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5
15화 메인메뉴
과거의 나는 다른 초인과의 충돌은 일단 피하고 보는 성격이었다.
약했으니까.
초인들 세계에서 나는 아무리 좋게 봐도 평균 이하.
나보다 강한 초인들이 훨씬 더 많았고, 초인 세계에서는 그 강함이 전부였다.
초인 세계에서 난 대부분 을의 입장에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자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그냥 참고, 못 본 척, 못 들은 척, 자존심도 없이 실실대고···.
근데 말이지.
“이제는 그렇게 등신같이 안 살 거거든.”
강제로 회귀한 것도 좆같은데, 두 번째 인생도 좆 같이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 말에, 잠시 뒤로 물러나있던 장석현이 앞으로 나섰다.
“새끼가 듣자듣자 하니까. 진짜 한번 해보자 이거냐?”
장석현은 양손에 끼고 있는 금속장갑을 위협적으로 까앙! 하고 부딪쳤다.
근접격투는 장석현의 특기.
나는 주먹질의 기본을 저 인간에게 배웠었다.
샌드백처럼 얻어맞아 가면서 말이지.
이야. 옛날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운데?
나는 깔고 앉은 마대자루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가져가라니까. 능력이 되면.”
“이 새끼가···.”
내 도발에 장석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뚱뚱이와 홀쭉이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우리가 좋게좋게 대화로 풀려니까.”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 본데···.”
그들의 눈짓에 열 명이 넘는 초인이 우리를 포위했다.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공격하지는 못했다.
저들에겐 날 응징할 명분, 그러니까 최소한의 핑계가 필요했다.
뚱뚱이가 말했다.
“당장 사과하십시오!”
“내가 뭘?”
내가 되묻자 홀쭉이가 밑밥을 치기 시작했다.
“우린 정중하게 요청했는데, 그쪽에서 무례하게 굴고 있지 않습니다. 업계 선배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도 그렇고···. 이건 화이트하우스 길드가 우리들을 무시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뚱뚱이가 맞장구를 쳤다.
“정식으로 사과하고, 사과의 의미로 그 마대자루에 있는 표본을 나눠주면 오늘 일은 넘어가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먼저 와서 싸우고 있었으니까 당신도 쉽게 포획한 거 아닙니까?”
뚱뚱이와 홀쭉이가 하는 말을 전부 들은 백영희가 분개한 목소리로 외쳤다.
-말도 안 돼. 저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오히려 백영희가 나보다 더 화가 난 듯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매니저 일만 해서 잘 모르나 본데. 현장에서는 원래 힘센 놈 말이 법이에요.”
나는 이런 억지를 수없이 경험했다.
뒤늦게 와서 전리품의 권리를 주장하던 놈.
거대길드의 위세를 믿고 남의 사냥감을 뺏어가던 놈.
이렇게 숫자를 믿고 시비 거는 놈들.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사과 못하겠다면?”
내 대답에 저들의 입매가 씰룩였다. 내가 자기들의 도발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겠지.
반면 백영희는 내가 꽤나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곧 2팀이 복귀할 거예요. 바로 그쪽으로 지원 보낼게요. 팀장님. 화나겠지만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시간을···.
“여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나는 이어마이크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 포위한 자들을 쭉 둘러봤다.
3개 길드에서 파견된 12명의 초인.
그 중 세 명은 팀장급이다.
나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숫자.
숨겨둔 밑천을 다 드러내고 개성까지 사용하면?
글쎄.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면 난 혼자가 아니니까.
나는 아까부터 표정이 굳어 있는 릴리에게 말했다.
“내가 신호하면 이 주변에 싹 불 질러. 이 자식들이 당황하게.”
내 말에 꼬맹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나를 식모 정도로 여기는 건방진 꼬맹이지만, 이럴 땐 역시 든든하다.
“불에 태워도 돼?”
“죽이는 건 안 돼. 귀찮아지거든.”
“겉만 살짝 구우면?”
“···사람이 무슨 스테이크냐.”
누가 마녀 아니랄까봐 살벌한 소리는.
“안 돼?”
“뭐, 죽지만 않으면 괜찮으려나.”
나는 꼬맹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앞으로 나섰다.
