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24
224화 특별임무(3)
중세의 왕족이 살던 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실내. 수십 명의 시종이 오가며 긴 테이블에 음식을 날랐다.
테이블 위에는 수십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은 고작 다섯에 불과했다.
“···과분한 대접에 감사드립니다.”
주상욱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만찬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표정으로 그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별말씀을. 손님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평소보다 적게 준비했는걸요. 그쵸 오라버니?”
블랙 요프숄더 드레스로 갈아입은 사쿠라가 옆자리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상당히 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의 사내였다. 두꺼운 뿔테 안경에, 옷차림은 고급스러웠지만 어쩐지 영주보다는 광대 같은 느낌이었다.
“그 대신 비싼 것으로만 준비했잖아.”
사내가 손가락으로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자체로 은색의 칼날이었다.
칼날에 묻은 약간의 고기와 소스를 혀로 핥은 사내는, 미간을 모으더니 접시를 옆으로 밀었다.
“다시 해 와.”
“예. 영주님.”
익숙한 일인 듯, 사내의 옆에 있던 시종장이 접시를 치우고 다른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나쁘지 않군.”
“쓰레기야.”
“이건 누가 만든 거지?”
사내는 어떤 음식도 한입 이상 먹지 않았다. 그의 냉정한 평가와 함께 대부분의 음식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하가와 키요시.
도쿄 북쪽을 장악한 트라이브 만다라의 영주이자, 옆에 있는 사쿠라의 친오빠였다.
한동안 식사에 집중하던 키요시가 고개를 들어 손님들을 바라봤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들 안 먹지? 음식이 별론가? 아니면 독이라도 들었을까 봐?”
약간의 불쾌와 짜증이 섞인 말투.
주상욱은 삐딱한 시선의 키요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잘할 타입은 아니군. 이 사람이 만다라의 영주라···.’
“오라버니. 그런 말씀 마세요. 손님들이 긴장하시잖아요.”
사쿠라가 사근사근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러자 키요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상욱의 예상대로, 만다라의 영주는 사회성이 무척이나 떨어지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만찬장의 분위기는 사쿠라가 주도하고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아무거나 말씀하세요. 저희 주방장들은 전부 도쿄에서 알아주는 레스토랑 출신이거든요. 너희는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사쿠라는 릴리와 신에게 물었다. 둘 다 고개를-릴리는 큰 유혹을 이겨낸 스스로가 대견했다-가로저었다.
주상욱은 생각했다.
‘저 여자가 이곳을 왜 자기 성이라고 했는지 알겠군.’
영주는 키요시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사쿠라가 쥐고 있었다.
지금도 시종들은 영주인 키요시보다 사쿠라의 눈치를 살폈다. 주상욱은 그 사실을 유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식사를 하러 온 자리가 아니니 그만 먹도록 하겠습니다.”
주상욱이 먼저 식기를 내려놓자, 그 분위기에 릴리와 신도 내려놓았다. 릴리는 아주 약간 머뭇거렸다.
“키요시 님.”
솔직히 말해서, 주상욱은 귀족놀이에 빠진 이 남매와 긴 담소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이곳에 온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일 군사 협정에 대해 조건부로 찬성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날 부를 땐 영주님이라고 불러.”
“어떤 조건인지 듣고 싶습니다.”
“내 말 무시해?”
키요시가 목소리를 날카롭게 냈다. 동시에 그의 칼날 손가락이 조금 더 길어졌다.
서걱.
그의 손가락이 닿아있던 접시가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잘려나갔다.
“오라버니. 외국에서 온 손님들한테까지 이곳 규칙을 강요할 순 없잖아요?”
사쿠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분위기를 수습했다.
“난 영주야!”
“알아요. 그거 모르는 사람 여기에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진정해요 오라버니. 응?”
사쿠라는 능숙하게 키요시를 어르고 달랬다. 주상욱은 그 모습을 확실히 눈에 담았다.
‘이로써 누가 영주인지 확실해졌군.’
잠시 후, 어른아이를 달래는 데 성공한 사쿠라가 주상욱을 돌아봤다.
그녀는 시종들에게 전부 나가 있으라고 한 다음 말했다.
