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 Instruction Manual RAW novel - Chapter (1703)
회귀자 사용설명서 1703화
중원무림빙의(108)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수님.”
“…….”
“형수님….”
뭔가 절절하게 들려오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절… 절절하자너. 후회와 미련이 잔뜩 깃들어 있자너.’
당연히 목소리에는 대답해 주지 않는다.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울음소리가 무릎에 파묻혀 제대로 들려오지 않고 속에서만 맴돈다. 수도꼭지라도 틀어놓은 것마냥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왜 이렇게 서러운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니, 이미 모련은 답을 알고 있을지도…. 아마 그에게 서운했던 것이리라. 모련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용화연을 보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섭섭한 마음이 올라온 것이리라.
‘바보 같은 짓이었어. 내가 뭐라고….’
그래.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한낱 시녀 따위가… 뭐라고….’
괜스레 혼자 들떠서 두근거렸던 것도,
갑자기 주방으로 들어가 그 소란을 피웠던 것도….
내가… 내가 만든 식사를 드셔주기를 바랐던 것도….
전부 다. 그래, 전부 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처음부터 도련님은, 아니, 진가주님께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데….’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허드렛일….’
“…….”
‘허드렛일…….’
마치 모련의 삶 전체를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던지라 더욱더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모련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다. 모련은 한낱 시비에 불과했고, 그는 이 커다란 세가를 이끄는 가주가 아니었던가.
만약 성모님께서 와주시지 않으셨다면,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큰소리치고, 잘났다는 듯이 훈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안에 성모님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가… 모용화연의 그림자 속에 가려진, 모련을 봐줄 거라 생각이라도 했던 걸까. 정말로 그가 모련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걸까.
자신의 한심함에 커다란 숨이 나올 수밖에 없는 시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모련 소저.”
“?”
“…….”
“도… 도련님?”
“…….”
“여기는… 어떻게….”
“…….”
“…….”
“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네… 네? 죄송하다니요… 갑자기….”
“방금 했던 무례한 발언에 대해…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네?”
“…….”
“…….”
‘어이. 어이. 진심이냐고. 이렇게 쉽게 함락되는 게 말이 되는 거냐구!’
“…….”
‘뭐 별거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바로 백기 올리는 거냐고….’
물론 완전히 함락시켰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녀석은 단지, 앞전에 했던 허드렛일 발언을 사과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나름대로 제정신이 박혀 있는 놈이니만큼 본인이 제대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던 것뿐이다. 이전의 실수를 바로잡고 싶었을 뿐이다.
“아… 아니요. 도련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제가 형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봐. 바로 다시 형수님으로 선회하자너.’
“…….”
‘근데 그거 알아? 방금 걸로 살짝 기분 풀렸어. 모련이라고 불러준 걸로 기분 풀렸다구….’
“…….”
조금이지만 우울한 기분이 살짝 풀린다. 눈앞의 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남자가 표현에 서투르다는 것은 안다. 앞전에 했던 무례를 사과하는 것이 아마 한계였을 것이다. 게다가….
‘모련이라고… 불러주셨어.’
“…….”
‘가주님께서… 모련이라고 불러주셨어!’
형수님이 아니라 모련 소저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모련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로 인정한 것이다. 물론 확대해석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지만 모련이라는 이름을 그에게 각인시켰다는 것은….
‘기뻐….’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되새기자 괜스레 배시시 미소가 흘러나왔다.
살짝 웃어주자. 녀석도 안심이 되는 것 같은 얼굴을 선보이고 있었다. 한 번 더 텐션업 시키고 입을 열어본다.
“저… 도련님! 식사는….”
“하고 왔습니다.”
“네? 아… 드, 드시고 오셨다고요?”
“네. 오랜만에 참으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 내가 무조건 맛있을 거라고 했자너. 이거는 진짜 맛없을 수가 없다니까?’
“정말인가요?”
“네.”
다시 한번 기분이 좋다는 듯이 배시시 웃어주기.
이번에는 녀석도 살짝 미소 지은 것 같았다.
‘달다.’
분명히 미소 지었다.
‘달달한 분위기다.’
이건 틀림없이 썸 타는 분위기다. 분명히 확신의 그린라이트다.
때마침 살짝 내 옆에 앉은 녀석. 마음 같아서는 손깍지를 끼고 살짝 어깨의 머리를 기대고 싶었지만 이게 무리수라는 걸 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은 절대 중원 감성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두근거린다. 녀석도 중원인이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서 두근거릴 수밖에 없다.
저 나이 될 때까지 이성과 제대로 말도 섞어본 적이 없는 놈이었기 때문에, 그냥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모련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초야 때와는 다르다. 그때 녀석은 모용화연과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모련과 함께 있다.
어색함을 지우기 위함이었던 걸까. 흔치 않게 진청운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곳은….”
“아. 자주 오는 곳이에요. 이런 말씀드리기는 부끄럽기는 하지만…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나, 홀로 삭혀야 할 일이 있을 때 이곳에 오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보세요. 정말 예쁘지 않아요? 복잡한 생각도, 답답한 마음도, 한순간에 싹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
“저는 이렇게 십만대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하늘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렇군요….”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했었거든요.”