액션영화 주인공처럼 멋지게 한 마디 날려주고 판을 벌일 생각이었다.
“덤벼 이···.”
그때였다.
우우우우웅-!
갑작스러운 마나의 파동에 모두의 고개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우우우우우우웅!
달팽이를 잔뜩 쏟아내고 한동안 잠잠하던 게이트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울룩불룩.
게이트의 형태가 기이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푸화아아악! 소리를 내며 크게 찢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거대한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3층 건물과 맞먹는 높이.
붉은색과 주황색이 뒤섞인 껍질에, 피부는 음울한 회색이었다.
스르르륵.
그건 수십 개의 촉수를 가진 괴물 달팽이였다.
저 녀석이 등장한 순간, 내 마대자루의 가치는 재활용 쓰레기 봉투 정도로 격하됐다.
“큰 놈이다!”
“전투 준비!”
세 명의 팀장이 거의 동시에 외쳤고, 초인들은 돌아서면서 일사분란하게 포메이션을 갖췄다.
그 모습에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나 지금 달팽이한테 밀린 건가…”
그때 팀장들이 나를 홱 돌아봤다. 그들 눈에 탐욕이 이글이글했다.
“당신은 이 전투에 끼어들지 마!”
“어설프게 끼다가 우리 공격에 맞아도 책임 못져!”
“그 마대자루나 가지고 돌아가!”
이 전투에 끼면 다칠 수도-사실상 다치게 하겠다는-있다는 친절한 경고까지.
메인메뉴로 보이는 저 괴물 달팽이만큼은, 자기들끼리 해먹겠다는 소리였다.
“흐음.”
나는 잠시 괴물 달팽이를 바라보다가, 어깨에 마대자루를 둘러메고 뒤로 물러났다.
“그럼 그렇지.”
“쫄보 새끼.”
등 뒤에서 그런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마대자루를 차량에 넣어두고, 다시 이어마이크를 꺼내 착용했다.
곧바로 백영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들은 모양이었다.
-팀장님! 지금 뭐하는 거예요! 가서 싸워야죠! 한 대라도 쳐야 나중에 전리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요!
나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이제 막 시작된 달팽이와 초인들의 싸움을 구경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방금 전 게이트를 찢고 나타난 거대 달팽이.
저건 그 전에 나타났던, 건드리기만 해도 폭죽처럼 터져나가던 달팽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무려 ‘괴수급’이다.
도감에서 본 적이 있거든.
“저 전력으로는 저거 절대 못 잡아요. 공략법이라도 알고 있지 않는 한.”
물론 내가 본 도감에는 공략법도 적혀 있었다.
***
“탱커들 붙어!”
다섯 명의 초인이 동시에 괴물 달팽이를 가로막았다.
두꺼운 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그들은 달팽이의 전진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아주 잠시 동안은 말이다.
괴물 달팽이는 앞을 가로막은 인간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계속 전진했다.
“크윽···!”
“무슨 힘이···!”
달팽이의 정면에 달라붙은 초인들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힘에서 밀리는 것만 문제가 아니었다.
치이이익!
달팽이의 표피에서 흘러내리는 점액이 초인들의 방패와 갑옷을 녹이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점액을 뒤집어 쓴 초인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염산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변해 있었다.
만만하게 생각했던 괴물 달팽이가 생각보다 강해 보이자 팀장들의 표정이 굳었다.
“딜러들! 일단 촉수부터 잘라!”
초인들이 좌우로 나뉘어 촉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미끄덩.
칼날이 촉수에 닿아 미끄러졌다. 오히려 괴물 달팽이는 촉수를 이용해 초인들을 공격했다.
휘리릭!
채찍처럼 길어진 촉수가 초인 한명을 휘감았다. 그리고 허공으로 날려버렸다.
-콰아아앙!
저 멀리 건물 하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자, 초인들은 비로소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도 아직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다들 긴장해!”
“탱커들 뒤로 빠져!”
“탱커 빠지면 원거리 공격 퍼부어!”
팀장들의 외침에 탱커들이 일제히 뒤로 빠졌다.
그때, 탱커들 중 가장 굼뜨게 움직이는 사내가 내 눈에 들어왔다.
