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4
14화 가져가
개판.
이 두 글자보다 눈앞의 상황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있을까?
약 10미터 상공 위에 열린 게이트.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달팽이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짜증 가득한 비명.
“젠장! 이 끈적거리는 건 뭐야!”
“나한테 튀지 마!”
“씨발 냄새 좀 어떻게 해줘!”
게이트 주변에는 이미 바리게이트가 처져 있었다.
바리게이트 바깥에는 전투경찰들이 대기 중이었고,
그 안에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다른 길드의 초인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정정.
저건 전투라기보다는 코를 틀어막고 거대 달팽이를 마구잡이로 때려잡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퍼엉! 퍼버버벙!
초인들의 주먹, 검, 몽둥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달팽이들이 폭죽처럼 터져나가며 끈적끈적한 액체를 사방에 뿌렸다.
날렵한 초인들이라고 해도 그걸 다 피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또 묻었어!”
“끄악! 얼굴 앞에서 터졌어!”
“우웩! 우웨에에엑!”
다른 사람들이야 처음 보는 몬스터겠지만, 나는 저 달팽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대왕 고린내 달팽이-
보기에는 아주 예쁜 청록색 껍질에, 반투명한 젤리 같은 몸을 가졌다.
크기는 30cm~수 미터가 넘는 놈까지 다양하다.
가장 큰 특징은 몸이 폭발했을 때 풍기는 엄청난 악취.
초인들이 기피하는 몬스터 앙케이트를 하면 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놈이었다.
오죽하면 바리게이트 밖에 있는 전경들도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있을 정도.
“우웁, 우웨엑!”
일부는 구역질을 못 참고 오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해 백영희에게 전달했다.
-정말 개판이네요.
“그렇죠? 그리고 저 녀석들 약하고 쓸모도 없어 보이는데. 우리까지 딱히 안 나서도···.”
내 의견은 적극적으로 묵살됐다.
-아무리 약해도 신종 몬스터의 표본은 꼭 필요해요. 최대한 원형을 유지한 상태로 3마리 이상 확보해 주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한숨을 내쉰 나는 차량에서 마대자루를 꺼냈다.
바리게이트에 가까이 접근하자,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있던 경찰 간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초인이십니까?”
나는 차량에서 갈아입고 나온 방호복의 어깨 견장을 그에게 보여줬다.
길드에서 기본지급 되는 하얀색 방호복에는 길드 이니셜 [WH]가 새겨져 있었다.
“화이트하우스 길드 소속입니다.”
번거로운 확인절차는 하지 않았다.
미치지 않은 이상, 저 구역질나는 곳으로 들어가려고 초인을 사칭할 놈은 없을 테니까.
“···행운을 빕니다.”
마치 명복을 빌어주는 듯한 경찰의 말을 뒤로 하고, 우리는 바리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으윽, 냄새···.”
내 옆에서 릴리가 두 손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나는 씩 웃으며 꼬맹이를 놀렸다.
“나는 마나로 후각을 차단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까?”
물론 몇 마디 말로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마나를 이용해 오감을 차단하는 건 정교한 컨트롤과 교감 능력, 무엇보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가 있어야···.
“어? 진짜 되네? 이제 냄새 안 난다!”
···망할 재능충.
노력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설명도 다 끝나기 전에 그걸 배워버려?
어쨌든, 우리는 더 이상 냄새에 고통 받지 않고 게이트에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마대자루를 펼치며 가장 가까이 있는 달팽이를 향해 걸어갔다.
“쟤넨 뭐야?”
“화이트 하우스?”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미리 와 있던 다른 길드의 초인들이 우리를 힐끗 거렸다.
그 중에는 아는 얼굴도 몇 보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임무에 집중했다.
“우선 한 마리 잡아볼까.”
대왕 고린내 달팽이.
이 녀석들의 젤리 같은 피부는 점성이 강하고 끈적거리는데다, 작은 녀석일수록 마나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때문에 공격에 마나가 실리면 약간의 자극으로도 폭죽처럼 몸이 터져버린다.
아이러니한 건, 마나가 실리지 않은 공격은 거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포획을 어떻게 하냐고?
“이렇게 하지.”
나는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드는 달팽이를 가볍게 쓰다듬듯이 팔을 휘저었다.
휘리릭.
태극권의 부드러움의 묘리에 따라 달팽이가 휙 뒤집어지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내 손바닥 위에서 10cm쯤 떠오른 달팽이는 돌풍에 휘말린 낙엽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이내 머리를 축 늘어뜨렸다.
나는 질식시킨 달팽이를 마대자루에 집어넣었다.
“휴우.”
사실 도중에 잘못해서 터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태극권을 써본 것도 꽤나 오랜만이었으니까.
“우와!”
옆을 돌아보자, 릴리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알려줘!”
이 꼬맹이가? 아예 내 밑천을 다 털어먹으려고?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배우고 싶으면 돈 내. 100억.”
“치사하긴!”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 꼬맹이는 내 허벅지를 마구 꼬집어댔다.
곧 나머지 두 마리도 포획해서 마대자루에 넣었다. 나는 불룩해진 마대자루를 어깨에 둘러메며, 이어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통제실. 표본 확보 끝났습니다.”
-네? 벌써요?
“정확히 3마리 포획했어요. 수거팀 오면 이거 넘겨주고 퇴근해도 될까요?”
곧 황당해하는 백영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첫 임무에서 퇴근할 생각뿐이에요? 좀 더 긴장하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래야 정상 아니에요?
궁금한 게 있어야 물어보지.
이 바닥에서 20년을 굴렀는데.
“글쎄요. 어차피 현장도 다 정리 돼 가는 분위기라.”
