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18
218화 신주쿠 레인저(4)
레드는 난감한 표정으로 술에 취한 동료를 바라봤다.
“그러니까아~! 우리 리더는 사람이 너무 물러서 탈이라니까? 그 싸가지 없는 소마 경부한테 왜 한마디도 못 따지냐고!”
쇼트커트 단발에 옅은 주근깨가 매력적인 소녀가,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레드는 난감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옐로우. 너 너무 취했어.”
“술 마시러 와서까지 무슨 옐로우야! 린이라고 불러 하야토 오···읍!”
깜짝 놀란 하야토가 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쉿!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이름은 말하지 않기로 맹세한 거 잊었어?”
하야토의 팔을 뿌리친 린이 동네방네 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우리 이름 궁금해하기나 하는 줄 알아? 안 그래 사카이 오빠?”
“······.”
홀로 조용히 술을 홀짝이던 레인저 블루, 사카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본 린은 복장이 터졌다.
“아우 답답해! 한 명은 열혈 오타쿠에 한 명은 묵언수행이라니! 오빠들 때문에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받는 줄 알아?”
린은 도수가 꽤 높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야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옐로우. 그만 마시라니까.”
“흥. 이게 얼마 만에 마시는 술인데?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실 거야.”
“···알코올로 신체와 정신이 흐트러지면 비상사태에 대비할 수 없어. 우리는 신주쿠를 지키기 위해 언제든지 준비하고 있어야 해.”
하야토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그를 봐온 린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웃기시네. 신주쿠가 진짜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부르지도 않아. 왜인 줄 알아? 너무 약해서 도움이 하나~도 안 되거든.”
“너···!”
붉은 헬멧을 쓰지 않았는데도 하야토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레인저 옐로우! 리더로서 명령이다! 당장 음주를 멈추도록!”
“눼눼~.”
“야! 린! 너 자꾸 이럴 거야!”
그 한 편의 촌극을, 대인은 술집 입구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막 술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대인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헬멧 벗고 저러고 있으니 완전히 애들이네.”
신주쿠 레인저. 셋 다 많아 봐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재밌는데 좀 더 구경할까.’
대인은 일부러 신주쿠 레인저와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 앉았다.
몇 시간 전.
도쿄도청에 도착한 일행은 곧바로 일본 정부의 고위관료들과 접선했다.
주상욱이 일본 정부의 고위관료들을 만나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인은 적당히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회담을 어지간히 길게 해야 말이지. 대충 가닥은 나왔으니 내가 거기 있을 필요도 없고.’
적당히 자기합리화를 한 대인은 곧바로 신주쿠 레인저에게 연락해, 퇴근한 그들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후, 릴리를 숙소에 떼어놓고 몰래 빠져나오는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을 성공시키고 이곳에 도착했는데···.
“제발 조용히 좀 해! 옐로우 레인저!”
“나 노란색 싫어! 차라리 핑크 할래!”
“바보야. 네가 핑크를 하면 삼원색이 아니잖아!”
“알 게 뭐야! 어차피 처음에는 세 명도 아니었잖아!”
“······.”
“미, 미안.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면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원래 셋이 아니었다고? 뭔가 사연이 있나 본데.’
대인은 먼 테이블에 앉아서 그런 세 사람을 관찰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구경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인의 눈은 세 사람의 체형, 유연성, 움직일 때의 버릇 같은 것을 면밀히 분석했다.
“셋 다 근골이 나쁘진 않네. 아직 어리기도 하고.”
대인이 짧게 평가를 내렸을 때였다.
쿵!
우람하고 굵은 팔뚝이 대인 앞에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맥주잔 안에는 맥주가 아닌, 정체불명의 냄새를 풍기는 술이 담겨 있었다.
“알록달록한 꼬마들이 하는 짓이 제법 귀엽지? 저 셋은 예전부터 저렇게 어울려 다녔거든.”
“······.”
대인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건 상대를 바라봤다.
그는 거구의 흑인으로, 나시 하나만 걸친 근육질의 상체에는 문신 같은 상처가 가득했다.
사내가 대인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잭이다. 이 술집을 운영하고 있지.”
“히무라···. 아니, 임대인이다.”
대인은 더 이상 가명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려질 테니까.
잭은 아예 대인의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구의 덩치가 앞에 앉자 대인의 위로 그림자가 지는 듯했다.