키는 전봇대처럼 크지만,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몸.
과거에 알고 지낸 얼굴이었다.
이름 왕구호. 별명은 호구왕.
장석현이 느릿느릿 뒤로 물러난 왕구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호구새끼! 빨리빨리 움직여!”
왕구호는 석화된 몸을 천천히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 느릿느릿한 말투에, 장석현은 속이 터진다는 듯 소리쳤다.
“말할 때는 개성 풀라고 했지!”
그러나 개성을 풀어도 왕구호는 별로 빠릿빠릿해지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명령이 떨어지면 앞으로 나서서 온 몸으로 달팽이를 막아섰다.
느리고, 공격을 전혀 못하는 반쪽짜리 탱커.
왕구호가 블랙하운드 길드의 천덕꾸러기인 이유였다.
“젠장! 어디서 이런 괴물이!”
초인들은 괴물 달팽이에게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다.
탱커들은 부식성 점액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떨어져 나갔고, 딜러들이 촉수 몇 개를 자르는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새로운 촉수가 자라났다.
스르르륵.
괴물 달팽이는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전투불능에 빠진 초인들이 늘어나면서, 전진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설마···.”
“여, 여기까지 오는 건 아니겠지?”
뒤쪽에서 공포에 질린 전경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두면 바리게이트까지 넘어올 기세였다.
마치 빌딩이 걸어오는 듯한 그 형상은,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초인들은 괴물 달팽이 사냥을 포기했다.
“지원이 올 때까지 뒤로 물러난다!”
“일단 후퇴해!”
팀장들의 명령에 초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뒤로 빠졌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왕구호.
탱커 중 유일하게 남아서 괴물달팽이를 막아서던 그가 놀란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다른 초인들은 이미 바리게이트 근처까지 물러나 있었다.
왕구호의 눈이 두려움으로 커져 있었다.
“저···도···데···려···가···!”
오른팔 뼈가 보일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장석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등신아! 알아서 탈출해! 개성 풀고 뛰면 되잖아!”
개성을 풀면 왕구호는 죽는다. 바로 괴물 달팽이의 점액이 온 몸을 뒤덮을 테니까.
“도···와···주···세···요···.”
왕구호는 고개를 돌려 다른 초인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같은 길드에서도 버린 초인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사람은 없었다.
휘리리릭!
촉수 하나가 왕구호를 휘감았다. 왕구호는 땅에 발을 박고 버텼다.
그러나,
휘리릭! 휘리릭!
연달아 3개나 되는 촉수가 한 번에 몸을 휘감자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안···돼···.”
허공으로 몸이 딸려 올라간 왕구호.
차라리 그대로 멀리 던져버렸다면 괜찮았겠지만, 괴물 달팽이는 왕구호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도···와···줘···요···.”
모두가 그의 애처로운 외침을 외면했다.
내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쯧. 저런 것들도 동료라고.”
촤아아아악!
촉수가 잘려나가고, 왕구호의 몸이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아래에서 받아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얘 석화하면 엄청 무겁거든.
물론 그래도 엄청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왕구호가 나를 바라봤다.
“고, 고···맙···습···.”
끝까지 듣고 있다간 속이 터진다는 걸 알기에, 나는 그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왕구호. 네 개성은 그렇게 쓰는 게 아냐.”
“네···?”
“궁금하면 나중에 날 찾아와.”
이 녀석은 자기 개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왜냐면 미래에도 이 녀석과 같은 개성을 가진 초인이 있거든.
그것도 무려 영웅이라 불리는 초인이 말이지.
“성가시니까 빨리 도망쳐. 얘긴 나중에 하자고.”
내 말에 왕구호는 개성을 풀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이제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나와 릴리, 그리고 괴물 달팽이 뿐이었다.
자, 방해꾼은 전부 퇴장했으니 메인메뉴를 먹어보실까.
“꼬맹이. 시작하자.”
내 말에 릴리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꼬맹이는 지금 의욕 만땅이었다.
끝나고 바비큐 치킨 먹으러 가기로 했거든.
화르르르르륵!
사방에서 화염이 솟구쳐 괴물 달팽이를 가뒀다.
“그럼 들어갈까.”
우리는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