“성격이 급하신 것 같으니 본론부터 말씀드리죠. 저희는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군사 동맹을 지지하겠어요.”
“······.”
주상욱은 그 말이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기를 바랬다.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영주들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쥐고 있는 권력을 조금도 내려놓을 생각이 없을 테니까.”
사쿠라가 심히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수심이 가득 어렸다.
‘그러는 당신들은 권력을 내려놓을 생각이 있고?’
주상욱은 그렇게 묻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두 분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곧 전쟁이 일어날 거다.”
그 말은 한 것은 키요시였다. 그는 여전히 주상욱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만다라. 무사시. 오로치. 이자나미. 4대 트라이브 모두 한계까지 성장했다. 최근에는 서로 영역이 겹쳐서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는데, 너희가 오면서 기름을 부었지.”
어린애처럼 칭얼댈 때와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바보는 아니었군.’
오히려 그 반대였다. 키요시는 무척이나 지능이 높은 편이었다. 소위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공학에 재능도 있었다.
하지만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학창 시절과 성인이 된 이후에도 오랜 시간 따돌림을 당했다.
초인으로 각성하기 전까지 그에게 따듯하게 대해준 사람은 가족들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가족은 여동생인 사쿠라뿐이었다.
그것이 키요시가 지금도 사쿠라에게 의지하는 이유이자, 사쿠라가 영주 이상의 권력을 휘두르는 비결이었다.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죠. 저희는 1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어요.”
사쿠라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전쟁에서 승리해 도쿄를 통일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피해가 적지 않겠지만.’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주상욱을 이 자리에 초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드디어 진짜 목적을 말했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우리를 지원해주길 바라요. 그렇게 해준다면, 도쿄를 통일한 후 신(新)정부로서 여러분이 원하는 조건을 맞춰드리죠.”
상상도 못 한 제안에 주상욱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예···?”
그러니까 지금, 야쿠자나 다름없는 조직들의 전쟁에 힘을 보태달라는 뜻인가?
‘이것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뭘로 보고.’
순간 울컥했지만, 주상욱은 티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사쿠라는 생각 이상으로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요. 지금 도쿄도청에 있는 자들이, 일본 정부를 대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럼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쿠라는 피식 웃었다.
“지요다구가 통째로 소멸하면서 일본 정부의 수뇌는 대부분 죽었어요. 그 당시 하급공무원이던 인간들이 모여서 만든 게 지금의 신주쿠 정부죠. 즉, 자격도 명분도 없어요.”
그것은 모든 영주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진짜 일본 정부는 3년 전에 지요다구와 함께 소멸했다.
그 남은 찌꺼기 일부가 도쿄도청에 모여서 정부를 자처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주들이 그들을 내버려 둔 건, 누구든 먼저 정부를 자처해서 공공의 적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키요시의 말에 주상욱은 자기도 모르게 반박하고 말았다.
“혹은 그 이름의 무게를 짊어질 용기가 없어서였겠죠.”
“···역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서걱. 만찬 테이블의 한 귀퉁이가 잘려나갔다. 사쿠라는 눈빛으로 오빠에게 참으라고 말한 후 주상욱을 돌아봤다.
“곧 트라이브 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건 기정사실이에요. 그리고 결국엔 우리가 최종 승자가 되겠죠.”
“자신만만하시군요.”
“물론이죠. 우리는 4대 트라이브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가장 많은 기술자를 보유하고 있거든요.”
사쿠라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키요시도 히죽 웃으며 여동생의 말에 힘을 보탰다.
“겁쟁이 다케다, 야만인 류노스케, 멍청이 무사시. 전부 다 내 적수가 못 돼.”
키요시의 입에서 다른 영주들의 이름이 하나씩 흘러나왔다. 그는 디저트로 나온 과일을 손가락으로 수십 조각으로 만들었다.
“···그중에 가장 성가신 건 무사시지만, 놈도 결국 내 손에 죽을 거다.”
주상욱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다음 목표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키요시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는 신(新) 일본의 천황이 될 거다.”
“그리고 전 총리가 될 거예요.”
“······.”
그 순간 주상욱은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 남매가 정권을 장악하면 일본은 독재국가가 되겠군.’
