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하나는 됐고
“클클. 애송이들. 오랜만이구나.”
적발 사내의 자신감 넘치는 미소, 천하를 자신의 발아래로 보는 눈빛.
그를 본 순간, 천하삼절은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천무극···.”
도왕과 신창은 저도 모르게 무기를 꽈악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본 천무극이 피식 웃었다.
“클클. 검황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애송이들이 많이 컸구나.”
“닥쳐라!”
“아직도 100년 전인 줄 아는가!”
두 절대고수가 뿜어낸 기세가 천무극을 자극했다. 천무극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크크큭···.”
100년 전, 천하의 패권을 두고 검황과 싸우던 날들이 떠올랐다. 당시 천마교주였던 천무극은 자비를 모르는 사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천무극은 클클 웃더니 먼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클클. 그만두자. 오랜만에 보니 너희 얼굴마저 반가울 지경이다.”
검성도 나서서 흥분한 두 의동생을 말렸다.
“너희도 그만 하거라. 저자가 파천검제에게 무공을 가르쳤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대형···.”
“저자를 어찌 믿는단 말입니까!”
도왕과 신창은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100여 년 전, 그들은 당대 천마였던 천무극에게 여러 번 죽을 뻔했다.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직접 마주한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검성 또한 천무극의 등장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동생들보다 더 의연하게 천무극을 대했다.
“오랜만이오. 과거보다···. 더 강해진 것 같군.”
“클클. 모용가의 애송이구나.”
“애송이라 불리기에는 나도 꽤 나이를 많이 먹었소만?”
“흥. 그래 봤자 한 번 애송이는 영원한 애송이지.”
“안하무인인 성격은 여전하군.”
“클클. 네놈도 여전히 시건방지구나.”
두 사내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다 피식 웃었다.
100년 만이었다. 그 시절을 함께했던 이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화도 썩 유쾌했다.
“클클. 회포는 나중에 풀지. 일단 우리 집안 문제부터 좀 해결해야겠다.”
천무극이 몸을 돌렸다. 바닥에 처박혔던 괴물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크워어어어어어!
천무극의 등 뒤에서 검성이 물었다.
“도움이 필요하시오?”
“클클. 정파 애송이한테 별소리를 다 듣는군.”
“그리 대답할 줄 알았소.”
검성은 의동생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나중에 다시 끼어들더라도, 우선은 도왕의 부상부터 살필 생각이었다.
뒤로 물러나려는 천하삼절을 향해 괴물이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그러나 그 팔은 끝까지 뻗어지지 못했다. 공간이 갈라지듯, 천마의 팔이 사선으로 잘려나갔다.
크워어어어어어!
괴물이 괴성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잘려나간 부위에서 마기가 피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무한아. 이제 그만하려무나.”
천무극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는 보랏빛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천마검(天魔劍)
500년 전의 천마조사가 낙원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천마신교의 신물.
천마조사가 우화등선하며 사라졌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조사동 안에 『천마비록』과 함께 남겨져 있던 물건이었다.
크르르르르···.
괴물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흉광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치 천마검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천무극은 심마에 잡아먹힌 손자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이제 와서 조부랍시고 하는 말이 고깝게 들릴 것을 안다.”
천무극이 한 걸음 다가가자, 괴물이 주춤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허나 지금 네가 가는 길은 내가 가려 했던 길이기도 하다.”
천무극은 천마검을 들어 괴물을 겨눴다. 괴물이 몸을 크게 부풀리며 포효했다.
캬아아아아아아!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은 파멸뿐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너를 이대로 둘 수가 없구나.”
괴물이 어마어마한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살기 위한 발버둥처럼, 전신으로 모든 힘을 다 쥐어짜 냈다.
그 순간 천무극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러니 좀 아프더라도 참거라.”
스르르륵.
천무극은 천마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보라색 검신이 허공에 유려한 선을 그렸다.
촤악, 촤아아악!
그 선들이 괴물의 몸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양파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듯, 마기를 둘러싸인 괴물의 몸이 점점 작아졌다.
크아아! 크아아아아!
괴물이 포효하며 팔다리를 마구 휘둘렀다.
그러나 아무 소용도 없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괴물은 천무극이 만들어 낸 거미줄 안에서 버둥거릴 뿐이었다.
“끝났네.”
협곡 아래로 내려온 대인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더 이상은 숨어 있을 이유가 없었다.
대인은 포션을 꺼내 천하삼절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부상을 치료할 생각이었다.
“······.”
그런데 천하삼절은 아픈 것도 못 느끼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넋을 놓고 천무극이 펼치는 무공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
“저자는 대체···.”
“···아직도 이만한 격차란 말인가.”
그만큼 천무극이 보여주는 신위는 압도적이었다. 대인도 스승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왜 일주일이나 연락이 안 되나 했더니···.”
천무극은 대인이 불어 넣은 마기를 이용해 다시 환골탈태했다.
거기까지는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육체가 젊어지면서, 그전까지는 육체의 한계로 닿을 수 없었던 깨달음이 순식간에 몸으로 체화(體化)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천마조사가 남긴『천마비록』을 읽고 얻은 깨달음까지.
그것을 다 소화하는 데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후우···.”
한 차례 검무를 마친 천무극이 호흡을 고르며 검을 내렸다.
그 순간,
퍼버버버버벙!
퍼버버버버벙!
퍼버버버버벙!
괴물의 몸이 수천, 수만 조각으로 폭발하며 그 잔해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정신을 잃은 천마교주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툭.