퇴근할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게이트에서는 더 이상 달팽이들이 쏟아지지 않고 있었고,
얼마 남지 않은 달팽이들은 다른 길드에서 보낸 초인들이 무서운 속도로 사냥하고 있었다.
이어폰 너머에서 백영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표본 몇 마리만 더 확보해 주세요. 그리고 조금만 더 현장에서 대기해 주시구요.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6시 넘으면 추가수당 지급하는 거 알죠?”
-···얄미워.
내가 달팽이 몇 마리를 더 마대자루에 집어넣었을 때, 현장에는 더 이상 살아있는 달팽이가 없었다.
치지지직.
저 게이트 상태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직 뭔가가 남은 거 같은데···.”
불행하게도 이런 예감은 예전부터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때였다.
“이봐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달팽이 점액으로 흠뻑 젖은 초인들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곳에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길드는 총 3곳이었다.
두꺼운 특수부대 복장에, 검과 방패로고가 등에 새겨진 이들은 워리어스 길드.
얇은 정장스타일의 방호복에, 소매가 금실로 장식된 이들은 로얄패밀리 길드.
그리고 회색 방호복에 등에 검은 사냥개가 그려진 초인들은 블랙하운드 길드다.
특히 블랙하운드.
그 중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지긋지긋한 악연을 여기서 또 보네.”
블랙하운트 길드의 3팀장.
과거의 내 직장 상사였던 장석현이 내가 입은 방호복을 보더니 말했다.
“화이트 하우스 소속입니까?”
“네. 그런데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입?”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그의 얼굴에 거만한 기색이 드러났다.
말투도 대뜸 반말로 바뀌었다.
“얼마 전에 백병원에서 괜찮은 루키를 하나 데려갔다더니. 네가 걔냐?”
‘백병원’은 다른 길드에서 화이트하우스 길드를 비하할 때 쓰는 이름이었다.
그 말에 다른 길드의 초인들도 피식 거렸다.
다른 길드 초인들의 숫자는 최소 3명에서 5명.
반면 이쪽은 나와 릴리 둘 뿐이고, 둘 다 나이가 어리니 만만해 보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그렇다고 진짜 내가 만만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씨···.”
내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는 순간, 백영희가 필사적으로 나를 말렸다.
-팀장님! 제발 진정하세요! 제가 나중에 정식으로 저쪽 길드에 항의할게요!
“후···.”
나는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심호흡을 했다.
그래. 한번은 참아주기로 하자.
나는 장석현과 그 뒤의 익숙한 얼굴 몇, 그리고 다른 길드의 초인들까지 쭉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내 말에 몇 명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 숫자로 기선제압을 하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자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장석현이 헛기침을 한번 하고 말했다.
“아까 재밌는 기술을 쓰던데. 그게 네 개성인가?”
태극권을 말하는 모양이다.
그런 것까지 개성으로 친다면 내 개성은 아마 스무 개도 넘을 걸.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 반말에 장석현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는 바로 화를 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저 망할 달팽이를 건드리는 족족 다 터져버려서 말이지. 제대로 된 표본을 거의 못 건졌는데···.”
새끼들. 이제 보니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거였네.
그런 주제에 반말을 찍찍 내뱉으셨어?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장석현의 눈썹 웨이브가 한층 심해졌다.
“너 말이 짧다?”
“댁도.”
“이 새끼가···.”
장석현이 눈을 부라리며 내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다른 두 길드의 팀장들이 그를 제지했다.
“장형. 흥분하지 말고 대화로 합시다.”
“어린 친구도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마시고.”
워리어스 길드 팀장을 뚱뚱이.
로얄패밀리 길드 팀장을 홀쭉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뚱뚱이와 홀쭉이는 씩씩거리는 장석현을 뒤로 보내고 대화에 나섰다.
“보다시피 우리도 열심히 싸웠는데, 건드리는 족족 다 터져버려서 표본을 못 구해서요.”
“화이트하우스에서는 표본을 많이 구한 것 같은데···. 한 마리씩만 나눠주면 참 고마울 것 같습니다만.”
“이럴 때 같은 업계 종사자끼리 서로 돕는 게 이 바닥 전통이고 인심 아니겠습니까.”
“하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죽이 척척 맞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이것들이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뭐? 이 바닥 전통? 인심?
-절대 안 돼요!
백영희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신종 몬스터 표본은 그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다.
몬스터가 약하고 강하고 상관없이, 가져가서 조사해보면 어떤 활용가능성이 발견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걸 말 몇 마디로 후려쳐서 얻어내려는 이것들은 도둑놈들이란 소리다.
나는 마대자루를 어깨에 고쳐 메며 말했다.
“싫은데.”
내 한마디에 뚱뚱이와 홀쭉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짜 이럴 겁니까? 이렇게 부탁하는데.”
“어린 친구. 이 바닥 생각보다 좁아요.”
부탁으로 안 되니 회유와 협박으로 나오시는군.
스스슥.
몇몇 초인들이 몰래 마나를 끌어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를 해칠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간 길드간의 전쟁까지 번질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고···.”
저들이 노리는 건 내 마대자루다.
표본을 얻지 못하면 차라리 내게 시비를 걸어서, 마대자루에 있는 달팽이들을 모조리 터트릴 생각이겠지.
내가 못 가지면 너도 못 가지게 하겠다는 심보.
회귀하기 전, 옛날에도 여러 번 당해봐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건,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란 것이다.
툭.
나는 내 옆에 마대자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져가.”
뚱뚱이와 홀쭉이가 활짝 웃었다.
그들 뒤에서는 장석현이 조용히 나를 비웃었다.
어지간히들 좋은가보네.
그런데 어쩌나.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툭.
나는 마대자루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가져갈 수 있으면.”
저들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