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ion Day 1 Mana Burst RAW novel - Chapter 151
151화 환상(1)
노보시비르스크 상공.
페일 라이더의 탑승구 위에서 현우는 차원 쐐기의 상태를 살폈다.
일전, 천마산에 나타났던 것과는 다르게 지면에서 자라난 수많은 덩굴 줄기들이 사슬을 단단하게 휘감고 있었다.
“그러니까.”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진지한 표정으로 덩굴을 하나하나 살피는 네크로맨서가 있었다. 그녀는 현우가 말을 걸어오자 눈을 깜빡이며 이쪽으로 시선을 향해왔다.
“네, 말은 저 덩굴 자체가 ‘밤의 악마’로 불리는 존재라는 건가.”
“맞아.”
“추측과 확신, 둘 중에 어느 쪽이지.”
“확신에 매우 가까운 추측.”
백 퍼센트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현우는 눈을 얇게 뜨며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큼은 그녀도 어쩔 도리가 없는 건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현우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만약 그 추측이 틀렸다면?”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서 완벽한 확신은 아니라는 거군.”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으니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현우는 녀석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었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 달리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차원 쐐기를 휘감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노보시비르스크 도시 전체로 뻗어 나온 덩굴들이 보였다.
덩굴들이 뻗어 나온 중심은 역시, 차원 쐐기가 꽂혀 있는 지면이었다. 한눈에 봐도 그 중심부라고 생각되는 부분에는 맥동하는 붉은 심장처럼 보이는 기관이 존재했다.
“저런 것이 본체였던 건가···.”
현우는 제 턱을 쓸어내렸다.
과연, 이런 것이 ‘밤의 악마’의 본채였다면. 과거 서울 방어전 당시에 녀석의 존재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차원 쐐기 덕분에 평범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외부로도 심상치 않은 것이 훤히 드러나 보이지만.
전생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는 그리 이상하게 보일만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가령, 서울 전역으로 뻗어 있는 지하철이나 하수구 어딘가에 저런 본체를 숨기고만 있었다면.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그때가 아니라고 해도. 찾아내는 것은 여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주 교활한 녀석이군.”
현우는 가볍게 혀를 찼다.
하지만, 한 가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의문점은, 그 ‘밤의 악마’라는 마족과 외신의 편린의 관계다.
두 가지를 연관시키기엔 특별히 관련이 있어 보이는 증거도 없고. 현우가 알고 있는 미래의 경험으로서도 딱히 결부되는 지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뭐, 그건 차차 알게 되겠지.’
정답이 무엇이 되었든.
당장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현우는 네크로맨서를 돌아봤다.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좋아, 말해봐.”
네크로맨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의 의사를 물어본 것이 아닌. 그저 일방적인 통보였을 뿐이기에. 만일 거절했다고 해도 물어보긴 했겠지만 말이다.
“너랑 사막 투기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꽤나 시간이 지나간 일.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당시의 상황을 잊진 않았다. 특히, 네크로맨서 본인에겐 굉장히 강렬한 만남이었을 테니.
“···음.”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겠지.
현우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한 듯,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당시 현우에게 농락당했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너는 내게 신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지. 그게 여전히 네 목표라면, 목표를 이룬 다음에는 어떻게 할 셈이냐.”
“흐음···.”
턱을 쓸어내리는 그녀.
아무리 그녀라고 해도 지금 만큼은 장난을 칠 마음은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글쎄.”
“어중간한 대답을 꺼낼 생각이라면 관두는 편이 좋을 거다. 이 질문만큼은 어물쩍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나도 마음이야 그러고 싶은데. 솔직히 말해서 그 이후의 일까지는 아직 생각도 안 해봤거든.”
“그게 납득이 된다고 생각하냐?”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푸욱 한숨을 쉬는 네크로맨서.
그녀는 도리어 자신이 답답한 건지. 제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어뜨리더니.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유하자면 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개미에 불과해. 그런데 당장 개미에 불과한 내가. 사람이 되고서 하고 싶은 일을 어떻게 알겠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선뜻 이해가 가는 비유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달리 추궁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듯했다. 일단, 현우는 가만히 침묵을 고수하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특별히 켕기는 것은 없는 걸까.
