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gressor’s Life After Retirement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특별임무(4)
신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영주와 술을 마시러 간 주상욱이 아직까지 숙소로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쩌지?’
신은 신경이 쓰여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쿠울···.”
옆 침대에서는 릴리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신은 그 천진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벌써 두 번째였다. 자신 때문에 일행이 곤란을 겪은 것이 말이다.
신은 낮에 본 주상욱의 모습, 그리고 아까 만찬장에서 모습을 떠올렸다.
‘왜 나 같은 걸 감싸는 거지?’
주상욱은 자신을 위해 소마 경부에게 하지 않아도 될 변명을 했고, 영주로부터 호타루를 구하기 위해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했다.
신은 그런 주상욱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봤자 이득이 될 게 없는데···.’
지난 몇 년간 소년이 살아온 세계는 정글이었다. 강자는 약자 위에 군림하고, 약자는 강자에게 굴복한다.
인간이 서로를 돕는 건 어떤 이득이 있을 때뿐이었다.
신의 상식으로는 주상욱도, 릴리도, 여기에는 없지만 대인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한국은 일본이랑 다르다고 했지. 그래서 그런가?’
신은 릴리가 종종 해주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맛있는 음식에 관한 것이었지만, 소녀가 아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마법사에, 이종족에, 외계인에, 자신을 신으로 추앙한다는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릴리는 틈날 때마다 신에게 조잘조잘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릴리는 대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눈을 빛내곤 했다.
“아저씨는 착한 일이 취미야. 어디 갈 때마다 꼭 착한 사람들을 구해줘. 그러면 그 사람들이 나중에 우리한테 맛있는 것도 주고 선물도 주고 그런다?”
신은 릴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동화 같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 엄마가 읽어준 동화책에서나 보았던 그런 이야기 말이다.
“우웅···.”
릴리는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걷어찼다. 신은 자신의 침대에서 내려와 릴리에게로 걸어갔다. 소녀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자기 침대로 향했다.
그때 문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노크 소리였다. 신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항상 가지고 다니는 단검이 만져졌다.
똑, 똑···.
또다시 노크 소리. 신은 릴리를 깨워야 하나 고민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적이라면 왜 노크를 하는 거지?’
신은 조심스럽게 문으로 걸어갔다. 주상욱이 술에 취해 돌아온 것일 수도 있었다.
문은 두꺼웠고, 안에서 잠겨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문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주상욱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호타루!’
아까 만찬장에서 자신을 보고 놀라서 접시를 깨뜨린 소년.
호타루는 1년 전, 함께 고아원을 탈출한 후에 흩어져 도망치다가 헤어진 친구 중 한 명이었다.
똑, 똑···.
“신. 그 안에 있지?”
호타루는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신을 불렀다. 누가 올 것을 의식하는 듯했다.
신은 단검을 든 손을 등 뒤로 숨기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익···.
초조한 표정의 호타루가 보였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을 본 순간 호타루가 낮게 외쳤다.
“신!”
“쉿! 안으로 들어와.”
신은 호타루를 안으로 들어오게 한 후 다시 문을 잠갔다. 바닥에 주저앉은 호타루가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신이었구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호타루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신은 단검을 품 안에 다시 숨겼다.
두 소년은 방 안 구석에서 속삭이듯 대화했다.
“오랜만이야 호타루. 아까는 모른 척해서 미안해.”
“아니야. 나라도 그랬을 거야.”
호타루는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여장 차림의 신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아까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너무 예뻐서 못 알아볼 뻔했어.”
“웃기시네.”
“하긴 넌 예전부터 여자애들이 예쁘다고 좋아했지.”
킥킥대며 웃는 걸 보니 긴장이 좀 풀린 모양이었다. 신은 멍이 든 호타루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얼굴은 왜 그래?”
“별거 아냐. 아까 접시 깼다고 선배들한테 맞았어.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지.”
호타루는 히죽 웃었다. 왼쪽 눈은 부어서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신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자기 때문에 친구가 다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너 말고 다른 애들은?”