비단 이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주상욱은 영주들 중 누구도 정권을 장악하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겉으로는 그런 생각을 내색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쿠라가 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한국 정부가 저희를 지원하면 전쟁은 금방 끝날 거예요. 헬게이트. 그 대재앙에 대비하려면 시간이 촉박하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래도 저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동맹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고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협상할 대상 자체가 바뀌는 건, 그 권한에서도 한참 벗어난 일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저희도 받기만 할 생각은 아니에요. 받은 만큼 드려야죠. 주상욱 님 개인에게도요.”
뇌물을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방금 것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주상욱은 그만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기로 했다.
그러나 사쿠라는 끈질겼다.
“아이들이 피곤해하는 것 같은데. 애들은 방에서 쉬게 하고 저희끼리 좀 더 이야기하는 건 어때요?”
“감사하지만, 저희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요.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해요. 네?”
사쿠라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교태를 부렸다.
그 뻔히 보이는 수작에, 주상욱은 구겨지려는 미간을 간신히 폈다.
“돌아가서 일행과 상의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드르륵.
주상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릴리와 신도 그를 따라 일어났다.
“그럼 이만.”
목례를 한 주상욱은 몸을 돌렸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임대인 부대표가 돌아오면 따로 이야기해 봐야겠어.’
그는 누구보다 대인을 경계했지만, 우습게도 이런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대인이었다.
“잠깐만요.”
사쿠라가 급하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가 주상욱의 팔에 매달리며 말했다.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세요.”
살면서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비장의 무기.
사쿠라는 오늘 처음으로 실패를 맛봤다.
“죄송하지만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스윽.
주상욱은 그녀의 팔을 자연스럽게 떼어내며 옆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사쿠라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는 순간이었다.
“흥. 갈 거면 가라고 해. 결국 지들 손해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요시가 밖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들어와서 이거 빨리 치워!”
문이 열리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식탁을 빠르게 정리하기 위해, 음식을 들여올 때보다 더 많은 시종들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릴리나 신 또래의 아이들도 보였다.
그중 한 명이 접시를 치우려다가 신과 눈이 마주쳤다.
“!!”
깜짝 놀라 크게 떠진 눈. 소년은 들고 있던 접시를 바닥에 떨어드렸다.
쨍그랑!
그 소리는 고요한 방 안에 끔찍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신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고, 주상욱은 표정을 굳혔으며, 릴리는 조용히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만다라의 영주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는 짓이지?”
“죄, 죄송합니다!”
표정이 창백해진 소년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소년은 키요시 앞에 엎드려서 싹싹 빌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용서해 주세요!”
“짜증 나게.”
영주는 칼날 손가락을 뻗어 소년을 겨눴다. 손가락 끝이 점점 길어지며 소년의 팔을 향했다.
‘감히 손님들 앞에서 내게 망신을 주다니.’
벌로 팔 하나는 자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키요시의 손톱이 닿기 전에, 주상욱이 먼저 아이를 감쌌다.
“그만하시죠. 어린아이가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비켜. 내 영지의 백성이야.”
“그 전에 한 사람의 시민입니다.”
주상욱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분노를 담아 키요시를 노려봤다.
그리고 사쿠라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어쩌나. 평소 같았으면 오라버니께서 실수한 아이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텐데. 지금은 누구 때문에 기분이 무척 나빠지신 것 같네요.”
“······.”
“바쁘다고 하셨죠? 배웅은 안 할 테니 조심해서 가세요. 저흰 이곳에 볼일이 좀 남아서.”
접시를 깨뜨린 소년은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빌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상욱이 몸을 돌려 이곳에서 나가면, 소년은 어떤 식으로든 해를 입을 것이다.
결국 주상욱은 선택을 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가도 되겠습니까?”
“조금 전에는 바쁘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
주상욱은 침묵했고, 사쿠라도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았다.
어쨌든 한국 정부는 반드시 동맹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니까.
“뭐,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야.”
사쿠라는 키요시에게 눈짓을 보냈다. 키요시는 칼날 손톱을 거둬들였다.
사쿠라가 주상욱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떤 술 좋아하세요?”
하룻밤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녀는 어떤 남자라도 녹여버릴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