네크로맨서는 여전히 능청스러운 얼굴로 히죽,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아, 그래도 약속은 지킬 테니. 다른 건 몰라도 그거 하나는 걱정 안 해도 돼. 어차피 내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거든.”
“···그거면 충분하겠군.”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아직, 열려 있던 페일 라이더의 탑승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밖에서 몰아치던 거센 바람이 현우의 귓가를 스쳤다.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성녀, 아그네스 그레고리오가 물었다.
현우는 대답 대신 주변에 신화(神火)를 피워 올렸다. 휘몰아치는 거친 바람 속에서도 순백의 불꽃은 흔들림 없이 타올랐다.
이윽고···.
드드득.
그의 힘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차원 쐐기를 휘감은 덩굴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현우를 포함한 일행은 눈앞에서 바로 덩굴 전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시나 반응한다.’
놈이 외신의 편린이 확실하다면, 외신과 직접 관계되어 있는 이 신화(神火)에 반응하지 않을 리가 없다.
마치 일종의 식충 식물처럼.
붉은 심장처럼 생긴 기관을 감싸고 있던 덩굴이 벌어지며 내부를 드러냈다. 현우는 심상치 않은 힘의 파장이 그 기관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으음,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면. 저 덩굴로 이루어진 신체 중에서도. 어디를 최우선으로 공략해야 할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겠네.”
네크로맨서가 중얼거렸다.
그 의견만큼은 현우로서도 이견 없이 백 퍼센트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녀석이 자신의 약점으로 보이는 부위를 드러낸 것 자체는 경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당장의 선택지는 두 개다.’
직접 내려가 접근전을 펼치거나.
아니면 원거리에서 페일 라이더의 포격을 이용하여 탐색전을 펼치거나.
보다 안전한 쪽은 후자겠으나.
아마 페일 라이더의 포격으로는 녀석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긴 어렵겠지.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고민이 무의미할 정도로 좁혀진다.
“우선, 적당한 거리에서 녀석의 전력을 탐색하고. 충분히 파악한 후에 접근하는 걸로 가죠.”
“예,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류한나가 대답했고.
아그네스와 네크로맨서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전략이 이리도 간단히 정해졌으니. 이제는 실행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럼···.”
현우가 결정을 내리려던 그때.
“···!”
아그네스가 무어라 소리치려 했고.
이들은 전부 동시에 귓가를 무언가 휘익,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그건, 절대 착각 따위가 아니었다.
‘뭐지?’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마치 눈을 깜빡였던 것처럼. 어느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온통 회백색의 공간 속, 곁에 있던 모두가 그 공간 속으로 끌려 들어온 모양이었다.
현우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본래 ‘밤의 악마’의 본채로 생각 되었던 덩굴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현우가 알고 있던 광경은 없었다.
대신, 회백색의 공간이 서서히 세로로 갈라지며. 무언가가 무(無)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허.”
인식하는 순간.
오싹, 전신의 피부위로 소름이 내달렸다. 저게 무엇인지 이해하진 못했으나. 본능이 위험하다고 외치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거대하고 창백한···.
단지 먼 거리에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고, 머리가 아찔하게 떨리는 것만 같은 눈동자였다.
그리고 힐긋 바라본 다른 이들의 상태는 현우보다 심각했다.
일단, 네크로맨서는 겨우 저항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아그네스와 류한나, 둘은 이미 정신을 놓아버린 것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거대한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영혼이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모습. 현우는 즉시, 뇌리에 한 가지 추측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환각!’
몽마, 혹은 서큐버스.
녀석이 그렇게 불렸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눈치조차 채지 못한 사이에 헌터를 환각 속으로 몰아넣고, 그 환각 속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다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하지만 이 정도 거리에서 전조도 없이 환각에 빠뜨린다니. 이건 예상을 뛰어넘은 것은 물론, 완전히 규격 외의 능력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은 당했다.’