악마와 같았던 고아원 원장을 죽이고 도망친 그날, 도망친 아이들은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몇 명씩 나뉘어 흩어졌다.
호타루는 그때 헤어지고 1년 만에 만나는 친구였다.
“나 말고는 경찰한테 잡히거나 다 죽었어. 켄토는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병에 걸려서 금방 죽었어.”
“이곳에서 치료해주지 않았어?”
“약 한 번 주고 안 나으니까 그대로 방치하더라.”
호타루는 고개를 숙였고, 둘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신은 1년 전에 헤어진 친구들, 오로치에서 죽은 친구들, 이곳에서 죽어간 친구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숨통을 끊은 원장을 생각했다.
‘우릴 괴롭히고 학대한 건 원장이었어. 우리가 경찰을 찾아가서 신고했을 땐 다들 무시했잖아. 내가 한 건 정당방위였다고!’
으득···.
김빠진 콜라처럼 사그라졌던 분노가, 다시 맹렬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호타루는 그런 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어서.”
“마지막이라니? 무슨 소리야?”
“난 여기서 도망칠 거야. 지금 같은 기회는 다시 안 올 테니까.”
호타루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소년은 자기보다 조금 작은 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영주는 너랑 같이 온 손님한테 온통 정신이 팔렸어. 무사들도 마찬가지야. 지금 파티가 한창이야.”
“···그래서 아직 안 돌아온 거였구나.”
영주와 사쿠라는 주상욱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주상욱은 아직도 그곳에 붙잡혀 있었다.
“덕분에 경비가 허술해져서 널 만나러 올 수 있었어. 게다가 아까 일로 나한테만 근신 명령이 떨어졌거든.”
“호타루. 계획 없이 도망치는 건 너무 위험해.”
신은 진심으로 친구를 걱정해서 말했다.
오로치로 함께 도망쳤던 친구들은 모두 죽었다.
‘이제 고아원에서 알고 지낸 친구 중 살아있는 건 호타루뿐일지도 몰라.’
그러나 호타루의 눈빛은 진지했다.
“어차피 너랑 손님들이 떠나면, 영주가 날 죽일 거야. 최소한 팔 하나는 자르겠지. 그럴 바에는 나도 이판사판이야.”
“미안해.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무슨 소리야? 덕분에 이렇게 절호의 찬스가 왔는데. 몇 달 전부터 도망치려고 개구멍까지 다 찾아놨어.”
그게 진실인지 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허풍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호타루는 예전부터 연기를 잘했다.
과거에 원장도 몇 번이나 속였을 정도였다.
“나 알잖아. 날쌘돌이 호타루라고.”
호타루가 씩 웃었다. 자세히 보니 앞니 하나가 없었다.
“그럼 네 얼굴 봤으니까 난 갈게.”
그러나 인사를 나누고도 두 소년은 머뭇거렸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결국 호타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신, 나랑 같이 도망칠래?”
“······.”
신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오히려 호타루가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괜한 말을 했지? 넌 나랑 처지가 다른데. 얼굴도 엄청 좋아 보이고, 왜 여장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미안. 괜한 걸 물었다.”
“······.”
호타루의 한마디 한마디가 신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죄책감이었다.
친구들이 모두 죽었는데, 혼자서 호의호식하기 위해 하나 남은 친구마저 모른 척하는 것 같았다.
‘뭐가 친구들의 복수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은 친구들의 복수를 다짐했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하나 남은 친구를 외면하려 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 같이 가자.”
“어? 정말? 그래도 돼?”
호타루가 놀란 얼굴로 신을 바라봤다. 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먼저 나가서 잠깐만 기다려.”
호타루를 밖으로 내보낸 후, 신은 가발을 벗고 옷을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간단히 짐을 꾸린 신은 릴리의 침대로 걸어갔다.
릴리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아니, 자는 척하고 있었다.
“릴리. 깨어 있지?”
“······.”
“자는 척 안 해도 돼. 너 정도 되는 초인이, 방 안에 누가 들어왔는데 모를 리 없잖아.”
릴리가 눈을 떴다. 소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신을 바라봤다.