“잠깐 앉아도 되지?”
“앞으로는 앉기 전에 물어봐. 근데 주인장. 신주쿠 레인저랑 예전부터 아는 사이야?”
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벌써 꽤 됐지. 그 좆같은 퍼스트 게이트가 열리고···. 지금이 천국처럼 느껴질 만큼 끔찍했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잭은 주머니에서 담뱃잎과 종이를 꺼내 직접 궐련을 하나 말더니, 힐긋 대인을 바라봤다.
“댁도 하나 줄까?”
‘어쩐지 지하에 연기가 자욱하더라니.’
“난 됐어. 그런데 이 동네에서 담뱃잎은 어떻게 구한 거야?”
후우-.
담배 연기를 허공에 길게 뿜어낸 잭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담배 정도야. 돈만 있으면 핵무기도 구할 수 있다고.”
“대단한 술집 주인이셨군.”
잭이 큭큭 웃더니 물었다. 그는 궁금한 것을 빙빙 돌려서 묻는 성격이 아니었다.
“바다 건너 한국에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듣기로는 정부에서 왔다며? 올 때 뭐 타고 왔어?”
잭은 대인 일행이 일본에 온 이유에 대해 대놓고 관심을 드러냈다.
‘역시 소문이 다 퍼졌군.’
잭뿐만이 아니었다.
술집 안에 있는 손님들 중 절반 이상은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
“······.”
몇 시간 전, 도청사에 도착한 한국 외교사절단에 대한 소문은 이미 신주쿠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구체적인 정보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주쿠에 사는 사람들에게 최대의 관심사가 된 것만은 확실했다.
비단 신주쿠뿐만이 아니었다. 도쿄 전체가 그들의 등장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슬슬 물고기가 모여드는군.’
대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느긋하게 술을 마셨다.
그러나 곧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웩! 더럽게 맛없네. 이거 도대체 뭘로 만든 술이야?”
“푸하하! 알면 술맛이 더 떨어질걸? 이런 동네에서 제대로 된 술을 기대하지 말라고. 취할 수만 있으면 됐지.”
잭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그가 목소리를 낮추더니 대인에게 물었다.
“궁금해 죽겠으니까 좀 알려줘. 한국에서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냐니까?”
“별거 아냐. 일본 정부랑 군사 동맹을 맺으려고 왔어.”
대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끼친 파급력은 엄청났다.
잭이 눈을 크게 뜨며 다시 물었다.
“군사 동맹이라고? 그 소문이 진짜였나?”
이미 소문이 돌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들 긴가민가하고 있었던 듯했다.
대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어차피 곧 발표될 텐데.”
이미 일본 정부와 접촉한 이상, 더는 목적을 비밀로 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알리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물고기들도 미끼를 보고 반응을 할 테니 말이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
잭이 거구의 몸을 대인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엿듣고 있던 다른 이들도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건 아직 비밀인데 말이야. 그러니까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대인은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인의 목소리를 아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동맹보다는 원조에 가깝지.”
한국은-그리고 화이트하우스 길드는-일본 정부에 국가 원조 수준의 지원을 퍼부을 계획이었다.
막대한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포션, 게이트웨이 기술, 무공 등 현재 한국에만 존재하는 기술도 일정 부분 공유할 계획이었다.
4대 트라이브 사이에 끼어 눈치를 보는 현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잭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한국이 왜 그렇게까지 일본을 돕는데? 그 뭐냐, 나는 미국인이라 잘 모르지만, 너희들 서로 싫어하지 않아?”
술집 안에 있는 일본인들 중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어딘가에는 아직까지 반일 감정이 있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혹시 헬게이트라고 들어봤어?”
“헬··· 게이트?”
“이건 우리도 얼마 전에 알아낸 건데 말이야.”
대인은 헬게이트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미래.
하늘을 찢고 나타날 최소 수천만이 넘는 마계의 짐승들과 악마들.
그리고 하나하나가 세상을 멸망시킬 정도로 강대한 마왕들.
“우리는 부산에서 마왕이라는 놈을 하나 잡았어. 놈을 고문해서 알아낸 건데, 1년 안에 그 수십 배에 달하는 놈들이 지구로 쳐들어올 거라더군.”
“!!”
세상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거대한 재앙이 들이닥칠 거라는 이야기에, 잭은 물론이고 술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말도 안 돼!”