천무극은 떨어지는 천마교주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의 손자는, 얼마 전까지 만박노괴라 불렸던 자신처럼 늙고 추레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
씁쓸한 표정을 짓는 천무극의 옆으로 대인이 다가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치료해서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교주에게 엘릭서까지 쓰는 건 오버지만, 최상급 포션과 약초 몇 개를 사용하면 다시 건강을 되찾아주는 것 정도는 문제없었다.
대인이 포션을 꺼내 교주에게 먹이자, 창백했던 혈색이 점점 돌아왔다.
그 모습에 조금 안도한 천무극이 무안한 얼굴로 대인을 바라봤다.
“명색이 스승인데 제자한테 빚만 지는구나.”
대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근데 이 얼굴 진짜 적응 안 되네.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
대인은 젊어진 스승의 얼굴을 바라봤다.
만박노괴라 불리던 쭈구렁 노인의 흔적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선 굵은 외모의 청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이놈아. 스승이 너무 미남이라서 놀랐느냐?”
“미남이라기보다는 무슨 람보처럼 생겨서···.”
떡 벌어진 어깨하며 근육질의 몸. 굵은 목과 팔뚝은 맨손으로 코끼리도 때려잡을 것 같았다.
“람보? 그게 네가 사는 곳에서 가장 잘생긴 사내냐?”
“어쨌든 회춘하셨으니 잘됐네요.”
대인은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천무극도 자세하게 캐묻지는 않았다.
제자와 오랜 시간 수다를 떨기에는, 품에 안긴 손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까.
육체의 상처는 포션으로 치료할 수 있지만, 마음에 남은 심마는 그리 쉽게 치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쌍한 녀석···.’
천무극은 창백한 손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뺨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천무극이 대인에게 말했다.
“나중에 더 이야기하자꾸나. 나는 서둘러 이 아이를 데리고 천마신교로 돌아가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천무극은 한시라도 빨리 손자가 심마를 다스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스승님이 할 일은 다 끝났으니까.”
“···그래. 정말 고맙구나.”
천무극은 대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대인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검황의 후인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때만 해도 내공만 많지 검술은 형편없는 녀석이었거늘···.”
“예? 갑자기 옛날얘기 하기 있어요?”
“이놈아. 그래 봤자 몇 달 안 됐다.”
그때부터 호기심이 생겨 며칠간 대인을 쫓아다녔고, 이내 제자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못 이룬 고금제일인의 꿈을 대인이 대신 이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반,
그리고 검황에게 평생 빚진 마음을 갚기 위해서 가르친 것이 절반이었다.
‘그랬거늘···. 오히려 네가 나를 구하고, 내 손자를 구했구나. 그리고 이제는 천마신교를 구원하려고 하는구나.’
구원자.
천마신교의 경전에서 지겹게 읽었던 이름.
그러나 스스로도 거의 믿지 않았던 존재.
척박한 환경에 떨어진 교도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천마조사가 꾸며낸 거짓말.
천무극이 본 『천마비록』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구원자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전쟁에서 패배해 다른 차원으로 도망친 일개 부족에 불과할 뿐···.
‘당신이 틀렸습니다.’
천무극은 천마조사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구원자는 있습니다. 나는 구원자를 만났습니다. 천마신교가 기다려온 구원자가 바로 내 앞에 있습니다.’
천무극이 클클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동안 조사동에 있을 테니, 일이 다 끝내면 찾아오너라. 네게 줄 것이 있다.”
“줄 거? 뭔데요?”
대인의 질문에, 천무극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클클. 이놈아. 미리 알면 재미없지 않느냐. 아무튼 기대해도 좋다.”
천무극은 그 말만 남기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럼 나는 먼저 가마.”
휘익-!
순식간에 허공의 점으로 멀어지는 스승의 모습을 바라보며, 대인은 작게 투덜거렸다.
“뭔데 얘길 안 해주는 거야? 괜히 궁금하게.”
***
대인은 통신으로 소교주에게 천무극이 천마교주를 제압해 데려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크게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생명에 지장은 없어요.]소교주는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한 듯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소. 그럼 본교는 이제 퇴각해야겠군.]잠시 후, 천마신교의 병력은 소교주의 명령에 의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교주가 부재한 상황이기에 소교주(와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대장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청해 무림맹의 무사들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통신 채널로 청운과 소교주가 대화를 나눴다.
[조심해서 가시오.] [다음에 봅시다. 그땐 호패를 꼭 가져오시고.] [어허. 내가 형이라니까···.]그들의 대화를 들은 대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얘네들은 또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거야?”
둘이 친해져 두면 나쁠 것은 없었다. 그들이 바로 미래의 천마교주와 무림맹주니까.
“그럼 천마신교 쪽은 해결했고···.”
이 정마대전은 무림맹과 천마신교가 오랜 시간 서로를 벼르고 별러 오다 터진 것이었다.
즉, 한쪽이 물러난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대인이 통신기에 대고 말했다.
“청운. 무림맹 본대는 지금 어디쯤 왔대?”
[···맹주께서 이틀 거리에 계시다고 하네. 전서구를 받은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은 하루 거리 안에 와 있겠지.]무림맹주는 대인에게 멸마단을 맡겨 먼저 청해 지부로 출발하게 한 후, 자신은 병력을 모아 본대와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병력의 수는?”
[총 3만이라고 하더군.]하루 거리 안에서, 무림맹주가 이끄는 3만의 무사들이 천마신교를 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3만이라···. 생각보다 얼마 안 되네.”
대인은 그들을 돌려보낼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