“진짜 갈 거야?”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
“어차피 난 오늘처럼 방해만 될 거야.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그것은 변명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신은 대인 일행에게 감사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구해주고, 위협에서 보호해주고, 거짓말에도 화를 내지 않고 어깨를 두드려준 사람들.
세상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깨준 어른들이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을게.”
그 각오가 워낙 단단해서, 가지 말라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알았어.”
릴리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하지만 신을 못 가게 막지는 않았다.
다른 이유도 아닌 친구 때문이니까. 소녀도 가이아 대륙에서 소중한 친구를 잃은 경험이 있었다.
그 대신, 릴리는 아저씨가 비상시에 사용하라고 준 물건을 신에게 빌려주었다.
“그럼 이거 가져가.”
릴리는 붉은색 브로치를 신의 가슴에 직접 달아주었다.
“이게 뭐야?”
“행운의 부적!”
실제 용도는 조금 다르지만, 신은 아무런 의문 없이 소녀가 준 선물을 받았다.
막상 릴리와 헤어지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신은 릴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고마웠어. 그럼 잘 자.”
쪽.
신은 릴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예전에, 고아원의 어린 동생들에게 하던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나왔다.
“난 이제 갈게.”
신은 곧장 몸을 돌렸다. 호타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
돌처럼 굳어 있던 소녀가 뒤늦게 비명을 질렀을 땐, 소년은 이미 방을 나선 후였다.
***
“블랙. 오늘 치 훈련을 끝내고 왔습니다.”
[어린노무 자식이 발랑 까져 가지고···.]“저···. 블랙?”
[훈련에 끝이 어디 있어? 열 세트씩 더 하고 와!]난데없는 블랙의 신경질에, 신주쿠 레인저는 그날 평소보다 두 배의 훈련을 소화해야 했다.
***
만월이 뜬 밤은 도망치기에 좋은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 소년은 지금 환경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허억, 헉···.”
신과 호타루는 한 시간 이상 뛰고, 숨고, 납작 엎드려서 기었다.
풀숲에 엎드려서 경비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호타루가 숨을 몰아쉬며 신에게 물었다.
“너 무슨 운동 했어? 왜 이렇게 체력이 좋아?”
옆에 엎드린 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타루와 달리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딱히 운동은 안했는데.”
“예전에는 체력은 내가 더 좋았는데···.”
“잘 먹어서 그런가 봐.”
확실히 요즘 들어 체력이 좋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보다 힘이나 시력도 더 좋아진 것 같았다.
“경비들이 골목을 돌았어. 가자.”
성안의 경비는 생각했던 것보다 허술했다. 호타루가 길을 찾았고, 신이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는 눈으로 누군가 접근하면 미리 알아챘다.
그렇게 두 소년은 성벽 밑에 도착했다. 이곳만 넘으면 탈출은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성벽은 어떻게 넘을 거야?”
“미리 봐둔 개구멍이 있어. 이쪽이야.”
호타루가 개구멍을 찾아냈다. 말 그대로 개나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라, 어른이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두 소년은 그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소년은 개구멍으로 성벽을 통과해 만다라의 영역을 벗어났다.
“성공이야.”
밝게 웃는 신에게, 호타루는 맥빠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 나 할 말이 있어.”
“뭔데?”
“미안해.”
“···뭐가?”
호타루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소년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죽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 설마···!”
파아아앗!
사방에서 켜진 불빛이 신을 향했다.
“꼼짝 마!”
강렬한 서치라이트 불빛에 신은 팔로 눈을 가렸다.
소년은 잠시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호타루는 예전부터 연기를 잘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드디어 잡았다. 요 쥐새끼.”
빛에 눈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신이 팔을 내리자, 히죽거리며 다가오는 소마 경부의 모습이 보였다.
“아까는 뭐? 레나?”
소마 경부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맺혔다. 신은 이를 악물며 호타루를 노려봤다.
“저 개자식한테 날 판 거야?”
“그게 아니야···.”
호타루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뒤편에서,
“잘했다. 시종.”
만다라의 영주, 키요시가 모습을 드러냈다.