“이봐! 허풍이 너무 심하잖아!”
그중에는 아예 대인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고,
“하지만 그거 때문에 한국 정부에서 왔다는 거잖아···?”
“그럼 신빙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말 아닌가?”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줘!”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대인에게 궁금한 것을 더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내가 본 마왕이라는 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주지.”
대인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었다.
어느새 모두가 대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하야토가 사람들을 밀치고 다가와 대인에게 물었다.
“그 말이 전부 사실입니까? 저희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죠. 아니면···.”
들을 자격이 안 되거나.
대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신주쿠 레인저는 그렇게 알아들었다.
“······.”
대인은 그 모습을 모른 척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헬게이트가 시작되면 전 세계가 동시에 마계에 침공당할 거야. 그래서 우리가 동맹을 제안하러 온 거고. 이건 전 세계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못 막는 대재앙이니까.”
술집 안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여전히 대인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어딘가로 연락하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대인은 술집에서 빠져나가는 몇몇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일이면 오로치를 제외한 다른 트라이브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겠지.’
주상욱의 역할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동맹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최대한 유리한 조건으로 말이다.
그동안 대인은, 일본의 초인들을 상대로 위기감을 조성하고 분위기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연이 꽤 많이 필요했다.
‘트라이브의 영주들. 그들은 어떻게 나올까?’
몇 가지 예상되는 반응이 있었다.
‘웬만하면 서로 덜 피곤한 방법을 선택해주면 좋겠는데.’
그러나 경험상, 이럴 때 일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인은 분위기가 사뭇 진지해진 술집 안을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오늘은 술이나 마시러 온 거였는데, 어쩌다 보니 딴 얘기만 너무 많이 해버렸네.”
대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신주쿠 레인저를 바라봤다.
“술은 다음에 마시죠. 즐겁게 마실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닌 것 같은데.”
“······.”
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주인장. 여기 얼마야? 신주쿠 레인저가 먹은 것까지 내가 계산할게.”
대인이 지갑을 꺼내자, 잭은 되었다며 손을 저었다.
“술값은 됐어. 방금 해준 이야기의 값으로 충분해.”
“그래? 안 그래도 돈 내기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빌어먹을 놈.”
잭은 큭큭 웃었다. 대인은 몸을 돌려 술집을 나섰다. 잭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다음에 또 오라고! 서비스 많이 줄 테니까!”
대인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그의 모습이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술집 안에 남은 사람들은 대인이 던져놓고 간 떡밥을 주제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그 자식이 한 말이 진짜일까?”
“에이 말도 안 돼. 다 허풍이겠지.”
“갑자기 한국에서 외교사절이라니. 뭔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근데 군사 동맹이 성사되면 트라이브는 어떻게 되나? 사실 그거 다 불법점거잖아?”
“······.”
순간 술집 안의 분위기는 얼음이라도 끼얹은 듯 싸늘해졌다.
그때까지 표정이 굳어있던 하야토가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임대인 씨 말대로 헬게이트라는 재앙이 시작되면, 이 도시는 또다시 큰 위험에 빠질 거야.”
린이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심각한 이야기를 들어서 술도 다 깨버렸다.
“그리고 우린 아무 도움이 안 되겠지. 한심할 정도로 약하니까.”
고작 붉은 점박 들개에게도 쩔쩔매는 그들이었다. 마족이니 마왕이니 하는 괴물들과 싸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약한 건 상관없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 번으로 충분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가족과 친구를 잃는 경험은.
희망도 없이 지하에 웅크리고 숨어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날들은 말이다.
“어떻게든 대비해야 돼. 나는 저 사람과 더 이야기를 해야겠어.”
동료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레드는 계단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린은 한숨을 쉬었다.
“저 열혈 바보···.”
“······.”
사카이가 말없이 린의 팔을 잡아당겼다. 리더를 따라가자는 의미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곧 두 사람도 리더를 따라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알록달록 꼬마들. 요란하게도 놀다 갔네.”
잭은 그들이 떠난 테이블을 정리했다. 손님들은 계속 떠들어댔고, 술집 안은 금세 다시 시끄러워졌다.
정리를 끝낸 잭은 자리에 앉아 새로운 담배를 말았다.
후우-. 자욱한 담배 연기가 가게 안에 퍼져나갔다.
잭은 대인과 신주쿠 레인저가 사라진 출입문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보스한테 연락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