아그네스와 류한나.
현우의 기억대로라면 저 녀석의 환각은, 절대 자력으로 빠져나올 틈을 주지 않는다.
녀석에게 홀린 이들의 말로는 조금씩 다르긴 했으나.
누구도 녀석의 환각을 극복하지 못했고.
물이 없는 곳에서 익사하거나. 자해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쳐버리기 일쑤였다.
그 능력이 훨씬 강해진 지금.
현우가 알고 있는 결말이 달라지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야.”
현우는 네크로맨서를 불렀다.
그녀도 환각에 저항하는 도중이라 여유는 없어 보였지만. 현우의 부름에 재깍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긴 했다.
“허튼 짓거리 하지 말고 기다려라.”
“으, 엉?”
의아한 목소리.
그러나 환각에 저항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그녀는 상세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깐 다녀올 테니까.”
그 한 마디와 함께.
현우는 환각에 저항하고 있던 힘을 완전히 풀어버렸고. 전신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뚝, 하고 신호가 끊긴 것처럼 시야가 사라졌다. 그게 현우의 의식이 마지막으로 느낀 것이었다.
***
“끙···.”
지끈거리는 두통.
마치 두개골 안에서 쇠구슬이 이리저리 부딪히는 느낌이다. 현우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의식을 잃고 있던 걸까.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쯤.
욱신, 두통이 사고를 조이듯 엄습해왔다. 뭔가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짙은 안개가 끼어 있는 것처럼 사고가 명확하게 떠오르질 않았다.
그리고 그때.
현우의 곁에 누군가 다가왔다.
“도련님.”
누구였더라.
의문을 떠올림과 동시에 현우의 뇌리에 그녀의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류한나.
천무그룹에 소속된 정예 헌터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무영대의 2대 대주.
불과 한 달 전이었나.
전대 대주인 검존 구동철에 이어 새롭게 무영대의 대주 자리에 올라선 그녀는, 무영대의 임무뿐만 아니라. 여직 현우의 심복으로서 역할까지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이제 나가보셔야할 시간입니다. 다들 도련님이 오시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침대.
대체 언제부터 누워 있었던 거지. 현우는 아리송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뭔가 정말 오랜 시간동안 잠에 들어 있던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 약혼자이신 아그네스님께서도 벌써 계승식장에 와계십니다. 도련님만 오시면 바로 계승식을 시작할 모양이더군요.”
계승식.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 듣는 소리다. 현우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을 깜빡였다. 뭔가 눈꺼풀이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계승식?”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한 걸까. 곧, 류한나가 이쪽을 돌아봤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설마, 아직도 잠이 덜 깨신 겁니까. 오늘은 도련님께서 새롭게 천무그룹의 회장 자리를 물려받는 날이잖습니까.”
“그···.”
현우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눈꺼풀이 무겁고 머릿속은 쇠구슬이 마구 굴러다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계승식이 오늘이라는 것에 들떠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일까.
“···그랬던가요.”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현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두통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태가 별로 안 좋으신 것 같군요. 그래도 계승식은 금방 끝날 테니. 조금만 참으시면 될 겁니다. 본래 회장님께서도 이런 행사는 질색하시니. 무슨 일이 있어도 길게 끌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건 그렇죠.”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주양태 회장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던가. 그래서 얼마 전, 현우가 의식을 잃고 있을 때에도···.
지끈─
머리가 쑤셔왔다.
아니, 단순히 쑤셔오는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의념(意念)의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심상 너머에서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한 순백의 불꽃이 뇌리에 가득히 퍼져 있던 안개를 순식간에 증발시켰다.
환상.
겨우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 이후로는 모든 것이 명명백백해졌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현우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오직, 이것만이 그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는 것처럼. 그저 눈앞에 실존하는 ‘가짜 현실’로써 살아 움직일 뿐이었다.
“···재밌네.”
현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게 누구의 환상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 빌어먹을 환상을 벗어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 그것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