신공을 기반으로 그가 새롭게 완성시켜 나가고 있는, 그만의 신공과 무학이 존재할 뿐이다.
용비어천(龍飛御天).
순백의 불꽃이 현우의 팔목을 타고 응집. 이윽고 네 줄기로 화하여 손을 뻗은 기세 그대로 허공을 향해 마치 폭죽과 같이 솟구쳐 올랐다.
“으음···.”
드미트리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작은 탄성을 흘렸다.
만일, 자신들이었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거라 확신되는 마족의 군단이. 주현우의 전진만으로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주먹을 당겼고.
그 움직임에 따라 거대하다고 밖엔 표현할 길이 없는 힘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곧, 드미트리가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키는 순간···.
콰아아─!
솟아오른 네 줄기의 불꽃이 순백색 용으로 변화하더니. 빠르게 지상 쪽으로 방향을 틀어 혼란에 빠진 스노우 오크 군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네 번.
연달아 터져 나오는 폭음과 함께. 눈앞의 스노우 오크 군단이 삽시간에 폭발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경이로운 광경.
드미트리는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폭발에 손을 들어 눈앞을 가렸다. 그러나 피부가 아려오는 강대한 힘은, 눈을 가린다 해서 느껴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대단한 성취로군.’
그는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현우를 보았던 것이 얼마 전이었는지.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게 아무리 오래 되었더라도 채 1년이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설령 그 사이에 10년이 지났다고 해도. 드미트리는 그의 성취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나 그가 품은 경탄은, 경악의 수준 까지는 발전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심 그는 주현우의 성장이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주양태 회장의 손자.
그것 하나만으로도 주현우의 폭발적인 성장에는 개연성이 생긴다.
아마도 주현우, 그가 천무그룹 본가의 혈통 중에서도. 주양태 회장의 피를 누구보다 가장 진하게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질 지도 모르겠어.’
아니, 어쩌면 이미.
그가 미처 알지 못한 사이에 뒤집혀버린 후일 지도 모른다.
***
상황이 일단락 된 후.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소피아.
그로부터 한동안 그녀는 감사 인사와 함께. 현재 로마노프 가문과 노보시비르스크가 처한 상황을 현우에게 설명했다.
“···그렇게 된 겁니다.”
특별할 거는 없었다.
천마산과의 차이는, 이쪽은 군대는 물론 협회까지 후퇴해버렸고. 로마노프의 힘으로 사슬을 파괴하지 못해 일이 이렇게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주현우님 덕분에 방금의 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니. 지금까지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녀석들은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잠잠할 겁니다.”
“확실합니까?”
“예.”
고개를 끄덕이는 소피아.
“그동안 낮 시간에는 녀석들이 습격하지 않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무슨 이유에서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밤에만 나타나 저희를 습격하더군요.”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하지만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 미안한데.”
네크로맨서가 끼어들었다.
“우리 목표는 로마노프 가문의 지원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너희들에게는 협조를 요청하고 싶거든.”
“···협조라?”
소피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현재 로마노프 가문의 상태는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 도시에서 대피해온 민간인들까지 대거 보호하고 있는 상황이니.
“만일 그것이 주현우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면. 우리 가문 측에서도 최대한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것이 아니라 그쪽, 블랙 가문 혈족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한다면. 재고해볼 여지도 없이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은 나도 너희를 도와준 사람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은인에 대한 취급이 너무 박한 거 아니야?”
입을 삐죽 내미는 네크로맨서.
그러나 소피아는 오히려 더욱 정색하며 굳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대할 뿐이었다.
“현재 로마노프 가문이 이런 상황으로 전락한 근본적인 원인은 블랙 가문의 지분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여 블랙 가문 출신의 흑마법사인 당신에게 호의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아니, 그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기는 했는데. 막상 이렇게 면전에서 박대당하니까. 이건 또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은걸.”
네크로맨서는 쩝,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녀도 믿는 구석은 있었다.
안 그래도 로마노프 가문의 반응이 이럴 것 같아서. 그에 대한 보험으로 일찌감치 주현우를 이번 일에 끌어들였으니 말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합니다. 저희 천무그룹은 저 녀석과 거래를 했습니다. 일단은 이곳에 강림한 외신의 편린이 저희 최우선 목표죠.”
“외신의 편린···.”
알고 있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현우의 추측대로 소피아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저로서는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음,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현우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알고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로마노프 가문의 안위를 확인한 후. 이들이 이변에 대해 수집한 정보를 통해. 짐작이 가는 부분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아.”
그때, 소피아가 뭔가 떠오른 듯한 소리를 냈다.
“말씀하시는 존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짐작 가는 것이라면 한 가지 있습니다.”
“짐작 가는 거라면···.”
현우의 물음에 소피아는 살짝 인상을 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밤의 악마.”
왠지 모르게.
현우는 그 이름에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