“…….”
“그때는 제가 왜 이 장소에서 보이는 풍경을 좋아했는지 몰랐었는데….”
“…….”
“지금 생각해 보니 왜 그랬던 건지 알 것 같아요.”
“그 이유가 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어렴풋이 알고 있었나 봐요. 성모님이 제게 들어오실 거라는 걸요.”
“…….”
“그래서 그렇게 좋아했던 건가 봐요. 적어도 이 풍경은 성모님이 평소에 보시던 풍경이 아니잖아요. 온전히 모련이만의 것이죠. 여기는 제가, 요녕의 모용세가의 모용화연이 아니라, 신강의 십만대산 아래에 있는 모련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어서… 그래서 좋아했던 건가 봐요.”
“역시나 많이… 혼란스러우신가 보군요.”
“죄송해요. 도련님. 제가 너무 어리광을 부리고 있죠…?”
“…….”
“다른 사람들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일 텐데… 도올장원의 시비였던 제가, 이렇게 비싼 비녀에… 비싼 장신구에… 고급스러운 옷에… 좋은 환경에서… 전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데… 매번 이렇게 지치지도 않고 제 신세나 한탄하는 것 같아서… 도련님께서 들어주시기 불편하실 것 같네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네?”
“저도… 저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
“앞으로는… 저도, 이곳에 자주 찾아오게 될 것 같군요.”
‘아하. 너도 좀 공감하고 있구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본다. 속에 담아놨던 말을 참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결국에는 저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리는 것이 국룰. 눈을 꼭 감은 채로 큰 용기를 내어보자.
“그럼… 그럼 같이 오면 되겠네요.”
잠깐 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진청운은, 이제는 완전히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네. 그리하면 되겠군요. 함께 옵시다.”
“…….”
“…….”
“…….”
“…….”
“…….”
당연하지만,
진청운이 모련과 함께 비밀장소로 함께 올라오게 되는 일은 없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의 닷새 뒤, 오늘.
모련은 잠깐 동안 천마신교를 떠날 테니까.
‘준비는 얼추 다 된 것 같고….’
“…….”
‘분명히 궁기신녀가 혈패왕, 천음마녀, 그리고 진청운이 함께 김현성을 치겠다고 했었지?’
미안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진청운은 곤륜산에 올라가 뭔 이름 모를 마두들과 함께 김현성과 세기의 대결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차르갈 칸에게 납치된 모련을 구하러 올 것이다.
물론 놈이 순환자들의 숙원을 저버리고, 모용화연의 시신까지 저버리며 이쪽으로 자살특공을 하러 올지는 미지수이기는 했지만… 그 미소가 진심이었다면 아마 이쪽으로 따라붙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천천히 애타는 마음을 억누르며 몰래 온 손님을 기다린 것은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약속했던 시간에 맞춰, 거구의 붉은 장발을 하고 있는 남자가 시야에 비쳐온다.
이미 망원경으로 한차례 확인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치니 더욱더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이기영의 키로도 올려봐야 할 거구를 모련의 모습으로 보려고 하니, 한참이나 머리를 위로 꺾어 올려다봐야 할 것 같다.
‘미… 미치기는 했어.’
“…….”
‘이… 이게 남자자너… 진청운이고 진청영이고 나발이고… 이게 진짜배기 남자자너….’
일단은 반가운 마음을 가득 담아 입을 열어본다. 온갖 아양과 애교를 담아서 말이다.
“희… 희라 누나♥”
“…….”
“희라 누나아!!”
“굳이 내가 직접 와야 될 일이었어? 자기? 사람 불러서 데리고 와 달라고 하면 되잖아. 아니, 귀찮게… 뭘 직접 와달라고….”
“그게… 좀 사연이 길어. 진 군사 문제도 좀 있고… 누나 부하들도 물론 강한 건 아는데… 영 못 미덥단 말이야. 분명히 나 나간다고 하면 난리부르스를 추면서 쫓아올 텐데, 누나 부하들이 그거 감당이나 할 수 있겠어? 진 군사가 좀 정신이 나가기는 했는데, 지금 생사경이야… 누나가 아니면 여길 누가 남몰래 빠져나가겠냐구… 일단 가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거든. 오늘 밤에 전부 다 이야기해 줄게.”
“글쎄. 오늘 밤은 좀 바쁠 텐데….”
“어?”
“오늘 밤은 좀 바쁠 거라고.”
“…….”
“…….”
“그, 그… 그 그런데… 누나는 내 편 맞지?”
“그것도 글쎄… 자기 하기 나름이겠지.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가 웃기다는 생각 안 들어?”
“왜. 편지로는… 분명히… 누나 거짓말 같은 거 하는 사람 아니잖아요….”
“뭐, 일단 가자. 밀린 이야기랑 그간 못다 한 이야기는 삼 일 뒤에 해보자고.”
“삼 일 뒤?”
“어쩌면 일주일 뒤가 될 수도 있고.”
“…….”
“어쩌면 열흘 뒤가 될 수도 있고….”
나를 품에 안은 채로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희라 누나, 아니, 희라 오라버니 차르갈 칸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 이 누나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과장 하나 하지 않고 불덩이가 나를 껴안고 있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